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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연기사상과 황금 분할 조형 - 석굴암

지식창고지기 2009. 7. 8. 17:23

불교의 연기사상과 황금 분할 조형 - 석굴암
 

     ⑴
   1995년 12월 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대한민국에 있는 3가지 문화 유산을 인류가 남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는 경주의 석굴암과 불국사,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과 경판고, 서울의 종묘 등이다. 우리 나라 역사에 있어서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 유산이 각각 하나씩이다. 100여 나라의 400여 문화유산 목록에 포함된 것이다.
   이 숫자는 지금까지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 수보다 적은 것이다. 1806년에 제정되어 해마다 5명씩 수여한 노벨상 수상자는 줄잡아 500여 명이다.
   위의 3가지 문화 유산은 이전부터 있던 것이었지만, 이제까지 정부 당국에서 관심이 소홀했던 탓도 있고, 국민들의 문화의식이 선진화되지 못한 점도 있어서 등록 신청이 늦어졌을 따름이다. 거기다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위원들인지라 이것저것 조사하고 판정하는데 오랜 시일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UN 산하 유네스코가 인정했으니, 우리들은 세계 인류가 남긴 귀중한 문화 유산을 지닌 민족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뿐더러, 대상을 바로 알고 보존해야 할 의무도 있다.

   경주에 여행 오거나 관광하는 사람들이라면 의례히 불국사, 석굴암은 들러본다. 그러나 보고 간다는 데만 주안점을 두지 말고, 그 우수함을 알고 진수를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경주 사람들이야말로 ‘전번에 가봤는데…’ 할 것이 아니라, 자주 마주쳐 보고 참된 가치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도 자주 만나야 정이 나듯이….
   차제에 불국사와 석굴암 당국에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경주 시민들은 자주 드나들 수 있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경주 석굴암이 어떤 것이길래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세계 인류가 남긴 위대한 문화 유산이란 말인가?

   불교 사원(절)은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전파되었다.
   인도는 더운 지방이라서 스님들이 수도하는 도량(道場)으로 시원하고 조용한 것을 택한 것이 석굴이고, 그 안에 불탑과 불상을 조각하여 모시고 예배하면서 한 쪽에는 수도자들이 기거하는 굴이 있었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 사원이나 중국 윈강 지방의 석굴들은 규모가 대단히 크고 많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윈강 석굴의 어떤 불상은 높이가 15m 넘는 것도 있고, 10m가 넘는 것은 수두룩한데,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은 3.4m에 불과하다.
   석굴의 수량으로 비교하자면, 중국은 몇 백m에서 몇 km에 걸쳐,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석굴 사원이 즐비한 것에 비하면, 석굴암은 달랑 굴 하나 뿐이다. 중국이나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인도, 중국의 석굴 사원은 하루 종일 봐도 다 못 보겠던데 석굴암은 뭐 볼게 있어야지.”
라고 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것이나 많고 적은 것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이 문화 현상이나 예술품이 아닌가.
   석굴암은 다른 나라 석굴 사원과는 축조 방법이 다르다. 그저 다른 게 아니라 독특한 방법으로 쌓았다.
   우선 돌의 성질이 다르다. 칼로 파고 새길 수 있는 사암(砂岩)을 깎아 만든 인도, 중국의 석굴에 비해 석굴암은 단단한 화강암(花剛岩)을 깨뜨려 정(釘)으로 쪼고 다듬어 쌓고, 새겨서 만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정(釘)이 닳았겠으며, 정이라는 쇠를 다루는 기술 또한 얼마나 발달했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본다면 크기로만 비교가 되겠는가?
   조형 디자인을 보면 굴의 앞쪽은 네모 났고, 본존불을 안치한 중심되는 굴은 둥글다. 무심히 본다면 그저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것은 당시의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생각을 시각화시킨 것이다.
   현상은 작지만 얼마나 크고 넓은 것을 표현한 것인가? 이런데도 작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⑵
   지금의 석굴암은 유리로 된 칸막이 앞쪽에서만 관람할 수밖에 없어 한정된 일부분만 보는 것이니, 앞 못보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과 별 다름이 없다.
   숲을 보자면 바깥에서 총체적으로 봐야 하듯이 지금의 석굴암 모습으로 되기까지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신라 35대 경덕왕 때 김대성이 국왕의 명을 받들어 왕 10년(751)에 불국사와 석굴사(석굴암) 창건을 담당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혜공왕 10년(774)에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맡아 완성하였으니 25년 넘게 걸려 건립된 것이다.
   그후에는 기록에 나타나는 곳이 없고, 기림사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고 있다.
   조선 때 우담 정시한(鄭時翰)이 석굴암을 보고 쓴 글이 산중일기에 남아있다.

