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근은 김중업과 함께 한국현대건축의 1세대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이 우리의 건축문화에 기여한 범위를 모두 열거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지 모르나, 그 동안의 활동 년대를 대별하여 그분의 작품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ꋼ1960년대 : 「 조형의지의 진솔한 표현시대 」라 할 수 있는 이 시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힐탑바(61), 자유센타(63), 타워호텔(64), 부여박물관(67)KIST본관(67), MBC건물(67), HAPPY HALL(69) 등이 있다. 특히 힐탑바, 타워호텔의 대담한 구조적 형태표현과 분명한 조형미는 그 시절, 젊은 건축가가 국내 건축계에 던지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건축가 자신에게는 커다란 자부심을 획득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또한 부여박물관으로 인한 전통성 시비 여부는 아직도 우리곁에 남아있는 토론의 한 대상이며 전통계승의 건축적 숙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으로, 그 당시 큰 파문을 일으킨 작품이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ꋼ1970년대 : 「 조형의지의 완숙미와 자기어휘 」에의 고집이 뚜렷했던 시기로 해석된다. 70년대초 공간사옥(71)을 필두로 서울대 예술관(74), 덕성여자대학 캠퍼스(76), 마산성당(77), 문예회관(77), 샘터사옥(77), 해외개발공사(77)등으로 이어지는 작품행로 위에 건축적 어휘에의 자기정립은 물론, 작품의 성격을 틀잡은 건축활동의 가장 중심지대가 되어지고 있다. 특히 공간사옥이 주는 이미지와 그가 확보한 건축적 위치는 바로 건축가 자신의 품위와 공간감, 건축적 자기철학을 세심히 대변하고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곳은 그분의 작품활동의 생산무대였고, 이같은 공간의 품속으로 많은 건축에의 열망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며, 끊임없이 밤낮을 밝힌 이 작업공간을 기억하는 많은 後者들이 꾸준히 서로의 교류를 계속하고 있는 一面 또한, 그 분이 남긴 교육적 큰 영향과 연결지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ꋼ1980년대 : 年代初에서 현재에 이르는 작업 속에서는 70년대의 기본어휘와 그 범위를 확대 수용해 가는 암시적 몇몇 작품이 돋보이고 있다. 공릉사옥(85) 및 국민은행 전산본부(81), 법원청사(85), 뉴 자이안트 호텔(85)등 일연의 대규모 건축계획 속에서 70년대의 두터운 어휘를 깨는 새로운 기법들이 엿보이고 있다.
이 밖에 무수한 작품활동에 대한 문화적 가치는 작품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와 함께 다시 한 번 강조될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이같은 왕성한 활동에의 흐름이 비단 건축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80년대 초에 이르러 범위 없는 미적 안목으로서의 시야를 형성하며, 건축의 문화적 가치상승의 범위를 넓히려는 소중한 Master Plan을 펼치게 된다. 바로 「 공릉예술Academy 」에 대한 구상이 그것이다. 건축수련의 장임과 동시에 문화적 전통이 숨쉴 수 있는 마당의 유입과 창작에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그분의 후반기의 계획을 현실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분의 가늠할 수 없는 뜻의 행진이 영면의 땅속으로 함께 사라져 갈 수 없듯이, 좋은 환경을 향한 의미 있는 행위에의 열정이 결국은 더 좋은 환경을 위해 보다 짙은 거름이 되어지는, 이같은 행위의 교훈적 모습이 진실의 폭을 넓혀갈 때 이 땅의 건축적 토양은 더욱 윤택해 질 것이고, 더부어 자란 수목의 꽃가루와 열매의 향기는 더욱 짙어져갈 것이라 믿는다.
