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 呂布
?~198.
중국 후한 말엽의 장수.
자는 봉선(奉先). 오원(五原)에 있는 구원(九原) 사람이다.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나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장'(飛將)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의 수하에 있다가 나중에 그를 죽인 후 동탁(董卓) 에게 귀순했으나 다시 왕윤(王允)과 모의하여 동탁마저 죽였다.
그뒤 분위장군(奮威將軍)의 지위에 오르고 온후(溫侯)로 봉해지는 한편, 서주(徐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남부 및 장쑤 성[江蘇省] 북부지역)를 나누어 차지했다.
198년(建安 3년)에 하비에서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죽음을 당했다.
사마염
司馬炎
236 ~ 290
진의 초대 황제.
사마소의 장자요, 사마의에게는 손자.
자는 안세(安世). 생김새가 괴상하여 양팔이 무릎아래 닿았고, 사람됨이 총명하였다.
265년, 사마소의 죽음과 함께 진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보다 앞서 사마씨는 이미 3대에 걸쳐 위 왕조에서 확고한 기반을 쌓고 있었는데, 사마염은 그 기세를 몰아 위의 황제 조환을 강요하여 황제위를 물려받고 진 왕조를 일으켰다.
사마염의 과제는 아버지 때 이미 촉을 평정했기 때문에 남은 오를 멸하여 천하통일을 이루는 일이었다.
그는 즉위 후 스스로 검약에 힘쓰는 한편 일족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여 병력을 배치하는 등 내부결속을 도모했다.
267년, 드디어 중신인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형주의 오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어서 왕준에게는 장강 상류의 익주에서 수군을 정비하게 했다.
그러나 오나라 명장인 육항이 장강 일대에서 방어에 힘써 두 나라 군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 대치는 10년이나 계속 되었다.
그러나 279년 드디어 수륙 20만의 대군이 일제히 남하하여 이듬해에 결국은 오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사마염이 황제로 제위한 것은 전후 24년이었다. 치세의 전반기에는 검약을 주로 하고 내치에 주력했으나, 오를 멸망시킨 뒤에는 긴장이 풀려 벌써부터 왕조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위 26년. 시(諡) 무제(武帝).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 하였다.
사마의
司馬懿
179~251.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대신(大臣).
자는 중달(仲達),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선제(宣帝). 하내(河內) 온(溫:허난 성[河南省] 현[溫縣]) 사람이다.
서진(西晉) 건국의 기초를 다졌다.
후한(後漢)말 경조윤(京兆尹)이었던 사마방(司馬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201년 군(郡)의 상계리(上計吏)로 추천되었고, 나중에 조조(曹操)에게 등용되어 문학연·황문시랑(黃門侍郞)·주부(主簿) 등의 관직을 거쳤다.
위(魏)가 건국되자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어 여러 가지 계책을 올렸는데, 특히 조조에게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 20만 명을 둔전(屯田)시키도록 건의했다.
문제(文帝:曺丕) 때에도 요직을 역임했다.
234년 명제(明帝:曺叡) 때 제갈량(諸葛亮)의 도전을 받아 오장원(五丈原)에서 대진(對陣) 하던 중 제갈량이 진중에서 죽음으로써 그 군사는 물러갔다.
다음해 태위(太尉)가 되었고 그뒤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여 낙랑(樂浪)·요동 등의 4군(四郡)을 위나라에 병합했다.
명제가 죽고 제왕(齊王)이 즉위한 뒤 시중(侍中)이 되었고 지절도독중외제군사 (持節都督中外諸軍事)로서 군권을 장악했다.
그후 대장군 조상(曹爽)이 그를 배척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이고 249년 승상(丞相)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251년 상국(相國)이 되었고 안평군공(安平郡公)에 봉해졌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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