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 정치론]
제2부 제3장 모택동과 등소평의 정치경제학 : 노선투쟁의 동학
Ⅰ. 문제의 제기
흔히 중국의 정치변화는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1949년 중국공산당정권이 수립된 이후 여러차례의 ‘역사적인 변화와 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정치과정이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다는 지적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사실 1958년의 대약진운동이나 1966년의 문화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1971년의 임표(林彪)의 실각과 1976년의 문화혁명 4인방의 숙청과 등소평체제의 등장 등은 모두 중국정치과정의 예측할 수 없는 유동성을 극적으로 표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태적이고 유동적인 중국정치의 성격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중국 당국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서구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노선투쟁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의 정치과정에는 이데올로기와 정책정향이 다르고, 권력이익이 상충되는 두 개의 노선과 세력이 존재하며, 중국정치의 변화는 이들 두 노선과 세력의 상호 갈등과 대립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제1차적 관심은 이와 같은 두 노선의 특징을 규명하는데 있다. 특히 등소평체제가 등장한 이후로 더욱 명료해진 정치와 경제, 경제발전과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노선을 비교·설명하려고 하였다.
좌파노선은 대약진운동이나 문화혁명과정에서 나타난 모택동의 정치경제학에서 그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보았으며, 우파노선은 등소평체제하에서 추진중인 4개 현대화정책에서 그 특징이 완전히 표출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택동의 정치경제학과 4개 현대화정책의 발전이론을 비교하려고 하였다.
둘째로, 중국이라는 특수한 정치상황에서 전개되었던 노선투쟁을 사회과학적인 맥락에서 파악해 보려고 하였다. 즉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논쟁이란 차원에서, 그리고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관한 확산이론과 종속이론의 논쟁이란 차원에서 중국의 노선투쟁을 재조명함으로써, 중국의 경험이 시사하는 보편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노선투쟁을 중국적인 특수상황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근대화과정에 있는 모든 사회가 당면한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흔히 중국학(sinology)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편협성(parochialism)을 지양하고, 중국학과 일반사회과학의 연계성을 구축해 보려는 노력에서 시도되었다.
끝으로 Skinner와 Winckler가 주장한 노선투쟁의 순환이론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하고, 중국의 정치과정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변화의 방향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권력투쟁이나 정책논쟁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정치적 변화의 패턴을 구명(究明)하여 중국정치과정의 특징을 논리적, 이론적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중국정치에 대한 예측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노선투쟁에 대한 이론을 재검토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Ⅱ. 모택동의 정치경제학
(1) 모택동사상과 경제발전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팽덕회사건(彭德懷事件)으로 당내가 동요되고 모택동의 권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모택동은 스스로 경제문제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한 적이 있었다. 혁명이나 유격전에는 경험도 풍부하고 일가견이 있다고 자랑할 수도 있지만 경제건설은 생소한만큼 경제전문가들의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고 당간부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사실 모택동이나 문화혁명좌파는 경제전문가로 자처한 적도 없었지만, 또한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았다. 양효와 같은 좌파이론가가 주장한 것처럼 모택동이나 좌파도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실현하여 부강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실용주의파와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좌파의 견해에 의하면 경제발전이나 4개 현대화는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이라는 목적에 필요한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무조건 강조하는 것은 ‘유생산력논(唯生産力論)’의 오류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지나치게 생산력의 발전만을 강조하게 되면 생산관계와 상층구조의 개혁을 등한시하게 되고,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이란 목적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택동이나 좌파의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발전’이란 경제성장의 물질적인 조건형성의 정도에 의하여 측정되기보다는 보다 포괄적인‘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이란 목표에 얼마나 접근했느냐에 의해서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사회에 대한 이상을 희생하면서까지 경제발전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사회란 어떤 사회이며, 사회주의사회에서 프로레타리아독재 주요 임무는 무엇인가?
(2) 사회주의사회와 프로레타리아독재
모택동과 좌파의 이론가들은 ‘사회주의사회’를 정의하면서, 사유재산제도의 철폐, 프로레타리아독재의 수립과 같은 구조적인 요건과 함께, 모든 사회적 불평등의 제거와 사회주의적 도덕과 가치의 정립을 중요한 요인으로 강조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모택동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도시노동자와 농민,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불평등을 억제·감소하여 공산주의사회에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주의사회에서 프로레타리아독재의 주요 임무라고 강조하였다.
모택동과 문화혁명 좌파에 의하면 중국사회는 소유권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사회주의사회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의식형태에 있어서나 대중의 가치관 속에는 봉건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요소의 영향력이 아직도 강대하게 남이 있고, 또한 사회주의사회에서 실행하고 있는 ‘8급공자제(8級工資制)’, ‘안노분배(按勞分配)’의 정책(政策), 그리고 화폐교환(貨幣交換)의 경제(經濟)는 사실상 구사회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자본계급법권(資産階級法權)’에서 유래하는 불평등을 억제하지 못하면 새로운 특권계급이 등장하고 자본주의가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사회는 ‘과도적 사회’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맹아’라고 할 수 있는 진보적인 요소와 자본주의에로의 복귀를 가능하게 하는 부정적인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속 계급투쟁을 전개하고 사회주의사회에서 산출되는 불평등을 억제하여 공동부유의 사회주의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레타리아전정의 최대의 과제는 바로 이와 같은 정치공작과 사상혁명을 주도하고 사회주의사회내에 존재하는 ‘공산주의의 맹아’를 확대·발전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모택동과 좌파는 정치공작과 상층구조의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고, 사회주의사회의 물질적인 조건만을 강조한 ‘스탈린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하였다.
