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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대왕 - 오동 이주, 오동 이주 원인, 오동 행적

지식창고지기 2009. 10. 29. 12:06

 오동 이주(斡東 移住)

 그런데 목조대왕은 삼척에서 동북면의 덕원으로 이주해 온 지 19년만에 다시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으로 이주하였다. 오동(斡東) 발음을 <위적사(偉蹟史)>의 번역에선 `와뚱'이라 하고 <왕조실록(王朝實錄)> 등에선 `알동'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2장에 `穆祖移居斡東之地'라 기록돼 있다. 위치는 두만강 입구에서 60리 거슬러 올라가면 있다. 이 곳에서 30리 더 올라가면 국방상의 요충지인 경흥(慶興)이 있다.

 

오동 이주 원인(斡東 移住 原因)

 박식하고 호탕하며 천하를 경영할 뜻이 큰 목조대왕이 원나라 점령하의 여진(女眞) 땅인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으로 이주하게 된 사유는, 첫째 목조대왕이 개원로 정부의 산길대왕과의 관계가 극친한 때문이요, 둘째 원나라는 두만강 요충 지대의 행정관을 여진인이 아닌 이방인(異邦人 : 고려인)에게 맡기는 정책을 써 왔던 때문이요, 셋째 원래 두만강 하류변의 오 동 평야는 주인이 없는 광활한 경작 지대로서 선단을 가진 목조대왕 일족 영흥만 사람들이 봄이면 가서 논밭을 갈고, 가을이면 거둬 오곤 하여 이미 친근해져 있는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오동 행적(斡東 行蹟)

 1254년(고려 고종 41) 목조대왕은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하여 동북면의 덕원에서 이미 일족의 선단으로 개척돼 있는 항로를 따라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까지 항행(航行)하였다. 가는 도중에 시리(時利 : 利原)에 내려 여진족과 친목을 꾀한 다음, 드디어 개원로 정부의 남경(南京) 관할하 경흥(慶興) 땅인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에 도착하니 때는 목조대왕의 춘추 51세 1254년(고려 고종 41)쯤이었다.

 1255년(고려 고종 42) 목조대왕과 극친한 사이인 개원로 정부의 산길대왕은 목조대왕을 위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오동천호소(斡東千戶所)란 구역을 새로 설치하였다. 목조대왕에게는 금패(金牌)를 내려주면서, 남경등처 오천호소(南京等處 五千戶所) 구역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아울러 다루카치(達魯花赤)란 관직을 겸하게 하였다.

 목조대왕이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에서 다루카치란 관직의 임무는 원나라 개원로 행정 구역인 남경 지역 내의 4성(城)을 관령(管領)하고 순찰하는 일이었다. 4성은 첫째 오동에 있는 오동대석성(斡東大石城), 둘째 오동 서쪽 남경에 있는 남경대토성(南京大土城), 셋째 오동 서쪽 120리에 있는 두문성(豆門城), 넷째 오동 서남쪽 120리에 있는 사오리대토성(沙吾里大土城)이었다.

 이 4성은 주로 군인이 거처하던 곳으로 목조대왕은 수시로 왕래 순찰하였으며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을 변동시키지 아니하였다.

 1258년(고려 고종 45) 목조대왕은 산길대왕의 영지(令旨)를 받아, 겸직으로 8개 백호(百戶 : 관청명, 萬戶 · 千戶 등)를 관령하는 명령을 받았다.

 또 1260년(고려 원종 1)엔 목조대왕이 원나라 상서성(尙書省)으로부터 본소(本所 : 총본부)의 직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동인(銅印)을 받았다.

 1264년(고려 원종 5)엔 원나라 황제로부터 오동천호(斡東千戶)를 담당하는 선명(宣命)을 받았다.

 태조고황제의 고조부인 목조대왕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공주(孔州 : 慶興)의 성(城) 남쪽 5리에 장사지냈다. 그 후 1410년(태종 10) 경인년에 함흥 서북쪽 가평사(加平社)의 계좌원(癸坐原)으로 이장되었다. 덕릉(德陵)이 바로 이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