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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육을 함께 돌보라

지식창고지기 2012. 1. 28. 20:26

영과 육을 함께 돌보라

1. 머리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것처럼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았다. 교회는 이 선교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이들은 또한 기쁜 소식이 될만한 복음의 전파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선교는 억압이 아니라 자유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착취가 아닌 공정한 분배에. 결핍이 아닌 충만에. 노예상태가 아닌 해방에. 질병이 아닌 건강에. 사망이 아닌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규정하든지 간에 선교는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WCC (World Councid of Churches)가 1980년 주최한 '세계선교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한 멜버른 대회 (Melbourne Conference of the Commision on World Mission)에서 제출된 '보고서 16'의 첫 단락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한편. 미국 오레곤주 유진 (Eugene)에 있는 노스웨스트 크리스챤 칼리지 (Northwest Christian College)의 리챠드슨 (W. J. Richardson)박사는 [사회운동 대 선교 (Social Action vs Evangelism)](윌리엄 케리 문고)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사회적인 '공작'으로서. 아니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치적인 압력을 가하는 기술로서의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구속관계를 맺게 하는 일 자체가 그밖의 모든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운동임을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사회운동이다.” 이처럼 한쪽에서는 사회운동이 곧 선교라고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선교가 곧 사회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계속 쟁점이 되고 있으며 기독교 세게는 분열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과. 전 세계의 2/3에 달하는 지역에서 고통받고 있는 말없는 다수 (silent majority)의 절규하는 요구에 대처 하는 일 모두에 중요하다. WCC측은 리챠드슨 박사의 사회운동은 올바른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악한 구조들에 대하여는 다루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리챠드슨 박사 측은 WCC의 선교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요건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양측이 모두 자신들은 사회운동과 선교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느냐 하는 것이다.
로잔 언약 (Lausanne Dovenant)은 매우 균형잡힌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사회행동이 곧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가지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이 책은 어느 부분이 우선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논쟁에 핵심이 될만한 원칙들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살펴보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 선교단체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를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로 출발했을 뿐이다.
우리는 최근 몇년동안 '왜 자선단체와 사회운동단체들이 충분히 쓸만큼 보다 많은 돈을 지출하지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왔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의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실제 필요에 대해 우리는 관심이 없는가.
이 책은 우선 사회운동을 생각해 보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몇가지 원칙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원칙들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필요에 보다 광범위하게 개입하도록 하는지 실제 상황을 통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2. 선교와 봉사
오늘날 우리만큼 포괄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세대는 없었다.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그 많은 요구들에 대해서 우리만큼 잘 알았던 세대도 분명히 없없다. 이제 첨단 기술이 확산되고 인구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의 처지에 대하여 알게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 지역에서 동시에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또한 그분은 나이많은 어른부터 갓난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아신다. 그분만이 이러한 필요들을 채우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무한한 원천이 되신다.
우리가 하나님 역할을 대신하려 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어떤 부분인지를 알려주신다. 바로 그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인데 이를 위해 믿을만한 몇가지 원칙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적용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꼭 적용할 필요가 없는 요소들도 고려해야 한다.
선교단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혹은 그리스도의 지체 가운데 하나로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보다 광범위한 필요에 직접 뛰어드는 근거가 될만한 몇가지 원칙과 요소들이 있다. 우리와 생각을 나누며 고난받는 세상에 작은 도움이나마 베푸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이 원칙과 요소들을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다.
선교 현장에 직접 나서는 사람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 뒤에는 분명히 선교사의 현장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고 실효를 거둘 수 있게 하는 수많은 협력자와 동역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첫번째 원칙 : 사회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가 반드시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그 종류야 어떠하든지 인간의 필요는 그냥 인간의 필요일 뿐이다. 성경적으로 영적인 필요와 사회적인 필요는 마치 신앙과 생활의 관계와 비슷하다. 육체와 영혼. 손과 장갑의 관계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를 양극화시키는 것은 문제를 더 크게 만들게 된다.
하나님은 삶 전체를 주관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일용할 양식'이 반드시 간구해야 할 떳떳한 기도제목임을 가르치심으로써 영적인 필요와 육체적인 필요를 하나로 묶으셨다. 그러므로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우리가 붙들고 씨름해야 할 과제는 끝없는 필요에 직면해 있는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을 비교우위에 놓는 문제이다.