   '무진년(1688) 5월 15일. 뒷쪽 봉우리에 오르니 자못 험하고 가파르매 힘을 다해 십여 리를 가서 고개를 넘어 1리쯤 내려가니 석굴암에 이르렀다. 명해 스님이 맞아 들여 자리에 잠깐 앉았다. 석굴에 올라 보니 모두 사람이 공들여 만든 것이다. 돌문 밖 양쪽은 네다섯 개의 큰 바위에 불상을 남김없이 조각하였는데, 그 기이하고 교묘함이 하늘이 이룬 듯하다. 돌문은 무지개 모양으로 돌을 다듬었다. 그 안에 거대한 돌 부처님이 있으니, 살아 있는 듯 엄연하다. 좌대석은 반듯하고 기괴하다. 굴 위의 뚜껑 돌[蓋石]과 여러 돌들은 둥글고 반듯하게 서 있어, 하나도 기울어지거나 어긋난 것이 없다. 줄지어 서 있는 불상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하지만, 기괴한 모습을 표현할 수 없다. 이러한 기이한 모습은 보기 드문 것이다. 완상(翫賞)을 하며 오랫동안 머물다가 내려와 암자에서 잤다.'

   17세기 말까지도 멀쩡하던 석굴암이 조선 말기에 오면서 피폐해지고, 일본의 침략이 곳곳에 미치면서 석굴 안의 유물들도 도난을 당하였다.
   1900년대 초 굴 속에 있던 대리석 5층 소형 석탑을 일본 어느 고관이 가져간 것을 비롯해, 굴 속의 또 작은 굴방인 감실(龕室) 안에 있던 2구의 불상도 도난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 소재는 알 길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우편배달부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떠벌이고는 해체하여 경성으로 옮기려다가 제자리에 복원하였다.
   1913∼15년까지의 1차, 1917년의 2차 공사, 1920∼23년의 3차 공사로 겉 모양은 산뜻하게 정리되었지만, 내면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가지 예를 들면 굴 밑에 흐르는 지하수를 차단한 것과 궁륭형 돔의 둘레를 시멘트로 발라 한 덩어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여물게 만들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때까지는 굴 속에 들어온 수증기가 지하수의 낮은 온도로 말미암아 바닥에 이슬 방울이 되거나 돌 틈 사이로 빠져 석굴을 감싼 자갈과 흙 사이로 자연스레 스며들던 것을 콘크리트로 차단시켜 버렸으니 그 수증기가 어디로 가겠는가?
   결국 화강암 표면에 이슬되어 맺힐 수밖에. 이것을 결로 현상(結露現狀)이라고 하는데, 이런 현상이 반복되니 섬세하게 조각된 암석에 풍화작용이 가속화될 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상태로는 1200여 년간 끄떡없던 조각상이 결단날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므로 1961년에서 64년까지 대대적인 수리를 하게 된 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모습이다.
   60년대 우리 나라 여러 분야가 다 그랬듯이 석굴암 보수도 지금 보면 미흡한 점이 많지만, 그런 대로 최선을 다하여 보수를 한 탓에 더는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
   궁륭형(공을 반 자른 둥근 모양)의 돌 바깥에 철벽같이 발라둔 시멘트를 제거하지 못하고 그 바깥에 1m 정도의 공간을 비워두고 새로운 궁륭형 돔을 만들었다. 그 공간에다가는 석굴 속의 온도·습도를 조절하는 기구를 설치하였다.
   네모난 전실에는 나무 집을 지어 외부와 차단하여 일반 관람객의 출입을 통제한 것이다. 그래서 앞쪽에 대형 유리판을 통해서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다 보니 자연 광선이 차단되어 어두워졌다.
   어두운 것을 밝게 하려니 인공 조명, 즉 전등불로 굴 내부를 비출 수밖에 없었다.
   본래는 자연 광선에 의한 경배의 대상이 인위적으로 설치된 조명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창건 당시의 의도, 또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진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본존불 모습이다.
   본존불의 위치를 굴 중심에서 조금 뒤쪽으로 물러난 자리에 안치했는데, 그것이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게 계획된 것이었다.
   앞쪽은 밝고 뒤쪽은 어둡기 때문에 어두운 것은 실제보다 뒤로 물러나 보이고, 밝은 것은 튀어 나와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이 굴에 적용한 것이다. 자연광을 받았을 때의 모습을 현진건 님은 이렇게 표현했다.