(3) ‘스탈린의 정치경제학’비판
모택동은 ‘소련에 있어서 사회주의경제의 문제’라는 스탈린의 팜프렛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스탈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층구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모택동에 의하면 스탈린의 중대한 과오는 사물에만 관심을 두고 인간에 대하여는 불신을 했다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과학기술과 경제발전만을 강조한 스탈린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책은 사회주의개조에 있어서 기계의 역활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농민의 의식을 높이고 인간의 사상을 개조하지 않고서 어떻게 기계에만 의존할 수 있는가?’
모택동에 의하면 스탈린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대중의 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성을 고양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증진에만 집착한 나머지 노동자들의 물질적 욕구를 이용하여 생산력을 제고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의 격차를 조장하고 물질적인 보너스제도를 도입하여 노동계급간의 불평등을 심화시켰을 뿐만아니라 산업구조의 불균형발전,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스탈린은 사회주의사회에서 계급투쟁과 모순이 계속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대중의 역활을 무시했기 때문에 소련을 마침내 수정주의국가이며 국가독점자본주의국가로 변질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모택동과 좌파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즉 생산·분배·소비에 관한 모든 경제문제를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문제로 이해해서는 않되며, 경제문제를 정치·사회·문화 등의 모든 영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제문제를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맥락에서 분석해야 하며, 특히 정치와 경제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정치경제학적’시각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4) 모택동의 정치경제학
모택동과 좌파에 의하면 정치경제학이란 모든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활동의 경제적 의미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동시에, 또한 경제문제를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경제는 좁은 의미에서 본다면 생산력의 제고를 도모하기 위한 자원의 배분에 관한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어떤 목적과 목표를 위해서 어떻게 자원을 배분하느냐는 문제는 사회구성원 전체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전체의 이익과 목적달성에 관한 결단과 결정은 결국 정치적 문제이므로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분배·소비의 모든 경제활동은 결국 정치문제이며,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이란 목표에 얼마만큼 기여하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택동이나 좌파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사회’란 모든 불평등이 점차로 소멸되는 사회이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정책에서도 부의 창조, 즉 생산력의 증가라는 문제보다는 공동부유의 공산주의사회에로의 접근이란 차원에서 부의 분배문제를 더욱 중요시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좌파는 부의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는 개체경제의 활동범위를 가능한 억제하고 집체경제의 역활을 확대하려고 하는가 하면, 산업구조의 불균형발전과 집체와 집체, 또는 개인과 개인간의 불평등을 점차로 감소시킬 수 있는 경제정책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집체소유권의 범위가 넓고 규모가 큰 소위 ‘일대, 이공(一大, 二公)’의 인민공사의 우수성을 강조한다든가 또는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분배원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소득의 불평등을 억제하고 대중의 물질주의적 성향을 극소화할 수 있는 ‘표병공분(標兵工分), 자보공의(自報公議)’라는 분배제도를 확대 실시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좌파의 정치우선주의와 평등주의적 경향은 비단 분배정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경제정책분야와 사회·문화정책에서도 나타났다. 이를테면 지식청년의 ‘상산하향정책(上山下鄕政策)’, 간부의 노동참가, 그리고 농촌의 ‘적각의생(赤脚醫生)’과 합작의료제도와 같은 ‘신생사물(新生事物)’이 모두 좌파의 정치우선주의와 평등주의적 정책정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좌파에 의하면 이와 같은 정치우선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정책은 비단 공동부유의 사회주의사회에 대한 이상을 구현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 대중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대해 적극성을 가지게 하고, 마침내는 대중을 동원하여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실현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주장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사회에서 생산관계와 상층구조의 변혁을 통하여 생산력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모택동과 좌파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이 타당하지만 사회주의개조가 완성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생산관계와 상층구조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생산의 급격한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혁명이 경제발전을 저해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대중의 사상을 혁명화하여······사회생산력의 발전을 가져 온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치우선주의, 평등주의, 그리고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로 집약될 수 있는 모택동과 좌파의 ‘정치경제학’이 형성된 배경에는 ‘연안경험(延安經驗)’이라는 중국혁명의 전통과, 경제적으로 낙후한 중국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집념을 찾아 볼 수 있으며, 또한 경제발전지상주의에서 파생하는 부작용에 대한 경고도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모택동과 좌파의 발전전략은 경제발전의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이나 계층으로부터, 그리고 지방당간부와 정치적 적극분자(political activists)들로부터 어느정도 지지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이 좌파가 주장한 것처럼 ‘생산력을 해방’하여 급진적인 경제발전을 초래하기는 커녕, 오히려 중국경제의 혼란과 퇴보를 초래하게 되자 실용주의노선이 등장하게 되었다.