1960년 김수근 교수가 우리나라에 되돌아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같은 해 국회의사당 건축현상설계 1등 당선이었다. 그 자신 이미 일본에서의 수학과 훈련을 마치고 귀국의 동기를 찾고 있었으며, 이 당선은 개연적인 귀국조건이 되었으며 그 후 그의 우리 나라 건축계에서의 위치조차도 가늠케 하는 것이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는 이 60년대의 우리나라건축은 대체로 모더니즘을 경험하여 내고 난 뒤, 새로운 구미건축의 동향에 대해 눈을 드리기 시작한 경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그때까지의 건축적 성과란 시민회관, 신신백화점(53년), 국제극장(57년), 대한극장(57년), 서강대 본관(58년), YMCA(60년), 한국은행 외국부(60년) 등의 합리주의 건축의 범주와 김중업씨의 주한 프랑스대사관(60)등 그가 르꼬르뷔제의 영향을 벗으며 한국적 표현에 몰두하던 시기이다. 이른바 제삼세대의 건축이념과 지역적 관심을 중심으로 기계적 기능주의 다음의 새로운 합의점을 두루 찾고 있던 시기이었다.
다시 말해 김수근 교수가 돌아오게 되는 우리 나라의 여건은 국회의사당의 설계가 아니더라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충분한 활동의 범위가 보장되어 있는 것과 같으며, 국내 건축계로서도 어떠하건 새로운 전개를 마련하여야 할 기미가 완숙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그의 현상 당선안인 국회의사당이 구현되지 못하고 좌절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작가를 이해하여 가는데 있어서 경향계보로 분류하며 고찰하는 형식은 시간적 맥락중에 推移와 그 動機를 분명히 할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김수근 교수의 작품계보에서 역시 그를 맥락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적 스케일 속에 작품개념의 변모가 작업에 나타나는 양상을 중심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를 뒷받침하고 있던 조직의 성향은 그와 공간그룹이라는 총체성을 보다 가깝게 이해하는 중요한 인자가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보다 직접적인 관심은 공간과 스케일을 중심으로 한 전통해를 찾고 있었으며 이의 표현이 1971년부터 원서동 공간사옥에서 결집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공간의 의도된 위계를 통해 트임과 막힘, 스케일의 제어와 확대, 그리고 연속적으로 풀리는 마디의 뚜렷한 인지로서 건축적 품격의 표현이었다. 같은 해 범태평양건축상을 수상하여 연설하게 된 窮極的 空間이라는 명제는 그의 공간적 이해를 전통에서 어떻게 찾고 있는가의 직접적인 메시지로 기억된다.
60년대의 자기표출적 건축이 70년대 원서동 공간시기부터는 內密의 경지로 돌아왔다. 이는 끊임없이 안으로 관조하는 사고과정에서 그의 공간세계는 침착하게 되고, 디테일이 예리하게 되며, 표현은 순화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동안의 그의 사고과정을 좀더 직접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1980년 일본동경에서의 UIA아시아․ 호주지역 회의에서 연설한 Negativism을 되돌려 볼 필요가 있다. 이 연설에서 그는 71년 범태평양건축상 수상 연설에서의 궁극적 공간이라는 의미를 다시 환기시키며 시작하고 있었다.
환경의 책임있는 조정자로서 그리고 진실로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킬 건축이 궁극적 목표일 때, 그의 방법은 윌 전통에서 경험된 사색과 영감을 통해 터득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정신적 삶을 위한 필수요건으로 좀더 인간생활을 완전하게, 좀더 의미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 속에서 저는 중요한 것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즉 공간설계를 인간화하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지속되어 내려온 한국인의 고정관념입니다. 그런데 최근 10년 동안에는 그 이전의 생각에 대해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무한정된 요구를 충족시키며 그와 함께 지구상의 모든 것 이 인간화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다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고양시키기 위해 해야 할 것 뿐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가르쳐 줍니다.”
그는 이것을 부정론이라고 하여 원초적으로 동양정신과 서구의 합리적 공리주의의 한계를 비교하면서 건축에서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었다. 첫째 주공간의 제한, 둘째 공간이용의 논리성, 셋째 설계의 역할이라는 법을 첫째자연과의 혼화, 둘째 빈터의 생명을 아낌, 셋째 이상과 창조를 위해 모호하게 남길 여유라는 「術」.
