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흔히 우주가 어떻게 하여 생겼으며, 어떻게 오늘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 '천지왕 신화'는 큰 굿의 맨먼저 시행되는 재차(祭次)인 초감제(初監祭) 때에 불리어진다. 초감제는 모든 신들을 청하여 제상 앞에 앉히고 음식을 들도록 하고 신에게 기원할 것을 비는 재차이다. |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이 세상은 암흑세상이었다. 하늘과 땅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맞붙어 있어서 암흑과 혼돈으로 되어 있었다.
이 암흑의 세상에 차츰 개벽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하늘의 한 끝이 자방(子方)으로 열리고, 을축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땅의 한 끝이 축방으로 열려 하늘과 땅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금이 점점 벌어지면서 땅 덩어리에는 산이 솟아오르고 물이 흘러내리고 해서, 하늘과 땅이 따로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 때 하늘에서는 청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물이슬이 솟아올라 이 세상에는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별이 제일 먼저 생겨났는데, 동쪽에는 견우성, 서쪽에는 직녀성, 남쪽에는 노인성, 북쪽에는 북극성,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에는 삼태성 등 별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암흑의 세상은 면치 못했다. 거기다가 동쪽에는 청구름이 감돌고 서쪽에는 백구름이 감돌았고 남쪽에는 적구름, 북쪽에는 흑구름이 머흘었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에는 황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이 때 천황닭(天皇鷄)이 목을 길게 빼고, 지황닭(地皇鷄)이 날개를 툭툭 치고, 그리고 인황닭(人皇鷄)이 소리를 크게 내어 우니 먼통이 트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해도 둘, 달도 둘을 보내어 이 세상은 광명의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질서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는 해도 둘, 달도 둘이 떠 있어서 낮에는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고, 밤에는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땅위에 있는 동물이나 식물은 모두 말을 하고 귀신과 사람의 구분이 없어서 사람을 불러도 귀신이 대답하고, 귀신을 불러도 사람이 대답하여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천지왕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러한 무질서를 바로 잡아야 할 텐데 묘안이 없었다. 천지왕은 밤낮으로 이런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생각한 끝에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 가운데 하나씩을 입으로 삼키는 꿈이었다. 천지왕이 곰곰 생각하니 이 꿈은 아무래도 이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을 아이를 얻는 태몽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생각한 천지왕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내를 맞이하기 위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 지상에는 천지왕과 결혼을 할 수 있는 총맹왕 총맹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지왕은 총맹 부인을 찾아갔다. 총맹 부인은 아주 가난하여 천지왕을 저녁 한 끼도 대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처럼 맞이한 천지왕을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수명장자에게 쌀을 꾸러 갔다. 수명장자는 마지 못하여 쌀을 꾸어주었지만 쌀에다 흰 모래를 한 되 섞어서 꾸어주었다. 총맹 부인은 그래도 고마워서 몇 번이나 그에게 절을 하고 돌아와서 그 쌀을 아홉 번씩 아홉 번이나 씻어 밥을 지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차린 밥상을 총맹 부인은 천지왕과 마주놓고 앉았다.
천지왕은 흐뭇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첫숟가락부터 돌이 씹히는 것이었다.
"어허, 이거 첫숟가락부터 돌이라니."
천지왕은 돌을 골라내며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천지왕님, 죄송합니다. 사실은 저희 집에 먹을 쌀이 없어서 수명장자한테 쌀을 꾸러 갔더니 쌀에다가 흰 모래를 섞어 주어 아홉 번씩 아홉 번이나 쌀을 일어서 밥을 지었는데도 어떻게 잘못하여 돌이 그만 들어갔나 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천지왕은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수명장자에 대하여 낱낱이 캐어 묻기 시작했다.
"무엇하고 사는 사람인가?"
"돈놀이를 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곡식도 빌려주는가?"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쌀을 꾸러 가면 흰 모래를 섞어 주고, 좁쌀을 꾸러가면 검은 모래를 섞어 줍니다. 그리고, 작은 말로 꾸어가면 큰 말로 받아들여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허허, 이거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나."