아시아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힌 문제의 그물에 걸려 있다. 그들은 종종 부채문제에 휘말리기도 하고 불의한 세상으로 나가는가 하면 타락의 도가니에 빠지거나 형편없는 건강으로 괴로워하며 전형적인 빈곤상태에 빠져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뜻으로든. 아니면 필연적인 윤회의 결과로든.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어떠한 문제에 먼저 매달리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한가지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이라도 종종 다른 문제의 촉수에 걸려서. 마치 문어발에서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리는 형국과 같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 개인적으로 힘을 보태는 일의 우선순위를 확정지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기저기서 아무 때고 불쑥 터지곤 하는 긴급상황 속에서 우선순위가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비록 그 긴급상황이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관점에서는 오히려 다루기가 더 간단할 수도 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음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난민들에게는 안식처가 가장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긴급한 상황이라도 한번 다루어지고 나면 .평범한.상황이 되고 수많은 새로운 문제들이 고개를 들고 나타난다. 결국 우선순위 결정은 또다시 난항에 빠지게 된다.

두번째 원칙 : 사회구조의 변화가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지는 않는다
'해방신학'을 부르짖는 몇 사람들은 세상사람 대부분이 그들을 억압하는 사악한 사회 구조 때문에 삶과 행복을 위협받고 있다는 점을 주입시키려고 애쓴다. 성경의 관점에서 구원이 삶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해방시키며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은 인정할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만들었던 구조들은 악했거나 악한 결과를 가져왔음도 인정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삶과 행복이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가 죄악된 구조를 가져오게 하는 자아중심의 사고를 낳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질병의 근본 원인을 놓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그 어느 쪽도 그 체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깊은 필요를 잘 채워 주었다는 특별한 기록이 없다.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체제들이 혁명으로 붕괴되는 것을 지켜보아 왔지만. 그 결과 보다 나은 사회가 나타났던 적은 거의 없었다. 정말로 지나간 30년의 역사는 앞으로 오는 체제가 더 나을지 못할지를 먼저 따져보지 않고 현재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을 망설이게 할 것이다. 사람들이 오직 체제 개혁만을 요구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생각일 뿐더러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다.
크리스챤의 진단은 인간의 죄와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충분히 참작해서 내려야 한다. 그 진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만들어진 인간사회에서 사람은 환경에 굴복하게 되고. 이기적인 정욕의 노예가 되며 자기보다 더 큰 힘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옛날식으로 표현하자면 기독교적인 진단은 사람이 세상과 육체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구시대의 도그마가 아니라 사물의 근본적인 실체를 .충실히. 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이 지닌 해방시키는 능력은 기독교의 신조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던 사슬을 끊어버린 폭발력 있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분류해야 한다. 이렇게 새롭게 세워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 본연의 삶을 살도록 사람을 해방시킨다.
필요한 것은 사회구조의 변화뿐.이라는 생각은 전혀 급진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급진적 (radical) 이라는 말은 원래 사물의 뿌리를 캔다는 뜻인데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일은 뿌리에는 손을 대지 않고 내버려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번째 원칙 : 복음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래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구원이 분명 사람의 삶과 행복을 위협하는 영적인 위험요인들을 떨쳐버리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삶과 행복을 위협하는 다른 요소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난. 영양실조. 불의 따위는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삶을 이끌어가는 능력을 절름발이로 만든다.
그러므로 크리스챤들과 선교단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으면 자동적으로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소개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새로 갖게 된 신앙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도록.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불행하게도 서구사회의 많은 교회들은 이 방면에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일반 성도들은 첨예한 사회적인 요구에 부딪혀서 굴복하게 되고 자신들이 바로 그러한 요구들을 다소나마 채워주도록 부름 받았다는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사악한 구조를 변화시키거나 최소한 도전이라도 해 보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 조차도 엿새동안 불의한 일을 힘써 행하다가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크리스챤으로서 신앙을 고백하기도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도적질하는 자는 더이상 물건을 훔치지 말고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4:28)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남의 물건을 훔치던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도둑질이 나쁘고 그만두어야 할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복음에는 영향력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특별한 감화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깨달음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필요와 그 필요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양면이 모두 빈틈없이 고려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회하고 성령으로 거둡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울러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거듭나야 한다. 이것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우리가 부수적으로 선택하도록 지워준 짐이 아니라 크리스챤의 삶에서 씨줄과 날줄같은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도 하셨다(고전1:30). 이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둘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성도의 개인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사회에 대한 관계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화돠지 않는다면. 그가 경험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체험의 깊이와 실제성을 논리적으로 되짚어 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어떻게 복음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며 문제의 뿌리에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과제를 몇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요즈음 세상사람들이 관심을 쏟는 영역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지위와 가치에 관한 것이다. 매스미디어의 영향으로 자신이 수백만이나 되는 피조물 가운데 보잘것 없는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현대인들은 영원한 가치를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국가조직의 관료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콤퓨터의 통계수치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상하게도 어떤 정부조직은 이러한 느낌을 매우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듯한 인본주의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것이 전체 우주구조의 한 부분에 불과하고 인류 최고의 희망이 모든 존재를 빨아들이는 끝없는 바다로 되돌아 가는 것이라고 모두들 믿는다면. 실제로 사람의 가치는 더욱 하잘것 없는 상태가 된다.
