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족과 조선족의 지역분포와 그 특징 | |
조선족 동·남서 인구 밀도 크고 한족은 서·북서 커 | |
이강부 기자, cndnews@naver.com |
등록일: 2009-08-03 오후 7:19:19 |
본지는 광복 68주년을 맞으며 중국 길림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항일 운동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중국에서 진행된 독립 운동사를 총 8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 글 싣는 순서 > ■ 연변 조선족 이주 개황 □ 청산리 전투 □ 항일 운동의 근원지 용정 □ 국자가 □ 15만원 탈취 사건 □ 반일 유격대 건립을 위한 투쟁 □ 봉우동 전투 □ 일제의 패망과 8·15 광복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속해 있는 연변 지역은 200여 년 전까지 야수들이 출몰하는 지역으로 당시 청나라는 장백산(백두산) 이북의 약 1000여리를 조상의 발상지라며 용흥지지(龍興之地)로 간주하고 타 민족이 이 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동북지방과 내지를 갈라놓는 이른바 류조변(柳條邊)이란 구역을 만들어 백성들의 출입을 막았다. 조선 변민(邊民)들이 강을 건너와 삼을 캐거나 사냥하고 나무를 벌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두만강과 압록강 북안 각처에 초소를 둬 매년 봄과 가을에 만주 8기병을 파견했으며 1762년 녕고탑 등지에 대한 류민금지조례를 반포해 류조변 밖의 길림과 흑룡강 지구를 봉금했다. 이 시기 조선은 강을 건너는 범죄자를 극형에 처했으며 범죄자가 발생하면 그 범인은 물론 그 지방의 군관에서부터 수령, 절도사, 관찰사까지 심문하고 범인은 목을 베어 국경에 효시하고 관계 군관의 책임을 추궁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청나라 통치자들의 봉금정책에 따라 중점 봉금지구인 연변지구는 녕고탑 장군과 훈춘협령에 속한 8기병과 그 가족들이 훈춘, 경신, 춘화, 돈화 등지에 살면서 농업과 수렵, 약초 채집을 하거나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에서 동주를 채집해 황실에 공물로 바치고 있을 뿐 연변지구는 만주 8기병들의 무예를 익히는 장소와 사냥터로 인적이 드문 황량한 지구로 내버려져 있었다. 이렇듯 청나라에 의해 엄하게 봉금된 동북지구에 가혹한 정치와 토지약탈 및 갖가지 부세와 부역 나아가 자연 재해로 살길이 막막한 산동, 하북, 하남 등지의 농민들과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의 조선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봉금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선 사람들이 강을 건너 봉금 지역으로 잠입한 기록은 이조실록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며 18세기부터 일시적으로 국경을 넘나들기 시작해 19세기 중엽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기아에 시달리던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지방의 농민들이 압록강을 건너 봉금 지구에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일궈 농사를 지었으며 상대적으로 경계가 심하지 않은 상류를 건너 장백, 림강, 집안 등지를 거쳐 압록강 북안의 여러 지류와 산골짜기를 따라 삶의 터전을 만들 무렵 두만강 대안의 조선 농민들도 연변지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압록강을 건넌 조선농민들은 통화지구와 단동지구로 이주하고 두만강을 건넌 이주민들은 무산, 회령, 종성 등지로 이동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결론은 현재 연변의 한족과 조선족의 인구 분포를 보면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갈수록 조선족의 인구 밀도가 작아지고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올수록 한족의 인구 밀도가 점차 작아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지난 1881년에는 근 200년간 봉금된 동북지구가 청나라 안팎의 사정이 어려워져 마침내 폐지 됐으나 조선족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으며 이는 중국 사람들만 이곳을 개발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중국인들로 연변 지역을 개간하려는 정책은 이주 희망자들이 길림, 장춘지구와 송료평원으로 이주를 희망하면서 교통이 불편하고 편벽한 연변으로 이주하려는 사람이 극히 적어 정책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청나라 정부는 지난 1885년 조선 이주민들을 이용 연변을 개간키로 해 봉금령을 완전 폐지하기에 이르러 두만강 이북과 해란강 이남의 특정 지역을 지정해 조선 농민들이 이주해 살도록 허용하고 화룡욕, 광제욕, 서보강에 통상국을 설치하고 이어 월간국(越墾局)을 설치해 개간 사무를 처리했다. 월간국 설치는 조선 사람들이 동북지구로 이주하고 연변 땅을 개발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함에 따라 간민구역 설치는 조선족의 민족공동체 형성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지방으로 들어와 7월에 훈춘을 점령하고 이어 연변지구와 조선 북부 지방을 강점하자 연변의 지방 관리들이 길림으로 피난한 기회에 조선의 간민들이 대거 연변 지구로 이주해 지난 1904년 5만에서 지난 1909년에는 18만4867명으로 늘어났다. 지난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해 서울에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 경찰권에 의한 무단 통치가 시작됐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에 식량을 공급하는 기지, 원료를 공급하는 기지로 만들며 상품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철도와 항만, 도로, 통신 등을 통제하고 토지조사법과 토지조사령 및 그 시행규칙을 공포하고 조선의 토지를 조사한다는 미명하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내세워 토지를 몰수했다. 토지를 잃은 수많은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망국 류민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러시아의 연해주로 대대적인 이주가 시작됐으며 한일합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애국지사들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국외로 옮기기 위해 동북지방과 연해주로 망국의 피눈물 나는 이주가 시작됐다. 조사에 따르면 지난 1920년 동북지방에 이주한 조선인은 45만9400명이나 됐으며 지난 1931년 9·18 사변 전에는 이미 63만 982명으로 조선인의 이민 행렬은 8·15광복 전까지 지속돼 지난 1945년 광복 당시의 동북지방의 조선인은 200만 명에 달했다. 19세기 말에 동북 지방에 조선인 거주지가 형성되고 20세기 초반에 그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대중적인 기반이 마련됐다. 특히 광활한 동북 지방의 지리적 여건과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인한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는데 튼튼한 후방 기지로 작용했음을 볼 수 있다. 또 이 지역에 이주한 대다수의 이주민 속에는 독립 운동가들이 조선인거주 지역을 항일 운동기지로 삼고 활동할 수 있어 우리니라의 독립 운동사 가운데 가장 활발하고 치열하며 대규모로 오랜 시간동안 전개될 수 있었으며 항일운동은 동만(연변), 남만, 북만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그 중 동만 지역이 가장 먼저 시작됐고 규모가 큰 항쟁이었다. 동만 지역의 항일 운동은 사립학교 설립 운동을 시작으로 전개돼 지난 1910년대에 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는 학생들에게 근대 과학 지식을 가르치는 한편 반일 사상을 주입해 반일 인재를 양성하고 일부에서는 군사학교를 설립해 군사인재를 양성했으며 이런 항일 애국계몽운동을 토대로 연변을 비롯한 동북 지역의 항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음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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