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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9](8)연암이 쓴 제주인 표해록

지식창고지기 2009. 8. 7. 14:48

[표류의 역사,제주-9](8)연암이 쓴 제주인 표해록
연암의 시선 보태 중국 풍속·지명 샅샅이
1부. 제주바다를 건넌 사람들


입력날짜 : 2009. 05.01. 00:00:00

▲제주시 화북동 포구를 지키고 선 제주도기념물 해신사. 조선 순조 20년이던 1829년 한상묵 목사가 바닷길을 오갈때 안전을 기원하며 지었다. 이방익 생전에 해신사가 세워졌다면 아마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김명선기자
정조 명령으로 북촌출신 이방익의 표류 기록 남겨
박지원 "뭇 사람 의심 깨트린 진실된 中 견문" 평가


"이방익의 전(傳)은 밀쳐 두고 있는 것이 아닐세. 비단 공무가 바빠서만이 아니라 이방익이 유람할 때 적어놓은 그 지나온 길과 고을 이름 등에 대해서 허술히 할 수 없어서니, 아무쪼록 영재와 초정 두 벗과 더불어 급히 글을 엮어보내주면 어떻겠나?"

'열하일기'를 쓴 '18세기의 문호' 연암 박지원(1737~1805). 그가 60세 되던 1796년(정조 20) 정월에 시작돼 이듬해 8월에 끝나는 편지글을 모은 '연암선생 서간첩'(박희병 역)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영재는 유득공을, 초정은 박제가를 말한다. 대체 '이방익의 전'이 무엇이길래 영재와 초정에게 글의 초고를 부탁하고 있는 것일까.

▶부친 보러 가다 큰 바람 만나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지낸 이광빈의 아들인 이방익은 1757년(영조 38) 지금의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서 태어났다. 1784년 무과에 급제한 그는 1796년 서울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탔다 중국에 표류한다.

박지원이 1797년 면천군수로 임명돼 부임지로 가기전에 임금께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정조는 "이방익의 일은 매우 신기한데, 애석하게도 글 짓는 능력이 좋지 않으니, 그대가 마땅히 1편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고 했다. 어명에 따라 짓는 글이라 연암에게는 그만큼 부담이 컸을 터, 영재와 초정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가 짐작이 된다.

이방익이 제주에서 배를 띄운 때는 1796년 9월 21일. 일행 7명과 함께 탄 배는 큰 바람을 만나 10월 초6일에 대만 서쪽에 있는 팽호(澎湖)섬에 닿는다. 이방익은 그곳에서 10여일을 머물다 대만으로 호송된 후 항구도시 하문, 복건, 절강, 강남, 산동 등 여러 섬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그러다 요동반도와 심양을 경유해 이듬해 윤6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생환까지 약 9개월이 걸렸다.

정조는 특별히 이방익을 불러 지나온 산천과 풍속을 묻고 사관에게 이를 기록하라고 명한다. 중국에 표류한 일행중에 문자를 아는 이는 이방익이 유일했다. 그러나 겨우 노정을 기억할 뿐이고 이따금 순서가 잘못된 것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암의 기록에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엉겹결에 물러나와 그 간략한 일의 내용을 가지고 증거를 보태어 바로잡아 놓는다"고 써있다.

'연암집'에 실린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이방익의 사건을 기록함)'는 바로 이방익의 중국 표해록이다. 이는 이본격으로 이방인(李邦仁)의 표해록으로 필사돼 전해지기도 했고, '고운당필기'에도 그 내용이 압축된 '이방익표해일기'가 담긴다. 성주이씨세적(星州李氏世蹟)에는 연암이 쓴 내용이 '남유록(南遊錄)'이란 이름으로 수록됐다.

▶표류와 직접 연관없는 지식도

연암은 이방익의 표류 경험담을 기록하면서 중국 지리와 제주에 관한 지식을 풀어놓는다. '남유록'만 보더라도 이방익이 직접 진술한 내용보다 '상고하건대'로 시작되는 연암의 갖가지 지식이 더 많이 쓰여있다. 제주에 대한 소개를 비롯해 팽호도, 대만, 강산현, 용구산, 태호, 금산사 등에 설명이 그런 예다. 대부분의 내용은 이방익의 표류 사실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이방익은 표류 초기 식량이 바닥나 먹지 못한 지가 여러날 되었을 무렵 홀연 큰 물고기가 배위에 뛰어오르자 8명이 함께 잡아먹었고,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줘 갈증을 풀었다고 말한다. 살아돌아온 자들인 만큼 이들에게 운이 따랐음을 보여주는 일화일 수 있다. 중국에 표착했을 당시 표류 사유에 대한 심문에는 조선 전라도 전주부 사람이라고 답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연암은 "탐라인으로 외국에 표류한 자들이 거짓으로 본적을 칭하"는 일이 있음을 덧붙인다.

연암이 쓴 이방익 표해록에도 표류인들의 송환 절차, 표착지의 생활 풍습, 이국의 풍물 등 대개의 표해록처럼 해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연암선생 서간첩'에는 "이방익은 바다에 표류해 민월을 지나왔건만 만 리 길이 전연 막히지 않았으니 중국이 안정되고 조용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뭇 의심을 통쾌하게 깨뜨린바, 그 공적은 그렇고 그런 일개 사신보다 훨씬 낫다 할 것이네"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민월은 양자강 이남의 강남땅을 일컫는다. 연암에게 제주사람 이방익의 표류 경험은 중국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진실된 문견(聞見)이었다.

/진선희·백금탁기자

광빈 父子 기이한 표류

무과시험 보러가던 부친 일본 나가사키로 떠밀려


정운경의 '탐라문견록'(정민 역)에는 1723년 제주성안에 사는 백성 김시위가 일본에 표류한 기록이 실렸다.

나가사키에 있을 때 김시위는 동향 사람 이기득을 만난다. 이기득 역시 표류해 그곳까지 가게 됐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제주 사람들에게 표류는 그만큼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이방익의 사연은 놀랍다. 연암은 표해록에 이를 언급하며 기이하다고 표현했다. 이방익의 아버지 이광빈(1734~1801)도 무과시험을 보기 위해 일찍이 바다를 건너다 나가사키로 표류한 적이 있어서다.

이광빈이 나카사키에 머물때 겪은 일은 이렇다. 어떤 한 의사가 이광빈을 맞아 집으로 데려가 환대하면서 남아있어 달라고 권했다. 그러더니 아리따운 여인을 그에게 소개시키면서 "우리 집에는 많은 돈이 있지만 아들이 하나도 없고 단지 이 딸애만 있을 뿐이오. 번거롭겠지만 당신이 내 사위가 되어 주시오. 내가 늙어 죽고나면 많은 재산은 당신의 소유가 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이광빈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자기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재물과 여자를 탐하고 사모하여 남의 나라에 귀화한다면 개, 돼지 만도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내가 등과(登科)하면 부귀를 얻을 수 있을 터인데, 하필 당신의 재산과 딸을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연암은 이 대목에서 "광빈은 비록 섬에 살고 있는 무관이었지만 의연하여 열사의 풍도가 있었던 것이다"는 소견을 달았다.

부자(父子)가 표류를 경험한 일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일까.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에게 명해 이역땅에 표류해 죽을 뻔하다가 살아돌아온 이방익을 불러서 위로하고 전라중군이란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연암도 "(정조가) 방익을 불러 보시고, 장대한 유랑의 노고에 대해 특별히 전라도중군을 제수하셔서 그의 귀환을 영광스럽게 해주었다"고 썼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