모태적 공간이란 이 표현과정에서 결말로 내보인 뜻이지만, 그가 원서동 공간에 이르기까지 전원과 자연에 대한 어떤 터득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에게 있어서는 이전에 있지 않던 주제의 경험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3개의 종교건축으로서 1978년 마산 양덕성당으로부터 80년 경동교회, 그리고 85년 불광동 성당이다.
마산성당을 처음 프로포즈 받을 때만 하여도, 그는 자신이 크리스챤이 아닌만치 그가 이 작업을 맡을 것인가 조차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작업이 단순하게 성서에 입각한 신학적 해석의 토대만은 아니며 오히려 소박한 인간공동체를 위한 공간으로 함축될 수 있고, 이러한 개념이 그가 계속 추구하여온 인간중심의 공간과 걸맞는다는 이해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를 화해, 축제, 다원성, 환경이라는 계획적 이념으로 바탕하여 작업에 임하였다.
결국 그의 해석은 교회건축이 신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는 공동체 인식의 문제로 귀결하고 공동체 인식의 개념이 스스로 산을 존재시킬 것이며 구성원 모두의 영혼을 소생시킴과 동시에 이를 둘러싼 환경을 밝고 맑게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내적 개념은 그의 매우 명확한 심증이기도 하나, 한편 이 마산성당을 필두로 하여 경동교회, 불광동성당은 그의 표현적 자아를 억제할 수 없어 표출해 내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이 기회를 그는 종교와 함께 만났는데 그것은 70년대의 작품경향이 어느 면에서는 다양해졌으며 동시에 자기제어 과정을 거치는 듯한 성향과 대비되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공간그룹의 구성원이 다원화체계로 이루어지고, 여기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의사수렴과정이 보편성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7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지고 몇 개의 주택, EXPO전시관, 그리고 해외주거 프로젝트들, 대학건축, 업무건축, 문화시설 등의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다원한 조형형식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느 의미 있는 작가에게서나 그럴 수 있듯이, 공간그룹도 역시 대형 프로젝트의 기회가 쉽지 않은 반면, 빛나는 성과는 오히려 우촌장, 창암장 등의 주택과 한국문예진흥원 전시관 및 극장, 해외개발공사 등 중소규모의 건축에서 보다 많이 거두어졌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하나의 자신감에 넘치는 대형 프로젝트인 남서울 대운동장 종합계획이 현상설계에서 당선되었다. 스포츠 시설이라는, 일반적 상식으로는 그 표현적 바탕이 쉽게 기대되지 않은 이 경우에서, 그는 80년대에 이르는 건축과정을 통해 획기적인 모뉴멘트를 만들어 내었다. 그 거대한 덩치의 스타디움이 그렇게 부드러운 양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은 그만이 내포하고 있는 대담성과 섬세함, 논리와 감수성이라는 양면성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와의 대화나 생활에서 간혹 어떤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매우 성큼한 스케일과 매우 미세한 뉴앙스를 동시에 느껴야 하는 거소가 같은 것이었다
1981년에 이루어진 국민은행 전산본부와 합숙소는 한 개 대지에 2개의 기능이 수용되며 조형의 방법자체가 의도적 대비를 드러내게 하였다. 간선도로변의 전산본부가 극단적인 담백함을 지키고 있는데 비해 후면의 주거동은 극히 복잡한 디테일의 기교가 충만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건축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작품과에 또 다른 변모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관능적 표현이 제어되어 상대적으로 無調한 단순성을 나타내는 경향이다.
물론 80년대에 이르러서도 전술한 종교건축이외에 춘천 어린이 회관, 광명시청사, 설악 휴게소, 워싱턴 대사관저, 인도 한국대사관 등의 공간적 표현 경향들이 병존하나 서울예술센타 프로젝트, 인천상륙작전 기념관과 같은 대조가 같이 있는 것이다.
국민은행 전산본부와 연관하여 올림픽 실내경기장의 High Tech로서의 가능성, 그리고 준비를 시작한 컴퓨터 응용디자인은 그의 새로운 이데아의 준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다음 공간적 실험은 공릉공간사옥을 마지막으로 하게 되었다.
