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의 역사 (9) : 청시대(1644~1911)

지식창고지기 2009. 5. 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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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중국의 역사 (9) : 청시대(1644~1911)


1.
略史

나라 이후 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이며 중국의 근대사는 이 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건주(建州)·야인(野人)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
建州佐衛)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의 위()에 올라 국호를 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심양]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나라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강[遼河:요하]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태종 황타이지[皇太極:황태극 太宗]는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1627, 16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새()를 얻음으로써 16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16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講和), 산하이관[山海關: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 태종의 아들 순치제(順治帝)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후베이[湖北:호북]로 몰아내 궁사(窮死)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복왕(
福王)·노왕(魯王)·당왕(唐王)·계왕(桂王) 등 구왕족 소위 남명(南明)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는데, 농민군을 적대시하여 제휴하지 않았으므로 그 명운이 짧아 대세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청조의 중국 통일에 있어서의 적은 중국 정복에 협력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 3(三藩)이었으며, 수년에 걸친 3번의 난의 진압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최후의 유신(遺臣) 정성공(鄭成功)의 자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는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에 이르러 비로소 전중국을 통일하였다. 더구나 강희제는 1689년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써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제국이 동진(東進),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 간간이 분쟁이 일던 조선과의 경계도 정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1712). 또 계속되는 옹정(雍正)·건륭(乾隆) 3대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중가르부(準部)를 토벌하고 이에 따라 칭하이[靑海:청해]의 속령화(屬領化)와 티베트 보호와 평화를 촉진시키면서 1759년에는 중가르부·위구르(回紇:후의 新疆省:신강성)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이 3대에 걸쳐 청왕조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조형(祖型)이 되는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확립함과 아울러 동아시아 거의 전역을 그 위령(威領)하에 두었고 내정의 충실에도 힘입어 그 극성기(極盛期)를 가져왔다.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먀오족[苗族:묘족]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
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아편전쟁), 프랑스·러시아·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태평천국(
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 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
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淮軍:상군, 회군)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 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
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유학생·민족자본가의 반()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2.
대의 사회와 경제

청대의 사회는 소수의 기인(
旗人) 및 지배계급인 관료층(鄕紳 포함)과 피지배계급인 양민(良民:農工商 기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볼 때 관료층은 거의 모두 지주였으며, 양민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자작농(自作農)과 전호(佃戶:小作農)로 나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지주와 전호가 기본적 계층이었으며, 양자 사이의 봉건적 관계가 사회구성의 기축(基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국가 체제하에서는 지주층도 또한 지배당하는 존재이며, 관료체계 속에 파고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특권의 유무가 생겼고, 명왕조 말엽 이래의 상품화폐경제의 전개와 때 맞추어 재지(在地) 중소 지주층의 몰락과 관료지주·상인지주의 부재지주로서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같은 지주의 존재 형태의 변화는 전호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킴과 함께, 원래 그것이 전호측에서 지주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들이 서로 협력·제휴함으로써 재생산 가능한 체제를 만들어냈다는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전호층의 계급투쟁, 즉 항조(抗租)의 발생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미 강남(江南) 일대의 농촌에는 명나라 말 이래로 목면·비단[:]을 중심으로 하는 섬유공업과 기타 수공업이 발달하여, 중국의 기본 경제지대가 되고 있었는데 이에 따르는 쌀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청왕조 초에는 후난[湖南:호남]·쓰촨[四川:사천] 지방이 새로운 곡창지대로 등장하였다. 또 푸젠[福建:복건]의 사탕수수 재배에 대하여 ‘만주’의 콩깻묵이 비료로서 강남·푸젠으로 이입되는 등, 각지의 특산적 상품생산을 통하여 일종의 지역적 분업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강남의 면직물은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난징[
南京]목면’의 이름으로 널리 해외로도 수출되었다. 이같은 수공업은 대부분 전호층의 영세한 부업경영이었기 때문에 유통과정은 상인 자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산시[山西]상인과 신안[新安]상인의 2대 동향(同鄕)상인단은 전국 시장을 양분하여, 서로 동업조합으로서의 회관(길드)을 만들어 중간적 이익을 옹호하였다. 화폐경제의 침투와 상품생산의 전개는 전호층의 자립화를 지탱하는 한편, 농촌에 있어 새로운 무산자(無産者)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 희박한 변경으로 이주하거나, 만몽(滿蒙)의 봉금지(封禁地)를 잠식하고, 또는 해외로 이민하여 화교(華僑)가 되거나 혹은 비밀결사에 들어가 반사회적 행동을 하였는데, 그 일부는 백련교의 난을 비롯한 청나라 말의 여러 반란에서 일정한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청왕조는 처음에 엄하게 해금(
海禁)하여 외국무역은 광저우[廣州:광주]항 한 곳에 한하였고,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특허상인의 조합에 독점을 허가했다. 무역은 차·생사 수출을 주로 하는 편무역(片貿易)으로서 19세기 초에는 연간 4,500만 달러의 은이 유입되었다. 이 형세를 역전시킨 영국의 인도산 아편 밀수입은 중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는데, 아편 그 자체의 해악은 물론, 아편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의 패전에 따라 강제로 개국을 하게 된 중국에는 면제품을 비롯한 영국 산업자본의 제품들이 밀려들어왔으나, 계속 아편수입과 은의 유출은 중국 경제를 피폐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과 결합하여 놀랄 만한 경제성을 지닌 견고한 가내공업제품이 저항하였기 때문에, 산업자본의 근본 의도는 어긋났다. 그렇지만 흥륭기의 자본주의는 장기적 경쟁을 통하여 점차 중국 가내공업을 압도, 농민경영을 파괴하고 대량의 무산 대중을 낳게 하였다. 1880년대에 이르자 면제품의 수입은 결국 아편을 능가하였고 거꾸로 면화가 수출 초과로 바뀌어 쌀의 수입이 급증하는 등 무역구조는 명료하게 원료 식민지적인 형태를 나타내었다. 그 무렵, 양무파(洋務派)는 군사공업뿐만 아니라 상하이[上海]에 기기직포국(機器織布局) 등을 설치, 민수기업에도 진출하였으나 민간기업을 압박할 뿐이었다. 한편 청·일전쟁 후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간 구미(歐美) 열강의 대중(對中) 침입은 차관(借款), 철도 이권의 획득, 기업의 직접 진출의 형태로 강화되면서, 중국은 완전히 반()식민지화하였다. 의화단의 저항을 계기로 하여 청왕조도 겨우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침략과 혁명세력의 대두에 대비하였으나, 그 지배체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지방 향신층(鄕紳層)이 앞장선 기업의 설립(방적·성냥제조 등)과 이권회수 운동은 신해혁명을 지향하여, 부르주아적 성격을 떠받치고 있었다.