인간의 지위와 가치에 대한 크리스챤의 기본 원리는 창조의 원리와 값주고 사신 대속의 원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이 사랑하셔서 모두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돌아가셨다는 것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 이상의 가치가 부여되엇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어느 분야보다도 의료윤리 (medical ethics)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시아 국가에서 의과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한 의료선교사가 병상에 서서 “누가 병원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외과 전문의과는 대답에서 병원 이사장이라는 대답까지 가지각색의 대답이 나왔다. 그밖에도 여러 다른 저명인사들이 거론되었다. 말이 모두 끝나자 그 의료선교사는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그에게 놀라움과 의혹에 찬 시선을 던졌음은 물론이다.
어떤 개인을. 특히 누가 보더라도 사회적인 신분이 낮은 사람을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다. 그래서 많은 간호원들이 자신을 공공 봉사자로 생각해서 고유한 역할에 미달되는 임무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서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표본적인 의료윤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기독교적인 바탕에서 흘러나온 것이지만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한 표본들이 어느 정도나 유지될지 의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의료윤리는 사실 이미 사라지고 없다고 장담한다.
기독교의 진리가 커다란 차이를 빚어내는 또 다른 경위는 그 진리가 모든 악을 거부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숙명론의 뿌리를 잘라버리는 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맹목적인 숙명론이나 결정론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져야 하고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 행동에 대하여 회계하기 위해서 부르실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환경 아래 머물러 있거나 그 환경을 하나님의 뜻. 혹은 이생이나 전생에서 행했던 일의 결과로 간주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몇년 전. 태국에 있는 마노롬 (Manorom)병원에 큰 홍수가 닥쳐오자 강물을 막아서 점점 차오르는 물이 넘치지 못하도록 여러 트럭분의 흙을 날라다가 둑을 쌓았다. 홍수가 물러갔을 때. 병원뿐만 아니라 그 지방 농민들의 광대한 논들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농민들은 이런 식으로 자연과 싸우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홍수를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이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말레이지아의 한 크리스챤이 시편 19편에 대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는 서정적인 어구를 총동원해서 피조물. 특히 별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많은 아시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가령 저녁 노을을 예찬하는 식으로)자연을 감상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몇몇 종교들은 거룩한 창조질서에서 사람이 자연보다 위에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재물을 지키는 청지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람은 자연의 한 면에 불과하고 그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래에 대한 소망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연관은 다르다. 어떤 식으로든 자연에 대적하거나 방향을 바꾸기보다는 자연의 힘에 복종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이 모든 것은 황폐하게 만들 지라도 가져오는 모든 것들을 수동적으로 견뎌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이 서구인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오랜 고통을 견디는 인내력을 키워주기도 하지만. 반면에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연의 힘을 통제, 조절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서구인들은 자연을 너무 많이 통제해서 종종 어리석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것은 앞의 예와 정반대되는 경우이다.
살아가면서 기독교 신앙이 빚어내는 세번째 차이는 공동체를 돌보는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아시아사회는 서구사회보다 휠씬 투철한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정신은 보통 가족이라든가 가문. 부족관계 따위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공동체적인 생활과 관심을 보여주는데 너무나 자주 실패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참된 삶을 살면 새로운 차원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태국의 아카 (Akha)마을 한복판에는 대나무로 거칠게 지은 구조물이 하나 있다. 이 건물은 크리스챤 공동체가 추수한 쌀의 10%를 비축해 놓는 곳이다. 다른 마을에 사는 한 가족이 예수를 믿고서 그 까닭에 고향에서 쫓겨나면 그들을 먹여살리는데 기독교 마을에 비축해 놓은 쌀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새로 정착한 마을에서 첫 수확을 거둘 때까지 계속된다.
