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웅전> 내용 따져 읽기
● 난세가 영웅을 부른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고소설은 그 시작이 대개 엇비슷하다. 주인공의 부모가 등장하여 주인공을 낳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 바 '-전(傳)'을 표방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특성이자 한계이다.
그러나 <조웅전>만큼은 예외이다. 이상하게도 국가의 위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송 문제 즉위 23년이라. 이때 시절이 태평하여 사방에 일이 없고 백성이 평안하여 격양(擊壤-태평성대에 땅을 두드리며 노래함)을 일삼고 있을 뿐이더라.
월명년 추구월 병인년에 문제 충렬묘에 거동하실 새, 원래 충렬묘는 만고 충신 좌승상 조정인의 묘라. 승상 조정인이 이부상서를 할 적에 황제 즉위 10년일러니 불의에 남란(南亂)을 당하여 사직(현 왕조의 기초)이 위태하며 구원할 모책이 없어 송 황실 옥새와 문제를 모시고 경화문을 나가 무봉티를 넘어 광임교에 다다르니, 성 안팎에 곡성(哭聲)이 진동하고 남녀노소 없이 전도(顚倒-엎어져서 넘어짐)히 도망하니, 남산 북악이 봄 아닌 오색 도화 만발함 같더라.
작품의 서두를 시대 배경에 대한 서술에 할애하고 있다. 조웅의 아버지 조정인은 국난을 당했을 때 황제를 보필하던 충신이었다. 그러나 그 뒤 간신 이두병의 참소로 조정인은 음독 자살하고 만다. 이 때 조정인의 아내인 왕 부인의 뱃속에는 7개월 된 아이가 자라고 있었으니 , 그 아이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조웅이다. 작품의 시작이 한 개인과 가문의 문제에 이끌리지 않고 있는 것에 유념하자. 즉 '난세를 평정할 영웅'이 필요하던 차에 마침 만고 충신의 유복자가 뱃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작은 '누가 아이를 낳았더니 영웅의 기상이 있더라'는 다소 맥빠진 서술과는 확실히 다르다. 다른 고소설과는 달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초반부터 스케일을 한껏 키워 놓기도 하면서 독자들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지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들은 항상 지치고 힘든데, 그런 삶의 고달픔을 한꺼번에 해소해줄 영웅이 등장하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소설은 먼저 문제를 제시하고, 그 문제를 풀어줄 영웅을 선보이고, 그 영웅은 기대를 저 버리지 않고 모든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준다. 독자들은 얼마간 자신의 현재 처지를 떠올리고, 일시적인 몰락을 딛고 일어서는 영웅의 활약에 환호한다. 영웅이 곧 자신인 듯한 환상 속에서, 영웅이 실의에 빠지면 함께 실의에 빠지고 영웅이 재기에 성공하면 마치 자신의 성공인 듯 기뻐한다.
● 사랑에 빠진 영웅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웅담의 인기는 공통적이다. 평범한 독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힘과 용기를 가지고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과 아주 다르기만 하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반감되고 만다. 어느 한 구석이라도 독자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부분이 있을 때 독자들은 안심하고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가정을 생각한다면 영웅담에 곁들이기 가장 좋은 이야기는 아마도 애정담일 것이다. 영화 <레옹>이나 <쉬리>가 그렇듯이 목숨을 건 전투 중에도 로맨스는 그칠 줄 모른다. 이 점에서는 <조웅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웅이 답 왈,
"꽃 본 나비 불인 줄 어찌 알며, 물 본 기러기 어옹(어부)을 어찌 두려하리요."
하며
"바라나니 소저는 빙설(심성이 결백함을 비유) 같은 정절을 잠깐 굽혀 외로운 자취를 이웃 삼기 어떠하니까?"
조웅이 장소저를 만나는 대목이다. 각종 사랑 이야기에 신물이 난 현대인들에게는 범상하게 보이겠지만, 고전 문학의 잣대로 보면 분명히 충격 중의 충격이다. 그 당시 예법으로는 성인 남녀가 부모의 허락도 없이 사사로이 만날 수도 없거니와 만난다 한들 '물 본 기러기' 운운하면서 저돌적으로 달려들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은 고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낭만적인 '자유 연애'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성의 의지와는 다르게 남자가 완력으로 여성을 취한다는 비난을 받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애정 문제를 본인들이 직접 나서서 풀어간다는 설정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것은 부모가 맺어주지 않았는데도 남녀가 어울리는 것을 야합(野合)이라 규정하며 범죄시했던 당시 현실에 비추어보면 엄청난 파격이었다. 바로 이 점이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만남이 곧바로 결혼으로 이어져 행복하게 잘 산다면 진정한 사랑 이야기라 하기 힘들 것이다. 진실한 사랑에는 반드시 어려움이 따르는 법, 조웅과 장소저는 잠시 헤어졌다가 모든 난관을 극복한 뒤 다시 만나게 된다. 결국 이야기 전편이 두 남녀의 만남 - 이별 - 재회로 읽어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한편에서는 숨막히는 남성들의 전투가 벌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슴 아린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어, 어느쪽에 관심 있는 독자든지 모두 끌어들일 태세를 완비하고 있다.