3.
청의 문화


청은 명과 같이 주자학을 보호하고 육성하여 학자와 문인을 우대하였고, 여러 가지 문화 사업을 일으켰다. 강희제 때 편찬된 <강희자전> 20세기 초까지 가장 권위있는 한자사전이었다. 옹정제 때에는 <고금도서집성>, 건륭제 때에는 약8만권에 달하는 <사고전서>가 편찬되었다. 이 시대에는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명 말기의 고염무·황종희 등에서 비롯된 고증학은 청대에 들어와 크게 융성하였으며, 조선의 실학 발달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고증학(
考證學)은 명 말의 주자학과 양명학 이공론을 일삼은 데 대한 반동으로,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으로 고전을 연구하여 그 참뜻을 파악하고자 한 유학의 한 계통이다. 문학은 명대와 마찬가지로 서민적인 소설과 희곡이 발달하였으며, 조설근이 쓴 <홍루몽>이 가장 뛰어났다. 한편, 그림은 문인화가 유행하였으며, 특히 이탈리아의 선교사 카스틸리오네가 전해 준 서양화의 원근법과 명암법은 중국의 회화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4.
아편전쟁
(Opium War)

아편전쟁은 1840~42년 아편문제를 둘러싼 청국(
淸國)과 영국간의 전쟁을 가르킨다. 청국은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외국 무역은 광저우항[廣州港:광주항]에 한하며, 또한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단체(길드)를 통해서만 허가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외국 여러 나라 중에서 영국이 광저우 무역의 중심이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출은 비단·차·도자기 등이었고, 영국은 약간의 모직물·향료 정도이며 그 밖에는 대량의 은()으로써 비단과 차를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8세기 말 영국 정부가 차의 수입세를 인하하고부터 일반 국민 사이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보급되어 중국차(홍차)의 수입이 격증하였다. 그리하여 1832년까지 중국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의 목화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함으로써 차의 구매자금을 조달하려고 했다. 특히, 그들이 전매제도 아래에서 중국인의 기호에 맞도록 정제하여 모험적인 민간상인에게 팔아 넘김으로써 중국에 밀수된 아편의 양은 해마다 격증하였다.

