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금강전도(金剛全圖)/연주담도((連珠潭圖)/ 김응환

지식창고지기 2009. 7. 28. 09:39

금강전도(金剛全圖)

◈ 김응환(金應煥) 1772 ◈ 견본담채. 22.3×35.2cm ◈ 박주환 소장



그림의 우측 상단에 「歲壬辰春 擔拙堂爲西湖 倣寫金剛全圖」라는 그의 발제로 보아 1772년 김응환이 만 30세 되던 해에 정선의 금강전도를 모방해서 후배 화원인 김홍도에게 그려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금강전도는 대향봉, 소향봉, 금강대를 중심으로 금강산의 명찰인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순으로 앞쪽 좌측에 대각선을 이루고 있으며, 멀리 둥그스름한 비로봉, 중앙에 솟은 혈망봉, 중향성 등이 눈에 띈다.

반조감법의 시점과 타원을 이룬 구도, 미점으로 처리한 토산과 수직의 개골산은 겸재의 화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부족하여 역시 겸재를 계승했지만 겸재의 수준을 뛰어넘지는 못하였다.

 

 

연주담도((連珠潭圖)

◈ 김응환 1788 ◈ 견본담채. 32.0×42.8cm ◈ 개인소장

내용 및 작품성격

〈연주담도〉는 금강산의 명승 가운데 하나인 연주담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1788년에 김응환이 그린 〈금강산 관동팔경도첩〉에 실려 있는 그림들 중의 하나이다.

명승을 유람하면서 거기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그린 기행첩은 김응환의 기행첩 외에도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松都紀行帖〉, 정선의 〈장동팔경첩 壯洞八景帖〉과 〈경외명승첩 京外名勝帖〉 등이 현존하고 있다.

이들 기행첩은 단순히 경치를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유람을 통해 받은 인상이나 느낌도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행가사(紀行歌辭)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강세황이 그의 〈영통동구도〉에서 화제를 통해 자연 경관을 본 소감 등을 피력하고 있는 것도 기행첩의 이런 성격을 말해 주고 있는 사례라 하겠다.

옛 사람들이 즐겼던 강산 유람이라는 것은 오늘날에 말하는 관광(觀光)과는 개념상의 차이가 있다. 관광이 단순히 경치를 보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유람은 산수간을 노닐면서 자연의 법도를 따라 인생을 관조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을 중요시한다.

중국의 유명한 문장가 손작(孫綽)도 그의 〈천태산부 天台山賦〉에서 산수를 유람하는 풍류의 경지를 “몸은 조용하고 마음은 한가하다(體靜心閒)”라는 말로 함축해 표현했듯이, 유람은 부드럽고 수동적이며, 긴장이 풀린 누그러진 유희이며, 극성스러움과 조급함이 필요 없는 풍류놀이인 것이다.

내용 분석

〈연주담도〉를 보면, 상류로부터 흘러내리는 계류가 암벽 아래서 잠시 머물러 두 개의 깊은 소를 이루고 있고, 맞은 편에는 암벽이 우뚝 솟아 있다. 상류 쪽에는 기암괴석이 임립(林立)해 있고, 그 앞쪽에는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깊은 소에 걸쳐 있는 널찍한 바위 위에는 앉거나 서서 한가롭게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세 명의 유람객이 있고, 그 앞쪽에 있는 외나무다리에는 지금 막 다리에 들어선 사람, 걸터앉아 쉬고 있는 사람, 서서 건너편의 암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탐승객들이 보인다.

작게 그려져 있어 그들의 얼굴 표정을 확실하게 읽을 수 없으나 자유분방하고 유연한 자세에서 아무런 목적의식도, 긴장도, 조바심도 없는 풍류의 멋을 느낄 수가 있다. 등장인물 〈연주담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대에 금강산을 유람했던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위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은 각각 김응환, 그리고 그와 함께 금강산 유람을 했다고 하는 강세황과 김홍도라고 짐작된다. 이것은 〈연주담도〉가 1788년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그린 그림이고, 그때 이 두 사람이 동행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기행첩에 실려 있는 〈하발연도 下鉢淵圖〉, 〈칠보대도 七寶臺圖〉 등의 그림에도 세 사람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굳이 그런 증거를 들먹거리지 않는다고 해도 본인이 그린 그림 속에 화가 자신이나 일행의 모습을 그려 넣는 것은 동양화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양에서는 원래 가장 으뜸인 것은 천(天)이고, 천에서 지(地)가 생기고, 다음에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의 존재를 천지의 자연에 환원하는 신뢰심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새나 짐승, 벌레나 물고기를 자연의 일부로 그리는 것처럼 인물도 자연의 일부로 그린다.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소나무 가지 위에 학을 그리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옛 성현을 그리고 화가 자신을 그린다. 더구나 실제로 명승을 찾아가 그곳에서 유람을 즐겼다면, 그 경치 속에 화가 자신이나 일행의 모습을 그려 넣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연주담도의 정서

이쯤 해서 강산 유람과 관계된 조선 시대의 가사 한편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기행 가사에는 삶을 하나의 소요(逍遙), 즉 산책으로 보고, 그런 경지에서 인생을 즐기는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는 노장(老莊)의 인생관이 반영되어 있다.

“죽장망혜(竹杖芒鞋) 단표자(單瓢子)로 천리 강산 들어가니 폭포도 좋거니와 여산이 여기로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은 옛말로 들었더니 의시은하낙구천(疑是銀河落九天)은 과연 헛말이로다. 그 물이 유도(流到)하여 진금(塵襟)을 씻은 후 석경(石逕)의 좁은 길로 한 곳을 내려가니 저익(沮溺)은 밭을 갈고 사호(四皓) 앉아서 바둑을 둔다. 기산을 넘어 들어 영수(潁水)로 내려가니 소부는 어이하여 팔 걷고 귀를 씻고 허유는 무삼일로 소고삐를 거사렸노. 창랑가 반겨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엄릉탄 여울물에 고기 낚는 어옹 하나 양의 옷 떨떠리고 벗을 줄을 모르더라. 석양천(夕陽天)에 촌려(村廬)로 돌아오니 청풍은 서래하고 명월은 만정이라 강산 풍경이 이러하니 금지할 이 뉘 있으리. 어와 벗님네야 빈천을 한치 말고 자락(自樂)하며 지내보세.”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장저와 걸익, 소부와 허유, 엄자릉, 사호(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녹리선생) 등 성현들은 모두가 관직과 명예를 거부하고 오직 자연에 몰입하여 무위(無爲) 자연을 즐기는 것을 인생의 최대 행복으로 삼았던 사람들이다.

작자는 그들이 산수간에서 추구했던 초연한 삶의 모습을 상기하고, 자신도 그런 경지에 들어 있음을 은근히 내세우고 있다. 김응환의 금강산 유람이 비록 왕명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연주담도〉 등 명승 그림의 정서는 이 단가의 정서와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