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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17> 브램 스토커『드라큘라』

지식창고지기 2009. 5. 22. 10:21

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17> 브램 스토커『드라큘라』

진보·전통이 교차한 19세기 말의 악몽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의 1897년 작품 『드라큘라』는 세기말의 어두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오는 작품이다. 여인의 피를 빨아 먹음으로써 자신과 같은 흡혈귀로 만들어버리는 드라큘라 백작의 악마적인 힘은 당시 세계 문명의 최정상을 자부하던 영국 사회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위기감을 나타낸다.

소설은 영국의 변호사 조너선 하커가 동유럽의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있는 드라큘라 백작의 성을 찾아가는 데에서 시작된다. 드라큘라는 영국 사회로 진입해 들어가기 위해 런던에 영지를 구입하려 했고, 그래서 법률적 조언을 해줄 사람을 초빙한 것이다. 하커는 다뉴브 강을 건너자 이미 터키 제국의 전설 속으로 들어왔다고 느낀다. 이 작품에서 서유럽과 동유럽은 모든 면에서 완전히 상극이다. “동방으로 가면 갈수록 기차가 시간을 안 지키는 것 같다.” 19세기 서구 문명의 총아인 기차마저 ‘동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드라큘라 백작의 성에 도착한 하커는 곧 자신이 가공할 마법의 존재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백작의 몸이 거울에 비치지 않을 뿐 아니라 지하실에서 흙을 채운 관 속에서 자는 것을 보고 하커는 그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는다. 게다가 “역겹고 소름 끼치는 관능”을 지닌 세 미녀(드라큘라의 신부들)가 달밤에 찾아와 그의 목숨을 노리기도 한다. 이성의 빛이 밝게 빛나는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은 이처럼 어둡고 음산한 마력이 지배하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브램 스토커(Bram Stoker·1847~1912)는 아일랜드 출신 소설가로서 여러 작품을 출판하였지만 지금은 『드라큘라』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47년 더블린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하였다. 신문에 연극비평문을 기고하다가 당시 유명한 배우 헨리 어빙 경을 알게 되어 런던으로 가 그의 매니저 역할을 하였다. 보충 수입을 위해 여러 권의 소설을 썼는데 그중 1897년에 쓴 『드라큘라』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커가 가까스로 성에서 탈출했을 때 드라큘라는 이미 러시아 선박을 이용해 그보다 먼저 영국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러고는 하커의 약혼녀인 미나와 그녀의 친구 루시를 공격한다. 루시는 드라큘라에게 피를 빨려 죽은 후 노스페라투로 부활하여 밤에 아이들의 피를 빨아 먹으며 돌아다닌다.

노스페라투란 불사귀(不死鬼)를 뜻하는데, 최초의 드라큘라 영화가 판권 문제 때문에 ‘노스페라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이 말이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19세의 순진한 처녀 루시는 드라큘라에게 ‘감염’된 뒤 “그 참하던 모습이 냉혹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바뀌었고, 그 청순하던 모습이 관능적이고 음탕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렇듯 야만적인 동유럽은 음탕한 힘으로 서유럽의 순결을 짓밟는다.

사실 드라큘라가 송곳니로 여인의 목에 구멍을 내어 피를 빨거나 자신의 피를 처녀에게 먹이는 행위는 분명 성행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원래 루시에게 청혼하러 모여들었다가 이제 흡혈귀를 쫓는 ‘특수부대’로 변모한 일행(아서 홀름우드 경, 수어드 박사, 미국인 퀸시 모리스)은 암스테르담에서 모셔온 흡혈귀 문제 전문가 반 헬싱 박사의 지도를 받아 노스페라투로 변한 루시를 처단한다. 그녀의 ‘목을 자르고 입 안에 마늘을 넣고 몸통에다가 말뚝을 박는’ 반 헬싱의 처방은 적의 수중에 넘어간 여성 희생자에 대한 악랄한 처벌로 보이는데, 사실 이 자체도 남성적 힘에 의한 강간 이미지로 보인다.

하커가 이 일행에 가담한 후 그들은 드라큘라를 끝까지 쫓아가 없애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드라큘라가 오히려 하커의 약혼녀 미나를 공격하고 자기 피를 먹여 복수한다. 미나는 이제 드라큘라와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통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나는 자신이 ‘더럽혀진 몸뚱이’를 가진 죄인이라고 절규하면서 만일 사랑하는 남자를 해치려는 징후가 보이면 죽어버리겠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하커의 응답이 실로 가혹하다. “자살을 말하는 겁니까? 부인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런 방법도 있을 겁니다.