Ⅲ. 등소평 실용주의노선의 발전전략
(1) 실용주의노선의 형성
문화혁명 이후 격렬해진 노선투쟁의 과정에서 좌파와 실용주의파는 각각 노선투쟁의 역사를 중국정권이 수립되기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좌파와 실용주의파의 노선투쟁은 중국의 혁명전략에 대한 논쟁과 유사한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20세기 초에 중국의 근대화와 관련하여 중국 지식인 사이에 전개되었던 논쟁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서구의 선진기술을 받아들여 낙후한 중국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실용주의노선은 ‘민주주의선생(民主主義先生)’과 ‘과학선생(科學先生)’의 힘으로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신문화운동시대의 지식인들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좌파와 실용주의노선의 역사가 중국의 근대화와 혁명과정에서 기원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곧 노선투쟁의 역사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문화혁명 이전에도 모택동의 좌파적인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와 같은 반좌파세력이 조직적이고 동질적인 실용주의노선으로 계속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50년대에는 진운(陳雲), 등자휘(鄧子恢)와 같은 경제전문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모택동의 급진적인 합작화운동을 반대했지만, 그들의 반대는 결코 모택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도전도 아니었으며, 또한 중국의 기본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초래된 최악의 경제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노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즉 유소기(劉少奇)·등소평(鄧小平)·진운(陳雲)과 같은 당관료와 경제전문가들은 ‘인민의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검은고양이(黑猫)이든 흰고양이(白猫)이든 상관없다는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들은 경제위기를 초래한 대약진운동의 기본이념과 정책에 대하여 대폭적인 수정을 가하게 되었고, 중국경제의 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신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이들은 대약진운동의 정치우선주의, 평등주의, 그리고 주의주의적인 경향을 비판하고, 경제와 정치의 분리, 그리고 ‘경제법칙’과 ‘객관적 조건’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경제발전과정에서 과학기술과 전문가의 역활을 중시하였으며, 경제적 효율성과 수익성이 모든 경제활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대약진운동 당시에 추진되었던 평등주의적인 분배정책이나 비경제적인 사업을 전면적으로 조정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조정작업은 처음부터 좌파노선에 반대하려고 한 것이 아니며, 경제적으로 긴박한 당시의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이 계속되면서 이들의 정책정향은 단순히 대약진운동의 정책적 과오를 교정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주의사회의 건설과 경제발전에 대한 모택동이나 좌파노선과는 다르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따라서 1960년대초의 ‘두 노선의 숨은 대립’은 마침내 문화혁명을 계기로 폭발하면서 양극화되었다고 하겠다.
(2) 실용주의파의 社會主義觀
실용주의파와 좌파는 모두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을 공동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주의관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좌파는 사회주의사회의 ‘과도성’을 강조하고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용주의파는 사회주의사회의 ‘장기성’을 강조하고,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소위 적대적인 모순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실용주의파에 의하면 중국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은 1956년에 끝났다고 지적한다. 프로레타리아전정이 확립되고 집단화와 국유화와 같은 사회주의개조가 완결된 1956년에 사회주의혁명은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대규모의 계급투쟁을 더 이상 계속할 근거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즉, 사유재산제도가 근본적으로 제약되고 집체경제가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한 중국사회에서 계급투쟁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용주의파에 의하면 사회주의사회의 주요 모순은 계급간의 모순과 갈등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향상을 바라는 대중들의 요구와, 그에 부응할 수 없는 중국의 경제적 낙후성에서 파생되는 모순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중국사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모든 계층이 협력·단결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파의 견해는 부분적으로 1956년의 제8차 전당대회의 결의에서 나타났지만, 그것은 곧 모택동과 좌파에 의하여 부정되고, 1962년에는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모택동의 주장이 당의 기본노선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사망한 이후, 특히 실용주의파의 정치적인 승리가 확인된 1978년의 3중전회에서 계급투쟁의 종결이 공식적으로 재강조되었다.
즉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 공보」에 의하면 중국사회에서 대규모적인 계급투쟁은 이미 종식되었고, 외적의 침략이 없는 한 중공당의 중심과제는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어떠한 정치운동이나 계급투쟁도 이러한 중심과제와 유리되거나 또는 그것을 저해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경제발전제일주의를 분명히 하였다.