한번은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가 어디에다 죽은 사람을 묻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들은 지역에 있는 장지(葬地)를 쓸 수 없었다. 3년동안 일시적으로 매장할 수 있는 곳이 꼭 한군데 있었는데 꽤 떨어진 로마 가톨릭교회 묘지뿐이었다. 한편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오고 3년 안에 옮겨야 하므로 관은 아주 단단한 나무도 만들어야 하며 그 위에 납을 씌운다. 그러니 얼마나 무겁겠는가.
장례식을 치르던 날.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길은 엉망진창이었다. 마을을 벗어난지 얼마 안돼서 버스들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길을 가로지르며 비틀거렸다. 그 동네 사람들은 크리스챤들이 당하고 있는 곤경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여겼다. 모든 크리스챤들은 관이 실려 있는 트럭으로 몰려가서 트랙터의 도움을 받아가며 트럭을 들어올려 길 밖으로 밀어냈다. 그들은 밭을 가로질러 버스들이 지나가게 하고나서 다시 트럭을 길로 끌어올렸다. 모든 사람들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내놓기 시작한 반응들은 매우 재미있었다. 구경하며 즐거워하던 사람들은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서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라면 우리는 결코 서로 돕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길에서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걸 보면 기독교에는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복음은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그러해야 하지만. 이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너무 자주 복음주의 교회들은 신앙만 있으면. 그 필요성이나 적당한 종류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일하게 된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사회문제들은 또 다른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깊숙하게 뿌리를 내린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어서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으며. 끊임없는 시험과 시행착오도 필요하다. 문제를 마주 대해 싸우게 될 경우에 체험을 통한 성숙도 필요하다.
새로 등장한 교회들은 이러한 성숙이 모자라는지도 모른다. 훈련된 요원도 없고 이 일을 하고자 하는 비전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교회들은 오랫동안 사회의 한복판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문제의 중대성은 마주 싸워야 할 필요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오류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네번재 원칙 : 돈은 위험한 물질이다
왜 O.M.F는 구제사업에 비교적 적은 돈을 쓰는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리적인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량 (水量)―때때로 너무 많다고 생각될 만큼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인도나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들에 타격을 주는 가뭄이나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태풍이 큰 피해를 몰고 오지만 (특히 필리핀에서) 극히 제한된 지역에 그칠 뿐이다.
현재 인구과잉의 정도는 인도보다 훨씬 낮으면서도 동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은 인도나 다를 바 없는 가난에 직면해 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헐벗은 것이 사실이지만 긴급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차이나에서 홍수가 발행해 난민들이 발생하기 전에는 대규모의 원조가 필요한 긴급한 상황은 아프리카와 세계 여러 다른 지역에 비해서 비교적 적은 편이다.
동아시아의 빈곤문제는 여기 저기에 자금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 문제들은 사회와 아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손댈만한 능력이 없다.
돈을 닥치는 대로 사용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문제거리를 일으키게 된다. 이미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쓸모있는 것으로 인정받은 간단한 기술을 통해서 소득을 늘여가도록 가능성을 심어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아카 (Akha) 주민들이 정착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을 개발하도록 지원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불을 놓아서 땅을 개발하고 지력(地力)이 다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농사법을 써왔던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보다 큰 문제는 재정 지원이 복음선포에 수반될 경우 잘못된 동기에서 직업적인 신앙을 갖게 될 가능성이 너무 높다는 점이다. 모슬렘 국가들에서는 그러한 지원이 .영적인 뇌물.로 간주되고 있다. 또 크리스챤의 재정 후원이 지역에 대한 후원으로 비쳐지기보다는 그들의 신앙적인 토대를 흔들어 놓는 것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거액의 재정을 선교지에 투입하게 되면 그 돈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불러 일으키기 쉬우며. 간혹 그 공동체를 위해 가장 적당한 곳이라고 볼 수 없는 부문에 돈을 쓰고자 하는 그릇된 생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재정 후원을 할 때 이러한 혼란 가운데 몇가지를 경험한 바 있다.
O.M.F가 사회운동에 재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태국에 세워진 3개의 병원은 점점 재정적인 자급을 이루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투자가 필요한 상태이다. 일본에는 알콜중독자 센터를 세워야 하고 필리핀의 망얀개발계획 (Mangyan Developement Programme)을 계속해서 추진해야 한다.