   '한번 문 안으로 들어서매 석련대(石蓮臺) 위에 올라앉으신 석가의 석상은 그 의젓하고도 봄바람이 도는 듯한 화(和)한 얼굴이 저절로 보는 이의 불심을 불러일으킨다. 한 군데 빈 곳 없고 빠진데 없고 어디까지나 원만하고 수려한 얼굴, 알맞게 벌어진 어깨, 뚜렷이 내민 가슴, 통통하고도 점잖은 두 팔의 곡선미, 장중한 그 모양은 정말 천추에 빼어난 걸작이라 하겠다.'

     ⑶
    “옆에 있는 신문지 한 장을 집으십시오. 큰 종이든 작은 종이든 관계없습니다. 한 변은 길고 한 변은 짧지요? 길이가 짧은 쪽에 맞추어 대각선으로 접으십시오. 정사각형으로 접어지고 한 쪽이 좀 남지요? 크기가 꼭 같은 다른 신문지의 긴 변에 접어진 대각선을 맞추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길이가 꼭 같지 않습니까? 이 비례를 √2라고 합니다. 쉬운 원리이지만 서양식 표기법으로 적다가 보니 어려운 것 같아 보일 따름입니다.    바로 이것이 석굴암 석굴 제작에 응용된 가로:세로 비례의 기본입니다. 가로:세로=1:√2”

   인간이 가장 아름답게 느끼는 가로:세로의 비율 「황금분할(黃金分割) 1:1.618」의 기본인 1:√2(루트 2라고 읽고 그 값의 1.414인 기하학의 기본원리)의 비례를 석굴에 응용한 것이다.
   석굴의 조형에 이용되었지만, 감추어져 있던 이 사실을 찾아낸 사람은 일본인 건축기사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였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촉탁으로 1942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기까지 우리 나라의 석굴암, 불국사를 비롯하여 많은 고대 건축의 평면 구성을 연구하였고, 비례 구성을 탐색한 사람이었다.
   그 후 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인 강우방(姜友邦)이 요네다(米田)의 실측 조사를 바탕으로 더욱 깊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석굴 조형 계획의 기본은 다음과 같은 기초적인 평면기하학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 12당척(唐尺)을 기본 단위로 삼았다.
      ㉯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을 사용하였다(1:√2).
      ㉰ 정3각형과 그 꼭지점에서 내린 수선(垂선)을 사용하였다.
      ㉱ 원(圓)으로 된 평면과 공모양의 입체를 사용하였다.
      ㉲ 6각형과 8각형을 사용하였다.

