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형(1915.11.7∼1996.11.26)
경북 대구의 변호사 가정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해 4월부터 서울 양정중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다 1945년 3월 반일지하조직 사건에 연루돼 광복 때까지 함흥형무소에서 영어의 나날을 보냈다.
선배학자인 김광진의 권유를 받고 1946년 8월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원이 됐다. 1956년 1월부터 1979년까지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사회과학원 고문을 거쳐 1991년 6월 사회과학원 원장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교수·박사(1962), 과학원 원사(1964)가 됐으며 김일성상과 국기훈장 1급도 받았다.
대표적인 연구성과로는 "리조병제사"(1952),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1957), "초기조일관계연구"(1966), "초기조일관계사"(하, 1988) 등이 있다.
'일본의 고대 한반도 경영설'깬 사학자 김석형
일본의 학술서적 전문 출판사인 고분도(홍문당)는 1994년부터 '역사학사전' 시리즈를 기획, 출판하면서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를 엄선해 그들의 학문활동과 연구성과를 싣고 있다. 1997년 출간된 '역사학사전' 제5권에는 남북한에서 각각 두 명의 인물이 선정, 소개됐는데 북한 학자로는 백남운과 김석형의 이름이 올라 있다.
광복 이후 북한 역사학계에는 1세대만 하더라도 이 두 사람을 포함해 전공분야는 다르지만 최창익 이청원 전석담 박문규 박시형 등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기라성같은 학자들 가운데 북한 역사학의 간판으로 백남운과 함께 김석형이 선정된 것은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학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과 학문적 편력을 돌이켜 보면 쉽게 수긍이 간다. 그 만큼 그의 학문연구는 독보적이었고 그 자취는 뚜렷했다.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김석형의 존재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저 집안 좋고, 사람 좋고, 학벌 좋은, 촉망받는 소장 학자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1946년 8월 월북 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원(교수)으로 임용되지만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건국과정에 동참한 '이방인'들에 대한 배려의 뜻도 담겨 있었다.
1952년 12월 6·25전쟁의 와중에 학문의 최고 전당인 과학원이 창립되고 내각 부수상 홍명희를 초대 원장으로 10명의 원사와 15명의 후보원사가 탄생하지만 여기에 그의 이름은 들지 못했다. 백남운과 박시형이 원사, 김광진 도유호 이청원 최창익 등이 사회과학을 대표하는 후보원사로 뽑혔다.
김석형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1956년 1월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이 즈음 북한 역사학계는 우리 역사에서 중세의 기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는 삼국 초기에 중세봉건제가 시작됐다는 ‘봉건론’을 학계의 공식 견해로 정리하면서 논쟁을 마무리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김석형의 성가가 내외에 크게 부각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기관잡지 '력사과학' 1963년 1호에 "삼한·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1966년 이를 보완한 '초기조일관계연구'라는 책을 내놓으면서였다. 20여년이 지난 1988년에는 '초기조일관계사'라는 두권짜리 책으로 집대성되어 나온다.
'분국론'으로 불리는 그의 이 학설은 명치이후 일본 학자들의 한국사 연구 100년사의 총화라고 일컬어지던 '임나일본부설'을 완전히 뒤엎는 획기적인 연구로 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았다.
임나일본부설이란 고대의 일본이 4∼6세기의 200년간에 걸쳐 한반도의 남부를 경영했으며 그 중심적 통치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주장으로, 정한론과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합리화라는 논리로 악용됐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석형은 임나일본부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 안에 있었으며, 한국계통 민족의 진출에 의해 형성된 크고 작은 분국들을 각각의 본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가 지배했다는 논지를 폈다. 그의 이러한 입론은 시시비비와 논증을 떠나 식민사학의 오랜 질곡을 깨는 일대 쾌거로 받아들여지면서 남북한은 물론이고 일본에도 엄청난 반향과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당시까지 식민사학의 극복을 당면과제로 내세우고 있던 남한 학계에서조차 반론을 제기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때에 나온 것이기에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했다. 1970년대 들어 일본 학계에서 기존의 한반도·한일관계 연구에 대한 자성과 함께 새로운 연구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그의 연구가 지핀 불씨의 산물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1949년 '임나흥망사'라는 책을 저술해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부동의 정설로 완성한 사람이 일제 때 경성제대 법문학부 역사학과 교수를 지냈던 쓰에마츠 야스카스였다는 사실이다. 정사인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무참하게 훼손해 우리 역사를 만신창이로 만든 식민사학의 중심인물이 쓰에마츠였고, 그는 경성제대에서 김석형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그로부터 학문을 배운 제자가 스승의 필생의 역작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은 출람일까 악연일까.
1970년대 김석형의 학문활동은 다소의 소강상태를 보인다. 이른바 주체사관에 의거해 1979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조선전사' 편찬 준비에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일 거라는 것이 공통된 관측이다.
김석형은 1960년대 초 제3기부터 90년대의 제9기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연임했고 1991년부터는 양형섭의 뒤를 이어 사회과학원 원장도 맡아 96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1990년 8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조선학 국제학술대회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왕년의 화려한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의 사람 좋은 얼굴은 여전했으나 어쩐지 왜소한 촌로의 잔영이 비쳐졌다고 지척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은 기억한다. 20세기 말 사회주의붕괴의 역풍이 몰아치는 언저리에서 그가 선택했던 이념과 체제가 흔들리고 있어서 였을까.
평소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이면서도 내면에는 충천하는 열정을 간직한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이 선비도 오사카까지 찾아온 혈육들과의 만남에서는 끝내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내 학문을 알아주고 발전할 수 있는 데로 가겠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북행 길에 오른 지 근 반세기만의 만남에서 뿌렸던 눈물의 의미를 알기는 어려웠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조선일보 2001년 3월 12일
'역사의 숨결 > 역사(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헌창의 난 金憲昌-亂 (0) | 2009.07.28 |
---|---|
김석신(金碩臣/1758- ? )/도봉도(道峯圖) (0) | 2009.07.28 |
안동 金誠一집안 (2002.05.27) (0) | 2009.07.28 |
김수철(金秀哲)/계산적적도(溪山寂寂圖)/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하화도(荷 (0) | 2009.07.28 |
김시습 (0) | 2009.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