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4](3)유구 세자 피살설의 영향
바닷길 헤맨 제주사람 "우린 탐라인 아니다"
[1부. 제주바다를 건넌 사람들]
입력날짜 : 2009. 02.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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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표착 외국 세자 잇단 살해설 표류민 위축
"내가 바다에서 표류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은 바다와 하늘이 서로 흔들리는 모습과 고기와 용이 나를 무섭게 하는 모습이었고, 귀에 들리는 소리는 부딪쳐 부서지는 사나운 소리와 중간에 생겨나는 우레 소리뿐이었소. 유구(琉球)의 호산도 해안에서는 왜구를 만나 내 혼을 잃었고, 구조 받은 배 안에서는 안남 사람들이 거칠게 죽이려고 들었소."(김봉옥·김지홍 역)
장한철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제주를 출발할 때만 해도 29명이 한 배에 올랐다. 그때가 1770년 12월 25일이었다. 1771년 5월 8일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은 장한철을 포함해 8명 뿐이었다. 귀환 직전에 표착했던 청산도 사람들이 베푼 인정은 꿈같은 일이었다. '표해록'을 보면 안남(베트남)상선에 구조되었을 때 위기를 맞는다.
▶"원수와 함께 배를 탈 수 없어"
1771년 정월 초이틀, 푸른 비단에 소매가 좁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탄 커다란 배가 제주 표류민을 구한다. 안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장한철 일행이 제주인이란 걸 듣고 태도가 바뀐다. 안남인이 필담으로 장한철에게 말한다. "옛날 탐라의 왕이 안남 세자를 죽이었으므로 안남 사람들이 그대가 탐라 사람임을 알고 모두 손으로 배를 갈라내어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소. 우리들이 만방으로 애써 타이르고 겨우 그 마음을 돌렸는데, 오히려 원수와 더불어 배를 함께 타고 건널 수 없다고 하므로, 그대는 응당 이제부터 길을 갈라서야 겠소."
표류민들은 '길 한가운데서 어린 아기가 어머니를 잃어버린'꼴이 됐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장한철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대개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제주 목사가 유구 태자를 죽였다고 하는데 유구가 아니고 안남 세자가 아닐까?" 유구는 지금의 오키나와다.
▶이중환 '택리지'에 한시 기록
제주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표착하면 출신지를 애써 숨기려 했다. 1611년(광해군 3) 제주에 표착한 유구국 세자가 탄 상선의 재물을 제주 목사 이기빈과 판관 문희현이 습격해 빼앗고 그들을 죽인 사건의 영향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다. 18세기에 쓰여진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죽서루 아래에 도도히 흐르는 물은 남은 원한을 실어 분명히 만 년 봄을 두고 오열하리라'며 죽기 직전 유구 세자가 남겼다는 한시를 소개해 놓았다. 20세기의 눈으로 제주도의 옛 지지를 조감하며 정리해놓은 '증보탐라지'에도 유구 세자의 죽음이 언급됐다.
하지만 다른 시각이 있다. 연암 박지원이 정조의 명에 따라 제주사람 이방익의 표류기를 담은 '남유록'에는 "탐라인으로 외국에 표류한 자들이 거짓으로 본적을 칭하기를, 영광 전주 강진 남해 등의 지방사람이라고 핑계된 것은 속전(俗傳)에 유구 상선이 탐라사람에게 해를 입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은 말하기를, 그것은 유구가 아니고 안남이라고도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그들 유구인의 시가 모두 실려있으나, 옛 기록으로 증거할 수 없고 단지 이는 세상에 흘러다니는 전설이므로 그 진위를 따질 필요는 없겠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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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록'의 역자인 김익수씨(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는 최근 논문을 통해 '유구 세자 피살설은 허구'라고 못박았다. 유구역사를 보면 산지천 부근에서 외국 대형무역선이 불탄 1611년 8월 중순에 외부에 점령된 유구의 왕자들은 가고시마, 나하 등에 있었다. 김익수씨는 실제 산지천에 표착했던 배에서 죽은 사람은 유구 세자가 아니라 수리귀족의 젊은이로 추정했다.
제주 사람 표류기에는 오히려 안남 세자 피살설이 몇차례 등장한다. 장한철의 '표해록'만이 아니라 1687년 안남에 표류했던 신촌 사람 고상영의 표류기에도 안남 세자가 조선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며 일행을 해치려 하지만 비단옷을 입은 어느 부인의 도움으로 살아남는 장면이 있다. 이들 일행은 당초 유구국에 표류한 줄 알고 제주에서 온 것을 숨기자고 말한다. 김익수씨는 안남 세자 피살설 역시 안남 사람이 배에 있던 게 와전되었을 것으로 봤다.
이들 피살설을 두고 한편에서는 조선정부가 표류민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일에 무지했다는 방증이라고 본다. 고상영이 안남에 표류했을 때 조선과 국교 관계가 없던 안남국은 인도적 견지에서 중국 상선에 부탁해 이들 일행을 회송했을 뿐만 아니라 교류를 원하는 공문까지 보냈다는 것이다. 단정하긴 이르다. 조선 정부는 표류 선박의 전말을 파악하지 못했고 유구나 안남 세자 피살설이 잘못 알려지면서 해외에 표류된 제주섬 백성들이 지레 겁을 먹은 것일 수 있다.
/백금탁기자 gtbaik@hallailbo.co.kr
한 편의 소설 같은 18세기 선비 표류기
장한철 '표해록' 이야기꾼에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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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떠난지 7일 남짓해 유구열도 호산도에 표착할 때까지만 해도 장한철 일행이 고향으로 돌아가겠구나 여긴다. 하지만 왜구가 들이닥치며 그 기대가 무너진다. 안남 상선에 구출되는 장면에선 '그들이 이번엔 집으로 갈 수 있겠지'란 생각이 드는 순간 세자 피살설로 위기가 닥친다. 큰 배에서 쫓겨나 작은 배에 몸을 실은 장한철 일행의 앞날은 다시 캄캄해진다.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에 표착하는 대목에서 또한번의 고난이 덮친다. 청산도까지 밀려드는 동안 바다 한가운데서, 해안에서 29명중 2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대로 이들의 고통이 끝나길 비는 '독자'의 눈앞에 조씨 여인과의 만남이 등장한다. 여인은 장한철에게 "낭군이 저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가히 남풍이 불 때를 말미암아 좋은 소식을 듣게 은혜를 베푸소서. 저는 5년을 기한으로 하여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장한철은 '표해록'에서 "손을 잡고 서로 이별할 때 목이 메어 능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표류했던 일행은 바로 제주로 돌아가지만 장한철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한다. 이 대목은 그의 강인한 인간상을 부각시킨다.
일기체로 써나간 장한철의 '표해록'은 '청구야담' 한문본에 실린 '부남성장생표대양(赴南省張生漂大洋)' 등 한문단편으로 다양하게 변주됐다. 숱한 표류기와 다른 점이다.
윤치부 제주대 교수는 " 이본이 많은 장한철의 '표해록'은 강담사로 불리는 전문적인 이야기꾼들의 단골 레퍼토리였을 것"이라면서 "강담사들의 구미에 맞게 생략, 압축, 추가되면서 허구적 소설로 변모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했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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