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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불교국가의 이루지 못한 꿈

지식창고지기 2009. 6. 10. 15:53

궁예, 불교국가의 이루지 못한 꿈 [2008.09.26]


승자의 역사 속에서 잔혹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고려의 창립자… 전면적 ‘명예 회복’의 날은 올 것인가



“역사는 승자의 것.” 진부한 이야기지만, 아쉽게도 맞는 말이다. 신라에 패한 고구려·백제처럼 당대 외국 사서에 소략하게라도 기록이 남는다면 다행이지만, 승자의 기록에만 남게 된 패자라면 이는 비극 중의 비극이다. 예컨대 남한이 북한에 무력통일을 당해 남한 자체의 기록과 남한에 대한 외국 기록들이 다 없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후세대에게 남을 남한의 이미지는 ‘미제의 가련한 식민지’ 정도일 것이다. 반대로 북한이 남한의 손에 넘어가 그 자체의 기록이 없어진다면 사후 역사 왜곡의 정도는 그보다 덜할까? 그 자체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동시대 외국 기록마저 극도로 소략해 끝내 승자가 된 쪽의 기록만 남을 경우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를, 고려의 실질적 창립자인 궁예에 대한 후대의 서술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왕건 쿠데타의 정당성 입증 위해

자신을 발탁해준 궁예를 제거해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태조 왕건의 왕조를 섬겼던 사가들이 그려놓은 궁예의 이미지는 ‘캐리커처’에 가깝다. 예컨대 <삼국사기>의 궁예는 ‘태생적 악인’으로 묘사된다. 신라 왕의 서자로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이빨이 있는데다 단옷날에 태어나 흉측한 징조들을 나타내니 일관(日官·주술을 담당하는 신라 관료)의 권유로 왕실에서 죽이려 함에도 우연히 살아남아 죽임을 피하는 과정에서 애꾸눈이가 된 것이다. 어릴 때부터 ‘미친 버릇’이 있어 품행이 단정치 못해 유모에게서도 버림받아 승려가 되지만, 계율을 지키지 못해 도적 양길의 부하가 돼 신라 말기의 난세를 틈타 호족으로 몸을 일으킨다. 901년에 스스로 후고구려의 왕임을 선포하고 나서 부석사에 걸려 있는 신라 왕의 초상에 칼부림을 하고 신라 귀순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등 신라에 대한 광적인 증오심을 보인다.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고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인 것처럼 보배로운 금색 왕관을 쓰고 요망한 말만 담겨 있는 경전 20여 권을 짓는데, 그의 불교론에 반대하는 승려 석총을 때려죽인다. 그 다음에 그에게 간언을 한 부인을 “당신이 간통했다는 걸 신통력으로 알았다”고 하여 음부를 찔러 잔혹하게 죽이고, ‘보살’로 칭해졌던 두 아들도 죽인다.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들이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수가 되니 이를 더 이상 차마 보지 못한 왕건은 918년에 “어쩔 수 없이” 뭇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그를 제거하고 스스로 임금이 된다. <삼국사기> ‘궁예전’의 내용을 간추리면 대체로 이렇게 왕건 쿠데타의 ‘절대적 정당성’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골자가 될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무인치고 제거된 정적을 욕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박정희에게 장면 정권의 시대가 ‘무질서·부패·무능’의 시대였다면,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제의 고용 간첩’으로 만들었다. 다행히도 장면과 박헌영 쪽의 사료가 남아 있기에 장면이 (박정희 자신과 달리) 개인적 부패를 전혀 하지 않았던 사실과 경제발전 계획을 수립하는 등 상당한 통치력을 민주적으로 발휘했다는 사실, 그리고 박헌영이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에 빠져 있긴 해도 근본적으로 열성적 노동계급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패자와 달리 궁예에게는 현존하는 자신의 기록이 없다. 그래서인지 전통 시대에는 물론 근대에 접어들어도 그에 대한 이렇다 할 ‘재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신채호는 그에게 다소 무관심했지만, 안확(1886~1946)은 “고구려에 대한 인민의 향수를 교묘히 이용하여 신라를 분열시킨 폭력적 야심가” 정도로 취급했다(<조선문명사>, 1923). 타성의 탓인지 이병도(1896~1989)와 같은 근대 강단 사학의 거목들마저도 왕건 쪽의 ‘흑선전’에 불과한 사료를 별 비판 없이 받아들여 “미륵을 자칭하고 극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위경(僞經)이나 짓고 부녀자까지도 가혹하게 죽이는 궁예”에 대한 왕건의 쿠데타를 사실상 두둔해주었다(<한국사 고대편>, 1959). 비판정신이 강한 이기백(1924~2004) 선생은 궁예가 후고구려의 국가적 제도를 제대로 정비한 점이나 7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 전제왕권을 모방하기 위해 숙청 등 폭력적 방법을 불가피하게 썼다는 점 등을 인정해주었지만 “자기 합리화를 위해 불교의 신비적 요소를 이용한” 궁예가 결국 “폭군으로 전락”해 왕건에 의해 제거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한국사신론>, 1967). ‘민중’의 존재에 눈을 뜬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초적(草賊) 등 신라 말기 반란적 민초들에게 기댔던 궁예에 대한 긍정적 관심이 고조됐다. 