부인을 위해 그것이 가장 좋다면, 아니 그게 안전하다면 당장에라도 안락사의 방법을 기꺼이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미나가 드라큘라와 감응(感應)하는 사실을 역이용해 드라큘라를 잡자는 계획을 세운다.
반 헬싱 일행은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자기 성으로 후퇴한 드라큘라를 추격한다. 드라큘라를 돕는 집시와 싸움을 하는 중간에 미국인 퀸시 모리스가 죽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드라큘라를 찾아내 목을 베고 심장에 칼을 박아 처단한다. 이와 함께 미나의 상처도 모두 낫는다.

드라큘라 이야기에 어떤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꽤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날 루마니아에 속하는 고대 왕국 왈라키아의 왕자 블라드 3세다. 그는 전쟁 포로 수백 명을 산 채로 말뚝에 박아 죽여 ‘체페슈(말뚝으로 박는 자)’라는 별명을 지니게 되었다. 드라큘라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이슬람 교도와 싸우는 비밀 기사단인 드라큘 기사단에 가입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이때 ‘드라큘라’는 ‘드라큘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 가문은 원래 터키 세력과 싸워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는 집단이었으나 곧 그들 자신이 서구 문명을 위협하는 암흑의 힘으로 간주되었다. 또 하나 흡혈귀 전설의 중요한 전거 중 하나는 17세기 초 헝가리의 체이테 성에 살았던 에르체베트 바토리 여 백작이다. 그녀는 700여 명의 소녀를 잡아와 매질하고 바늘로 찌르는 고문을 가하여 죽였고, 소녀들의 피를 마셔 젊음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런 이야기 자체가 100% 정확한 것도 아니고, 또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쓸 때 이런 내용들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저자가 소설 속에서 드라큘라 가문의 연원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을 보면 분명 그와 유사한 기록들을 읽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원래 드라큘라는 “다뉴브 강을 건너 터키 땅으로 쳐들어가 터키인을 무찌름으로써 명성을 얻은 귀족”이며, 이 가문은 합스부르크가(家)나 로마노프가(家)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 “위대하고 고결한 가문이었지만 그 후손들 가운데에는 같은 시대 사람들로부터 마왕과 거래한다는 소리를 들은 자들이 이따금 나왔다”고 서술되어 있다. 머나먼 고대로부터 면면히 대를 이어 내려오던 전통적인 세력이 잘못된 길로 타락하여 세상을 위협하는 위험한 힘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처럼 드라큘라는 진보해 가는 서유럽의 근대성과는 반대되는 측면들, 즉 동유럽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미신 등의 표상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을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내면에는 진보와 전통이 교차하는 세기말 상황이 투영되어 있다. 미나는 타이프라이터를 사용하는 당대의 ‘모던 걸’이면서도 전통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간직한 소녀이고, 반 헬싱은 최신 의학 기술과 무당을 연상케 하는 미신적 사고를 동시에 가진 신비로운 인물이다. 한편 드라큘라는 과거에는 최신의 과학 분야라 할 수 있는 연금술에 능통했고, 따라서 근대 과학의 힘을 배워 이를 악용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이 소설은 젠더(gender·육체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의 성)의 관점에서 보아도 흥미롭다. 외부의 위협에 먼저 직면하는 사람은 언제나 약한 여성이고, 또 그들 때문에 사회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위험에서 사회를 구하는 것은 늘 엘리트 남성들이다. 반 헬싱이 미국의 카우보이 퀸시 모리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이 점을 말해준다.

“한 여인이 곤경에 처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용감한 남자의 피요. 당신이 바로 그 남자요. 악마가 우리를 방해하려고 갖은 해악을 다 떨어대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자들이 필요할 때 그들을 보내 주시는구려.” 미나를 비롯한 여성들 자신도 이렇게 응답한다. “세상에 비록 괴물들이 있긴 해도 훌륭한 남자가 많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가!”

이 소설은 문명의 진보 개념이 최정점에 달했던 19세기 말 서구의 내면 상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과학과 기술이 진보하고 문명화가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동시에 도덕적 가치와 믿음 체계는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부의 동요는 외부로부터 침투해 들어오는 힘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에로틱한 방식으로 여성들을 유혹해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악마 같은 존재 드라큘라는 진보하는 사회의 내면에 자리 잡은 세기말의 불안한 그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