(3) 4개 현대화의 정치경제학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실용주의파는 1978년의 3중전회를 계기로 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최고·최대의 목표라고 선언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상해방, 체제개혁,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파는 문화혁명 시기에 숙청당했던 대부분의 당간부들을 복권시키고, 좌파(左流)에 의해서 비판되었던 실용주의적인 정책을 부활했을 뿐만아니라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용주의파는 모택동과 좌파의 정치우선주의와 평등주의, 그리고 교조주의로부터 인민의 사상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정치와 경제의 상호관계에 대한 모택동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고 경제발전제일주의의 관점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용주의파는 생산관계의 변화가 생산력의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있다는 모택동의 주장을 반마르크스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생산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생산력’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용주의파에 의하면 모든 사회관계와 상층구조는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하기 때문에 생산력의 증가만이 중국사회의 진보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공작을 비롯하여 모든 제도와 정책은 생산력의 증가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실용주의파는 사회주의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한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강화·확대하는 한편, 아무리 사회주의적 이상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더라도 생산력의 감퇴를 초래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은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실용주의파는 경제관리체제를 분권화하고, 부분적으로 시장의 기능을 인정하는 동시에 상품경제의 역할을 허용하였다. 소위 조자양(趙紫陽)의 ‘사천경험(四川經驗)’을 기초로 하여 기업의 자주권을 확대하는가 하면, 농촌지역에서는 인민공사제도를 철폐하고 생산책임제를 도입함으로써 개체경제의 활동영역을 확대하고 개인과 기업의 이윤추구를 허용·장려하였다. 사실 실용주의파는 좌파의 평등주의적 분배정책을 비판하고 어느정도 소득의 불평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실용주의파는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조속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교육정책을 개혁하여 전문적인 지식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선진국가의 발달된 기술문명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등소평에 의하면 경제적으로 낙후된 중국이 선진산업국가를 뒤쫓아 가려면 가장 발달된 과학·기술을 이용해야 하므로, 중국은 선진국가로부터 학습하는 데에 인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서방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다시 말해서, 실용주의체제하에서 중국은 좌파의 자력갱생노선에서 문호개방노선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4) 두 개의 노선, 두 개의 발전전략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같이 실용주의노선의 경제발전제일주의는 좌파의 정치우선주의와 모든 정책분야에서 날카로운 대립·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들은 사회주의사회와 계급에 대하여 상반되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중국사회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대하여도 상이한 전략을 제시하였다.
즉, 좌파는 인간의 의지와 대중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자력갱생의 정신에 입각하여 노동집약적인 방법을 통하여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적극성을 고양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즉 집체경제를 강화하고 공동부유의 의식을 고취하는 동시에 분배정책이나 사회보장정책 등을 통하여 평등한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좌파의 발전전략은 모든 지역과 계층이 균등하게 발전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실용주의파는 좌파의 자력갱생론이나 균등발전전략은 이상주의적이고 유심론적(唯心論的)인 사상의 소산이라고 비난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역과 계층이 주도하여 경제발전을 우선 이룩하고 점차로 그 효과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실용주의노선에서는 어느 정도의 불평등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허용하는 동시에,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계층과 지역의 발전을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Gurley와 같은 학자는 실용주의노선은 중국사회에서 가장 우수한 계층에 의존하여 발전하려는 전략(building on the best)인 반면에, 좌파노선은 중국사회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과 계층을 동원하여 발전하려는 전략(building on the worst)이라고 지적하였다.
Ⅳ.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본 중국의 노선투쟁
(1) ‘두 개의 마르크시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중국의 지도층내에는 사회주의 계급투쟁, 그리고 발전전략에 대하여 상이한 견해를 가진 두 개의 노선이 존재하며 이들은 서로 상대방을 비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즉, 실용주의파는 좌파의 평등주의와 인간의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주의주의는 ‘과학적 마르크시즘’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반면에 좌파는 실용주의파의 유생산력론이나 계급투쟁 종말론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계적, 형식적으로 해석한 결과로 나온 이론이라고 주장하였다.
좌파에 의하면 실용주의노선은 정치와 경제, 혁명과 생산의 변증법적 관계를 간과하고 있으며, 생산력의 발전은 자동적으로 사회주의사회에서 공산주의사회로 이전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사실상 경제결정주의를 반영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안정과 단결만을 강조한 나머지 사회주의사회의 변질을 가져 온 수정주의노선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실용주의파는 정치적·사상적 태도에 따라서 계급을 규정하려는 모택동과 좌파의 견해는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왜곡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실용주의파에 의하면 계급이란 사회의 경제구조에서 점유하는 개인의 위치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중국사회의 경제구조가 변모된 1956년 이후의 계급과 계급관계를 사회주의개조가 있기 이전의 계급관계와 동일시하는 것은 비마르크스주의적인 견해라는 것이다. 