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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일보]백두산 동쪽 용정에 태극기 휘날리다

지식창고지기 2009. 8. 7. 14:07

백두산 동쪽 용정에 태극기 휘날리다

이강부 기자, cndnews@naver.com

등록일: 2009-08-05 오후 6:24:32

< 글 싣는 순서 >

□ 연변 조선족 이주 개황 □ 청산리 전투
■ 항일 운동의 근원지 용정 □ 국자가
□ 15만원 탈취 사건 □ 반일 유격대 건립을 위한 투쟁
□ 봉우동 전투 □ 일제의 패망과 8·15 광복


본지는 광복 68주년을 맞으며 중국 길림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항일 운동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중국에서 진행된 독립 운동사를 총 8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갈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소속된 용정시는 길림성 동부의 장백산(백두산)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북한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연길시와 서쪽으로 화룡시, 서북쪽으로 안도현과 인접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백두 산맥에 속하는 북부의 할바령, 서부의 영액령, 동남부의 남강산맥, 동북부로 길청령이 있으며 두만강과 부르하통하, 해란강, 구수하, 륙도하가 변은 버들과 갈대, 소나무가 어우러져 풍경이 몹시 아름다워 중국인들은 이곳을 태성루(泰成樓)라고 했다.
청나라 시대 봉금령으로 사람이 살지 않던 이곳에 봉금령이 폐지되자 조선의 농민들이 대거 무리를 지어 두만강을 건너 삶의 터전으로 황량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짖기 시작할 즈음 처음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만족으로 구성된 진주 채집자들이었으며 그 후 한족 농민들이 륙도하 양안에서 밭농사를 지어 이곳을 륙도구라고 한다.
조선족이 용정에 처음 들어온 것은 지난 1884년 장인석과 박인언이라는 농민이 처음으로 들어와 륙도구의 한족 농민에게 의지해 살았으며 해란강변의 땅이 넓고 비옥했으며 개간을 하기 위해 이른 봄에 버들과 갈대를 베고 불을 놓다가 지금의 용문교 동쪽에서 우물자리를 발견하고 이곳에 초가삼간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용정은 조선 사람들의 교통의 요지로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게사처(삼합촌)에 와서 다시 오랑캐령을 넘는 하룻길로 용정을 거쳐 해란강을 건너 비암산 넘어 평강벌이나 모아산을 넘어 연길평원으로 가는 길목인 것이다.
이렇듯 많은 길손들이 용정에서 하루를 묵어가거나 우물가의 한촌에서 우물물을 뜨기 위해 두레박을 마을에서 빌려야하는 번거로움에 한 주민이 우물곁에 말뚝을 박고 용두레를 묶어 길손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 마을 이름이 용두레 마을로 불리게 되면서 용정이란 지명을 갖게 됐다.
해란강 양안의 비옥한 토지는 조선을 떠난 이주민들이 정착해 터전을 가꾸기에 적합한 이곳으로 모여들어 숙박업소를 비롯한 음식점과 점포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지난 1907년까지만 해도 용정촌의 인구는 조선인 96세대와 한족 5세대로 총 400여 명으로 구성된 부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 1907년 8월 일본은 간도문제미해결과 조선인 보호를 내세워 연변지방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게 되며 마을에 급변한 변화가 일기 시작해 일본군경을 파견하고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고 중국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지난 1907년 8월 19일 일본군 중좌 사이토 스에지로가 이끄는 헌병과 군인 60여명은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용정촌에 들어와 이주 조선인들에게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다, 한인은 청국의 재판에 복종하지 못한다, 파출소는 청국 관헌의 압박으로 말미암아 한인들이 부듣불 바친 것으로 간주한다, 청국 관헌이 공포한 일체 법령은 파출소가 승인할 바 아니다, 청국 관헌이 임명한 도향약, 향약 등에 대해서는 한인과 마찬가지로 대해준다는 5개 항의 훈령을 공포했다.
이는 일본 헌병과 경찰들은 중국의 주권을 무시한 채 지난 1907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통감부파출소 관할하에 도사장제(都社長制)를 세우고 연변지구를 북소도, 무간산도, 종성간도, 회령간도 등 4개로 나누고 그 아래에 사와 촌을 설치했다.
이어 지난 1909년 11월 일제는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철수하고 간도일보총령사관을 설치했으나 1922년 화재로 전소됐으며 1926년 현재의 용정시정부청사부지에 총령사관을 설치하고 국자가, 투도구, 배초구, 훈춘 등의 통상지에 영사분관을 설치했으며 총영사관에 경찰서를 설치했다.
이들은 연변에 대한 침략활동을 강화하며 조선인 항일단체들의 항일운동을 탄압키 위해 영사관에 경찰부를 설치하고 영사분관에는 경찰서를 설치하고 일본 세력 확대에 주력했다.