1830
년대가 되자 종전까지의 입초(
入超)에서 중국측의 은()이 출초(出超)로 바뀌게 되어, 중국의 은가(銀價)가 등귀(騰貴)하기 시작하였다. 본위(本位)화폐인 은화의 등귀는 재정과 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상 동전을 사용하면서, 이것을 은으로 환산하여 납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민에게 있어 동전에 대한 은가 비율의 고등(高騰)은 심각한 것이었다. 또한 관청, 특히 군대안의 아편 중독환자의 격증은 전제왕조(專制王朝)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몰리자 황제(道光帝:도광제)는 유명무실하게 된 아편금지령을 엄격히 실행하기 위하여, 강경한 아편금지론자로 알려진 임칙서(林則徐)를 흠차(欽差:全權)대신으로서 광저우에 파견하여 밀수를 근절하고자 하였다. 임칙서가 무력의 위협을 포함한 강경수단으로써 영국상인으로부터 아편을 몰수한 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영국정부가 내외의 격렬한 비난을 무릅쓰고 굳이 아편문제로 개전(開戰)하게 된 이유의 하나는 아편의 전매수입이 인도재정 안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듯이 아편무역이 영국의 당시의 인도 지배에 빼놓을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편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얻어진 은이 영국을 중심으로 미국·호주·중국·인도를 연결하여 시행된 세계 무역의 밸런스를 결제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것 등이다. , 아편무역 자체를 수호하고 합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1825년의 첫번째 공황(恐慌) 이래로 절실히 요구된 중국시장의 개방, 즉 연안 제항(諸港)의 개항과 무역에 대한 중국측의 여러 제한의 철폐, 유리한 무역 제()조건과 무역상·군사상의 근거지 획득 등의 요구를 일괄하여 실현할 것을 목표로 했다.

1840
년 여름, 함선 48척과 병력 4,000으로 구성된 영국 함대가 북상하여 베이징에 이르는 통로에 있는 다구[
大沽:대고]·톈진[天津:천진]을 위협하자, 청조는 일단 휴전을 명하고 철저한 항전파인 임칙서를 전쟁 도발자로 몰아 면직시키고, 강화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화평(和平)을 위한 초안이 쌍방에게 불만이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다음해 증원부대 1만을 추가한 영국군은 양쯔강으로 침입하여 난징[南京:남경]에 육박하였다. 청조는 민중을 무장하여 장기에 걸치는 게릴라전을 수행할 입장이 못 되었다. 무장한 민중이 이민족(異民族) 지배자인 청조를 위협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규군의 군규(軍規)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고, 일부를 제하고는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전쟁의 전()기간을 통하여 영국군의 사상자(死傷者) 520명인 데 대하여, 청조의 사상자는 약 2만에 이르렀다. 청조는 난징의 함락이 가져올 황제의 권위 실추를 방지하고자, 그 직전에 영국의 요구를 전부 수락하고 난징 조약[南京條約:남경조약]을 체결하였다(1842.8). 그러나 그 동안 광저우 교외의 삼원리(三元里)에서 영국군의 폭행에 격분한 농민 수만이 무기를 가지고 영국군을 포위하는 등, 민중이 자발적으로 침략 반대투쟁에 봉기하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광둥[廣東:광동]에서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영국인의 입성을 거부하려는 배외투쟁이 계속되었다.

아평전쟁의 결과 난징 조약과 그 추가조약(
虎門條約:호문조약), 오구(五口:廣州·厦門·福州·寧波·上海:광주,하문,복주,영파,상해) 통상의 결정 등으로 중국은 영토의 일부뿐만 아니라, 세제·사법상의 주권의 일부마저 제한되었다. 프랑스·미국도 영국에 따라 각각 황푸[黃浦]·왕샤[望廈]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었다(1844). 이들 제()조약은 중국을 강제적으로 세계 시장에 끌어들임과 동시에, 영사재판권과 최혜국(最惠國)대우를 인정시키고 관세자주권을 빼앗아, 중국을 반()식민지화하는 근본을 만들었다. 이에 중국은 전후의 막대한 배상금의 지불, 아편 거래에 의한 은의 유출, 점차로 국내 산업을 압박해오는 외국 공업제품의 보급, 행정기관의 퇴폐 등으로 봉건사회의 근저가 흔들리게 되었다.

