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식차지(植茶地) 몽산, '공차(貢茶)', '몽정차(蒙頂茶)'
오랜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빛바래지 않고 변함없이 다인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대련(對聯) 중에는 “揚子江中水, 蒙頂山上茶(양자강중수, 몽정산상차)”란 문구가 있다. 이는 천하제일천인 양자강 중령천(中굳泉:본지 2006년 4월호 게재)물과, 몽정산(蒙頂山)에서 나는 차가 최고임을 극찬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서로 잘 어울리는 최고의 차와 샘물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몽정(蒙頂)은 몽산(蒙山)의 정상을 일컫는 말이다. 몽산은 현재 사천성 성도(成都) 평원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역은 명산현(名山縣)과 아안현(雅安縣)에 걸쳐 있다. 몽산(蒙山)에는 기이한 봉우리와 고차수(古茶樹)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음은 물론 사찰 또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몽산은 연 강우량이 많고, 사철 안개가 자욱하고 구름이 많은 기후적 특징 때문에 거의 일 년 내내 온 산이 비와 운무로 뿌옇게 덮여져 있다. 몽산(蒙山:덮여져 있는 산)이란 산 이름은 바로 이러한 기후적 특징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차를 심고 재배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천연적인 환경조건을 구비하고 있어 가히 하늘이 내리신 땅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곳이다. 차를 심고 재배하는 차농(茶農)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와서 감탄을 금치 못할 뿐만 아니라 이곳 어느 한쪽의 땅에서라도 차를 심고 재배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고대 중국인들은 찻잎을 발견하고 약용(藥用)으로 쓸 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야생차수를 대량으로 채취하였다. 그 당시 찻잎을 채취하는 방법은 ‘伐而?之(벌이철지, 『다경』)’ 즉, 도구(낫, 도끼, 톱 등)를 사용하여 야생차나무의 가지를 쳐서 땅 위에 떨어진 가지에 붙은 찻잎을 줍는 방식이었다. 이에 야생차나무는 점점 감소하고 반면 찻잎의 소비는 점점 증가함에 따라 차나무 또한 다른 기타의 농작물과 같이 사람의 손을 거치게 되는 인공재배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이는 차업(茶業)의 발전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몽산에서 차를 심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 전인 서한(西漢) 때부터였다. 중국 사천성 몽산 일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 구전에 의하면 서한 감로(甘露:기원전53년~49년) 연간에 감로사(甘露寺) 승려 보혜선사(普慧禪師) 오리진(吳理眞)이 직접 일곱 그루의 차나무를 심었는데 그 품질이 특이하여 사람들은 이를 ‘선차(仙茶)’라 부르게 되었다. 몽산 정상에는 ‘차사박물관(茶史博物館)’ 건너편 산기슭에 정방형의 돌난간으로 둘러싸여 보호되어있는 10평 남짓의 비옥한 땅에 일곱 그루의 차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입구에 ‘황다원(皇茶園)’이란 제명이 새겨져 있다.
몽정차는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년을 ‘공차(貢茶)’로 지정되어 매년 황실에 바쳐졌다. 이조(李肇)의 『당국사보(唐國史補)』에는 “검남(劍南:지금의 사천성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에는 몽정석화(蒙頂石花), 소방(小方), 산차(散茶)가 있는데 으뜸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모두 몽산에서 나는 차를 일컫는 말이다. 매년 황제에게 바쳐지는 공차에는 정공(正貢)과 배공(陪貢) 두 종류가 있다.
황제나 황족이 음용에 바쳐지는 정공(正貢)하는 차는 바로 ‘황다원(皇茶園)’에서 재배된 일곱 그루의 선차(仙茶)이고, 조정대신이나 귀족들의 음용에 쓰이는 배공(陪貢)되는 차는 몽산 오봉(五峯)의 곳곳에서 나는 찻잎을 채취하여 제다한 것이다.
매년 공차(貢茶)를 제조할 때엔 몽산다원(蒙山茶園)에서는 개원(開園)의 예법과 의례가 엄중하고 성대하게 거행된다. 먼저 길일(吉日)을 선택하고 모든 이들이 목욕재개하며 찻잎을 따는 스님(採茶僧)과 차를 만드는 스님(製茶僧)의 역할 분업이 엄격히 구분된다.
이렇게 몽정차는 채다에서 제다에 이르기는 모든 공정에서부터 일반 차와는 현격한 차이와 그 품질에서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많은 문인(文人), 아사(雅士)들의 아낌없는 극찬과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시인 백거이는 그의 시에서 “차 중의 고향은 바로 몽산(蒙山)이로구나[茶中故舊是蒙山]”했고, 당대 여양왕(黎陽王)은 『몽산백운암다시(蒙山白雲巖茶詩)』중에서 “만약에 육우로 하여금 공론을 주최하게 한다면, 마땅히 (몽정차를) 인간제일차라 할 것”이라며 몽정차(蒙頂茶)에 대해 극찬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몽정차의 종류는 매우 많지만, 현재 제대로 회복된 정형적인 몽정차로는 주로 몽정석화(蒙頂石花)와 몽정감로(蒙頂甘露) 두 종류가 있다.
몽정석화는 납작하고 곧은 형태로 ‘불 쬐이기(홍배:烘焙)’와 덕음(초청:炒靑)과정을 거친 녹차(綠茶)이다. 청명(淸明)―우리나라의 우전(雨前)과 동일― 전에 어리고 여린 싹(일창,一槍)을 채취하여 만든 것으로 외형은 납작하고 곧으며 하얀 솜털(백호,白毫)이 덮여 있다. 그 형상이 마치 산석(山石) 위에 핀 석화(石花)와도 같고 맛은 감미롭고 신선하며 여린 맛이다.
몽정감로(蒙頂甘露)는 구불구불하게 말린 형태의 초청(炒靑)녹차이다. 차명을 ‘감로’라고 명명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서한(西漢) 때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감로(甘露:BC53년~BC50년)’연간에 몽산 감로사의 보혜선사 오리진(吳理眞)이 몽산에다가 최초로 차를 심고 인공 재배하였는데 후인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연호인 ‘감로’로 차의 이름을 명명하였다(범어에서 감로는 시조를 생각하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차의 맛이 아주 신선하고 부드러운 것이 마치 감로와 같고 차의 품질이 일반 여타의 차들보다 월등함을 상징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몽정감로의 외형은 구불구불 말려있고 하얀 솜털이 매우 많으며 그 색이 녹색 윤이 난다. 향기는 아주 깔끔하며 맛이 순후하고 감미로우며 싹 잎이 마치 꽃봉오리 같다.
이외에도 황차 종류에 속하는 몽산 황아(黃芽)가 유명한데 이제껏 맛 본 타 지역의 명차와는 그 맛이 참으로 사뭇 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진향무미(眞香無味)라 했던가? 그 맛이 순후하면서도 회향하는 맛이 아주 섬세하게 느껴지는 것이 어떤 말로도 참으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몽산은 차를 재배하기에 실로 천연의 자연조건을 다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몽산다원을 오르는 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여러 불교 고찰들은 과거 오랜 세월동안 불승들이 몽정차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 지금도 몽정산 지구사(智矩寺)의 선승들은 중국 내에서 거행되는 몽산 일대에서 거행되는 차문화 행사는 물론 대내외적인 국제차문화제에도 참가하여 자신들의 선차(禪茶) 다예를 대중들에게 시범하곤 한다.
촌안(村顔) 박영환 | 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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