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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金萬重,1637∼1692)

지식창고지기 2009. 7. 14. 09:21

김만중 (金萬重,1637∼1692)


김만중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호는 서포(西浦)이다.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고, 충렬공 익겸의 유복자이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만기의 아우로서, 숙종대왕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 해평 윤씨는 인조의 장인인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방(昉)의 증손녀이며, 이조참판 지(遲)의 따님이다.  

김만중 초상화김만중은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 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익겸이 일찍이 정축호란(1637)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으므로 형 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여,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유달랐던 것이다.  실은 그의 대작 <구운몽>도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기 위해 지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만년에 어머니를 술회한 글에서, 어린 시절 가난하고 외로운 환경 속에서도 그의 어머니가 많은 책을 이웃의 홍문관 서리를 통해 빌려 와 손수 등사하여 읽게 하였고, 때로는 베틀에 짜고 있는 피륙을 팔아 독서물을 충당하였을 뿐 아니라, 소학, 사략, 당시(唐詩) 등을 손수 가르쳤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어머니 윤씨부인이 만기, 만중 형제의 교육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만중은 위와 같이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16세에 진사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그 뒤 1655년에 정시문과에도 급제하여 관료로 발을 내딛기 시작, 1666년에 정언(正言), 1667년에 지평(持平), 수찬(修撰)을 역임하였으며, 1668년에는 경서 교정언, 교리가 되었다.  아울러 1671년에는 암행어사로 경기 및 삼남 지방의 진정득실을 조사하기 위해 부교리가 되는 등 1674년까지 헌납, 부수찬, 교리 등을 지냈다.  그러다가 1675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인선왕후의 상복 문제로 서인(西人)이 패배하자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688년에 남인인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의 죄로 연루되어 추국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이 선천 유배지에서 어머니 윤씨를 위해 <구운몽>을 지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1년이 지난 1688년 11월에 드디어 선천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나, 3개월 뒤인 1689년 2월 이른바 을사환국을 계기로 다시 남해로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유배가 계속된 것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의 여화 때문이었다.  그가 남해 유배지에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 윤씨는 그의 안위를 걱정한 끝에 세상을 떴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치 못하고 1692년 남해 유배지에서 56세를 일기로 외로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사상과 문학은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주희의 논리를 비판하거나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한 점등에서 사상의 진보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 예찬론'은 문학이론에서의 진보성을 보여준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이후 허균의 뒤를 이어 소설문학의 거장으로 나타난 그는 우리 문학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왔다.
   즉 소설을 천시했던 조선시대에 있어 소설의 가치를 인식, 창작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문학은 마땅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후 국문소설의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했다. 그의 우리말과 우리 글에 대한 국자의식(國字意識)은 높이 살 만하며 특히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쓴 <사씨남정기>나 모친을 위로하기 위해 순수한 우리말로 유배지에서 쓴 <구운몽> 같은 국문소설의 창작은 허균을 잇고 조선 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