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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京人과 上海人: 城과 灘의 차이

지식창고지기 2009. 11. 11. 15:46

北京人과 上海人: 城과 灘의 차이

 

 

뻬이징 사람들과 상하이 사람들은 서로 묘한 긴장 관계에 있다. 그것은 지역성에 따른 라이벌 의식일 수도 있고, 혹은 사회의식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상하이 사람들은 19세기 서구와의 접촉 이래 선진화의 자부심이 대단하여, 외지 사람들을 무시한다. 그런데 뻬이징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외이다. 상하이 사람들이 뻬이징 사람들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는 않지만 결코 무시하는 수준은 아니다. 이에 반해 뻬이징 사람들은 대범해 하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특별히 타지방 출신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독 상하이 사람들만큼은 무시하려 든다. 뻬이징 사람들이 상하이 사람들에게 하는 최고의 찬사가 “상하이 사람 같지 않은데?”하는 말인 것을 보면, 이들이 상하이 사람들을 매우 무시하거나 혹은 별종 취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뻬이징 사람들은 전통적 “사․농․공․상”관념에 따라 상대방의 신분을 나눈다. 이 잣대로 본다면 뻬이징은 사․농의 도시이고 상하이는 공․상의 도시이다. 이러다보니 뻬이징과 상하이 사이에는 높고 낮음의 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뻬이징에는 전통적으로 관리들이 모여 있었고, 상하이에는 행상이 그득했으니 뻬이징 사람들이 상하이를 무시하는 것은 자기들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요즘에는 상하이가 “大上海”가 되어 경제 수도를 표방하면서 뻬이징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으니, 뻬이징 사람들의 속마음에는 상하이 사람들을 깔보려는 심사가 커질 것이다.

 

이렇게 뻬이징과 상하이가 서로 경원의 대상이 된 것은 사회의식의 차이가 크다는 데 기인했고, 거기에 城(울타리)과 灘(여울)이라는 두 도시의 구조적 차이가 중첩되어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의 vs. 실리

 

뻬이징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대의명분이다. 1910년대 신중국을 뒤흔든 신문화운동기나 5․4운동에 민중의 정치의식과 사회윤리를 계몽시키는 데 앞장섰던 인물은 초기공산주의자 천뚜시우(陳獨秀 1879~1942)이다. 그는 뻬이징에서 <靑年雜誌>를 창간하면서 “청년에게 고함(警告靑年)”을 권두언으로 실었다. 이 글에서 그는 신중국의 청년들이 갖춰야 할 덕목 6개를 꼽았는데, 그 중에“(청년은) 자주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한다”는 항목이 들어 있다. 이러한 자주성과 진취성의 고취는 뻬이징의 청년들에게 그대로 이식되어, 뻬이징을 자주적인 사고를 하고 그것을 진취적으로 펼치는 도시로 만들었다. 대의를 앞세워 천안문광장에서 여러 차례 일어나 역사의 흐름을 바꾼 5․4운동이래의 수많은 청년학생 시위 활동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뻬이징 사람은 어떤 말이건 할 수 있다”는 배짱도 이런 정신이 있어서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싶다.

 

이렇게 대의를 중시하는 뻬이징 사람들이 상하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명문세가가 졸부를 바라보는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뻬이징 사람들의 군자 정신은 배울만 하지만, 군자연하는 허세는 그리 따라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차라리 꼬리를 드러내는 것이 상하이 사람들이라면, 우물쭈물하면서 외투를 좀더 길게 늘여 꼬리를 감추려고 애쓰는 것이 뻬이징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태연을 가장하면서 억지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 뻬이징 사람들의 고칠래야 고칠 수 없는 폐습이 된지 오래다. 게다가 호언장담 역시 뻬이징 사람들의 빼놓을 수 없는 버릇중 하나이다.

 

뻬이징 사람들과 달리 상하이 사람들은 실질을 추구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자전거의 홍수를 이루고 있는 중국에서 자전거에 사람을 태우는 일은 원래 교통법규에 어긋난다. 그런데 젊은 부부가 모두 출근을 하는 터에 아침 시간을 아끼려면, 등굣길에 오르는 어린 자녀들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출근하다가 학교나 유치원 앞에서 내려줘야 한다. 따라서, 시간을 아끼자니 법규를 위반하게 되고, 법규를 지키자니 출근 시간에 쫒기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의 대처 방안에 있어서 상하이 사람들의 실리성이 돋보인다. 그들은 아예 교통법규에 예외 규정을 두어, 출근 시간 등굣길에서는 어린 자녀를 자전거에 태우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로써 교통 안전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상하이 사람들의 이러한 실용주의적 마인드는 그들에게 더 많은 실질적 이득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실용성만으로 모든 업무와 인간관계를 처리해나가는 것은 이해 타산적이라는 비판을 동반한다. 이것이 바로 타지 사람들이 상하이 사람들을 낮게 평가하는 요소가 되곤 한다. 중국 사람들은 상하이 사람들이 무조건 실용과 실리만을 강조한다고 여긴다. 친구 사귀기를 예로 들어 보자.

