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상 재상(宰相)의 변천
재상은 중국고대에 최고행정장관을 지칭하는 통칭이다. "재(宰)"는 주재(主宰)한다는 의미이다. 상(商)나라때 집안과 노예를 관리하는 관료였다; 주(周)나라때 국정을 장악한 태재(太宰)가 있었고, 귀족의 집안 일을 장악한 가재(家宰)도 있었으며, 한 읍의 사무를 관장하는 읍재(邑宰)도 있었는데, 실은 이미 관직의 통칭이 되었다. "상(相)"이라는 것은 원래 '상례지인(相禮之人)"으로 글자상 의미는 보좌(輔佐)한다는 의미이다. '재상'을 붙여쓰는 것은 <<한비자. 현학>>에서 처음 나온다. 다만, 요(遼)나라이후가 되어서야 정식 관명이 된다. 다른 황조에서는 관명과 직권의 범위가 서로 달랐다. 이름도 아주 번잡하게 많았는데, 통상적으로는 승상(丞相)과 같은 개념이다.
재상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춘추시대이다. 관중(管仲)은 바로 중국역사상 첫번째의 걸출한 재상이다. 전국시대가 되면서 재상의 직위를 각 제후국에서 모두 두게 된다.
진(秦)나라때, 재상의 정식 관명은 '승상'이었다. 어떤 때에는 좌우를 두었는데, 우승상이 더 높았다. '우승상', '좌승상'으로 불리웠다.
한(漢)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본떴다. 단지 상국(相國)의 지위가 좀더 높았을 뿐이다. 그리고 어사대부를 부직(副職)으로 했다. 한무제때, 유생을 승상으로 삼아 일상행정사무를 처리하게 한다. 그러나 정무의 중심이 내정(內廷)으로 옮아간다. 재상의 직권은 점차 상서대장관(尙書臺長官)의 수중으로 옮겨간다. 한애제는 승상을 대사도(大司徒)로 개명한다. 동한은 사도(司徒), 사공(司空), 태위(太尉)가 공동으로 집정한다. 한헌제때 다시 승상을 두고 조조가 맡는다.
위진남북조때, 승상 혹은 상국은 대부분 권신(權臣)이 스스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일종의 찬탈수단으로 되었다. 남북조의 제도는 여러번 바뀌어 황제가 정사를 의논하거나 기밀사항을 위임하는 자가 바로 재상이었다. 관명에는 중서감(中書監), 중서령(中書令), 시중(侍中), 상서령(尙書令), 복야(僕射) 혹은 장군(將軍)등등이 있다. 지위가 가장 높고, 권한이 가장 큰 자에게는 '녹상서사(祿尙書事)'가 붙었다.
수나라때는 삼성제(三省制)를 취한다. 삼성장관 내사성의 내사령(內史令), 문하성의 납언(納言), 상서성의 상서령(尙書令)이 모두 재상이다. 당나라는 내사성을 중서성으로 고치고, 내사령을 중서령으로 고친다. 납언은 시중으로 고친다. 당고종 이후,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붙은 자만이 바로 재상이다.
송나라는 동평장사(同平章事)가 재상의 정식 관명이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부(副)이다. 한나라때부터 당나라때까지 황제는 재상을 대하는 예를 점점 낮추었다. 송태조에 이르러는 "좌론(左論)"의 예를 폐지한다. 그리하여 재상의 지위가 많이 하락했다. 원풍때 제도를 바꾸어 재상 2명을 둔다. 수상(首相)은 "상서좌복야겸문하시랑(尙書左僕射兼門下侍郞)"이고 차상(次相)은 "상서우복야겸중서시랑(尙書右僕射兼中書侍郞)"이었다. 이외에 하시랑(下侍郞), 상서좌우승(尙書左右丞)이 부상(副相)이었다. 정화연간에는 좌복야를 "태재겸문하시랑(太宰兼門下侍郞)"으로 바꾼다. 우복야는 "소재겸중서시랑(少宰兼中書侍郞)"으로 바꾼다. 건염연간에는 다시 재상의 관명을 "상서좌우복야동중서문하평장사(尙書左右僕射同中書門下平章事)"로 바꾸고, 부상을 '참지정사'로 한다. 건도연간에는 다시 좌승상, 우승상으로 바꾼다.
