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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상의 이적과 절경을 자랑하던 누대 - 백률사

지식창고지기 2009. 7. 8. 17:35

관세음보살상의 이적과 절경을 자랑하던 누대 - 백률사
 

     ⑴
  『삼국유사』 제 3권 「탑과 불상」조에 '백률사(栢栗寺)'가 나온다.
   계림의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부르는데, 산 남쪽에는 백률사가 있고 이 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한 구(軀) 있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영험이 꽤나 유명하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중국의 뛰어난 조각쟁이가 중생사의 불상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보살님이 일찍이 도리천 하늘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에 밟은 발자국이 돌 위에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 자취에 대해 혹은 말하기를 ‘관세음보살님이 부례랑을 구원해 돌아올 때의 발자국 흔적이라’고도 한다.

   효소왕이 즉위한 해(692년) 9월 7일, 대현(大玄) 사찬의 아들 부례랑(夫禮郞)을 받들어 화랑으로 삼았는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1천명이나 되었다. 무리들 중에서 안상(安常)과 가장 친한 사이였다. 부례랑은 화랑이 된 다음 해(693년) 늦봄에 화랑무리를 거느리고 금란 지방(지금의 강원도 통천 지방)으로 유람 길을 떠났다.    일행이 북쪽의 국경지역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오랑캐족들이 습격하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통에 부례랑은 오랑캐들에게 붙들려가고, 부하들은 모두 우두머리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안상만은 홀로 부례랑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다가, 화랑이 붙잡혀가는 뒤를 추격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3월 11일이었다.
   얼마 지난 뒤에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선대 임금(신문왕)이 신령한 젓대[萬波息笛]를 얻어서 이 몸에게 전하여, 지금은 거문고[玄琴]와 함께 궁중 천존고 고방에 간직하였는데, 국선이 어째서 도적에게 붙잡혀 갔는지 모르겠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고?”
하였다. 이 때 향기를 뿜는 상스러운 구름이 천존고 고방을 덮었다. 임금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더니
   “고방 속에 있던 만파식적과 거문고 두 보물이 없어졌습니다.”
고 보고하였다. 이에 왕이 탄식하기를
   “내가 얼마나 덕이 없기에 지난 번에는 국선을 잃었고 이번에는 또 만파식적과 거문고를 잃게 되었는고!”하면서 고방 맡은 관리 김정고 등 다섯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옥에 가두었다. 시름에 빠졌던 임금은 깊이 생각한 뒤에, 4월에는 전국에 현상을 내걸어
   “만파식적과 거문고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한 해 납세를 상으로 준다.”
하였다.

   한편 부례랑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날마다 백률사 관세음보살상 앞에 불공을 드리면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기도를 계속하던 5월 보름날 이상한 기미에 눈을 들어 보살님을 바라보니 향탁 위에 젓대와 가야금이 얹혀 있지 않은가!
   거기다가 보살님 뒤에서 아들 부례랑과 안상이 걸어 나오지 않는가! 꿈인가 생신가 싶어 양친이 넘어질 듯이 기뻐하며 아들을 붙들고
   “너가 분명 내 아들이냐?”하니 “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오랑캐들에게 붙잡혀가서 대도구라집 소와 말을 먹이는 목동이 되어, 대오라니 들판에서 짐승을 먹이는데, 갑자기 생김새와 행동이 정중한 스님이 나타나더니 ‘고향 생각이 나지?’하고 묻길래 저도 모르게 절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면서 ‘임금님과 부모님 그립기가 한량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스님이 말하기를 ‘그러면 나를 따라 오너라’하면서 데리고 해변으로 나갔는데, 바닷가에서 안상을 만났습니다. 그는 젓대를 툭 치더니 두 쪽으로 갈라서 우리 두 사람에게 주면서 각기 한 짝씩 타라 하고 자신은 거문고를 타더니 두둥실 떠서는 잠시 만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 하였다. 기쁘고 반가와 얼싸안고, 자세한 사정을 궁궐에 계시는 임금님에게 급히 보고드렸더니, 왕이 깜짝 놀라 부례랑을 맞아 들였는데, 낭과 안상은 젓대와 가야금을 고이 모셔들고 들어갔다.
   왕은 잃었던 화랑과 만파식적을 한꺼번에 찾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었다. 50냥쭝이나 되는 금과 은을 부어만든 그릇 두 벌과 누비가사 다섯 벌, 비단 3천 필, 밭 1만 경을 백률사에 시주하여 보살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보답하였다. 또한 나라 안에 죄 지은 이들을 크게 용서하여 주고 벼슬아치들에게는 3급씩 계급을 올려주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 납세를 면제하였으며, 백률사 주지를 봉성사로 옮겼다.
   부례랑을 대각간으로 봉하고, 그의 아버지 대현 아찬을 태대각간으로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을 사량부의 경정궁주로 삼고, 안상법사를 대통으로 삼았으며, 고방 맡았던 관리 다섯 명을 모두 석방함과 동시에 벼슬 다섯 급씩을 올려주었다.
   모두가 좋아하며 즐거워하였는데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다름아니라 6월 12일에 살별인 혜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는 서쪽에 나타나므로, 천문 맡은 관리가 아뢰기를
   “만파식적과 거문고가 이룬 공적에 대한 작위를 봉하지 않아 이런 불길한 변고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므로 이때서야 만파식적의 이름을 높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더니 그제서야 혜성이 사라졌다.
   그 뒤에도 백률사 관세음보살상으로 말미암은 이적이 많으나 사연이 너무 복잡하여 쓰지 않는다고 일연스님은 적었다.

