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의 난 金憲昌-亂
신라 하대(下代)에 접어들면서 귀족의 유대의식의 약화로 골품제도(骨品制度)가 붕괴되어가자, 진골(眞骨) 귀족세력의 분열이 극심하였다. 그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專制主義的) 경향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되었다. 그 결과 하대의 신라는 귀족적이고 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어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김헌창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계로서, 그의 부친 상대등(上大等) 김주원(金周元)은 선덕왕(宣德王)이 죽은 뒤 당연히 왕이 될 것이었으나, 김경신(金敬信: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당시 웅천주 도독으로 있던 김헌창은 대규모의 난을 일으키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고 하였다.
김헌창이 무진주(武珍州:光州) ·완산주(完山州:全州) ·청주(菁州:晋州) ·사벌주(沙伐州:尙州)의 4도독을 위협하니, 국원(國原:忠州) ·서원(西原:淸州) ·금관(金官:金海) 등의 관리들과 군 ·현의 수령들이 이에 항복하여, 한때 충청 ·전라 ·경상 등지의 지역이 이에 호응하였다. 청주도독 향영(向榮)은 도망하여 퇴화군(堆火郡:密陽)으로 갔으며, 한산(漢山) ·우두(牛頭) ·삽량(葛良) ·패강(浿江) ·북원(北原) 등지에서는 수비에 임하였다.
완산의 장사(長史) 최웅(崔雄)은 영충(令忠)의 도움으로 서울로 도망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서울을 수비하게 하고 장웅(張雄) ·위공(衛恭) ·제릉(悌凌) 등에게 김헌창을 격퇴하게 하였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헌창의 군대를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보은)을 공격한 뒤 속리산에서 헌창의 군사를 격멸하였다. 균정(均貞)이 성산(星山)에서 승리한 뒤 웅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김헌창은 자살하였다.
그 뒤 그의 아들 범문(梵文)이 또다시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과 난을 일으켜 한산(漢山)에 입도(立都)하려고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후로 무열왕 후손들은 왕위계승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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