공장과 같은 느낌, 아마 이것이 원서동 공간사옥에 상대하는 개념이었는지 모르나 그것은 Negatevism에서 천명한 내외가 윤리적으로 통합된 공간, 공간의 가변성을 담을 형식, 그리고 氣分공간을 남기면서도 현대의 기술적 가능성들을 외면할 수 없는 개념의 근처에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김수근 교수는 그 자신이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패트런 역할 또한 중요하게 인정되어 왔다. 이는 그의 매우 광범위한 예술분야에 대한 흥미 정도를 넘어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인 것이었느냐는 공간그룹 체계자체가 이미 잘 말하여 주고 있다.
1966년 8월 종합예술지 空間을 창간하여 이미 그의 의지는 확고하게 드러나나, 그 자신이 발굴하였거나 또는 중요한 동기를 만들어 준 현대예술과 전통예술의 성과는 헤아릴 수 없다. 언젠가 이러한 그의 너무나 광범위한 의도와 욕구를 일본인 친구가 마스타베이션에 비유하자 그 자신이 가가대소했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에게는 철저한 自己愛와 理想愛가 공존하여왔던 것 같다.
그러나 건축이 예술이 아닌 만치 의미만은 아니고, 건축이 방법만은 아닌 만치 기술이 아니라는 간곡한 설득은그의 조형론의 기본이자 대학의 교실에서 빼놓지 않는 교훈이었다.
또한 건축가가 전문인이 아니어야 되는 이유를 간곡히 말하여, 문제의 포괄적 해석자로 이해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적 갭은 비단 우리의 교육환경에서 뿐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서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고 보인다.
한국건축가협회장, UIA이사, AIA명예회원, 수많은 위원회 참여를 거쳤으나 마지막까지도 사회의 인식부족과 대중적 한계를 안타까워하였다.
건축과 예술의 사회적 맥락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해되나, 동시에 이의 타파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그에게 있어서도 큰 벽이었다. 이것이 그가 가고 난 이제, 우리의 건축사회가 보다 진보적인 진화를 위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과제의 첫째이다. 또한 이것이 그가 가고 난 이제, 그렇게 두텁지 않은 우리나라 건축가의 계층구조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기를 어떻게 맞느냐 하는 염려이기도 한 것이다.
1969년부터 김수근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문제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생활공간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건축이 어떻게 하면 자연환경의 균형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연과 기계와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이다.「건축행위가 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말이암아 어떤 부정적 결과가 야기」되는가, 이런 「부정적 측면도 아울러 고려」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요구조건만이 아니라 자연의 필요조건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건축사상을 그는 「네가티비즘」이라고 표현했다.
『네가티비즘이 시사하는 공간개념들은 세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생활공간의 한계성에 관한 것으로, 둘째는 공간의 이용을 계획하고, 공간을 설계하는데 관계되는 윤리문제에 관한 것으로, 그리고 섯째는 공간설계에 있어서 공간의 기능과 양식 또는 형태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980년,「네가티비즘」에서>
『네가티비즘의 공간개념들
1. 생활공간의 한계성 : 소모되지 않은 자원이 무제한 공급 될 수 없다.
가. 적정공간: 필요이상의 공간을 차지해서는 안된다.
나. 자연공간: 이용 한계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2. 공간이용의 윤리문제: 남에게 미치는 해를 고려한다.
가. 통합공간: 제한된 공간의 안과 밖이 다 같이 좋은 목적을 위해 이용이 될 수 있는 공간
나. 공유공간: 이용공간을 줄이고, 공유공간을 최대한 늘인다.
3. 공간의 기능과 형태: 기능주의의 한계와 차기능적 요소를 의식한다.
가. 기분공간: 어떤 고정된 기능에 얽매이지 않는 공간
나. 자궁공간: 구조적 가변성을 갖고 있는 공간.』
<1980년, 「네가티비즘」에서 요약 인용>
네가티비즘적 사고는 결코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있어 온 한가지 유형의 사고방식을 당면하고 있는 환경문제와 관련시켜 봄으로써 건축행위를 더욱 더 책임감있는 행위가 될 수 있게 하자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김수근은 제안의 뜻을 밝히고 있다.