   위와 같은 기본 위에 석굴의 구성과 본존 대좌 평면의 구성이 다함께 정사각형의 한 변을 기본으로 하고, 그 대각선을 전개하여 정8각형, 원형을 만든 전체적인 비례 구성상 극히 미묘한 계획법 임을 밝혔다.
   그림을 봐 가면서 이야기를 펼쳐 나가겠다.

   ①, 본존불 대좌 좌우 중심(앞쪽)에서 12당척을 기본으로, 즉 반지름으로 삼아 원을 그린 것이 주실(主室)의 밑바닥이다. 또 굴 입구의 문 너비는 12당척의 기본으로 되어있으니, 12당척을 반지름으로 한 원에 내접하는 정6각형의 한 변이 된다.
   ②, 굴 바닥에서 벽면의 천부상, 보살상, 나한상 등의 위 부분까지가 12당척이다.
   ③, 그러므로 ①과 ②의 길이는 1:1이고 그 정4각형의 대각선을 세운 길이가 돔(dome)을 제외한 감실 위 부분까지의 길이에 합치하는 √2이다. 이 길이는 또한 본존불의 전체 높이에 해당된다.
   ④, 원통형으로 된 위의 돔 중심은 바로 본존불의 머리 위에 해당된다. 머리 위의 기준점에서 반원을 그린 것이 바로 둥근 천장인 돔이다.
   ⑤, 벽면의 ③번 길이(굴 바닥에서 감실 위 부분까지의 높이)를 다시 1로 잡았을 때 그 √2가 바로 굴의 지름이 되는 기막히게 묘한 비례인 것이다.
   ⑥, 굴의 전체 높이는 1(12당척 기준)+√2(1.414)가 된다.

   여러 가지로 좀 머리를 써 생각해야 되게 전개를 했는데 실제로는 더 깊고 복잡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필자도 아는 것이 부족한 때문에 이제까지 이야기를 간추리면, 석굴암의 기본구조는 계속하여 1:√2라는 순환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1:1인 정4각형의 대각선(√2)으로 직사각형을 그린 다음, √2를 다시 1로 삼아 √2되게 그리면 처음 길이의 2배가 되는 순환이 계속된다.
   돌아가는 순환성은 바로 우주의 근본 원리이자 불교의 연기사상(緣起思想)이기도 하다. 이 불교의 연기사상을 형상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기하학의 기본인 √2의 원리를 이용하였음은 과연 뛰어난 착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석굴암 석굴은 수학, 기하학, 건축, 종교, 예술 등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실현물이라 할 수 있다.

