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정묘약조(1627)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폐(공물)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깨트리고 식량을 공급해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해왔다. 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 관계'로 개약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폐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이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후금의 요구 사항이 이처럼 터무니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 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 해 2월에 용골대, 마부대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리고 인조비 한씨 문상을 겸할 요량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그들은 맹약을 바꿔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개약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이 후금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이에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칠 것을 극간했고, 인조도 이에 동조하여 후금 사신이 가지고 온 국서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민가의 마필을 빌려 급히 본국으로 도주해갔는데, 이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조선 조정이 평안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을 그들에게 탈취당하고 만다. 이 유문은 전시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비를 손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후금을 치겠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유문을 읽은 후금 태종은 조선을 재차 침략할 뜻을 비친다. 그리고 이 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였으며,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불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가한다. 하지만 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조선 조정은 그들의 제의를 묵살해 버린다. 그 해 11월 청은 다시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내세우는 인물들을 심양으로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이번에도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시해버린다.
그 해 12월 1일 청 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2만 등 도합 12만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처내려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도원수 김자점과 의주부윤 임경업의 장계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이었다. 그리고 13일 오후 늦게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청군이 그렇게 빨리 밀고 내려올지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장계로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고, 도성 내의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4일 개성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조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감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에게 주사대장을 겸직시켜 강화도 수비를 명령했다. 또한 윤방과 김상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시, 원손, 둘째 아들 봉림대군, 셋째 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도록 했다.
인조 자신도 그날 밤 도성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와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이를 포기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사후 대책을 논의한 끝에 최명길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끌게 하고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 등은 그곳이 지리적으로 불리하다는 이유를 대며 야음을 틈타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했다. 다음날 15일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떠나려 했지만 폭설로 인해 말을 움직일 수가 없어 포기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남게 되자 한성 주변의 관리들은 각기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집결하였고, 이에 총병력은 약 1만3천이 되었다. 이때 성 안에 있는 식량은 양곡 1만4천3백 석, 장 220항아리 정도로 약 50일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한편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청 태종은 1월 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싸움 없이 40여 일이 경과하자 성 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조선군들은 싸움에서 모두 대패하여 패주하고, 명에 청한 원군도 내부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이리하여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 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수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인조가 출성하여 항복할 결심을 굳히자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등은 적진을 왕래하며 조선측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고, 청국 진영에서는 용골대, 마부대 등의 사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회담에 응하였다. 조약서에 명시된 청의 요구 사항은 총 열한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세폐(공물)를 보낼 것 등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하였던 척화론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청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단도의 동강진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청 태종은 패륵 아탁과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으로 하여금 병선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측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 조건에 따라 평안병사 유림을 수장으로 하고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으로 하여 청군을 도와 싸우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를 몰래 보내어 명제독 심세괴에게 피하도록 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청군에 의한 군사적 피해 못지않게 민간의 피해도 막심했다.
청군은 도적질을 일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군하면서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을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끌고 간 여자들을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속가를 낼 만한 입장이 못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꽤나 많았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 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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