 

뻬이징 사람들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대부분 첫 느낌을 중시한다. 상대방에 대한 느낌이 좋고 성격이 맞으면 금방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된다. 이에 반해 상하이 사람들은 사람을 사귈 때도 이 사람이 쓸모가 있을 것인지를 저울질한다. 만약 쓸모가 있을 것 같으면 당연히 사귄다. 심지어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해도 서슴없이 지불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사귀어봤자 도움 될 것이 없을 것 같다 싶으면 대부분 아주 점잖게 상대방을 밀어낸다. 이래서 뻬이징 사람들은 상하이 사람들을 이기적이고 속이 좁으며 교활하고 계산적이어서 의리를 나눌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신분의식 vs. 지역의식

 

뻬이징과 상하이는 대도시답게 포용력과 겸용성이 클 뿐만 아니라, 외지인의 출입이 자유로워 인재를 양성하고 활용하며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해올 수 있었다. 그런데 뻬이징의 포용력이나 흡수력은 상하이와 다르다. 뻬이징은 외부인을 선택적으로 흡수하는데 반해, 상하이는 외지인들에게 문호를 훨씬 개방해왔다. 즉, 뻬이징은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야 입성이 가능했지만, 상하이는 원하는 이 모두가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1911년 신해혁명 이전에 뻬이징에 이주해 올 수 있었던 이들은 주로 황제를 보필하는 데 관련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이 벼슬길에 오른 이들이거나 황궁을 관리 유지하는 데 필요한 태감이나 궁녀 및 하인 등이었다. 이후 국민당 정부가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옮겨가고 나서는, 대학과 관련된 이들이 뻬이징에 들어왔다. 당시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대학들은 모두 뻬이징에 몰려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우수 인재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이후에는 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이주해왔다. 뻬이징으로 업무차 전근 온 간부와 뻬이징으로 직장을 분배받은 대학졸업생이 신이주민들이었다. 뻬이징의 신이주민이 이런 식으로 결정된 것은 결국 우수한 엘리트 자질이 전제조건이 된 셈이다.

 

이에 반해 같은 시기, 상하이에 이주해온 이들은 조계지에 안전을 찾아온 강남의 재력가들, 한 몫 잡으려 투기 목적으로 온 이들, 피난민, 향락을 좇아 온 이들, 생계를 유지하러 온 이들, 학업이나 창업을 위해 온 이들로 채워졌다. 그야말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도시에 이주해온 부류가 달랐듯이 이주의 결과도 달랐다. 뻬이징에 들어온 이들은 뻬이징을 강력하고도 여유 있게 만들어 놓았지만, 모두가 하나가 되는 北京人을 만들지는 못했다. 뻬이징 사람들은 애초에 너, 남 없는 하나가 되질 못하고 그저 각기 서로 다른 울타리 안에서, 즉 황가 정부 관리라거나 문인 학자, 또는 시정 서민들이 끼리끼리 울타리를 두르고 살았을 뿐이고, 신이주자들도 각기 다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파묻혔다. 이와 반대로 상하이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이주 경로라거나 동기가 달랐지만, 기존 주민들과 한데 어우러져 일체화된 “우리 上海人”을 만들었다. 결국, 뻬이징에서는 관리, 학자, 서민이 각기 부류별로 자리를 잡고 다층적인 울타리를 만들었으나, 상하이에서는 외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기회를 잡고자 경쟁하면서 다양성을 전제로 일체화를 이루었다 하겠다.

 

뻬이징 사람들은 신분에 대한 고려가 지역성보다 훨씬 강하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관리냐 학자냐 서민이냐는 신분인 것이며, 뻬이징 출신이라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들은 자기 신분에 맞는 체면을 손상당하는 것을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긴다. 이와 반대로 상하이 사람들에 있어서 지역성은 신분보다 우선시되는 항목이다. 그들에게는 상하이 출신이냐가 중요한 것이지, 상대방이 상인이든 사무원이든 혹은 공무원이냐는 나중 문제인 것이다. 이런 의식은 상하이 지방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상하이 사람들에게 받는 대우가 달라진다는 데서 뚜렷이 나타난다.