실용주의파에 의하면 사회주의개조가 완결된 중국사회에서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회주의사회에서 계급관계는 적대적인 투쟁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경제발전을 통하여 점진적이고 평화적으로 공산주의사회로 이전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와같은 ‘물질적 기초’가 마련되기 이전에 공산주의사회로 이전하려는 좌파의 ‘궁과도(窮過渡)’는 유토피아적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와 같이 좌파와 실용주의파는 서로가 자신들만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대변하고 있으며 상대방의 노선과 정책은 비마르크스주의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중국 지도층 내에서만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노선투쟁에 관심이 있는 서방세계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Meisner와 같은 학자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과정에서 나타난 좌파와 모택동의 유토피안이즘은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이 미래의 공산주의사회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이며, 이와 같은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비로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도시와 농촌의 불평등을 철폐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택동은 생산력의 발전이 없이도 계층간, 기능간의 불평등을 억제하여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Schwartz와 Schram같은 학자들도 인간의지와 혁명정신의 역활을 강조하는 모택동과 좌파의 주장은 역사발전에 있어서 생산력의 변화와 사회경제구조의 변화를 중시하는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즉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와 모순된다고 지적하였다. 마르크스와 레닌도 역사발전에서 인간의 역활을 강조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술과 경제의 발전과 같은 객관적인 조건을 더욱 중시했다고 주장하면서 모택동의 주의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된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Pfeffer와 같은 학자들은 모택동과 좌파의 주의주의와 유토피안이즘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서 일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해방을 목표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정신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고 옹호하였다. Pfeffer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계적 유물론자(mechanical materialist)도 아니며, 더구나 경제결정론자(economic determinist)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에서 인간의 역활을 강조했으며, 의식화된 인간의 행동이 물질적인 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택동과 좌파노선은 “마르크스와 레닌주의의 전통안에서 마르크스가 제기한 공산주의사회의 목표를 중국이라는 사회에서 실현하려 했던 혁명적인 발전전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택동과 좌파노선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정신을 계승했을 뿐만아니라 중국과 같은 비서구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는데 적합한 이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이 계속된다는 모택동의 주장은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하여 구체화 되지 못한 부분을 보완·발전시킨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와같이 모택동과 좌파노선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정신을 계승한 반면에 실용주의노선은 마르크시즘의 수정주의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Dittmer와 같은 학자에 의하면 유소기·등소평의 실용주의노선은 Bernstein, Kausky, Bukharin, Khruschev 등으로 이어지는 수정주의전통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지상의 목표로 설정하고 계급투쟁과 혁명의 종식을 선언한 실용주의노선은 마르크시즘과 사회주의에 대한 경제주의적 해석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택동과 좌파노선이 진정한 마르크시즘의 계승이냐, 또는 실용주의노선이 정당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느냐는 문제는 결국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다양하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과거에 서구학자들 사이에서 소위 ‘초기의 마르크스’와 ‘후기의 마르크스’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또한 Hegel철학과 서구의 휴머니즘의 전통을 반영한 마르크시즘(the Humanist Marx)과 영국의 정치경제학의 전통을 계승한 마르크시즘(the Scientific Marx)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무엇이 마르크시즘의 핵심이냐는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생산력과 생산관계, 역사발전에 있어서 경제적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 그리고 기술의 역활에 대한 논쟁은 과학기술의 몰가치성과 계급성에 관한 중국의 노선투쟁의 쟁점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쟁에 대하여 Gouldner는 마르크시즘 자체에 ‘두 개의 마르크시즘’(the two Marxisms)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 즉 마르크시즘 속에는 ‘과학적 마르크시즘’( scientific Marxism)과 ‘비판적 마르크시즘’(critical Marxism)이 공존·대립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Gouldner에 의하면 과학적 마르크시즘은 서구의 기술과 과학에 바탕을 둔 근대적 문명의 전통에서 출발한 것으로, 생산력의 발달에 대하여 낙관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으며 인간을 구조의 피조물로 보는 하부구조결정론적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마르크시즘은 자연히 생산력의 발전을 강조하며, 혁명의 궁극적인 목적도 생산력의 발전에 의한 ‘필요로부터 해방’과 근대화에 있다는 견해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마르크시즘은 서구의 인문주의적 전통을 계승하여 인간을 사회구조의 창조자로 보는 주의주의적 경향이 강하며, 사회변화를 비연속적·혁명적 비약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혁명과 역사의 목적에 대해서도 선험적 가치의 존중, 도덕성의 부활과 같은 인간해방과 인간성의 회복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개의 마르크시즘’은 마르크스 자신 속에 이미 공존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잠재적인 모순은 마르크시즘의 전승과정에서 표면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과학적 마르크시즘의 오류가 발견되고 그것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이 노출되자 비판적 마르크시즘이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낙후한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은 비판적 마르크시즘의 역활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마르크시즘이 간과한 부분, 즉 경제발전의 필요가 대두하면 다시금 과학적 마르크시즘에 의거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의 노선투쟁도 바로 마르크스 자신 속에서 존재했던 두 가지 상반되는 성향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으며, 중국의 사회적·경제적 현실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따라서 때로는 비판적 마르크시즘과 유사한 좌파노선이, 때로는 과학적 마르크시즘을 표방하는 실용주의노선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해 왔다고 하겠다.