   경주 벌판의 북쪽 야트막한 산이 금강산ㆍ금강령임은 신라 때부터 부른 이름이다. 국립지리원이 펴낸 최신 지도(1994년 7월 인쇄. 2만 5천분의 1)에 보면, '소금강산'은 높이 142.6m. 백률사 뒤 등성이는 178m로 표기되어 있다.
   경주 평지의 동ㆍ남ㆍ서쪽에는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지만 북쪽은 가장 약하고 허한 편이다. 허약한 곳은 이름이라도 강하게 붙여야 다른 곳과 균형이 맞지 않겠는가!
   그래서 강한 이름을 붙인 것이 금강(金剛)인 것이다. 백두 대간의 중허리에 자리잡은 강원도의 금강산이다 돌들이 뼈만 남은 것같이 단단하게 얽힌 모습이라 생김새대로 표현하여 금강산이라 한 것이지만….
   그 산과 구분하기 위하여 경주 금강산은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고도 부른다.

     ⑵
   김사경(金思敬)의 백률사 서루기(栢栗寺 西樓記)에는 백률사의 빼어난 풍광을 기록하고 세월 속에 허물어져 있는 것을 중창하게 된 경위를 자세히 적었으니

   '경주의 누각 가운데 백률사 서루(樓)가 가장 뛰어나다. 정지상 선배가 시를 지어 그 아름다움을 극찬한 바 있다. 창건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많이 허물어져 주위 경치와 어울리지 않더니, 윤승순(尹承順)이 부윤으로 온 다음 해(1377년), 왜구는 이미 물러가고 한가로운지라 주지 견해(見海)가 부수 심우경(沈于慶)과 더불어 중창하기로 의논하고, 김정미, 안일, 김군자에게 명하여 수졸을 거느리고 공사를 감독하여 일을 마쳤다. 지금 다시 올라 바라보니 전날보다 배나 좋아졌다. 이 절은 향축을 받드는 곳이라 사대부가 항상 드나드는 곳이며, 더구나 신라 고도의 장관을 다 이 누에서 내려다볼 수 있으니, 옛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누가 이 새로운 누에 올라 함께 사방을 바라보지 않겠는가! 절집을 수축하는 일은 부처님에게서 복을 받는 일이지만 이는 윤 부윤의 본 뜻이 아니다.'

했으니, 이 글은 고려 말인 1377년 경의 형편을 적은 것이다. (『동경통지』, 『경주시지』 참조)
   정지상(鄭智常 ; ?~1135. 고려 인종 때의 시인ㆍ문신)의 시에,

   새벽에 일어나 다락맡 발을 걷고 하늘을 바라보니,
   다락 밑이 곧 계림이라. 기이하고 괴이함을 헤아릴 수 없구나.
   싱싱한 나무 뿜는 기운 골마다 자욱하고 거리는 바둑판 같도다.
   흰 구름 동산에 날고 푸른 물 서쪽 개로 달리도다.
   우뚝우뚝 황금 절집 해돋는 아침에 서로 바라보며
   월성 안에 삼삼히 벌려진 꽃들과 대나무 이제는 주인 없어.
   속절없이 남은 옛 풍류 한 곡조 높은 소리로 춤출 뿐
   우뚝한 최고운, 문장으로 중국을 진동해,
   실올같이 갔다가 비단 옷으로 고향에 돌아오니
   나이 이십구도 못되어 임금께 바른 일 건의했건만, 당시에 취할 바 안 되었다네.
   또한 설총 선생 있어 용과 범처럼 방언으로 오경을 강의하여, 학자들이 동쪽 노나라로 겨누었네.
   세속에서 부르기를 두 군자 이름을 같이하기 이백과 두보에 견주었네.
   맑은 바람결에 글 읊고 휘파람하니 묵은 병 낫는 듯
   들어와 부처님 뵈옵고 빈 마루에 향 한번 태우고,
   머리 조아려 임금님 축수하니
   만년토록 히느님 도움 받으소서.
   상상하니 묘법은 밝은 거울 이내 마음 알으신 지?
   민자 샘에 차 달이니
   사발 위에 구름이 떠오르네.
   옛 시 세 번을 거듭 외니, 온 벽에 구슬 뱉았는 듯
   즐거울 손 근심할 바 없어, 이 즐거움 얼마나 태고스러운가?
   일산을 날려 솔문을 내려오니, 솔문에 해가 한낮이네.