● 안에서는 효자, 밖에서는 충신
그렇다면, <조웅전>은 그 당시 윤리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작품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아주 굳건히 봉건 이념에 봉사하는 작품이다. 연애담을 빼고 본다면, 조웅에게 닥친 문제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아버지 조정인의 원수를 갚고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요, 또 하나는 황제 자리를 빼앗은 간신을 내치고 쫓겨난 태자를 모셔 와서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사실 하나씩 따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일이 곧바로 간신을 내치는 일이고, 간신을 내치게만 된다면 국가는 자연스레 원상으로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웅이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곧 부자, 군신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충신 조정인은 뱃속에 아이를 두고 약을 먹고 죽으며, 황제는 여덟 살 난 아들을 두고 세상을 뜬다. 공교롭게도 태자와 조웅은 동갑내기여서 황제는 조웅을 불러다 태자와 인사를 나누게 하고 열세 살이 되면 벼슬을 주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간신 이두병 일파가 등장하여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충신은 죽고 집안은 풍비박산 나며, 태자는 왕위를 물려받기는 고사하고 이두병에게 쫓겨 귀양 가는 처지에 놓인다.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가는 길은 한 가지, 어떻게 해서든 이두병을 제압하는 길뿐이며, 그것이 바로 효도이고 충성이다.
조웅은 나이 일곱 살에 이미 '남의 자식이 되어 어찌 불공대천의 원수를 목전에 두고 그저 있사오리까?'를 선언하며, 황제가 자기를 총애하여 불러들이자
'벼슬 없는 어린아이가 궐내에 오래 있으면 국정에 미안하옵고'를 말할 줄 아는 인물이다. 코흘리개의 말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점잖은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
부분이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를 아주 명확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에서는 남녀의 정욕을 수긍하면서 자유로운 교제를 옹호하는 듯한 반유교적 성향을 보이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엄격한 유교 윤리를 실천해 보이고 있다. 조정인 부자의 충성과 효도, 장소저의 열(烈)이 한데 어우러져서 충 - 효 - 열의 3대 유교 덕목을 고스란히 펼쳐 보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은 유교 이념으로 중무장한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까지도 아우들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 <조웅전>의 성과와 한계
<조웅전>의 인기 요인은 매우 복합적이다. 우선, 근본적으로는 한 인간, 한 가문, 한 국가의 몰락과 회복을 둘러싼 영웅담이어서, 결국 대중들의 위안이며 꿈이 되기에 안성맞춤이다. 거기에 남녀의 사랑 이야기까지 결부해 놓고 보면, 흡사 현대 영화를 한 편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흔히 그렇듯이 주인공이 한 가지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애인을 찾고, 집안을 일으키며, 국가적인 위기도 극복하는 것이다. 게다가 작품 중간중간에 드러나는 장소저와 조웅의 어머니가 겪는 고난 역시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공감이 갈 법한 내용이다.
싸움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온갖 소무를 감내해야 하는 쪽은 오히려 여성들이었다. 화려한 결말을 담보로 고생을 극대화하여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충 - 효 - 열 같은 유교적 덕목을 강화한 점 역시 독자층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런 익니가 단순히 그럴 듯한 스토리에만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소설에는 다른 어떤 고소설도 다르기 힘든 사실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용 자체만으로는 상당히 허황된 것처럼 보이지만, 세부 묘사나 내면 심리 서술 등에서 독자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기교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주제나 사상이 전근대적이라는 약점을 내보이고 있는 것과 달리, 적어도 소설을 소설답게 써내려가는 기법 면에서는 근대적인 면을 상당히 갖춘 수작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적과의 전투 장면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이 점에 대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소설 속에 그려진 세상이 실제 현실인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는 데 성공했다는 말이다.
- 이강엽, 고교 독서평설(통권 110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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