(2) 확산이론과 종속이론
2차대전이후 서구학자들은 개발도상국가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관하여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 확산이론가들은 전통사회와 근대사회의 양분법을 이용하여 근대화를 설명하면서 서구학계의 주류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확산이론가들에 의하면 근대화는 점차로 전통적인 가치와 제도 등의 중요성이 감소되고 근대적인 가치와 제도의 역할이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가정한다. 특히 근대적인 산업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비합리적’인 전통사회의 가치와 행위규범을 근대적인 가치와 행위규범으로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근대화는 모든 사회와 모든 계층이 동시적으로 추진될 수는 없으며, 주로 서구의 영향을 받은 계층과 지역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확산된다는 것이다. 즉 근대화와 경제발전은 처음에는 서구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로 비서구사회에까지 확산되어 세계적인 현상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확산이론가들에 의하면 이와 같이 근대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현상도 나타났지만, 점차로 상호의존성이 증가되었기 때문에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는 공동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유주의적 국제경제학자들은 국제적 분업과 상호의존관계에 입각한 자유무역을 통하여 공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즉 개발도상국가는 선진국가로부터 발달된 과학기술과 자본을 도입하여 경제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확산이론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의 좌파노선은 근대화의 필연성(the inevitability of modernization)에 대한 일시적 저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가치와 태도를 부정하고 인간의 의지와 혁명정신을 강조하는 좌파노선은 확산이론가들이 생각하는 ‘근대화증후군’(modernization syndromes)과 배치되는 비합리적인 것이고, 따라서 일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분업과 호혜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협력, 또는 상이한 계층과 지역간의 협력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고려하지 않고 자급자족적인 자력갱생정책만을 강조하는 좌파노선은 비효율적인 경제정책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확산이론은 좌파노선보다는 실용주의노선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실용주의노선은 확산이론과 마찬가지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합리적 가치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실용주의파의 문호개방정책은 국제협력과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산이론과 같은 맥락을 가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실용주의파의 문호개방정책을 ‘양노철학(洋奴哲學)’의 반영이라고 비난하고 중국의 대외의존도를 극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좌파노선은 확산이론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종속이론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겠다. 물론 다양한 분석시각을 지니고 있는 종속이론과 좌파노선을 비교한다는 것은 양 쪽을 모두 단순화할 위험성이 있지만, 좌파노선과 일부 종속이론의 이데올로기적인 동류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첫째로, 종속이론가와 중국의 좌파이론가들은 개인이나 집단보다는 정치경제학적인 단위인 계급이나 사회구성체를 기본분석단위로 설정하고, 이들 사이의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구조적·역사적·총체적 맥락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둘째로, 종속이론가와 좌파이론가들은 계급이나 사회구성체간의 관계가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며, 이들 사이의 관계를 적대적·대립적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계급조화설이나 국제협력론은 기존하는 지배나 종속의 관계를 영구화하려는 이데올로기라고 배격한다. 이들은 피지배계급이나, 또는 주변국의 저발전은 지배계급이나 중심국과의 관계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지배계급이나 중심국과의 종속적 관계를 단절하는 사회구조의 총체적인 변혁이 없이는 주변국이나 피지배계급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세째로, 일부 종속이론가들은 가치지향적인 발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택동이나 좌파의 평등주의적 유토피안이즘과 유사하다. 이를테면 Seers에 의하면 기존의 발전이론은 경제의 양적인 성장을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은 빈곤과 실업, 불평등의 감소와 같은 발전의 질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Goulet와 같은 학자들도 대중의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향유할 수 있으며,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발전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발전의 목적성과 가치성을 강조하는 종속이론가들의 견해는 기술지향적인 현대문명에 대한 불신과 게릴라시대의 평등주의적 이상을 강조하는 모택동과 좌파노선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Ⅴ. 노선투쟁과 순환이론
Skinner와 Winckler는 1949년부터 1968년까지 중국의 농촌경제정책을 분석하여 좌파와 실용주의파의 노선투쟁과 정책변화에 대한 ‘순환모델’(cyclical model)을 제시한 바가 있다.