그러나 7년 전에 안방을 정복하다시피 한 사극 <태조 왕건> 속의 궁예는 멋진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지만, 여전히 ‘폭군’의 면모를 지녔다. 그만큼 궁예를 ‘인격 말살’시킨 <삼국사기> 이후 기록들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 기록들을 부정할 만한 궁예 쪽 기록은 현존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의 궁예 관련 기술에선 역사적 맥락과의 모순과 노골적 편향 등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승려 석총·신라 귀순자들을 죽인 이유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신라 왕의 궁녀의 아들’이라고 돼 있는데, 헌안왕(재위 857~861)인지 경문왕(재위 861~875)인지 편찬자 본인도 잘 모른다고 털어놓는다. 실제 왕자였다면 그 계통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남았을 법한데, <삼국사기> 기록이 왔다갔다 하는 점으로 봐서는 아마도 항간에서 떠도는 소문 이상의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흉측한 징조가 일어나 왕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는 주몽신화 등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전도된 영웅탄생담’이다. 주몽신화만큼이나 주인공의 ‘태생적 비범함’이 부각되지만, 주인공은 애당초부터 마땅히 당해야 할 죽임을 우연히 비켜간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궁예는 결국 승려가 될 수밖에 없는 몰락한 진골 귀족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되는데, 그는 계율이나 어기는 속칭 ‘땡땡이’는 분명 아니었다. 사찰에서 아무것도 못 배웠다면 과연 20여 권의 불경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신라의 왕들 중에 불교적 저술을 직접 남겼다는 이가 없는데, 군주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불교적 저술에 정력을 쏟은 궁예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비상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승려 석총은 <삼국유사>에서 유명한 진표율사(8세기)의 계승자로 언급된 석충과 동일한 인물로 추측되는데, 궁예는 진표나 석충처럼 법상종에 속했음에도 그 계통을 달리했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아미타보살과 관음보살을 의미하는 이름(신광보살·청광보살)을 준 궁예의 불교가 미륵과 아미타, 관음 중심이었다면 진표의 불교는 미륵과 지장보살 신앙을 중심으로 했다. 석총(석충)의 살해를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 나름의 모순이 진작부터 존재해온 이상 단순히 ‘화나서 죽인’ 건 아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석충이 왕건과 내통했던 인물로 묘사되는 점까지 감안하면 석총(석충)의 살해에 왕건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깔려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총(석충)이 희생된 반면에, 명주(강릉) 호족 김순식의 아들인 승려 허월이나 승려 출신의 종간(宗侃) 등 수많은 불승이나 승려 출신들은 궁예를 끝까지 지켰다. 즉, 김부식은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궁예의 불교적 저술들을 ‘요망하다’고 폄하했지만, 과연 동시대 불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랬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본인이 속했던 법상종과 경쟁 종파이던 화엄종의 사찰 부석사에서 궁예가 신라 왕의 초상화를 칼로 찢었다는 점이나 신라 귀순자들을 죽였다는 점 등은 얼핏 괴상해 보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납득할 수 있는 면들도 없지 않다. 예컨대 주로 초적, 즉 신라의 극심한 세금 독촉을 참지 못해 정든 고향을 떠나 떠돌이가 된 민중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궁예가 과연 민중에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 신라 귀족들의 귀순을 받아들이기가 쉬웠겠는가? 당시에 ‘귀순자’란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태조 왕건이야 신라 귀족들의 귀부를 잘 받아주었지만, 그는 초적들의 도움을 받아온 반란자 궁예와 달리 ‘정통’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는 점도 기억해둬야 한다. 궁예가 부인 한 명과 아들 둘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현대의 독자에게 충격적인 ‘포악함’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왕건 쿠데타의 쉬운 성공이 보여주었듯이 지방 호족의 영토를 직접 통제할 수 없는 궁예 왕권의 기반은 사실상 꽤 취약했다. 그만큼 궁예는 언젠가 있을지 모를 정변에 대한 경각심을 늘 늦출 수 없었던 것이고, 처가 쪽이 세력화돼 자신에게 불리하게 움직일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계책을 채택할 만한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간언을 드리는 부인의 음부를 찔러 잔혹하게 죽였다”는 설정은 후대의 유교주의적인 조작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부인과 아들들의 처형을 사실로 인정한다 해도 신라 말의 혼란기라는 잔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일인 만큼 “폭군만이 할 수 있는 짓”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에는 그것도 ‘정치’였다.