5.
南京條約

1842
8월 아편전쟁(阿片戰爭)의 종결을 위하여 영국과 청()나라가 체결한 강화조약으로 장닝조약[江寧條約:강녕조약]이라고도 한다. 당시 난징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상에서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耆英)·이리포(伊里布)
와 영국 전권대사 H.포틴저(1789~1856)가 조인하였다. 13조로 되어 있고, 1843 6월 홍콩에서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
② 광저우[
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寧波], 상하이[上海] 5()을 개항한다.
③ 개항장에 영사(
領事)를 설치한다.
戰費賠償金 1200만달러와, 몰수당한 아편 보상금으로 600만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⑤ 행상(
行商) ,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⑥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
⑦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영국은 이 조약을 더욱 구체화하여 1843 7, 5항 통상장정(
通商章程), 10월에 호문채(虎門寨) 추가조약을 체결하여, 영사의 재판권 인정과 수출입품의 세율 협정 및 개항장에 있어서의 조계(租界)설치·최혜국대우(最惠國待遇)·조관(條款) 등의 특권을 획득하였다. 이들의 조약을 기본으로 하여 44년에는 미국이 청나라와 망하(望廈)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도 청나라와 황포(黃浦)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 똑같은 여러 특권을 획득하였다. 난징조약을 비롯하여 이에 이어지는 그 뒤의 여러 조약은 근대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부담하게 된 불평등조약의 단서가 되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정치·문화·영토면에서의 중국 침략에 길을 열어준 결과가 되었다. 이후 중국은 점차 유럽 및 일본 등 자본주의 세계의 종속적인 시장으로서 재편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조약체결을 기점으로 해서 중국은 반식민지(半植民地)·반봉건사회로 전화(轉化)하였다.

6.
청과 조선의 관계


한반도 북변에 할거하면서 17세기 초 중국 본토에 진출하여 통일왕조 청(
)을 세운 여진은 조선 개국 초부터 북방개척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정부의 가장 부심(腐心)거리로 등장하여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책을 써서 이들의 조공(朝貢)·귀화(歸化)를 권장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노략질하는 동기의 하나가 생활 필수품의 결핍에 있음을 감안하여 함경도의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으며, 여진 추장들에게는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비롯하여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 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청을 일으킨 건주여진은 1467(세조 13)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정벌을 당해, 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가 살해되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힘이 만주에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조선 선조가 의주(義州)에 피란하였을 때 건주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그 속셈을 알 수 없어 거절하였다. 그 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1636(인조 14)에는 다시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종래의 수직 또는 수평 관계는 전도(顚倒)되어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은 약 250년간 해마다 정기·부정기적으로 사절과 조공품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하였으나, 조선은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체로 독자성을 유지하여 청나라의 종주국 행세는 극히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양국 관계도 별 어려움이 없이 무난하게 보냈다.

1842
년 난징조약[
南京條約]으로 조선에 앞서 개국한 청나라는 조선이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의 둑이 무너지자, 1882(고종 19) 조선과 미국의 통상을 권유하고 조미·조독 수호통상조약을 돕는다는 구실로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이 군함을 끌고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함 3척에 4,500명 병력을 끌고 와서 흥선 대원군을 납치하였고,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독일인 묄렌도르프 및 마건충 등을 조선 정부의 정치·외교·세관 등의 고문으로 앉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84
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일 양군이 충돌해 톈진조약[
天津條約:천진조약]을 맺자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를 주조선 총리로 임명해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간섭하는 등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청나라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협력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일본과 충돌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조선은 1896 250년간 사용하여 온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
建陽)’을 연호로 사용함으로써 최초로 자체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8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숭명배청(崇明排淸)’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더욱 일어 당시의 학자는 물론 일반 민중에까지 뿌리깊이 스며들었는데, 학자로서는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그 극에 달하였다. 이는 중국 본토의‘중화(中華)’만이 문화·가치이고 일본·베트남·거란·몽골·흉노 및 여진[]은 야만의‘이()’이니 비문화·비가치(非價値)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의 소산이어서, 중국 변두리의 오랑캐 여진족이 형성한 청나라의 문화는 배척되고, 주자학(朱子學)만이 국가사회 유지의 규범으로 정치와 결합되어 숭상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형식적·관념적·배타적인 면만이 강화되어 학문으로서의 자유로운 비판을 거부하자, 그 반동으로 실학(實學)이 일어났고, 영조·정조 때에는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박학(樸學)이 일어나서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청나라를 경유하여 서학(西學:유럽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이 유입되어 과학기술과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전성기를 맞이한 강희~건륭 연간(1662~1795)에 부연사(赴燕使) 일행에 끼어 청나라의 물질문명을 보고 돌아온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은 청나라의 문화를 들여와 문화를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자는 ‘북학(北學)’운동을 벌였다. 이와 같이 청나라의 근대문화는 조선의 학자들을 자극하여 그 고증학적 방법과 과학사상을 바탕으로, 역사학·지리학·언어학·금석학(金石學) 및 천문학·지도제작 등에 많은 역작이 나왔고, 이와 같은 학문의 방법은 백과사전파에도 영향을 끼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가 편찬될 정도로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