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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10](9)안남국으로 간 진상선

지식창고지기 2009. 8. 7. 14:49

[표류의 역사,제주-10](9)안남국으로 간 진상선
1부. 제주바다를 건넌 사람들
320년전 표류로 만난 제주-베트남 평화향한 항해


입력날짜 : 2009. 05.15. 00:00:00

▲베트남 하타이 지방에서 한 여성이 논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재미교포 3세인 브렌다 백 선우의 '베트남 모멘트'에 실린 사진중 하나다.
제주馬 싣고 1687년 화북진 출발해 안남국 회안땅에 표착
김대황 표해일록· 고상영 표류기 등 각기 다른 기록 전해


지난해 9월, 베트남 꽝아이에 제주 문화예술인들이 있었다. 제주민예총이 꽝아이성 예술문학회와 문화예술교류를 펼쳤다. 전쟁과 학살의 상처를 안은 두 지역의 예술인들은 평화로 연대했다. 이들은 먼 걸음을 달려가 두 손을 맞잡았지만 제주와 베트남의 만남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320여년전 제주사람들이 먼 바다를 떠돌다 베트남에 표류한 일이 있다.

▶"언어가 마치 새 지저귀는 소리 같아"

1687년 8월 그믐, 제주 진무(鎭撫) 김대황 일행 24명은 화북진 항구에서 배를 띄운다. 제주 목사 직책을 교대할 때 진상하는 말 3필을 실은 배였다. 9월 초3일에 이르러 바람의 형세가 좋아지자 바다로 나갔지만 추자도 앞바다에 도착했을때 사정이 달라졌다. 바람이 동북풍으로 변하더니 크게 비가 내렸다. 육지를 향해 가려고 해도, 제주로 돌아가려해도 도무지 제어할 길이 없었다.

바다에서 길을 헤맨지 한달여. 10월 초4일 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 사람들은 그곳에서 비단에 구멍을 낸 기다란 통옷을 입고 풀어헤친 머리에 맨발인 이들을 만났다. 그들의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같았다. 그곳은 안남국(安南國·지금의 베트남) 회안(會安·호이안)땅이었다.

안남은 표류가 잦은 제주사람들에게도 낯선 곳이기 때문일까. 같은 배에 타고 베트남에 표류했던 이들의 경험담은 몇개의 기록으로 전해온다. 제주에 부임했던 이익태 목사(1633~1704)가 남긴 '지영록(知瀛錄)'(김익수 역)에는 '김대황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이 실려있다. 1689년(숙종 15년) '조선왕조실록'에는 김태황(金泰璜)이란 이름으로 안남에 표류한 일을 적어놓았다.

제주 표류민을 인터뷰한 정운경의 '탐라문견록'(1732)에는 조천관 신촌에 사는 고상영의 안남국 표류기로 이 일이 소개됐다. '지영록'에 담긴 '김대황표해일록'에는 고상영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탐라문견록'(정민 역)에는 진상선에 올랐던 김대황이 나온다. 고상영 표류기는 조선후기 학자 정동유가 1805~1806년 집필한 '주영편(晝永編)'에도 수록됐다. 1727년 역관 이제담이 제주에 갔다가 고상영을 만나 안남에 표류한 전말을 듣고 기록한 것을 다시 정동유가 옮겨 실었다. 안남에 표류했던 게 40년전이지만 그 사건을 역관에게 전하는 고상영에겐 어제일처럼 생생했을 것이다.

이들 베트남 표류기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중 '탐라문견록'에는 안남에 표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우리나라 태자가 일찍이 조선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니 너희에게 보복하여 태자의 원수를 갚아야 마땅하다"고 했던 대목이 쓰여있다. 앞선 '지영록'에는 그런 내용은 없다. 대신, 동남쪽 여러 사람들이 탐라를 '바깥 고려'라고 부르는데, 여러 나라에서 왕래하는 장사 배들이 혹 땔나무나 먹을 물이 부족하거나 배의 기구를 잃어버려 이를 보충하고자 탐라 해안가에 대려고 하면 병사들을 출동시켜 이를 저지했던 탓에 원한을 품고 탐라 사람을 만나면 죽여 버린다는 말을 떠올리고 '전라도 흥덕현 사람'이라며 거짓으로 출신지를 댔다고 그려졌다.