영국의 티어 펀드 (Tear Fund) 스위스의 블루 크로스 (Blue Cross) 독일의 저먼 에이전시 (German Agency) 등의 단체가 후원 사업에 많은 재정을 지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재정을 지출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후원이 자원을 개발하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데 쓰이기를 원하기 때문이고. 또 한편 이런 종류의 사역을 전문적으로 감당하는 기관이 그러한 국가들 안에 있으며 그들의 특성을 살리도록 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원칙 : 선교사는 사역지에 찾아간 손님이다
우리는 내부인이 아니며 호의적인 외부인이 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스스로의 행동이 쓸데 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미 '영적인 뇌물'을 주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잘못된 동기에서 나온 비뚤어진 신앙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그 문화권에서 성장하지 않은 우리로서는 어느 것이 참된 믿음이고 어느 것이 잘못된 직업적인 신앙인지 분명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그리스도 자신은 5천명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일에 위험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음을 아셨다. 그분은 조용히.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리스도께서도 잘못된 동기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도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물론 우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먹이셨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회 문제들이 정치 분야에까지 미쳐있어서 외국 선교사들이 주의할 점이 되고 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기 위해서 그곳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 잘못 개입하게 되면 당장 다음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시아 국가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종교의 이름으로 대항해 오는 많은 위험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교사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타락한 정권을 지지하는 나라의 시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신 들어서는 정권 역시 많은 잘못을 범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캄보디아가 몰락하기 전에는 정부를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새로 세워진 정부는 이전의 정권에 비하여 더 끔찍한 정권이었다. 여기서 선교사들은 자신의 축복받은 다수 가운데 하나이며. 어떻게 이러한 문제에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복잡한 문제를 살펴보면 두가지 문제가 분명해진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실상을 알아야 하고. 정부가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는 점과 수많은 부조리한 상황들이 그 노력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 모두를 동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부정을 해소하기 보다는 그 사실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특히 그 문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나라에 여유가 없어서 정부가 경찰관에게 봉급을 주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으로 수입을 올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가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같은 문제에 부딪히면 어떻게 할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여 비난하기에 바쁘다. 우리는 문제의 엷은 비늘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인구는 지난 30년 동안 두배. 혹은 거의 세배에 이르도록 증가되었는데 무역은 별로 늘어나지 않았고. 유전이 발견된 바도 없었으며. 산업도 비교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국민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몇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지도자가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며 생활 수준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킨다는 말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살펴볼 때 아무런 발전도 이루어 내지 못한 정부라 할지라도 마땅히 동정을 받아야 한다.
야고보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말하기는 빨리하되 긍휼이 여기기는 더디하는 경향이 있다. 크리스챤들까지도 세상의 이런 풍조를 쉽게 따라가고 있다.
바울은 권세잡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섣불리 비방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옳지 못한 권력구조나 소수의 사람에게 부(富)가 편중되는 것에 대하여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지도자가 얼마간은 정치, 경제적 환경에 얽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극히 중요한 원칙 가운데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회 병폐에 도전하고 불의한 구조를 개혁하는 일은 선교사 보다는 그 나라의 크리스챤 지도자들이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점이다. 그 문화권 안에서 사는 내부인 (insider)만이 잘못된 일에 정확하게 도전할 수 있으며. 그들만이 그것을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럴 자격이 있다.
동정적인 외부인 (outsider)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사회에 대한 관계를 결정하고 그 나라의 성도들이 자신의 상황에 적응해 가도록 격려해 주는 성경의 원리들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선교사들이 정치적으로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그 나라 시민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본 원칙들은 가르칠 수는 있다. 불행히도 오랜 기간동안 성경적인 원칙들을 우리 문화에 적용하는데 큰 힘을 쏟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 그런 원칙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우리도 미리 공부해 둘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은 선교단체가 사회운동에 접근하는데 기초가 될만한 몇가지 주요 원칙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라고 주신 소명과 사명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나 그분의 복음이 사회적인 필요를 채우는데 적절하지 않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변화되어야 할 것은 사람이지 환경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복음과 함께 그 복음을 공동체의 삶에 적용하는 것 모두를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음을 알고 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과 흡사하다. 한번 벗겨내면 다음 층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한층을 모두 벗겨내고 그 다음 층으로 옮겨가야 한다. 같은 원리로 우리가 일단 복음을 전하게 되면 다른 필요들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 문제를 처리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표면에 떠오른다. 첫번째 껍질을 벗기는데 만족해서 그 다음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첫번째 껍질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것은 바로 복음전파이다.