라고 하였으니, 몽고병란(1238년)으로 잿더미가 되기 전의 경주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석재 박효수의 시에도 백률사 서루에 대한 정경을 그리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내 걸음이 좋은 때를 만나서
   봄 산에 들리는 것 두견새 소리.
   푸른 솔 그늘에서 길 비켜라 외치고
   종을 쳐서 구름 절 문 열었네.
   보타락가산(관음보살이 거처한다는 산) 올랐는 듯, 보배 구슬이 은하수에 솟은 듯,
   갖가지 꽃 철마다 피어 향기롭기 언제나 화창한 봄,
   있는 스님 오직 둘셋, 누구가 향화의 주인인고.
   서루에 올라 바라보니, 처마와 도리 날고 춤추는 듯,
   남으로 탁 트여 반듯한 거리마다 집들이 늘어섰네.
   문물이 옛 신라 땅이라 황금 절집이 사람 집과 섞여, 세는 중 열에 아홉이네.
   성스러운 자취 범상한 발자취와 섞여, 길손이 다투어 구경하네.
   제일 가는 저택, 구슬로 된 궁궐들, 난리(몽고병란) 뒤에 돌밭으로 되었네.
   마루에 백의관음 있어 신묘한 조화 둘도 짝이 없어
   거문고와 만파식적 구름에 떠온 지난 일이 벽 뒤에 벌렸도다.
   병란을 겁내어 예 와서 빌자 전쟁이 곧 감추어져
   예 와서 빌자 어리석고 노둔한 데 총명을 주어 마음의 소원대로 응해.
   넓은 문 막히지 않아 시원시원한 단 이슬 많아
   뿌려진 다음 번열의 고뇌 가시어.
   내 피로서 기름지어 이 몸으로 믿음의 향불 되어
   다만 원하옵기 우리 임금 만복을 누리시어 삼한이 태평으로 향해 행운을 타고 비운은 털어,
   만방에서 어린애처럼 연모하여 와 우러러 젖 빨 듯이
   억세나 약하나 먹히고 뱉아짐이 없이 자연스레 좋은 시대 열려
   세상이 복희씨 옛날로 돌아가도록 하소서….
   이를 생각하며 밤 깊이 앉았으니 달이 마루 한가운데 오르도다.

이 글은 몽고란으로 불탄 뒤의 형편을 읊은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도 경주 남산인 금오산에 7년간(1465∼1471년) 거주하면서 경주에 대한 시를 지은 것이 많다.
   그 가운데 백률사에 관한 것이 2편 있다.
  「백률사 누각에 올라가 바라보면서」라는 제목의 시와, 「백률사 옥판 스님」이라는 시에

   느릅나무 높고 낮게 흰 안개를 뿜는데
   인가와 절집이 이웃하여 잇대 있구나.
   물소리 서쪽으로 거슬러 시조(市朝)가 변하였고
   산 형세는 북쪽이 낮아 문물을 옮겼다네.
   석탈해 사당 가에 속절없이 달만 있고
   경애왕의 능 가에는 저절로 밭이 없다.
   유유한 성패가 모두 이와 같으니
   진(秦)나라 앞서 주(周)나라는 8백 년이었다네.

   그는 또 「백률사 옥판 스님」제목으로 당시의 이 절 정경을 잡힐 듯이 그리고 있으니

   내 들으니 옥판 스님께서는
   모든 불법 요체를 잘도 설법하시어
   사람마다 참선의 희열을 느낀다더니
   도는 과연 기약하기 멀지 않구나!
   백률사는 성 북쪽에 있다 하지만
   돌 길이 어찌나 멀기도 한지?
   솔 문은 진실로 깨끗하여서
   더운 번뇌 오자마자 사라지누나.
   남쪽나라 여름철 오월 달,
   무더워 땅기운도 타오르누나.
   여나믄 사람과 벗을 맺아서
   청정함에 참여하여 시끄러움 벗어나네.
   스님 말이 티끌 세상 사람들은
   색미(色味)를 향기로 사는다 하네.
   만약에 이 괴로움 떠나려 하면
   먼저 우리 절집에 모여야 한다네.
   만 가지로 그대 몸의 병을 찾아서
   치료하는 방편을 나누어 준다네.
   한 알이면 오랜 병을 낮게 하구요.
   두 알이면 가슴앓이 풀어준다네.
   세 알은 다 먹을 수 없다 하지만
   겨드랑이 바람이 솔솔 일음 깨달았네.
   또 오래 단련하고 공 쌓은 어린애 있어
   우리 스님 가슴이 쓸쓸함을 도와주네.
   관리가 (스님의 도) 드높음을 표준으로 삼으니,
   잿빛 옷 자락에 누른 소리개가 도누나.
   양념으로 음식을 조리한 지 때가 이미 오래되어,
   만물을 구성하는 법미(法味)가 향기롭고 넉넉하네.
   여럿 모여 절하고 믿고 받아들인다면
   지혜 칼로 슬픈 불 타는 것을 끊어주리.
   배불러 상방 풍죽루에 누었으니
   오경에 지는 달이 산허리로 가라앉네.
   늙은 스님께옵서 방편 많음을 비로소 깨달으니
   뒷날에 부름 받기를 간절히 바람이라.
     (『매월당집』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