"그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김을 매게 될 때 점심을 먹게 되면 맛좋은 간장은 저희들끼리만 먹고, 고린내 나는 간장을 일꾼들에게 주곤 합니다."
천지왕은 기가 막혔다.
"어허, 괘씸하도다! 수명장자 이놈, 이럴 수가 있나. 벽력장군 내려보내라. 벽력사자 내려보내라, 우레장군 내려보내라, 우레사자 내려보내라. 화덕진군 내려보내라."
천지왕이 이렇게 외쳐대자 곧 하늘이 무너질 듯이 요란하게 우레소리가 나며 번개가 번쩍번쩍하더니 수명장자의 그 으리으리한 집을 금방 태워 버렸다.
천지왕은 수명장자의 아들 딸에게도 벌을 주었다. 딸은 가난한 사람들을 못 살게 굴었으니 부러진 숟가락을 엉덩이에 꽂아서 팥벌레가 되게 하고, 아들은 말이나 소에게 물을 주지 않아 목마르게 하였기 때문에 솔개가 되게 하여 비 온 뒤에 꼬부라진 주둥이로 날개에 있는 물을 핥아먹도록 했다.
이런 뒤에 천지왕은 총맹 부인과 결혼을 하고 며칠 뒤에는 하늘로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천지왕은 하늘에 오르면서 아들을 둘 낳을 테니 큰아들은 대별왕이라 이름을 짓고, 작은 아들은 소별왕이라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그리고 박씨 두 개를 주며 자기를 찾거든 박씨를 심어 그것을 따라 보내라고 말한 뒤에 하늘로 훌훌 떠나고 말았다.
그 뒤 총명 부인은 천지왕의 말대로 아들 형제를 낳았다. 큰아들은 대별왕이라 하고 작은 아들은 소별왕이라 불렀다. 두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하여 어느덧 서당에도 다니게 되었는데 친구들로부터 '애비없는 후레자식'이란 놀림을 받게 되어 아버지 없는 것이 그들은 늘 한이 되었다.
그런 어느날 아이들은 총맹 부인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확연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끝까지 졸랐다. 그제야 총맹 부인은 지난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했다.
형제는 아버지가 두고간 박씨를 심었다. 박씨는 금방 싹이 나고 넝쿨이 뻗어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갔다. 그들은 아버지가 박씨를 주고간 것은 이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오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박줄기를 붙들고 하늘로 올라갔다. 박 줄기는 바로 천지왕 용상의 왼쪽에 칭칭 감겨져 있었다. 용상은 금빛이 번쩍번쩍하고 휘황찬란한 의자였다. 형제는 이 용상이 멀지않아 제 차지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형제는 용상에 걸터 앉았다.
"이 용상아, 저 용상아. 임자를 몰라보는구나."
형제는 신이 나서 용상을 힘껏 흔들면서 외쳤다. 그랬더니 그만 용상의 왼쪽 뿔이 부러지면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나라 임금님은 왼쪽 뿔이 없는 용상에 앉게 되었다.
잠시 뒤에 천지왕이 나타났다. 아들을 본 천지왕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이제야 이 세상의 혼돈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대별왕에게는 이승을 맡겨주고, 소별왕에게는 저승을 맡겨 주었다.
대별왕은 아버지 말대로 하려고 하였으나 소별왕은 불만이 컸다. 이승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소별왕은 한동안 침통하게 앉았다가 한 꾀를 생각해냈다.
"형님, 아버님 말씀대로 그냥 땅을 맡는 것보다는 수수께끼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이승을 차지하기로 하면 어떨까요?"
"아무렇게나 하려무나."
대별왕은 소별왕의 제안을 따랐다. 소별왕은 무척 기뻐하며 형에게 먼저 수수께끼를 내라고 했다. 대별왕은 소별왕의 말대로 형이 먼저 수수께끼를 내었다.
"어떤 나무는 왜 사철 잎이 지지 않고, 어떤 나무는 왜 잎이 지느냐?"
"오곡이란 것은 마디가 짧아서 사철 잎이 지지 않고, 속이 빈 나무는 잎이 집니다."