양파껍질을 벗기면 눈물이 난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고 사회운동을 하는데에도 눈물이 따른다. 병원을 개설하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은 괴로운 고민거리이다. 문둥병을 고쳐주는 것은 마음에 큰 기쁨이 되지만 회복된 환자들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할 때 그들은 계속해서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버려두는 것이다. 양파를 벗기지 않으면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음식은 제 맛을 내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했을 때 나타났던 .양파껍질. 몇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맡은 일은 아주 조그만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가 하도록 주신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그분의 의도에 가장 잘 부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3. 종족문제
“여느 때처럼 이 백인들은 우리 민족들에게 여러 질병들을 전해주었다.” 195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유카 (Auca)로 가던 5명의 선교사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다룬 텔레비전 보도는 이 짤막한 한마디로 끝맺고 있다. 이 말 가운데는 과장된 비아냥거림이 들어 있다.
이 말을 듣고 있노라면 서구사회의 번잡함과 타락에서 벗어나서 자연 그대로 단순한 생활방식을 즐기는 목가적(牧歌的)인 사회생활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러한 이상적인 세상에 코 큰 침입자들이 들어와서 순진한 원주민들에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파괴하며. 건강한 안식처에 들어보지도 못한 질병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옳다. 선교단체는 서투르고 문화적으로 무감각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이상적이지 않으며 단순하지도 않다.
우선. 이런 이상적인 어휘로 묘사할만큼 아름다운 부족사회는 거의 없다. 나름대로 칭송할만한 특성들이 많이 있지만 반면에 그만큼 많은 죄악된 특성들을 그지고 있다. 공포심―영혼에 대한. 혹은 다른 집단이나 환경에 대한―이 종종 그들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용납될 수 없고 생산적이지도 못한 신앙에 몰두하는가 하면. 선교사 때문이 아니라 개발사업에 밀려 더 어려운 상황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들이 오늘날과 같은 상태로 계속 남아있기를 원해서 그 선택의 결과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아시아에서는 바로 같은 날 저녁인데도 한군데서는 발전을 위한 계획을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거석 사회(megalithic society)가 나타난다. 이말은 지난날 집을 짓거나 제사를 지낼 때. 노예나 적을 제물로 바치고 모든 순서마다 피를 뿌려야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다행히도 그들의 문화는 변하고 있으며 카메라 맨들도 그런 장면을 사진에 담을 수 없게 되었다.
문화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선교현장에 나서는 선교사들은 천편일률적이다.
필리핀의 마노보 (Manobo)족은 최근까지 돈을 써본 일이 없었다. 그들의 문화 속에서는 돈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벌목하는 인부들이 들어와서 빽빽한 숲을 뚫고 좁은 황토길을 냈다. 그들은 나무를 옮겨다가 트럭에 실어줄 인부들이 했고. 그 일의 대가를 모두 현금으로 지급했다. 마노보족에게 이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마노보족에게는 값싼 럼주(酒)가 더 쓸모있고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결국 이 술은 그들의 문화에 뚜렷한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교사들이 그 황토길을 통해서 들어왔다. 그들이 원주민의 문화에 끼친 영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문화는 변할 수 있고 또 변하지만 그 모든 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변화를 이끌어가는 책임있는 일꾼으로서. 선교사들은 가능한한 많은 변화릉 일으킬수록 올바른 방향의 변화뿐 아니라 그 변화하는 사회에 흡수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태국 북부에서는 최근 모든 부족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인구팽창이다. 이것은 건강이 좋아져서 유아 사망률이 떨어진 결과 식구가 늘어난 탓이기도 하고 정치적인 탄압을 피해서 버마와 라오스로부터 넘어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자 태국 북부의 농민들은 조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자기 식구들을 먹여살리려면 더 많은 땅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마침내 정부도 환경문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으며. 산지의 숲을 무차별로 파괴하는 것이 해롭다는 점을 인식하고 제한을 가하는 한편 일정한 지역을 산림보호구역으로 설정했다.
전통적인 농사법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정글을 베어 쓰러뜨리고 불을 질렀으며. 낱알 얼마만큼을 얻으면 또 다른 지역을 개간하곤 했다. 이러한 세력들의 결합은 극단적인 피해를 가져왔다.
오늘날의 위기는 경제.문화. 사회적인 부분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경제조건이 나빠지면 대가족은 붕괴되고 문화 형태가 변하게 된다. 사람이 자기의 정체성을 잃게 되면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만 항상 그들에게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문화 등을 익힌 선교사들이 그들과 함께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고 가끔 그 문제에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인적 자원으로서 활동할 수도 있고. 정부의 시책을 부족에게 알리는 사람이 되기도 하며. 부족과 당국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기도 한다.
