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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2> 노예제와 멕시코 전쟁, 그리고 양심

지식창고지기 2009. 5. 22. 10:18

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2> 노예제와 멕시코 전쟁, 그리고 양심

헨리 데이비드 소로 『시민의 불복종』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당신이라면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명백하게 단언한다. “불의가 당신에게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계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극력 비난하는 해악에게 나 자신을 빌려주는 일은 어쨌든 간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 의롭지 않은 정부의 일에 동조함으로써 내가 불의의 하수인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소로가 『시민의 불복종』을 쓸 때 염두에 둔 미국 정부의 불의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이었다.

일러스트=남궁유
노예제도는 그 자체로서 분명 악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해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 주들에만 비판을 돌릴 따름이다. 매사추세츠주 시민들은 인류의 선악에 대한 문제보다는 오직 자신의 돈벌이에만 몰두해 있다. 미국 정치에 큰 족적을 남긴 대니얼 웹스터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소로는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웹스터는 헌법이 노예제도를 인정한 점에 대해서 “원래 계약의 일부이므로 그대로 두자”고 말하였다. “본질적 개혁을 생각하지 않는 입법자들에게는 지극히 지혜로운 말로 들리겠지만,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나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입법자들에게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눈 한 번 돌려본 일이 없는 사람으로만 보인다. 그가 신봉하는 진리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일관된 편의인 것이다.” 한마디로 그런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라 추종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몸으로나 재산으로나 매사추세츠주 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지금 당장 중지하여야 한다…. 나는 이것만은 알고 있다. 즉, 이 매사추세츠주 안에서 천 사람이, 아니 백 사람이, 아니 내가 이름을 댈 수 있는 열 사람이, 아니 단 한 명의 정직한 사람이라도 노예 소유하기를 그만두고 실제로 노예제도의 방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며 그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멕시코와의 전쟁(1846∼1848)이다. 1821년에 멕시코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했을 때 이 나라는 오늘날 미국 남부의 광대한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멕시코는 이 먼 변방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사정이 못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많은 미국인이 텍사스로 들어와서 그들이 오히려 다수가 되었다. 텍사스는 1836년에 독립 공화국을 선포하였다가 1846년에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양국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텍사스와 뉴멕시코, 캘리포니아까지 미국 영토가 되었는데 이는 멕시코 전체 영토의 40%를 넘겨준 셈이다. 이때 많은 미국인이 멕시코와의 전쟁을 정의롭지 않은 침략전쟁으로 비판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노예 소유주들이 그들의 권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멕시코 전쟁을 도발했다고 주장했다.

소로 역시 이 전쟁에 명백하게 반대했다.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소박한 명상
의 삶을 살아가던 그에게 세리가 찾아와서 6년간 밀린 ‘인두세’를 내라고 종용했지만 그는 전쟁과 노예제에 반대한다며 이를 거절했고, 이 때문에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의 명상이야말로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나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나의 육신을 처벌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마치 어떤 소년이 앙심을 품은 사람을 때리기에는 역부족인 경우 대신 그 사람의 개를 패듯이 말이다.” 그는 짐짓 의연한 태도를 취하며 이렇게 말한다. “격리되어 있으나 실은 더 자유롭고 명예로운 곳, 매사추세츠주가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두는 곳,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 감옥이다.” 그의 결연한 의지가 호기롭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사실은 단 하룻밤에 불과했지만(바로 다음 날 그의 친척이 밀린 세금을 대납해서 그는 곧 석방되었다) 이 감옥 경험은 그의 사유를 크게 진척시켰다.

내가 직접 남을 착취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를 괴롭히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먼저 그 사람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다소 놀라운 일이지만, 소로는 논어까지 인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편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부끄러운 일이요,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하고 귀하면 부끄러운 일이다.”(『논어』 憲問編)

그렇다면 그는 정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가? 사실 다수의 투표로 성립된 정부에 이런 식으로 대항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여전히 단호하다.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장 좋은 정부는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이 무정부주의(아나키즘)와 통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폭력을 써서 기존 질서를 부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불의에 대한 평화적인 저항을 주장하였으며, 바로 이 점이 후일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같은 비폭력 저항 혹은 무저항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부는 기껏해야 하나의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는 원래 국민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다수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해서 그 정부가 인류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감행하는 데 대해 묵과해서는 안 된다. “옳고 그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다수가 아니라 양심”인 것이다.

“투표는 모두 일종의 도박이다. 장기나 주사위놀이와 같다. 단지 약간의 도덕적 색채를 띠었을 뿐이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지겠지만 옳은 쪽이 승리를 해야 한다며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다. 나는 그 문제를 다수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편의의 책임 정도를 결코 넘지 못한다. 정의 편에 투표하는 것도 정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당신의 의사를 사람들에게 가볍게 표시할 뿐이다.”

정부는 한 번 투표로 모든 것이 결판났다고 오판해서는 안 된다. 그런 오만 때문에 세상의 많은 정부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며,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파문하고, 조지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역자’라 불렀다.” 또 그 때문에 양심을 지키는 많은 사람이 국가에 저항하게 되며, 따라서 국가로부터 흔히 적으로 취급받는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연 옳은 말이다. 인간을 위해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정부에 복속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오만하게 인간을 억압하려고 들 경우 시민은 불복종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의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셰익스피어 『존 왕』 5막 2장)

오늘날 미국을 두고 의로운 나라 혹은 고매한 나라라고는 누구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데에는 눈 시퍼렇게 뜨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저항하고 감시하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상의 중요한 뿌리를 월든 호숫가의 소박한 오두막집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