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안동 金誠一집안 (2002.05.27)

지식창고지기 2009. 7. 28. 09:44

안동 金誠一집안  (2002.05.27)

 
▲사진설명 :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품을 전시한 운장각.학봉은 지연과 당파를 뛰어넘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안동=이재우기자

영남의 명문가는 안동에 몰려 있고, 안동에서 유명한 명문가는 퇴계를 배출한 진성 이씨, 서애 류성용의 하회 류씨, 학봉 김성일의 의성 김씨 집안을 꼽는다. 진성 이씨들은 역대로 글 잘하는 선비가 많고, 하회 류씨 집안은 벼슬이 많고, 의성 김씨 집안에는 대대로 입바른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게 이 지역 사람들의 중론이다. 특히 의성김씨들은 5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지 않는다”(寧須玉碎 不宜瓦全)는 정신과, “선비집안에는 3년에 한번씩 금부도사가 체포영장을 가지고 찾아와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살았던 강골 집안이다. 독립유공자만 29명이 배출됐다는데서도 이런 기질을 헤아릴 수 있다. 한 집안이 배출한 독립유공자로는 전국 최대규모다. 일제가 1930년대 중앙선 철도를 놓을 때에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묘소를 피해가기 위해서 계획에 없던 터널을 5개나 새로 뚫어야만 할 정도였다.

의성 김씨 가운데 대쪽 선비로 유명한 인물이 학봉이다. 대쪽이면서도 원칙에 맞으면 지연과 학연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라도 포용한다는 것이 학봉의 신념이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정신이기도 하였다.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남명 조식의 제자였던 최영경(崔永慶)이 희생됐다. 당시 최영경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구도 앞에 나서서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칫하면 자기도 역적으로 몰리는 살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상 좌도의 퇴계 문하인 학봉은 상대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경상 우도의 남명 문하였던 최영경을 위해서 그의 원통함을 강력하게 해명하였다. 목숨을 걸고 하는 바른 말이었다. 그리하여 최영경의 명예가 회복됐다. 3년후인 임진왜란때 학봉이 경상좌도 출신이면서도 우도인 진주에 와서 민심을 모아 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수 있었던 이면에는, 최영경 사건 때 학봉이 보여준 처신이 경상우도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던 것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의병장 가운데 게릴라전의 명수이면서 통제 받기를 싫어했던 홍의장군 곽재우가 학봉에게 만큼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가 능히 내 목숨을 마음대로 할 것인가. 나도 또한 그의 통제를 받아야지!” 라고 했다는 일화는 학봉이 지닌 리더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명 문하에서 알아주는 제자였던 곽재우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좌도의 퇴계 제자에게 고개를 숙였던 배경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임진왜란 때 사용한 유서통과 철퇴.

 

 

학봉은 전라도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46세때인 1583년에 전라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발령받아, 3년간 목사를 지내면서 나주 최초의 서원인 대곡서원(大谷書院·후에 경현서원으로 바뀜)을 금성산 밑의 대곡동에 설립하였던 것이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의 뿌리 깊은 도시에 와서 학문의 요람인 서원을 세웠다는 것은 음미해 볼 만한 사건이다. 전라도라는 이름도 전주와 나주에서 따온 이름일 만큼 나주는 비중 있는 고장이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나주에서 배출된 정승 숫자가 8명에 달한다. 나주는 또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을뿐만 아니라 영산강을 통한 수상운송의 중심지여서 물산이 풍부하였고 큰 부자도 많았다. 부와 권력을 모두 쥐고 있던 곳이라 고려시대 이래로 자존심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런 나주에서 경상도 사람인 학봉이 다른 시설물도 아닌 서원을 세운 것은 그만큼 학봉이 전라도 사람들로부터 학문과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봉은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인 의사소통 방법을 사용하여 막혀 있는 민심을 소통시켰다. 학봉은 큰 북을 달아놓고 “누구든지 억울한 일을 당하여 호소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이 북을 쳐라”고 선언하였다. 그 결과 억울한 사람들이 이 북을 쳐서 아래와 위가 서로 이롭게 되어 민심이 크게 좋아졌다고 한다. 학봉이 대곡서원을 세울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나주의 토착세력이면서 명문이었던 나주나씨(羅州羅氏)들의 전격적인 후원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씨들은 호남의 남인집안으로서 학봉 집안과는 학풍뿐만 아니라 정치적 노선도 같았던 것이다. 대곡서원의 설립으로 인해서 철학적인 성찰을 중요시하는 영남학풍과 문학적인 풍류를 우선시하는 호남학풍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학봉이 세운 나주 대곡서원의 존재는 각기 다른 영-호남 학풍이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되는 파이프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후일(1693년) 학봉은 고봉 기대승과 함께 호남인들에 의해 대곡서원에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다.