1970년대 초까지 아카 (Akha), 리수 (Lisu), 야오(Yao), 흐몽(Hmong) 푸오 카렌 (Pwo Karen) 등의 부족에 교회가 세워졌다.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도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974년.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OMF의 태국 북부 담당부서는 스위스의 농업선교사인 프레디 가서 (Freddie Gasser )지역 선교사들 및 부족들과 함께 일할 현장 농업종사자로 임명했다. 프레디의 임무는 부족민에게 새로운 작물의 재배법을 가르쳐 주고. 새로운 가축을 기르게 하며. 땅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게 하고. 논농사를 위해 관개시설과 농산물 시장을 알아보는 일 등이었다.
프레디와 그의 부인 루스 (Ruth)는 그들의 사역이 주로 농사짓는 일이지만 아직도 선교사로서 일하고 있다. 프레디 부부는 아직도 태국어를 배우러 다닌다. 태국 북부에서는 모든 선교사가 먼저 태국 표준말을 배우고나서 언어적으로 약간 차이가 나는 태국 북부어를 배우며. 그 다음에야 부족의 언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프레디 내외는 아카 (Akha)의 말을 배우고 있는데 그 일을 끝내면 농업교육 외에도 지도자 훈련. 단기 성경학교 등 더 많은 일에 유익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훈련과 농업교육의 중간쯤에서 사람의 완전성과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노동캠프 (work camp)에 참석할 젊은이 12명을 스위스에서 데려오기도 했다. 그 그룹을 6주간 산지 (山地) 상황에서 부족사회의 경제생활에 부담을 주지 않고 부양할 준비가 갖추어졌다. 필요한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오토바이 한대가 다닐만한 길이 뚫렸으며. 동시에 캠프가 열리면 따먹을 수 있도록 때맞춰 채소들을 심었다.
처음에 아카족들은 누군가 자기들을 이렇게 열심히 돌보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위스의 젊은이들이 좁은 길 어구에 나타나자 비로소 그들은 사람들이 정말로 왔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스위스 청년들은 기꺼이 일하는 손과 노래하는 목소리를 같이 가지고 왔다. 낮에는 산을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가꿔진 논에서 부락민들과 함께 일을 했다. 밤이면 이 두 산나라 사람들은 불가에 둘러앉아 돌아가면서 자기 나라말로 노래를 불렀다.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동료애의 열기가 모닥불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두번째 캠프에서는 아카족에게 산비탈에 계단을 만들어서 위쪽의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세번째 캠프는 푸오 카렌 부락에서 열렸다. 푸오 카렌의 크리스챤 가운데 한 사람이 언덕 위에 있는 노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논에 들어가 손을 더럽히며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아시아 문화들 가운데서 대부분이 직접 손을 써서 일하는 사람들을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젊은이들이 일하는모습을 유심히 보게 되었고 “땅을 정복하라 너희이 식물이되리라”(창 1:28-29)고 하신 말씀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복음이 사람들을 구속하고 있던 영혼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해 버렸으므로 푸오 카렌족의 한 크리스챤은 불신자들이 귀신붙은 곳으로 여기던 밭에다 과감하게 씨를 뿌렸다. 그들은 이제 그 밭에 손을 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 해에 그 밭에서 큰 노출을 얻었다.
이 경우에서도 영적인 일과 육체적인 일은 전혀 별개로 취급되고 있지 않다. 선교사들은 기도가 참으로 신령한 능력이 됨을 알고서. 그 기도의 싸움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선교사는 기도하고 영적인 무장에 대해 가르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일하면서 토양과 씨앗에 대해서 가르친다. 양쪽 모두 잡초뿐인 곳에서 곡식을 찾는 것이다.
프레디 부부는 이제 코끼리계곡 (Elephant Vallet)으로 알려진 아카족 크리스챤 부락에 살고 있다. 그 이름은 계곡 머리 부분에 있는 산에서 따왔는데. 코끼리의 윤곽을 쏙 빼닮아서 북부의 벌목장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프레디는 현지어를 공부할 뿐 아니라 마을의 몇몇 핵심인물들과함께 일하고 있다. 그는 우선 지도자들을 도와서 그로 하여금 계단식 논을 일구도록 가르쳤다. 그 후에 윤작을 가르치고 땅에서 최대의 소출을 얻는 방법을 지도한다.
그는 집에서 만들 수 있는 마구(馬具) 따위의 간단한 장치들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사람들은 말다루는 법을 배워서 역시 집에서 만든 수레와 쟁기. 써레 등을 끌게하고 있다. 아카족은 이전까지는 같은 땅을 거듭 거듭 경작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코간 (cogan)이라는 억센 잡초가 금새 땅을 덮어버려서 어떤 노력도 물거품이 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간단한 쟁기로 땅을 깊이 갈아서 효율을 높이고 있다.