 

외지에서 만난 상하이 사람들은 상하이 말을 한 마디라도 들으면 금방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상하이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러고는 상하이말로 한껏 목청을 돋워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직업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이런 연유로 중국 각지에 흩어진 상하이 출신들이 “작은 상하이”를 여기저기 만들곤 하지만, “작은 뻬이징”은 찾아보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뻬이징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 나가는 경우, 먼저 자신이 속한 계층의 울타리를 찾아 안주해 버릴 뿐, 상하이 사람들처럼 상하이 출신이라면 무조건 모여 한 지역을 “작은 상하이”로 변모시키는 일은 엄두도 내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로, 뻬이징 사람들은 외지에 나가 지역성 없이 제각기 흩어져버리지만, 평소 각자 자기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상하이 사람들은 외지에서 많은 성과를 거둔다.

 

城 vs. 灘

 

뻬이징과 상하이사람들의 이러한 차이는 뻬이징과 상하이의 도시 구조가 울타리(城)와 여울(灘)이라는 차이에서 더욱 심화된 듯하다. 중국을 한번이라도 둘러본 이는 “뻬이징 청(北京城)”과 “상하이 탄(上海灘)”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또한 뻬이징은 고궁과 성곽으로 이루어져 있고, 상하이는 황푸(黃浦) 江을 끼고 바다로 이어져 해변과 강변 등 여울에 둘러싸여 있음을 보고, 이 말을 실감했을 것이다.

 

城은 울타리이고, 울타리는 그 크기와 형태로써 존귀와 비천을 나타낸다. 황제의 거소인 뻬이징은 그 구조에 있어서 중국의 계층간 주거 환경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淸代의 뻬이징은 지금의 규모와 달리 황제의 집무실인 태화전을 중심점으로 삼은 자금성, 그 바깥쪽의 정부가 들어선 황성, 가장 외곽에 각 부서의 관아가 들어서 있는 경성, 이렇게 세 겹의 울타리로 둘러싸인 城이었다.

 

물론 이 세 겹의 울타리 바깥에는 반듯하게 구획된 시가지가 있어 평민들이 거주했다. 특히 경성에는 내성과 외성의 구분이 있어, 정권을 잡은 만주족이 내성에 거주했고, 외성에는 정권을 이민족에 빼앗긴 한족관리들이 기거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신분에 맞춰 구획된 성 내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면서 생활했다. 이런 상황에서 뻬이징 사람들이 울타리 의식, 즉 동류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상하이라는 도시는 뻬이징과 달랐다. 그곳은 구조상 城이 아니고 灘이었기 때문이다. 灘이란 울타리를 둘러 밀폐시킨 城과 달리, 주변이 툭 터진 물가자리이다. 그러다 보니 개방적이고 한계도 존재치 않는다.

 

이렇게 개방된 환경 속에서 여기저기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제 방식대로 살다보니 획일적이고 높다란 울타리를 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한 울타리가 생긴다하더라도 형식적인 것에 그쳐 얼마 안가 옆으로 밀리고 옮겨져 기둥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되면서 결국은 여울 혹은 모래사장(灘)에 파묻히게 된다. 이는 곧 상하이 사람들로 하여금 뻬이징 사람들이 갖게 된“울타리 의식”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울타리 의식의 유무 여부는 뻬이징과 상하이의 전통 주택이 갖고 있는 구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뻬이징의 전통 가옥 형태인 “쓰흐어위앤(四合院)”은 울타리가 네 귀퉁이를 이루며 가운데에 마당이 있어 옆집과의 차단이 가능했으나, 상하이의 전통 민가는 “스쿠먼(石庫門)”이라 하여, 비슷비슷한 크기의 단독 주택들을 가로로 길게 이어 지어 담장도 없이 벽과 벽이 붙어 있는 형태로 울타리를 칠 수도 없고 또 필요치도 않은 구조였다.

 

뻬이징 친구, 상하이 비즈니스 파트너

 

뻬이징 사람과 상하이 사람을 놓고서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의 우위를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중국인들도 뻬이징 사람을 사귀게 되면 통쾌하고, 상하이 사람을 사귀게 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말하곤 한다. 외지사람이 뻬이징 사람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서로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되면 간담상조가 가능해져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진다. 이는 안팎을 가리는 뻬이징 생활에서 원군을 얻는 셈이 된다.

 

상하이 이주민이 되지 않을 외지인 입장에서 상하이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예의를 중시하기는 하지만, 외지 사람에게 그다지 열정적이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기는 몹시 어렵다. 그렇지만, 상하이 사람하고 친구가 되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그들과 일을 함께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뻬이징 사람들에 비해 계산이 정확하고 사리가 분명하므로 사업 상대로 적격일 수 있다. 즉, 상하이 사람들의 실리 추구 행위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이익과 독립적 인격을 존중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뻬이징에서는 친구를 사귀어 두고, 상하이에 가서는 사업 파트너를 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