학봉 집안은 광주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집안과도 끈끈한 인연이 있었다. 제봉 집안은 임진왜란때 삼부자가 순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봉과 그의 둘째아들은 1592년 7월 10일의 금산전투에서 함께 전사하였고, 제봉의 큰 아들은 얼마 있다가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호남의 대표적인 강골집안이 고씨 집안이었던 것이다. 당시 60세의 노인이었던 고경명은 둘째 아들을 데리고 금산전투에 참가하면서 막내 아들인 16세의 고용후(高用厚)를 경상도의 학봉 집안으로 위탁했다. 학봉 집안에 내려오는 기록과 구전에 의하면 고경명은 아들을 보내면서 “너는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도 안동 금계의 김학봉 선생 댁을 찾아가서 피난을 하여라. 그 집은 높은 의리가 있는 집이니 난리중에도 너희들을 그냥 죽게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학봉과 제봉 사이에 어떠한 인간적인 교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봉이 나주목사로 재임할 때 보여준 인간적인 신뢰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임진왜란 중에 고용후를 비롯한 고씨 집안 일가족 수십명은 학봉집안 사람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다. 난리중이라 먹을 것도 변변찮았지만 같이 죽을 먹고, 산나물을 먹으면서 고생을 함께했다. 그 와중에서 고용후는 금산전투에서 함께 전사한 아버지와 형님의 소식을 접하였다. 얼마후 학봉이 호남의 관문이 되는 진주성을 지키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는 기별이 왔다. 호남으로 진입하는 요충지인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학봉과, 역시 호남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제봉 집안은 두 집안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었다. 고용후와 비슷한 연배였던 학봉의 손자 김시권(金是權)은 “자네나 우리나 두 집이 다같이 난리를 만나서 자네는 아버님 상을 당하고, 우리는 조부님 상을 당했으니 피차에 일반이네, 그렇다고 학문에 힘쓰지 아니하면 나중에 옷 입은 짐승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학문에 힘썼다. 학봉집에서 4년 동안 피난하였던 고씨 일가는 광주로 되돌아왔고, 1605년의 과거시험에서 고용후와 김시권은 나란히 합격하였다. 그후 10년이 지난 1617년에 고용후는 안동부사로 부임을 하게 된다. 안동부사 고용후는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학봉의 부인과 큰아들인 김집을 관아로 초청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두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읍니까?’하고 울먹이면서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 영.호남의 대쪽 같은 선비집안들이 보여 주었던 아름다운 우정과 미담이다.

◆호남유림-학봉집안 오늘날도 유대 끈끈

  영남의 학봉 집안과 호남 유림사이에는 오늘날에도 교류가 있다. 전남 장성의 산암(汕巖) 변시연(邊時淵·80)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변 선생은 현재 호남의 대표적인 한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58년 착수해 1990년에 완성한 73권 분량의 「문원」(文苑)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문원」은 서거정의 「동문선」이래로 가장 방대한 문헌집이다. 「문원」에 등장하는 저자만 해도 2500명에 6000종의 문헌이 망라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의 학맥은 학봉의 11대 종손이자 퇴계의 정통 학맥을 계승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에 맞닿아 있다. 변시연이 10대 후반에 임창순과 함께 동문수학한 바 있는 충북 보은의 관선재(觀善齋)가 바로 김흥락의 손제자였던 홍치유(洪致裕)가 관장하던 학당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맥으로 인해서 학봉 집안과 장성의 변시연은 밀접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학봉집안을 비롯한 안동의 한학자들과 교분이 깊은 변시연은 호남 한학자 가운데서 거의 유일한 영남통인 것 같다.

(趙龍憲·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조선일보 2002년 5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