측천무후를 벤치마킹?

김부식부터 이병도까지 궁예가 “미륵을 자칭했다”는 것을 “민중의 미신을 이용하는 요망한 행위”로 취급해왔다. 그런데 정치의 불교화 자체는 그 시대에 그렇게까지 특출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궁예가 태어나기 약 1세기 전에 일본에서 궁예와 같은 법상종에 속하는, 그리고 궁예 못지않게 신비주의에 관심을 보였던 승려 도쿄(道鏡·700~772)가 효겸여황의 애인이 되어 불교에 기반하는 일련의 정책을 폈다가 결국 스스로 천황이 되려는 야심이 문제가 되어 실각당해 귀양가게 된 일이 있었다. 또한 당나라의 여황인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도 690년에 중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됐을 때 궁예와 비슷한 모양으로 ‘전륜성왕’을 자칭하고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이라는 설을 퍼뜨려 ‘일체 중생을 제도할’ 미래불인 자신의 즉위를 합리화하려 한 것이다. 아직 연구되지 않은 주제지만, 사실 궁예가 꽤나 의도적으로 측천무후를 ‘벤치마킹’해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디자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측천무후의 측근 승려 중에서는 그를 위해 위경을 지어주고 아부하는 무리들도 있었지만 그의 비호하에서 법장(法藏·643~712)과 같은 화엄학의 거장들이 중국 불교를 크게 일으키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측천무후의 사례를 이용해 자신을 유교적 성인(聖人)이 아닌 미래의 부처, 고난에 빠진 중생에게 열반의 희망을 주는 미륵불로 규정한 궁예의 불교가 꼭 ‘요망’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 말기의 실정, 진골 귀족 정권의 혹독한 가렴주구, 그리고 혼란기의 처참한 살육에 지치고 평등과 안락의 새 시대를 열망했던 민초들에게 사실 유교적인 엄숙주의·도덕주의보다는 군주가 종교적인 ‘구세’까지 약속해주는 불교적인 ‘종교 국가’가 더 가까이 와닿았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궁예의 불교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물론 그가 민초들의 ‘평등과 안락에의 갈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쿄도, 측천무후도, 궁예도 실패했다. 미천한 평민들의 발탁이라든가 각종의 종교적인 민심 수습책 등 꽤나 이례적인 정책을 폈던 그들에 비해 동아시아 사회의 기득권층은 차라리 ‘안정적인’ 유교적 통치를 선호했다. 정치적 실패는 역사학자들에 의한 ‘인격 말살’로 이어졌는데, 이는 ‘천황의 계통을 단절시킬 뻔한 도쿄’나 ‘폭군 궁예’의 경우에 특히 심했다. 중국에서도 최근에 와서야 측천무후의 대담한 왕권 탈취가 양성평등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일면의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과연 한국 역사학에서도 이색적인 불교적 통치자 궁예에 대한 전면적 ‘명예 회복’의 날이 올 것인가?


참고문헌:
1. ‘철원환도 이전의 궁예정권 연구’ 강문석, <역사와 현실> 57호, 2005년 9월, 241~273쪽
2. “궁예의 미륵세계” 김두진, <한국사 시민 강좌> 제10집, 1992, 19~37쪽
3. ‘궁예와 그 미륵사상’ 양경숙, 국민대 석사학위 논문, 1988
4. ‘태봉국형성과 궁예의 지지기반’ 오영숙, 숙명여대 석사학위 논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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