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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16>나폴레옹이 ‘괴물’이라 부르며 추방한 여

지식창고지기 2009. 5. 22. 10:23

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16>나폴레옹이 ‘괴물’이라 부르며 추방한 여인

스탈 부인 『코린나-이탈리아 이야기』

자크 루이 다비드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그린 유화 ‘브루투스에게 두 아들의 시체를 가져다주는 형리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과격 공화주의자(자코뱅)로서 프랑스혁명(1789~1799)에 적극 가담하였던 화가 다비드는 혁명이 일어나던 그해에 ‘브루투스에게 두 아들의 시체를 가져다주는 형리들’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의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암살 당시의 브루투스가 아니라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던 로마 역사 초기의 인물이다. 그는 마지막 왕을 추방하는 데 참여하고 새로 출범한 공화정의 집정관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두 아들이 어머니 쪽과 관계 있는 전왕을 복귀시키려는 거사에 끼었다가 발각되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의 처형을 결정했다. 그림은 사형당한 아들들의 시체가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화면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좌측의 남성들은 정치 영역, 곧 공화정의 가치(브루투스가 손에 쥐고 있는 법률 문서를 보라)를 나타내는 반면 우측의 어머니·자매·유모 등 여성들은 뜨개질 바구니나 실 같은 물품을 통해 가정사를 나타낸다.

잘 보면 바구니에는 프랑스 왕실 문양이 수놓아져 있어 이 그림이 단순히 과거 로마사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 아니라 프랑스혁명에 대한 작가의 코멘트임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은 구체제와 왕정의 가치를 추종하며 진보를 거부하는 반동적인 집단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의 메시지는 국가가 가정보다 더 상위에 있으며 혁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준엄한 남성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프랑스혁명은 자유·평등·박애(형제애)를 기치로 내걸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되었을까? 비판적인 논자들은 혁명이 모든 사람에게 해방의 가능성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을 배제하고 억압했다고 주장한다. 형제애는 있었을지 몰라도 자매애는 없었으며, 그 형제들(시민)이 아버지(국왕)를 살해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 나타난 결과는 여전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질서였다는 것이다.

스탈 부인은 우리에게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체제 말기로부터 프랑스혁명의 발발, 공포정치, 집정관 시대를 거쳐 나폴레옹 제정(帝政)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변을 직접 겪고, 이 시대를 고발하고 증언하는 작품들을 남긴 일급 작가다. 그녀는 1766년 파리에서 제네바 은행가 출신으로서 루이 16세 치하에서 재무대신을 지낸 아버지 자크 네케르와 스위스계 개신교 목사의 딸인 어머니 쉬잔 퀴르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어머니가 주관하는 파리의 살롱에서 루소·디드로·달랑베르 같은 최고 수준의 철학자들과 만나면서 계몽주의 사조를 익혔고, 스웨덴 대사와 결혼하였으며, 국외로 망명하여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괴테·피히테·슐레겔·시스몽디 같은 유럽의 석학들과 교류 내지 연애를 하였다. 그녀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딸이면서 19세기 유럽 낭만주의의 선구자라는 독특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녀의 찬란했던 삶은 나폴레옹과의 불화로 파리라는 중앙무대에서 추방되면서 험난한 여정을 겪게 된다. 애초부터 두 사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나폴레옹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인 데다 군국주의적이고 프랑스 민족중심적인 반면 스탈은 관용적인 엘리트로서 개혁적이며 영국애호주의(anglophile)의 심성을 가지고 있어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나폴레옹을 만난 스탈은 그가 프랑스혁명이 선언한 자유를 지켜주리라고 믿었지만 이 기대는 곧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무력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스탈이 본 나폴레옹은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지금껏 살아온 여성 가운데 가장 훌륭한 여성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은 여자”라고 차갑게 대꾸했다. “이 거인은 두려운 가슴속에 따뜻한 마음이 없다. 그는 절대권력의 벼락을 쥐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 승리하도록 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는 지구 전체를 손아귀에 움켜잡고 집어삼켜야만 하는 젊은 사자와 같다.” 스탈의 이런 비판에 대해 나폴레옹은 그녀를 여자 이데올로그이자 괴물이라고 부르며 국외 추방을 명했다. 스탈의 아들 오귀스트가 어머니의 귀국 허락을 받아내 보려고 따로 나폴레옹을 만나 “어머니는 문학에만 전념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부인은 파리에 다시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오. 게다가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정치·도덕·예술, 그 외에 이 세상 모든 것을 할 수 있소. 여자들은 뜨개질만 해야 하오.”
과연 나폴레옹은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코린나』와 같은 문학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연애 이야기로 보일지 모르지만 혁명과 제정에 대한 가장 예리한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794년부터 1803년까지, 즉 프랑스혁명 중의 공포정치 시기로부터 나폴레옹 집권 초기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큰 줄거리는 기품 있는 스코틀랜드 귀족 오스왈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이탈리아 여행을 갔다가 로마 최고의 즉흥시인이며 천재 여성 작가인 코린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도중 베수비오 화산에서 각자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데,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이지만 과거에 두 사람이 영국 내의 같은 지방에서 살았고, 그들의 아버지끼리 친한 친구였으며, 심지어 둘을 결혼시키려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스왈드의 아버지가 코린나를 직접 본 후에 결혼을 피했는데, 그 이유는 코린나가 이탈리아인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자유분방한 성정이 영국 귀족 가문의 성향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인데, 사실 오스왈드는 이때 고향에 루실이라는 전형적인 영국적 미덕―오직 가정에만 충실한 것을 뜻한다―을 갖춘 여성과 약혼한 상태였다.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그는 고민 끝에 코린나와의 사랑을 버리고 루실과 결혼하며, 사랑을 잃은 코린나는 병이 들어 죽음을 맞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의 스토리를 보면 결코 진보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거의 여신의 지위를 누리며 사람들의 찬탄을 받는 여성 예술가가 외국인 남성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는 여성의 탁월한 예술 능력과 개방적인 성격을 부담스러워하다가 결국 사랑을 포기하고 떠난다는 것이 기본 구조다. 그러나 사실 저자는 바로 이런 점을 통해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가장 앞서 나가는 영국 사회에서도 코린나와 같은 천재 여성을 아직 용인하지 못하며, 뛰어난 여성의 목소리는 억압되고 만다는 것이다.

코린나를 억압하고 그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결국 전제정의 메타포다. 코린나는 어떤 이념이나 관습 때문에 사랑을 희생하지는 않으려는 인물이다. 프랑스혁명이라는 무대배경을 놓고 본다면 이는 추상적 인류 개념이나 민족주의적 열정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혁명기와 제정기에는 섬세한 인간적 차이들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하나의 이념으로 환원하려는 성향이 극성을 부렸는데, 스탈은 이를 ‘철학적 광기’로 규정하였다. 구체제와 혁명기의 영웅들, 그리고 나폴레옹에게서 모두 이런 요소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 체제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도그마가 지배하게 된다.

스탈은 온건한 입헌군주정인 영국식 헌정을 최선의 제도로 보았지만, 그 사회에서는 또 인간이 행복한가 하는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다. 『코린나』는 여자 주인공의 시와 음악·춤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적으로는 아직 미숙하지만 빛나는 자연과 아름다운 노래가 어우러진 이탈리아 방식이 더해져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죽이는 과격한 공화국, 혹은 나폴레옹 체제와 같은 무지막지한 군사 제국이 아니라 시의 제국, 신비로운 음악의 제국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반쯤 무당과 같은 여인인 코린나의 시와 노래·춤을 접할 때 사람들은 열광(enthusiasm·‘신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한다. “음악은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