송태조는 건국후에 계속 황권(皇權)을 강화하고, 상권(相權)을 분화 약화시킨다. 재상은 하나의 관명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의 집단이다. 황제를 제외한 최고지도층인 것이다. 송나라초기에는 "이부삼사제(二府三司制)"를 시행했다. 재상의 직권을 셋으로 나눈 것이다. 중앙에는 삼성(三省)을 두는데, 삼성 및 육부(六部)의 장관은 특별한 허가가 없으면 본사(本司)의 업무를 관리할 수 없었다. 즉, 한직(閑職)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권력은 "중서문하(中書門下)"라는 기구에 두었다. 이는 정사당(政事堂), 도당(都堂)이라고도 불렀다. 국가의 행정사무를 관리하는데, '동평장사'가 장관이었다. 많은 경우에는 중서, 문하 양성의 시랑이 많았고, 정원은 없었다. 이외에 참지정사는 부상인데, 행정권을 나누어 가졌다. 추밀원은 중앙최고군사기구이다. 장관은 추밀사(樞密使)이다. 정사당과 합쳐서 '이부(二府)'로 불리웠다. "삼사"는 호부(戶部), 염철(鹽鐵), 탁지(度支)로 재정을 주관하는데, 속칭 "계성(計省)"이었다. 장관은 "삼사사(三司使)"인데 속칭 "계상(計相)"이라 불렀다. 지위는 "이부"보다 약간 낮았다. 이부삼사는 각자 독립되고 서로 지휘관계가 없이 직접 황제에게 책임지는 최고보정(輔政)기관이었다.
송신종 원풍개혁으로 이부삼사제는 폐지된다. 좌,우복야가 재상이 된다. 좌복야는 문하시랑을 겸했고, 우복야는 중서시랑을 겸했다.
남송초기에 "좌,우복야가동평장서(左,右僕射加同平章事)"가 정재상(正宰相)이고 더이상 이성시랑을 겸직하지 않았다. 이성시랑은 참지정사로 바꿔 불렀다. 남송 효종이후, 정재상은 좌우승상이 되고, 부재상은 여전히 참지정사였다. 이외에 송녕종, 송이종은 모두 일찌기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와 "동평장군국중사(同平章軍國重事)"를 둔 적이 있다. 노신이나 권신이 맡았는데, 군국대사를 처리하여 지위가 재상보다 높았다.
원나라이후 중서성이 정무의 중추가 된다. 책임자인 중서령은 왕왕 황태자(皇太子)가 겸직했다. 그 아래에는 좌우승상을 두고, 다시 아래에 평장정사(平章政事)를 두었다. 부직은 좌우승(左右丞) 및 참지정사가 있었다.
명나라는 초기에는 중서성을 두고, 좌우승상을 둔다. 홍무13년(1380년), 명태조 주원장은 재상의 권력이 너무 커져서 황위찬탈의 위험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중서성을 폐지하고, 승상을 폐지한다. 황제가 친히 국정을 결정한다. 홍무13년에 좌승상 호유용(胡惟庸)을 '도모불궤(圖謀不軌)'로 주살한 후, 아예 이 기회를 틈타 재상제도를 없애버린다. 이는 1천여년간 지속되던 재상제도가 중국에서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상이 원래 가진 권력은 이, 호, 예, 병, 형, 공의 육부상서가 분담하였다. 이 육부상서는 군주가 직접 관할지휘하니, 군주의 권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재상제도가 마침내 폐지된 것이다. 나중에 황제는 번잡한 정사를 모두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두어 문서를 처리하게 하였다. 나중에 각(閣)직이 점점 중요하게 되었다. 대학사는 사실상의 재상이 되었는데, 보신(輔臣)이라고 불렀고, 그중에 제일 높은 자를 "수보(首輔)"라고 불렀다.
주원장이 승상제도를 폐지하여, 1천여년간 지속되어오던 제도가 이때 사라진다. 군권, 상권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봉건군주집권전제제도는 최고봉에 도달하게 된다. 당나라중기이후 군주집권(君主集權)과 분할상권(分割相權)의 전체적인 추세로 보면, 명나라때 최종적으로 재상제도를 폐지한 것이, 역시 재상제도의 필연적인 결말이었다. 권릭이 고도로 집중되자 주원장은 역사상 가장 바쁜 황제가 된다. 나중에 사서의 기록통계로 보면, 홍무19년 9월 14일에서 21일까지, 주원장이 처리한 각종 주장이 1660건이었으니, 평균 1일에 200여건을 처리한 것이다. 이는 아주 피로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곁에 있는 시종에게 "짐이 즉위한 이래로, 일찌기 근려자면하여 해가 뜨기 전에 조정에 나와서 포시이후에 궁으로 돌아간다. 밤에 누워도 편안히 자지 못했다"
청나라는 명나라제도를 승계한다. 옹정때는 군기처(軍機處)를 둔다. 내각은 일없는 부서가 된다. 군기대신이 사실상의 재상이 된다. 명청은 습관상 모두 대학사를 받으면 재상으로 대했다. 다만 정식 재상의 명분이 없었을 뿐이다.
모든 관직중에서 재상의 변화가 가장 많았다. 이는 군주에게 있어서 정무를 처리하는데 재상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으면서도, 재상의 권력이 너무 커져서 자기의 권력에 위해를 가할까봐 걱정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역사상의 명상(名相): 관중, 전단, 위염, 상앙, 여불위, 이사, 소하, 조참, 주발, 조조, 제갈량, 육손, 왕맹, 사안, 적인걸, 조보, 구준, 왕안석, 사마광, 문천상, 육수부, 우겸, 장거정, 장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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