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후지와라씨의 귀족정치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0:48

후지와라씨의 귀족정치

藤原氏

 

고대 일본의 귀족 가문으로 왕실과의 통혼과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9~12세기 일본 왕실을 지배했다.



후지와라 씨의 권력과 지위는 군사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수완과 왕실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용의주도하게 계획하여 획득한 이러한 관계는 후지와라 씨의 딸들을 천황에게 시집보내는 결혼정책을 통해 왕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시킨 데서 온 것이다.

이로써 후지와라 씨의 딸들은 왕비가 되었고 손자와 조카들은 천황이 되었으며, 방계 가문을 포함한 후지와라 씨의 일원들은 국가보호를 받았다.

이리하여 후지와라 씨의 수장은 직위가 있건 없건 간에 정부통치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후지와라 씨는 그들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불교 승려들과의 관계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불심이 깊은 천황이 머리를 깎고 불교 사찰로 퇴위하는 선례를 이용해 후지와라 씨는 독립심 강한 천황들을 설득해 세상사에서 손을 떼고 퇴위하도록 조종했다.

또한 이 가문은 그들의 확고한 정치력의 기반이 될 경제적 토대를 탄탄히 다지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방의 지주 계층들은 그들의 토지를 후지와라 씨에게 맡기게 되었다.

이로써 이들 지주들에 대한 세금이 대폭적으로 감면되거나 그들의 납세의무가 없어지거나 했으며, 후지와라 씨가 국가 수입을 자신들의 가문의 재원으로 돌리는 것이 묵인되었다.



후지와라 가문의 창시자인 나카토미 가마타리(후지와라 가마타리)는 당시 일본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왕위 계승자와 함께 반란을 음모해 왕실의 강력한 정적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

그에 따라 덴지 천황으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왕자는 감사의 뜻으로 가마타리에게 정부의 일을 위임했다.

가마타리가 죽은 해에 천황은 그에게 후지와라[藤原 : '등나무 정자'라는 뜻]라는 성을 주었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그들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짜던 장소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후지와라 후히토는 가마타리의 아들로서 후지와라 성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딸을 쇼무 천황[聖武天皇]에게 시집보내 왕실의 일원이 되는 첫발을 내디뎠다.

후이토의 네 아들은 각각 분가를 세웠는데, 그중에서 홋케[北家]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9세기 후반이 되자 후지와라 씨의 권력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현 천황의 장인이자 왕위후계자의 조부였던 후지와라 요시후사는 천황이 죽자 9세 된 어린 나이의 외손자를 세이와 천황[淸和天皇]으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후 자신은 섭정으로 취임하여 일본 역사상 왕족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후지와라 씨는 천황을 설득하여 비교적 이른 나이에 퇴위하게 한 뒤 어린 천황을 즉위시키고 자신들이 섭정으로 군림하는 관행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약 200년 동안 이런 식의 퇴위가 8회 있었고 7명의 어린 천황이 즉위했다.


섭정직을 확고하게 장악함으로써 후지와라 씨는 왕실을 제거하거나 해임시키지 않고도 사실상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섭정직의 유일한 단점은 천황이 성인이 되면 그 임기가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시후사의 조카인 후지와라 모토쓰네가 섭정직보다 더 강력한 직위인 간파쿠[關白]라는 관직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었는데, 간파쿠는 주로 천황을 대변하거나 천황과 관리들 사이에서 중재를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사실상 간파쿠는 총리이자 천황 다음 가는 최고의 관직이었으며 또한 모든 권력자들이 노리는 자리였다.

887년 우다 천황[宇多天皇]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후지와라 씨는 정부를 장악하는 데 있어서 잠시 제약을 받았다.

우다 천황의 어머니는 후지와라의 씨 출신이 아니었으며 게다가 그는 후지와라의 섭정 없이 통치를 하고자 했다.

그때 마침 모토쓰네가 죽었기 때문에 그는 퇴임 전의 마지막 6년 동안 후지와라 간파쿠를 두지 않고 다스릴 수 있었다.


모토쓰네의 아들 후지와라 도키히라는 아버지가 죽자 겨우 21세의 나이로 후지와라 씨의 지배권을 재확립했다.

도키히라는 결코 간파쿠에 오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와라 씨에 대한 반대를 불식시키거나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의 정적으로는 유능하고 존경을 받는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가 있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자신의 손자를 왕위에 계승시키려는 음모를 짰다는 거짓 혐위를 받아 멀리 규슈[九州]로 유배되었다.


후지와라 씨가 최고의 권력과 영광을 누린 것은 후지와라 미치나가 때였다.

그는 3명의 딸을 천황과 결혼시키고 나머지 1명은 뒤에 천황이 된 후계자에게 시집보냈다.

4명의 손자가 천황이 되었고 1명의 아들이 섭정으로 있었다.

30년 동안 그는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천황들의 궁전보다 더 웅장했던 그의 저택은 연회, 음악회, 와카[和歌] 짓기 대회, 야유회가 자주 열렸다.

이 화려하고도 때로는 퇴폐적이며, 천박한 궁정생활을 동시대인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는 그녀의 위대한 소설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에 묘사했다.

미치나가는 또한 당대에 씌어진 작자 미상의 소설인 〈에이가모노가타리 榮花物語〉의 탄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처럼 미치나가가 궁정에서 한창 권력을 누리고 있을 때 지방에서 후지와라 씨의 세력은 급속하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미 940년대에 지방에서 2번의 심각한 반란이 일어났으나 후지와라 씨와 연계한 무사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무사 가문들의 권력과 인기만을 상승시켜 지방의 지주들은 그들의 토지를 후지와라 씨보다도 이 무사가문들에게 점점 더 많이 위임하고자 했다.

이러한 관행을 미리 점검하지 못함으로써 후지와라 씨는 자신의 권력기반인 경제적 토대가 급속히 무너지고 외곽 지방의 무사가문들이 세력화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027년 미치나가가 죽음으로써 후지와라 씨의 몰락은 더욱 촉진되었다.

후지와라 씨는 1068년 후지와라 출신의 여성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고산조 천황(後三條天皇)이 즉위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후지와라 씨의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독특한 행정제도를 설립하는 것을 저지시키지도 못했다. 

인세이(院政)라고 불린 이 제도는 천황이 어린 아들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퇴임한 후 사원에 별도의 정부를 설립하여, 거기에서 후지와라 씨의 전제에서 벗어나 통치를 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된 것이었다.


인세이 제도는 11세기에 후지와라 씨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으며, 12세기가 되자 궁정에서의 후지와라 씨는 권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1156년 호겐(保元)의 난에서 후지와라 씨와 연계한 무사가문인 미나모토 씨[源氏]의 지지를 받은 파벌들은 무사가문인 다이라 씨[平氏]의 지지를 받은 시라카와 천황[白河天皇]에게 패배했다.


또한 1159년 헤이지[平治]의 난에서 미나모토·후지와라 군대는 다이라 씨로부터 궁정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고자 했으나 불명예스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약 300년 동안 무력 행사를 삼가해왔을 뿐만 아니라 배우지 못한 무사들을 업신여겨왔던 후지와라 씨는 공교롭게도 무력에 의해 제거되었고, 그들의 경멸 대상이었던 무사들에게 권좌를 내주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