이렇게 되자 용정을 관할키 위해 이곳에 상부국, 상부국순경국, 해관과 세연국을 설치하고 일제 세력에 대처하는 동시에 한족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나 지난 1911년 용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도시의 절반이 타버리자 일제는 당시 2만5000원의 자금을 투입해 구제회를 설립하고 부동산을 담보로 대부 사업을 시작하며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용정시장, 새시장, 세관촌시장, 49 금시장, 평양시장 등 5개의 시장에 대한 지난 1928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년 거래 총액이 80만2160원이며 농산물 거래 금액이 52만 3118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용정은 지난 1906년 이상설을 비롯한 이동녕, 정순만, 황달영, 김우용, 홍창섭, 려준, 박정서 등 항일민족운동자들이 들어와 기독교 인사인 최병익의 집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조선인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신문화와 함께 반일민족교육을 시작했으며 실제적으로는 명칭만 서숙으로 하고 실제로는 항일운동의 인재를 키우는 양성소였다.
그러던 중 지난 1907년 이상설이 고종의 밀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회의에 참석하게 되며 려준이 교장 대리로 학교를 운영하면서 경제난으로 운영이 어렵게 되자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가 월 20원의 보조금을 주겠다며 공동 운영을 제의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훈춘현 탑도구 부근으로 옮겨 74명을 배출하고 서전서숙은 문을 닫았다.
서전서숙은 비록 해산됐으나 국권회복을 위해 설립한 최초의 학교로 전통 서당 교육이 근대적인 학교 교육으로 넘어가는 첫 시작이며 서전서숙의 설립이 연변지구의 항일 운동의 발단이 된 것이다.
서전서숙이 해산되자 서숙의 교원들과 졸업생들은 연변 각지에 분산해 국권을 회복키 위한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전개 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명동, 창동, 길동, 정동 등의 사립학교인 것이다.
지난 1909년 서울기독교청년학교를 졸업한 정재면이 명동으로 와서 이곳에서 규암재와 소암재를 이끌던 김약연과 김하규를 설득해 서숙을 명동학교로 세우고 명동교회를 설립하고 서양의 민주주의와 과학 등을 가르쳤다.
이 지역에 사립학교들은 지난 1910년 이동춘, 김립이 교육으로 민족을 구하고 간도간민회를 조직하고 양정숙을 세웠으며 지난 1911년 세워진 길동학당은 후에 광성학교로 개칭하고 지난 1912년 오상근이 창동학교, 지난 1914년 영국기독교 선교사 박걸이 명신여자학교, 지난 1917년 은진중학교를 세웠다.
이렇듯 1910년대에 들어 용정촌을 중심으로 화룡현 호천포의 사립청파학교, 지신사 영암촌의 사립덕흥학교, 덕신사 장동촌의 사립장동학교 등이 이 시대에 세원진 학교들로 학생들에게 근대적 과학문화 지식과 철저한 반일 민족 교육을 실시해 항일 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했다.
항일애국지사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는 조선역사, 조선지리, 조선어문, 산수, 창가, 체육 등의 교육을 진행함으로 학생들을 항일 독립운동에 끌어들였으며 그들 속에서 수많은 항일 운동의 지도 간부와 독립군을 양성해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919년 3월 1일 실시된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용정에서 13일 교원과 학생, 군중들이 참여하는 반일 시위가 단행됐으며 이 시위를 기점으로 항일 운동이 대대적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연변문사자료와 조선족략사에 따르면 “지난 1919년 3월 13일 오전 각지의 학교 학생과 교원, 군중들이 용정에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화룡현 덕진사와 지신사 등지의 수천 명 군중들이 명동학교에 집결해 명동학교 학생을 선두로 대열을 지어 용정에 도착했을 때 평강 방면에서 온 수 천명과 합세해 명동학교 학생들을 선봉으로 일본 순사들을 물리치고 대회장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날 3만 명 가량의 군중들이 일본 영사관 옆에서 독립축하회를 열고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대회에 참가한 군중의 손에는 작은 태극기가 들려 있었으며 인근 천주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대회 부회장 배형직 목사가 대회의 개막을 선포하고 김영학 회장이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의 이름으로 작성한 독립선언 포고문을 우렁찬 목소리로 낭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용정 조선인 가옥은 일제히 태극기를 내걸었으며 만세를 외치며 용정 시가를 향해 행진할 때 군경의 발포로 10명이 사망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용정의 3·13 반일 시위는 지난 1919년 5월 중순까지 각지에서 집회와 시위행진으로 이어졌으며 통계에 따르면 연변 지방에서 총 54회의 집회와 시위행진이 있었으며 시위에 참가한 군중이 7만5500명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