"그런 소리 말아라. 청대와 갈대는 마디마다 속이 비어 있어도 잎이 지지 않는단다."
동생이 그만 지고 말았다. 다시 형이 물었다.
"왜 언덕에 있는 풀은 잘 자라지 못하고, 언덕 아래에 있는 풀은 무럭무럭 자라느냐?"
"이삼 사월 샛바람에 봄비가 내리니 언덕의 흙이 낮은 쪽으로 흘러 내려가서 언덕의 풀은 잘 자라지 않고 낮은 데의 풀은 잘 자랍니다."
"모르는 소리 말아라. 그렇다면 왜 사람의 머리에 있는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고 발등에 있는 털은 짧게 자라느냐."
이번에도 동생은 할 말이 없었다. 또 진 것이다. 그러니까 동생은 다시 꾀를 냈다.
"형님, 그러면 꽃씨를 심어서 꽃을 잘 피게 하는 쪽이 이승을 차지하고, 꽃을 시들하게 피우는 쪽이 저승을 차지하는 게 어떻습니까?"
대별왕은 그것도 좋다고 했다. 둘은 지부왕을 찾아가서 꽃씨를 얻어다가 심었다. 꽃씨는 곧 새싹이 돋아나서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웠다. 그런데 대별왕이 심은 꽃씨는 꽃송이를 수도 없이 많이 달고 예쁘게 꽃을 피웠는데, 소별왕이 심은 꽃씨는 어쩐 일인지 꽃도 제대로 피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소별왕은 얼른,
"형님, 누가 잠을 오래 자는가 시합합시다."
"네 마음대로 하려므나."
형제는 잠을 자기 시작했다. 형은 얼마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졌으나 동생은 자지 않았다. 동생은 형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형의 꽃을 갖다 자기것과 바꾸어 놓았다.
"형님, 이제 그만 자십시오."
형은 동생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보니 자기 앞에 있던 꽃은 동생 앞에 가 있고 동생의 꽃은 자기 앞에 놓여 있었다. 형이 속았다. 진 것이다. 이래서 형은 저승을 차지하고 동생은 이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소별왕아, 네가 이승을 차지해도 좋다마는 인간 세상에는 온갖 죄악이 다 있느니라. 도둑도 많고, 살인도 많고, 간음도 많고, 역적도 많으니 모두 잘 다스려야 하느니라."
대별왕은 저승으로 가면서 이렇게 분부를 했다. 소별왕은 이승으로 내려왔다. 그랬더니 과연 말이 아니었다. 하늘에는 해도 둘, 달도 둘이 떠서 백성들이 더워서 견딜 수 없고, 밤에는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온갖 생물이 다 말을 하여 세상이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귀신과 사람의 구별도 없어서 사람을 부르면 귀신이 대답하고 귀신을 부르면 사람이 대답하기도 했다. 이런 판국에 사람들은 또 온갖 죄를 다 저질렀다.
소별왕은 이 혼란을 어떻게 바로 잡을까 걱정이었다. 며칠이고 생각을 거듭했으나 좋은 묘안이 나오지 않았다.
'옳지, 형에게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여야겠다.'
소별왕은 이렇게 생각하고 대별왕에게 간청을 했다. 대별왕은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는 이승에 와서 먼저 화살을 준비하여 하늘에 있는 해와 달을 각각 하나씩 쏘아서 동해 바다에 떨어뜨렸다. 그래서 오늘날 하늘에는 해와 달이 각각 하나씩 있게 된 것이다.
다음에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가루를 만들었다. 그것은 모두 다섯 말 다섯 되나 되었다. 대별왕은 그것을 모아 세상에 뿌렸다. 그랬더니 모든 생물은 혀가 굳어져서 말을 못하게 되고 사람만이 말을 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귀신과 사람을 달아서 백 근이 되는 놈은 인간으로 내보내고, 백근이 되지 않는 놈은 귀신으로 두었다. 이로써 이 세상은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었다.
그러나 대별왕은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도 인간 세계에는 역적과 도둑과 간음 같은 것이 여전히 생기고 저승의 세계는 한결같이 공정한 세계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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