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Cafe/My Love China

내지와 변방 지역으로 구분되는 중국

지식창고지기 2009. 11. 11. 15:42

내지와 변방 지역으로 구분되는 중국

 

 

중국인의 거주 범위는 역사적으로 황하 중류 계곡의 중심지로부터 사방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지금과 같은 범위의 중국 영토가 완성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국이라는 단어는 춘추 시대에 나타났지만, 그것은 지리적 중심에 있는 나라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확실하게는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을 국가의 개념으로 간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1912년 1월, 작년에 있었던 신해혁명의 결실로 중화민국이 등장하면서 그 약칭으로 중국을 쓰게 되었으며, 이로써 중국이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중국은 크게 보아 내지와 변방지역으로 양분할 수 있다. 내지는 예부터 한족이 정착하여 곡물 위주의 농업을 주요 생업으로 삼아온 곳으로,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변방 지역은 한족 이외의 소수 민족이 중심이 되어 목축 경제를 중심으로 하고 오아시스 농업을 보조로 삼는 경제 활동을 해온 곳으로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오늘날과 같은 내지와 변방지역의 정치적 통합은 18세기에 이룩되었다. 현재의 변방지역은 대부분이 청나라의 변방 지대에 속했던 곳으로, 청나라에 의해 복속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예전의 변방 지역은 거의 모두 자치구로 분할되어 있는데, 이들 소수 민족 차치구에는 네이멍구(內蒙古내몽고) 자치구․신지앙웨이얼(新疆維吾爾신강위그르) 자치구․닝시아후이주(寧夏回族영하 회족) 자치구․광시주왕주(廣西壯族광서 장족) 자치구․시장장주(西藏藏族티벳 장족) 자치구 등이 있다. 중국의 남서부 변경 지대에는 18세기 후반부터 이 일대를 뒤덮고 있던 밀림이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인접 국가들과의 국경선이 명확하게 그어지기 시작하였다.

 

내지와 변방 지역은 면적면에서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지만 인구면에서는 극심한 불균형 상태다. 변방 지역은 면적상 내지보다 크지만 인구수로는 전체의 5%도 차지하지 못한다. 변방지역은 대부분 인구 밀도가 1㎢당 1명을 넘지 않으며, 실제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지역도 있다. 변방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지는 고도가 높기 때문에 하천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고 내륙에서 끝이 난다. 하천과 지형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변방 지역은 내지와 달리 내륙 수운망의 혜택을 보지 못해 왔다. 그 대신 육로와 내륙 수운망이 발달하지 못한 변방지역을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중요 통로는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었다. 비단길을 따라서 살았던 오아시스의 여러 민족들은 늦어도 9세기까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였으며, 중국․인도․유럽을 왕래하며 살았다.

 

6대 古都의 변천

 

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의 수도는 초기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후기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갔다. 중국 역사상 등장했던 수많은 수도 가운데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고도는 드물다. 그 대부분이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된 동부의 평원 지대에 집중되어 있다. 역대 都城 가운데 “6大 古都”를 고른다면, 창안(長安)․루오어양(洛陽)․뻬이징(北京)․카이펑(開封)․난징(南京)․항저우(杭州)가 될 것이다.

 

이 중에서 창안․루오어양은 도성의 건설 시기가 상대적으로 이를뿐더러, 수도의 지위를 일찍 상실했다. 이에 반해, 카이펑과 뻬이징은 도성의 건설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수도로서의 존립 기간은 비교적 길었다. 또 난징과 항저우는 도성의 건설 시기가 카이펑 보다는 이르지만 뻬이징 보다는 늦었다.

 

난징과 항저우는 통일 정권보다는 망명 정권 또는 할거 정권의 도성으로 건설되었다. 난징과 항저우는 창지앙(長江)을 천연의 해자(垓字)로 삼을 수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또 난징과 항저우는 경제가 풍요롭고 경치가 아름다운 강남 지방이었기에 통치자의 생활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창안과 루오어양은 험분한 지세로 인해 서북 지방 또는 관동 지방과 격리될 수 있었다. 이는 대외 방어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수도를 건설하게 했다. 그러나 이민족과의 정치․군사적인 투쟁의 중심이 서북 지방에서 동북 지방으로 옮겨감에 따라 동북 지방에 가까운 카이펑이나 뻬이징이 수도로서 더 적합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뻬이징이 난징을 제치고 수도로 선택된 이유는 정치 권력을 전국에 효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