이들의 순환이론에 의하면 중국의 지도층내에는 이데올로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좌파와 경제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실용주의파가 있으며, 이들의 정책정향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적극성과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좌파의 견해가 당내에서 우세하게 되면, 자연히 객관적인 조건과 경제적 현실을 무시하는 정책정향이 대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좌파의 정책은 중국공산당정권이 추구하는 또다른 목표인 경제발전과 질서유지를 희생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되어 대중의 불만이 누적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내에서 실용주의파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경제적 목표와 대중의 물질적 욕구를 존중하는 정책정향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Skinner와 Winckler의 ‘순환이론’은 중국 지도층간의 노선투쟁과 정책변화, 그리고 권력투쟁을 간명하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순환이론’에 대한 이론(異論)과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Nathan과 같은 학자는 중국 지도층이 사회주의사회의 건설과 경제발전에 관하여 양극화되어 있다는 노선투쟁의 이론을 부정한다. Nathan에 의하면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나, 또는 농촌의 집단화와 사회주의 분배원칙을 추진한다는 점에 있어서 좌파와 실용주의파는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좌파와 실용주의파의 노선투쟁은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방법과 수단에 관한 사소한 견해차이에 불과하며, 그것이 권력투쟁에 의하여 과도하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Nathan에 의하면 중국의 정책변화는 지도층간의 이데올로기적인 차이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중국의 정책환경에 적응하려는 실험적이고 발전적인 정책정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Nathan과 Skinner 등은 중국정치에 대하여 전혀 상반되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이론이 중국의 정치과정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다른 논문에서 자세히 분석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Nathan과 Skinner의 이론이 가진 주요 문제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즉, Skinner와 Nathan은 모두 1949년 이후의 중국정치를 단일모델로 파악하려고 했다는 점에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Nathan의 경우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 중국의 정치과정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변질시켰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지적할 수 있다. 반면에 Skinner의 경우에는 문화혁명시기에 나타난 노선투쟁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문화혁명이전의 정치과정에서 발견될 수 있는 정책논쟁까지도 노선투쟁으로 간주함으로써 중국지도층내에 유지되고 있었던 동질성과 공동의식의 작용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사실 1950년대에는 Nathan이 지적한 것처럼 사회주의사회의 건설과 경제발전이라는 목표에 대하여 지도층간에 대체적인 합의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동일한 혁명경험을 가진 비슷한 세대의 지도자들의 동질성이 이와 같은 합의에 의한 정책결정을 용이하게 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국지도층내의 동질성이나 합의형성과정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혁명으로 파괴되거나 변질되었다. 특히 문화혁명과정에서 등장한 강청을 중심으로 하는 사인방(4人幇)은 과거의 중국지도층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집단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출현으로 지도층의 동질성은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더욱이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모택동의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고, 또한 사회주의사회의 건설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는 융통성이 상실됨에 따라서 정책논쟁은 점차로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복합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1950년대의 ‘실험적이고 발전적인 정책결정과정’의 특징은 사라지고 1960년대 이후에는 권력투쟁과 정책논쟁이 노선투쟁으로 발전되었을 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즉 노선투쟁은 지도층내에서 격화되었을 뿐만아니라 그것은 중국사회의 여러 계층의 상반되는 이해관계와 연결됨으로써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혁명 이후에는 Skinner와 Winckler가 지적한 두 개의 상호 대립되는 노선과 세력이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국의 정치과정에서 두 노선이 번갈아 등장하는 명백한 순환패턴(cyclical pattern)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정책변화의 패턴은 지도층간의 노선투쟁이 격렬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두 노선의 순환패턴은 불투명해졌던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좌파와 실용주의파의 정치적 교착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Lewis가 지적한 것처럼, 중국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으로 어느 한 정책정향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었고, 셋째로, 좌파와 실용주의파는 심각한 이데올로기적인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사회가 지닌 현실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정책선택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정책분야에 있어서는 타협과 공존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일대, 이공(一大, 二公)’의 인민공사제도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좌파의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좌파지도자들은 중국사회의 경제적인 현실여건에 비추어 볼 때 3급소유제와 노동에 따른 사회주의분배정책 등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문화혁명이후에 정책변화의 패턴은 지도층간의 권력투쟁과 노선투쟁이 격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노선과 세력의 정책이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여러가지 성향의 정책정향이 공존하거나 타협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좌파나 실용주의파의 노선과 정책이 번갈아 가면서 지배했다기 보다는 공존과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1975년에서 1978년까지는 화국봉(華國鋒), 엽검영(葉劍英) 등이 중심이 된 중도세력이 등장하여 좌파와 실용주의파의 미묘한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협과 공존의 정치는 모택동의 사망, 문화혁명 4인조의 몰락, 그리고 실용주의파의 복권이 이루어지면서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1978년의 3중전회이후에는 좌파와 실용주의파의 세력균형이 완전히 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실용주의파의 정치적 승리로 말미암아 중국의 정치과정에서 노선투쟁이 종결되고 1950년대와 같은 합의에 의한 정책결정과정이 부활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을까?
1982년 9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2전대회와 1983년 6월에 개최된 제6기 전인대에서 실용주의파는 당과 국가의 주요 정책결정기구로부터 좌파적인 세력을 배제하고 등소평·호요방·조자양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지도층내의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어느정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치적인 승리를 바탕으로 실용주의파는 전통적인 실용주의적 정책을 전면적으로 부활하고 좌파적인 정책을 배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농촌경제정책분야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좌파노선의 상징인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과거에 좌파로부터 수정주의적 정책이라고 맹렬한 비판을 받았던 농업생산책임제를 확대·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책분야에서 실용주의파는 권력투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선명한 개혁노선에서 후퇴하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즉, 1978년의 3중전회에서 실용주의파는 사상해방, 체제개혁, 문호개방정책을 표방하였지만, 그와 같은 3중전노선과 정책은 곧 광범위한 계층으로부터 반대와 혼란을 유발하게 되자 후퇴·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82년의 3중전 노선과는 달리, 타협과 조정을 모색하는 새로운 중국지도층의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와 같이 좌파의 정치적 몰락에도 불구하고 좌파노선의 영향력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970년대에 유소기나 등소평의 정치적 실각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노선과 정책의 영향력이 계속 남아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좌파나 실용주의노선과 정책은 모택동이나 등소평과 같은 소수의 지도층의 견해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사회의 여러 계층과 지역의 이해관계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좌파노선이나 실용주의노선을 대변하던 정치지도자가 사라진 후에도 장기간 그 영향력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택동과 같은 강력한 대변자를 상실한 좌파세력은 주요 정책결정과정에서 그들의 노선과 정책을 표출·집약하지는 못하겠지만 현대화과정에서 실용주의노선과 정책을 견제하는 일종의 반체제세력으로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예측된다.