     ⑷
   본존불 이마의 백호(白毫)에서부터 불그레한 빛이 물들어 반이나 감은 눈자위며 뺨과 콧등, 입술, 턱, 목으로 내려오다가 가슴팍이 붉어질 때는 심장이 뛰는 것 같다.
   팔뚝에 핏기가 돌아 손가락 마디를 거쳐 손톱이 붉어질 때는 온 몸에 생기(生氣)가 넘쳐흐른다.
   잠시 동안 ―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刹那)―의 생기(生氣)는 시나브로 붉은 기(氣)가 가시며 차츰차츰 차가운 화강암(花崗岩)의 질감(質感)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동해에서 해가 뜰 때 석굴암 부처님에게서 일어나는 신비한 현상이다.
   지금은 굴 앞에 문을 달고 벽을 만들었으니 햇살이 바로 비취지 않아 이런 현상을 볼 수 없지만 30여 년전까지는 아침마다 생기가 도는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석굴암에 가 본 것은 단기 4288년, 이른바 쌍8년도 였다. 서기로 1955년이었지만 당시는 단기를 공용(公用) 연호로 쓸 때였다.
   휴전으로 6.25사변의 총소리는 멎었으나 경제적으로 무척 살기 어렵던 그 때, 나는 국민학교 6학년이었고, 석굴암에는 수학여행을 갔다.
   전촌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쌀 한 되 자루에 넣어 메고, 삶은 달걀, 밤, 찐쌀, 눈깔사탕 등을 보자기에 싸고, 돈 몇 푼 가지고 버스에 탔다.
   웃범실 들머리 신작로에서 내린 우리는 뛰는 가슴만큼이나 우쭐거리며 산마루를 타고 올라 해거름에 도착한 곳은 기와집으로 된 상점 겸 여관이었는데, 석굴암 바로 아래였다.
   메고 온 자루의 쌀을 모아 상점 주인에게 건네주고 그 쌀로 지은 밥을 먹고는 설레는 기분에 잠도 제대로 못 잔 아침. 석굴 밑 축대 돌 홈에서 새어 나오는 감로수를 마신 기억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물 맛이다.
   이곳 돌 홈에는 날마다 중 혼자서 먹을 만치 쌀이 나왔는데 어떤 새로 온 중이, 좀 더 나오라고 꼬챙이로 쑤셨더니 나오라는 쌀은 안 나오고 물이 새나오더라는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는 것이었다.
   또 가난한 김대성이 어려서 죽었는데, 다른 부자 귀족 집에 다시 태어났고, 그는 청년 시절에 곰을 사냥하였는데, 꿈에 곰이 나타나는 바람에 혼겁(魂怯)을 하고는 새 사람이 되어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신라의 재상이 되었다는 이야기. 재상이 되어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었다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떠오르는 타래 중에는 비록 조각이었지만, 굴 앞에는 머리에 괴상한 치장을 한 사람이 이상한 옷을 입고 손에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서 있는데, 특히 앞으로 툭 튀어나온 두 장수는 몹시 무섭게 보였다. 윗통을 드러낸 가슴과 팔뚝에 알통이 밴 우락부락한 장수가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쥔 손을 치켜들고 있는 모습! 배꼽과 자지는 가리고 정강이 밑은 들어내어 신도 안 신은 거 보면 잘 사는 양반은 아닌, 이웃집 아저씨 같구나 싶어 무섭다가도 마음은 놓였다.
   아랫도리에 걸친 옷자락을 들어올려 사타구니를 들여다보면? ‘후후후….
   '우리 같은 고추 자지는 아닐 거고. 우예 생겼을꼬?’
   ‘예- 이 놈!’
‘아이고 겁나라! 부처님요. 잘 못 했심더. 예? 예! 더러분 마음 내뿌리고 부처님한테 가 볼께요.’
하면서 굴 앞에 서 보니 나한테 턱 와 닿던 돌부처!
   사람이 만든 건 아니고 본디부터 이 자리에 있던 거다. 산에 나무가 있고 바위가 있듯이. 그야말로 숨도 크게 못 쉬고 굴 속을 돌아 나온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1년에 한 두번 멀리서 온 친척들과 같이 석굴암에 가곤 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그러다가 1962년에는 월성군청에 근무하는 친구가 석굴암 수리공사 때문에 그곳에서 붙박이로 있게 되었는지라, 나도 자주 석굴암에 가서 먹고 자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으니, 이제 생각하면 다행하고도 감지덕지한 인연이었다.

   그때 새벽 일찍 일어나 시원한 감로수 한 바가지 퍼마시고, 산등성이 아래로 내려 깔린 범실, 노루미기, 시무내, 어일, 둘산, 갓밑들, 큰거랑, 용담, 탑, 대밑, 무제터, 동해 바다를 바라 보다가 바다 끝이 불그레해지면 굴 앞쪽 본존불을 비스듬히 바라볼 만한 자리에 나 혼자 선다.
   희끄므리하던 하늘빛이 주황색으로 되었다가 차츰 다홍빛으로 되어가는데 그 변하는 모습은 이루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아침 햇빛을 받아 불그레해지는 석굴암 부처님 모습은 생동하는 우주 만물의 자태 바로 그것이다.
   이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때는 동지를 전후한 12월인데, 지금은 그런 감동을 어디서도 느낄 수 없지만, 이제는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새로운 보존책과 함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방책이 모색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