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가마타리
藤原鎌足
614 ~ 669. 11. 14
9~12세기에 일본을 지배한 막강한 가문인 후지와라 씨의 창건자이다.
본명은 나카토미 가마타리[中臣鎌足], 가마코[鎌子].
7세기초 일본 왕실을 완전히 지배했던 세력은 강력한 가문 소가 씨[蘇我氏]였다.
가마타리는 소가 씨 전제체제 타도의 뜻을 굳히고 뒤에 덴지 천황[天智天皇]이 되는 왕자와 연합하여 645년 소가 씨의 수장(首長)을 살해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대가로 가마타리는 내대신(內大臣)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으로 알려진 광범위한 개혁을 주도했다.
다이카는 '큰 변화'라는 뜻인데, 중국을 본떠 일본에서 채택한 최초의 연호(年號)이기도 했다.
그의 개혁은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시켰으며, 중국 당(唐)나라를 모방하여 정치·경제 제도를 정비했다.
669년 개혁의 공로를 인정받아 가마타리는 '후지와라'라는 새로운 성을 받았으며 그의 지도하에 후지와라 씨는 안정된 세력기반을 확립했다.
후지와라 후히토
藤原不比等
659~720. 9. 9.
일본의 정치가.
그의 후손들은 857~1160년 일본을 지배한 후지와라 가문의 네 가계를 이루었다.
후히토는 유명한 나카토미 가마타리[中臣鎌足 : 614~669]의 아들이었다.
나카토미 가마타리는 덴치[天智]를 왕으로 옹립한 쿠데타에 이바지한 공로로 후지와라라는 새로운 성을 하사받았다.
후히토는 아버지의 명성 덕분에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었다.
701년 후히토는 다이호[大寶] 율령을 기초한 위원회를 주도했다.
일반법인 영(令) 11권과 형법인 율(律) 6권으로 이루어진 다이호 율령은 일본에서 반포된 최초의 포괄적인 법전이었다.
이 율령은 718년 부분 수정되어 요로[養老] 율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후히토의 두 딸은 각각 왕비가 되었고, 쇼무 천황[聖武天皇 : 724~748 재위]은 그의 손자이자 사위였다.
후지와라 가문과 왕실의 이러한 인척 관계는 후지와라 가문이 권력을 잡는 토대가 되었다.
후히토의 네 아들이 737년 천연두로 모두 죽음으로써 이 후지와라 가문의 권세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이 대를 이어 9세기 중엽에는 후지와라 가문이 궁정을 지배하게 되었다.
후지와라 요시후사
藤原良房
804 ~ 872. 10. 7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전기의 관료.
그는 후지와라 씨가 3세기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일본 왕실을 지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9세기 중반이 되자 후지와라 씨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지와라 가문 여성들이 왕실의 왕비에 계속 간택됨으로써 가능했다.
857년 요시후사는 왕실이 몇 대(代)에 걸쳐 공석이던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요시후사는 9세 된 외손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섭정(攝政)이 되었는데, 왕족이 아닌 신하가 섭정이 된 것은 일본 역사상 처음이며, 이후 일본은 오랫동안 후지와라 가문만이 섭정을 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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