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삼국(촉한) - 도겸/노식/문추/맹획/진수

지식창고지기 2009. 8. 9. 10:49

도겸 陶謙

? ~ 194


서주 태수.

단양 사람으로 자는 공조(恭組).

서주자사 때 황건적 토벌 공으로 서주목이 됨. 193년, 서주의 하비에서 관선이 천자를 잠칭하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침.

사람됨이 온후순독 하였는데, 조조의 아비 조숭이 난을 피하였다가 아들의 모심을 받아 자기 영토를 지나게 되었을 때 순전히 호의로 도위 장개를 시켜 호위하게 한 것이, 장개는 본시 황건적의 잔당이라, 본성을 드러내어 조숭의 일행 전 가족 40여 명을 몰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조가 원수를 갚겠다고 대군을 휘동하매 무수히 변명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각처의 구원병으로 항전하는 한편 자신은 노병을 이유로 유비에게 서주를 맡으라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노식 盧植

? ~ 192


후한 말엽의 중신.

탁군 사람.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이기도 하다.

황건적의 난 때 관군을 이끌고 나가 연승을 함.

황건적의 두목 장각과 대치하나 감전선을 시찰 나왔던 환관 좌풍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무고로 귀양을 갔다.

후에 황보숭의 힘으로 복직되어 황제 측근에서 정무를 담당했다.

159년, 원소 등이 환관을 몰아내려 하자 장양 등 환관이 하태후, 소제, 진류왕 등을 납치하여 도망치려는 것을 꾸짖어 하태후를 구했다.

그 후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즉위시키려 했을 때 홀로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낙향하게 되었다.

 

 

문추 文醜

? ∼ 200


원소의 상장.

백마의 전투에서 조조의 장수 장요, 서황을 상대로 하여 싸워 장요를 쏘아 말에서 떨어지게 까지 하였으나, 조조에게 얹혀 있던 관우에게 죽었다.

본시 안량과 함께 원소의 자랑하던 장수였는데, 정사에는 관우에게 죽은 것으로는 안량만 나와 있고, 그에 대해선 써있지 않다.

 

 

맹획 孟獲

? ~ ?


남만의 왕.

건흥 3년,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익주에 침입하여, 군의 태수4들도 많이 그에 협력하였다. 

촉한의 전권을 맡아 있던 제갈량은, 먼저 역내의 주군을 평정하고 그를 토벌하고자 남만 땅 깊숙이 원정하였다.

그리하여 일곱 범 잡았다 일곱 번 놓아준 은의에 감복하여 진심으로 항복하게 되었고 제갈량은 그로 하여금 남만의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진수 陳壽


233~297.


중국 서진(西晉)의 역사가. <삼국지 三國志〉의 저자이다.


자는 승조(承祚). 파서(巴西) 안한(安漢: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난충 시[南充市] 북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초주에게 사사받았다.

촉한(蜀漢)에서 관각영사(觀閣令史)라는 벼슬을 지냈으나, 환관 황호(黃皓)의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핍박을 받았다.

서진 때도 벼슬길에 많은 장애를 받았지만 장화(張華)에게 인정받아 좌저작랑(佐著作郞)· 양평령(陽平令)을 역임했다.

이후 저작랑·파서군중정(巴西郡中正)을 거쳐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를 지냈다.

진이 오(吳)를 멸한 뒤에 삼국시대의 저작을 모아 〈삼국지〉를 저술했다.

〈삼국지〉는 후대 문헌 중 특히 소설과 희곡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고국지 古國志〉·〈익도기구전 益都耆舊傳〉·〈촉상제갈량집 蜀相諸葛亮集〉을 편찬했으나 모두 망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