크리스챤 공동체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하도록 돕고 있다. 코끼리계곡에서는 족장과 그의 측근인 3명의 개혁자들이 보다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함께 노력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러한 과정이 사역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했으나 풍성한 소출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점차로 나아졌다. 교회가 새로운 인간성을 키워 내기위해 몸부림치는 전초기지인 것처럼. 얼키고 설킨 정글이나 잡초 투성이의 땅에 둘러싸여 있는 잘 갈아진 밭도 매우 두드러진 존재이다.
그곳에는 많은 아픔이 도사리고 있다. 쟁기로 잘 갈은 논에는 적당한 때에 내려야 한다. 내리 쪼이는 햇빛과 들쥐는 어떤 밭이든 공격한다. 모든 크리스챤들이 가르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전혀 구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있더라도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인 것이다.

어느날 프레디는 아 바우 리 (A Baw Li)에게 물었다.

프레디 : “어디에 가시는 길입니까.”
아 바우 리 : “들에 나갑니다.”
프레디 : “무슨 일을 하러 가시지요.”
아 바우 리 : “곡식을 털러 갑니다.”
프레디 : "금년에는 얼마나 거두실 것같습니까.
아 바우 리 :“90비프(Bip-12가마)정도 되겠지요.”
프레디 : “그 정도면 당신 내외와 자녀들이 내년 추수 때까지 먹고 살 수 있을까요.”
아 바우 리 : “그렇지 않답니다. 충분하지 않아요. 아마 한 아홉달 정도 먹으면 떨어질 겁니다.”
프레디 : “그러면 나머지 석달은 어떻게 하지요.”
아 바우 리 : “그래서 양식을 좀 살까합니다.”
프레디 : “그러실 작정이라면 지금 곧 사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맘때는 양식값이 좀 싸거든요. 두세달 지나면 그만한 곡식을 사는데 훨씬 더 큰 돈이 들게 됩니다.”
아 바우 리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엔 주님께서 적은 양이든. 많은 양이든간에 나에게 돈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아 바우 리는 들로 나갔고 프레디는 생각에 잠겨 자기 일터로 돌아왔다. 어떤 점에서는 아 바우 리가 한 말이 정말 맞는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적든지 많든지 우리를 도와 주실 수 있다. 물가가 높든지 낮든지 상관없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게으름'이라는 문제가 끼어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자신의 부주의와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차이를 제거해버리실 것인가. 가난은 사회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영적인 문제인가.
코끼리계곡의 30가구 중에서 대부분이 최근 10년 사이에 크리스챤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우상과 귀신을 버린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1976년에 마을에 큰 불이 나서 가재도구와 재산. 그리고 양식을 모두 태워버렸던 일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즉시 태국과 서방의 교회들을 통해서 그들의 필요. 특히 양식의 부족을 채우도록 도우셨던 것이다.
그러나 몇년이 지난 후.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은혜에는 책임이 따르고 먹기 위해서는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아무일도 하지않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양의 음식을 먹다니. 창고에 더이상 곡식이 없고 돈마저 떨어진다면. 그들은 족장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을 먹여 살리기를 기대할 것이다.
때로는 9달치 양식밖에 없었던 아 바우 리의 경우에서 처럼. 부주의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 마을에는 곡식이 떨어져 가고 있는 최소한 5가구의 주민들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과 양식을 얻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프레디는 이것을 한편으로는 농토를 분배하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적인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실생활에 필요한 훈련과 함께 크리스챤이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일해야 하고. 그 신앙을 호미와 함께 그대로 밭으로 나가야 한다는 영적인 원리들을 가르쳤다.
아카족의 남정네들은 한창 곡식을 거두고 있는 중이라고 어슬렁거리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낮잠을 자는가하면. 심심풀이로 사냥을 다녔다. 그들이 먹여 살여야 할 대식구가 딸려 있는데도 말이다. 오래 믿은 크리스챤들 조차도 그들의 좁은 세계를 벗어날 줄 몰랐다. 코끼리계곡이 그들에게는 세상의 처음이요 끝이었다. 프레디 부부는 아카족 크리스챤들의 사랑이 코끼리계곡 교회라는 작은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가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해야 할 다른 마을에 사는 아카족에게 까지 미치게 될 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프레디처럼 선교사들은 실제적인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선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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