Ⅵ. 결 론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모택동 이후에 실용주의파가 득세하면서 모택동의 ‘정치경제학’과 좌파노선은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계급투쟁과 혁명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유토피아적인 평등주의를 표방함으로써 모택동과 좌파는 중국의 경제발전과 현대화과업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1958년의 대약진운동이나 1966년의 문화혁명은 좌파노선의 오류였으며, 이와 같은 좌파노선으로 말미암아 대중은 심각한 정신적·물질적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좌파노선이 지배하던 시기는 중국공산당 역사에 있어서 ‘대재난(大災難)’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주의파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택동사후, 특히 1978년 3중전회이후 좌파의 정치·혁명우선주의와 날카롭게 대립되는 경제발전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좌파에 의하여 비난되었던 ‘수정주의적 정책’을 모두 부활·강화하였다.
즉 평등주의적인 분배정책을 폐지하고 능력에 의한 차등분배를 실시하였고, 소득의 불평등을 용인할 뿐만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생산의욕을 자극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실용주의체제에서는 경제발전과 현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계층과 지역에게 어느 정도의 특권을 부여했으며, 선진국가로부터 자본과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대중의 혁명의지보다는 과학기술을, 평등주의적 이상보다는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생활개선을, 그리고 계급투쟁보다는 조화와 협력을 강조하는 실용주의노선은 ‘과학적 마르크시즘’이나, 또는 서구의 확산이론의 시각과 유사한 점이 많으며, 반대로 좌파노선은 ‘비판적 마르크시즘’이나 종속이론의 정신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좌파노선과 실용주의노선이 번갈아 가면서 지배했던 중국공산당의 노선투쟁의 경험이 제3세계의 발전전략에 시사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또한 실용주의파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좌파노선이 경제발전의 퇴보와 ‘대재난’을 초래했다면 무엇때문에 좌파의 영향력이 그처럼 강성했으며, 모택동과 4인조가 없는 데도 좌파노선의 영향력이 지속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좌파노선과 실용주의노선의 장·단점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실용주의노선은 단기적 차원에서 본다면, 생산력의 증가와 경제발전의 문제에 있어서 좌파노선보다 효과적인 것 같다. 사실 실용주의파가 주장한 것처럼 좌파가 주도한 대약진운동이나 문화혁명은 경제성장이란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사에서 좌파가 지배적이었던 시기에는 경제적 침체와 퇴보가 있었고, 실용주의노선과 정책이 우선했던 시기에는 경제발전이 있었다는 실용주의파의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둘째로, 좌파노선은 생산력의 증가에는 기여하지 못했지만 배분적 불평등을 억제·감소하는 동시에 발전의 혜택을 여러 계층과 지역에 확산·공유하려는 정책을 산출하였다. 이를테면 도시의 지식인과 관료의 하방운동이라든가, 농촌합작의료제도, 혹은 지방공업의 발전정책 등으로 근대화와 고도성장정책을 추구하는 제3세계에서 흔히 발견되는 병폐, 즉 인구와 문화·복지시설의 도시집중화와 빈부의 격차현상을 중국에서는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좌파정책의 효과는 경제력의 절대적인 부족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질 때가 많았다. 따라서 실용주의파는 ‘선생산, 후분배’의 정책정향이 보다 현실적인 접근방법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셋째로, 등소평의 ‘흑묘, 백묘론’에서 나타난 것처럼 실용주의파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덜 강조하고 개인의 이익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비교적 다채로운 생활양식과 문화활동이 허용되지만, 적과 동지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사상의 통일을 강조하는 좌파노선은 생활양식과 문화활동의 획일화·단순화를 가져 왔다. 그러나 사상교육과 배분적 정의를 강조하는 좌파노선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사회주의체제의 정통성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았는데 비해서, 보다 자유로운 실용주의정권하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심의 위기’가 제기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좌파노선과 실용주의노선은 근대화과정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강조하는 정책정향도 다를 뿐만아니라 상이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좌파노선이나 실용주의노선의 어느 한쪽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되면 중국사회의 분열과 위기를 초래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좌파노선이 지배적일 때에는 ‘경제적 위기’가 문제가 되었고 실용주의노선이 지배적일 때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이 퇴조하면서 ‘신심의 위기’와 ‘불평등의 위기’가 제기되었다. 이와 같이 성격이 서로 다른 ‘위기’를 경험하는 동안에 중국의 지도자들은 두 노선의 보완적인 관계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두 노선의 공존과 타협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겠다.
즉 모택동과 좌파는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도 생산의 증가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동시에 주장하였으며, 실용주의파도 ‘사회주의 물질문명의 건설’과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을 동시에 강조한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교훈의 결과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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