이제 구체적인 몇가지 사례를 통해서 그러한 변모가 어떤 의미를 띠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 경동교회 : 도시의 좁은 가로변 대지에서 본당에의 우회전입으로 과정적 공간을 둔 것은 마산성당에서도 성공했던 기법이다. 옥상의 노천 예배실을 둔 것은 희귀한 착상으로서 기능적 의미와 함께 공간의 연출 또한 적절하다. 형식에 대한 장인적 집착은 외벽재료로서의 벽돌을 깨뜨려 사용하게 했으며 기도하는 손을 직설적으로 암시하는 외관과 함께 비극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주변의 문맥과는 전적으로 대조되는 소외된 자족적 체제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광명시청사 : 내부공간의 친밀감과 밝고 유쾌한 처리에 비해 외관은 일본의 「이소자키」의 작품들처럼 긴장된 표정을 보인다. 특히 진입측의, 민원실 부분의 정면은 「키타큐슈미술관」이 보여주는 불안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것은 다분히 공격적인 외관이며 민원실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외관과는 거리가 있다. 편안하거나 익숙하다기 보다는 자기를 내세우는 목청이 다소 크게 들리는 외관을 갖고 있다.
● 진주박물관과 인천상륙작전기념관 : 돌의 벽면처리에 의한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전자는 보다 여유있는 진입과 옥외의 조경을 통해서, 그리고 후자는 대지가 갖고 있는 강한 축을 극대화시키면서 몇 개의 단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있다. 동선의 가름과 모임이 밝은 돌벽의 빛과 경사로 등으로 맺어지면서 공간경험의 점진적 고양을 노리고 있다. 단, 양자 모두 중심이나 최종점의 경험의 매듭이 산만해져 버린 아쉬움이 있다. 진주박물관에서는 중앙전시실을 가로지른 경사로가 그 요인이며, 「인천」의 경우에는 최상부의 맥아더 동상부분이 절정으로서의 공간집약이 약하게 느껴진다는 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두 건물 모두 기념비적인 당당함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천주교 불광동 교회 : 동일한 구성의 마산성당이나 경동교회에 비해 훨씬 절제된 형식으로 외벽을 처리하고 있다. 기도하는 손의 모습이 거의 추상화되었으나 그러면서도 충분한 연상을 불러 일으킨다. 외관에서의 동일 모티프의 반복이 결국 형식화의 경향을 드러낸다. 경동교회보다는 한결 긴장이 덜하여졌으나 주변을 압도하는 조형의지만은 여전하다.
● 공릉 공간신사옥 : 숭고성을 향한 극한적인 재료처리가 두드러지고 있다. I형강을 세운듯한 외벽의 기둥들은 실은 콘크리트 기둥을 싸고 있는 철판을 접은 것에 불과하다.
실내의 작업공간은 둘레의 넓은 유리에 의한 트인 조망에도 불구하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으며 그 주된 원인은 모든 가구를 검은 색으로 통일시켜 버린 실내 처리 때문이다. 이곳은 건축에 삶의 모든 것을 걸고 일할 각오가 되어 있는 수도사적인 젊은이들의 터전답게 많은 것의 희생을 건축을 통해서도 드러내고 있다. 위층의 볼트형 천창조차도 낮은 천장부분의 노출콘크리트 주두부분과 함께 명랑한 분위기보다는 진지하고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 밖에 「한국바이엘 사옥」과 과천의 「서울대 공원본관」 및 「국민은행 전산본부」등의 재료와 조형적 처리는 ‘80년대의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시도들은 그간의 「공간그룹」의 경향에 익숙해 있는 이들에게는 거의 완전한 변신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사상의 문제에 대한 요약
창작예술가로서 그 전성기에 있어 사람과 사상전체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술적 창작의 바탕이 될 사상문제는 역시 자기의 사상이 형성되는 젊은 시절에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교육이 사상교육과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뜻한다. 김수근 자신도 이런 면에서 부족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가 자신의 사상문제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런데까지 대화가 발전해가는 것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언의 대화속에도 사상의 문제는 서로가 의식하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우리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때에는 부드럽고 수용적인 나의 태도가 사상의 문제에 관해서는 단호해지고 지배적으로 되는 것이 아마 그에게는 이상하고 거북하게까지 느껴졌을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의 Negativism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사상적 문제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때에도 그의 관심은 건축분야에서의 사상으로 Negativism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문호현상 전반에 관한 사상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도가의 사상을 오늘의 문화현상에 다시 살려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창작에서만이 아니라 생활일반에서까지 적용되어야 할 사상이라는 뜻이었다.