▶귀환 기다리다 이역만리에 묻힌 3인

김대황 일행은 해를 넘겨 16개월만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런 중에 세 사람은 병이 들어 끝내 회안 땅에 묻힌다. 제주로 돌아갈 날을 기약없이 기다리던 표류인들에게 한줄기 빛처럼 찾아든 것이 중국 상인들이었지만 그에 상응한 조건을 달았다. 표류인을 싣고 조선으로 가는 대신 쌀 600포를 받기로 한다. '지영록'말미에는 제주목사 이희룡, 정의현감 박제 등이 제주 표류인을 싣고 온 중국 상인과 문답하는 게 덧붙여졌다. 중국 상인들은 결국 서울로 압송돼 쌀 대신 은(銀)을 받는다.

아무런 힘이 없던 표류인들은 귀환할 때 중국 상선의 노정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이들은 제주로 돌아오기 위해 1688년 7월 회안부 항구에서 배를 띄운다. 광서, 광동, 복건, 절강 등을 거치며 4개월간의 항해 끝에 영파부 땅에 있는 보타산 항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10일만에 마침내 대정현 지경에 다다른다. 그때가 12월 17일이었다. 표류 당시 파도 위에 떠돈 시간보다 귀환하는 배에 올라 바닷길을 지나온 시간이 더 길었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백금탁기자 gtbaik@hallailbo.co.kr

▲베트남의 어린 소녀가 베트남의 상징으로 통하는 물소에 몸을 기댄 채 환하게 웃고 있다.
"얼음과 눈이 없는 베트남, 목동 태우고 다니는 물소"

김대황의 표해일록이든, 고상영의 표류기든 베트남에 대한 호기심어린 시선은 한결같다. 이즈막에 베트남의 젊은 여성이 제주 남자와 결혼해 이 섬에 흩어져 살고 있는 현실과 비교해보면 표류인들이 맞닥뜨린 문화적 충격은 꽤 컸을 것이다.

'지영록'에는 겨울에도 얼음과 눈이 없는 베트남의 남방문화를 흥미롭게 기술해놓았다. 그중 물소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다. 밤에는 집안에 매어놓아 풀 사료를 먹이고 낮에는 목동이 그 등위에 올라타 앉기도 하고 혹은 눕기도 한다고 했다. 저녁이 되어 목동이 물가에 가서 휘파람을 불면 물소가 물속에서 스스로 나와 다시 주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도 담았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이국의 풍물을 적극적으로 품었던 게 표류인이다.

고상영 역시 '탐라문견록'에서 베트남 호이안의 기후, 의복, 물산 등을 꼼꼼히 그렸다. 날씨가 늘 따뜻해서 소매가 넓은 홑적삼만 입고 바지는 안입는 것, 일년에 누에를 다섯번 치고 벼는 3모작을 하는 것 등이 이어진다. 물소, 원숭이, 코끼리, 공작의 특징도 적었다. 원숭이는 사람의 뜻을 잘 알아 심부름시키기에 편하다고 했고, 태평소 소리를 잘내는 코끼리에겐 먹을 것을 따로 주지 않지만 추수할 때 벼 대여섯단을 챙긴다고 기록하고 있다.

표류인에게 안남은 낙후된 듯 보였지만 낯선 이방인들을 맞는 그곳 사람들의 인심은 인상적으로 기억됐다. 민가에서는 구걸하는 표류인들을 너그럽게 맞아 들였고, 국왕은 쌀과 돈 등을 내준다. 제주 목사 등은 이에 김대황 일황을 싣고 온 중국 상인들과 필담으로 문답하면서 "불쌍하게도 우리나라 백성이 안남에 표류하자 그곳의 군신(君臣)이 자기 백성이나 마찬가지로 보아 편안히 있게 허락해주고 쌀, 돈으로 대접해줬으니 그 은혜의 경중을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라고 쓴다.

한국과 일본, 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표류사건을 연구해온 진익원(陳益源) 교수(대만 국립성공대)는 '탐라문견록'에 실린 고상영의 표류기에 담긴 베트남의 풍속이 매우 사실적이라면서 "큰 조난을 당했음에도 이역에서 있는 힘을 다해 살길을 찾고 현지의 문화를 주의깊게 살펴 17세기말 베트남 회안에서 보고 들은 것을 진실되게 기록해 동아시아 문화교류에 구체적인 공헌을 했다"고 밝혔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