Negativism은 그것이 하나의 윤리적 기준으로 나타날 때는 절제를 뜻한다. 남보다 무엇이든 3배를 더 살았다고 한 그 자신의 말처럼 그의 생활은 풍부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제가 필요했었다. 종교인에게만 절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에게도 과학자에게도 절제는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전문적 수행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절제는 인간의 모든 분야활동에 적용되는 소극적 가치기준이다. 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제한성이다. 자연을 거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오늘 우리 인류에게 다시 인식되는 도가사상의 교훈이다. 그는 그러한 자연의 제한성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패기와 의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Negativism의 필요성을 다시 말해준 것이다. 예술가의 생애와 창작에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문화적 창조의 바탕이 될 사상은 소극적인 것만으로 충분할 수 없다. 적극적 의미를 갖는 사상적 바탕도 있어야 한다. 무엇을 어디까지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제한적 가치기준도 필요하지만, 무엇을 위하여 창작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지향적 가치기준도 필요하다.
김수근씨는 우리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찾고 지켜나가는 것을 창작의 사상적 바탕으로 했다. 이것은 그의 작품들에서도 나타나고, 공간사를 중심으로 한 종합예술적 활동에서도 드러났다. 이것은 민족주의 예술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한 민족주의는 너무나 당연한 사상적 선택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오늘 우리시대의 예술가라면 누구나 당연히 민족주의적일수밖에 없다. 차라리 반민족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특별히 강조하게 되면 필요없는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민족주의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더라도 오늘 우리 예술가들의 창작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적극적 사상의 바탕이 민족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오늘의 우리 예술가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김수근씨에게도 이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민족주의의 불충분성을 무엇으로 보충하느냐에 있다. 서양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에게는 종교적 구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시대적 가치기준이 있었다. 하나님 중심의 역사를 인간중심의 역사로 회복시키는 과업이 있었다.
그것은 그 시대의 모든 인류에게 호소할 수 있는 사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면 우리의 르네상스가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내놓을 수 잇는 사상은 무엇인가?
김수근씨는 마산성당을 비롯하여 경동교회와 불광동 성당등을 설계하면서 이러한 사상적 문제를 의식했던 것이다. 그 무렵부터 이러한 사상적 문제를 의식했던 것이다. 그 무렵부터 우리의 대화에는 그런 사상적 문제가 언급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그 사상적 방향에 대한 것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새대를 모든면에서 진정한 평등화를 추구하는 시대로 보자는 사상이었다. 모든 민족의 문화가 평등한 대우를 받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평등한 문화적 혜택을 받게하는 시대적 정신을 표방하는 사상을 말했다. 나는 이런 사상문제에 관한 우리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것이 김수근씨의 작품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표현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원숙한 단계의 그의 작품은 그런 사상적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은 또한 우리의 르네상스를 이끌어갈 적극적 사상이 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꿈같은 우리의 이야기에도 등장해보지 못한 것이었으니 나 혼자만의 꿈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심 사 > 잡다한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수근 - 궁극공간(Ultimate Space) (0) | 2009.08.03 |
|---|---|
| 김수근 - 건축배경 (0) | 2009.08.03 |
| 녹색성장과 맞물려 가능성 확인 … 고부가·세계화·미래식품 선보여 (0) | 2009.08.01 |
| 쌀의 종류 (0) | 2009.08.01 |
| 올게쌀 (0) | 2009.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