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Cafe/언덕에서

단재 신채호

지식창고지기 2009. 5. 25. 23:46

신채호(申采浩.1880.11.7∼1936.2.21)

 

  항일독립운동가ㆍ사학자ㆍ언론인. 본관 고령(高靈). 필명 금협산인(錦頰山人)ㆍ무애생(無涯生). 호 단재(丹齋)ㆍ일편단생(一片丹生)ㆍ단생(丹生). 충북 청주 출생.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ㆍ참가하고, 이듬해 순한글 [가정] 잡지를 편집ㆍ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또는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ㆍ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해조신문(海朝新聞)] 발간,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활동하다가, 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단장,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 등에 피선되었다. 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쫓겨가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36년 옥사했다.

  적과 타협 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채호 생가와 신채호 동상이 대전 도리미산 도리미 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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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말기ㆍ일제강점기의 역사가ㆍ언론인ㆍ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ㆍ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ㆍ무애생(無涯生)ㆍ열혈생(熱血生)ㆍ한놈ㆍ검심(劍心)ㆍ적심(赤心)ㆍ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ㆍ변영만(卞榮晩)ㆍ이장식(李章植)ㆍ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ㆍ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서호문답(西湖問答)> <영웅과 세계> <학생계의 특색> <한국자치제의 약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이십세기 신국민> 등의 논설을 실었다.

  그리고 <독사신론(讀史新論)>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 등의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천희당시화(天 喜堂詩話)> 등을 연재하였다. 또한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와 [대한협회회보]에 <대한의 희망>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과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家庭雜誌)] 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독사신론>은 그 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 수정되어 최남선(崔南善)이 발행하던, [소년] 제3년 제8권에 <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이미 단군ㆍ부여ㆍ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그가 집필한 <동국거걸최도통전>과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등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그는 28세 무렵, 양기탁ㆍ이동녕(李東寧)ㆍ이회영(李會榮)ㆍ이동휘(李東輝)ㆍ안창호(安昌浩)ㆍ전덕기(全德基)ㆍ이갑(李甲)ㆍ이승훈(李昇薰)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尹致昊)ㆍ안창호ㆍ최광옥(崔光玉)ㆍ최남선ㆍ박중화(朴重華)ㆍ장응진(張膺震)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尹世復)ㆍ이동휘ㆍ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大東共報)]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 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文一平)ㆍ박은식(朴殷植)ㆍ정인보(鄭寅普)ㆍ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이듬해 윤세용(尹世茸)ㆍ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ㆍ고구려ㆍ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중편소설 <꿈하늘(夢天)>을 집필했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다.

  한편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ㆍ정한경(鄭翰景)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신채호 등에 의해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異族統治)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ㆍ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1922년 1월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ㆍ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4년경부터 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발표되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가입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 <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ㆍ평등ㆍ폭력ㆍ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 투쟁에 나섰던 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게 한국사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한말 [대한매일신보]에 사론을 싣기도 하였고, [소년]에 <국사사론>을 연재했으며, 최영ㆍ이순신ㆍ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민족영웅에 관한 전기도 썼다. 이 무렵 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는 영웅중심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해,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신채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셋째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넷째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게 되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서의 역사학의 인식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그는 앞에서 열거한 한국고대사관계의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러한 논술들은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해 독자적인 경지를 내보인 것으로, 과거의 유교주의에 입각한 관학적 역사학과 재야(在野)에서 면면히 이어온 비유교적인 사학을 종합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사학은 한국사학사의 여러 흐름들을 종합한 것이다. 그의 한국사 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 바, 그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ㆍ부여ㆍ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했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ㆍ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을 반도 밖에 존재했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했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했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 사상의 역사 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그의 역사이론 및 한국 고대사 인식을 교조적(敎條的)ㆍ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채호의 민족주의(民族主義) 사학(史學)】

 

  우리 나라 민족주의 사학은 단재 신채호에 의하여 확고히 성립되었다. 그는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동국삼걸전>, <최도통전> 등의 구국 위인전기를 저술하여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독사신론>을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연구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조선 상고 문화사> 등을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을 성립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였다. 1923년에는 의열단의 요청에 따라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고 식민지 상태에서 우리 민족을 구할 역사의 주체를 민중이라고 규정하면서 민중에 의한 혁명을 항일 운동의 핵심으로 부각시켰다.

 

【신채호 문학의 의의】

 

  신채호가 강조하는 것은 낭가사상(郎家思想)이다. 낭가사상은 화랑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신채호가 신라의 통일의 힘을 화랑 사상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통치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낭가사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조선 상고사>의 서문에서 신채호는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정의한다. '아(我)' 는 나이고 '비아(非我)'란 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역사는 즉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 간의 투쟁의 과정이라는 의미가 된다. 시기에 따라 '비아'는 계속적으로 달라지는데 여기에서 역사는 주인공인 '아'의 관점에서 쓰여지게 된다는 것이 민족주의 사관이다.

 

  신채호가 문학에서 강조하였던 것은 식민지의 현실을 담아내는 '나' 관점에서 문학이 쓰여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당시의 서구 문학 경도에 대한 항거였다. 이를 국수주의나 보수주의로 이해할 것은 아니며, 당시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서 중심을 잡고, 우리 문학을 세워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신채호 문학의 의의는 삶과 죽음의 절대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흔히 알려진 것처럼 신채호가 문학의 사회적 효용성을 중요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2) 신채호는 양반 계층 출신이면서도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민족 해방을 위한 진보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3) 신채호는 민중의 직접 혁명을 주장하여 식민지적 현실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민중적 세계관 속에서 담아 내었다. 그의 혁명적 일원론은 서구 문학에 대한 민족 문학의 항거였고, 문예 반정(反正)이었다.

 

【연보】

 

1880년 충남 대덕에서 출생.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움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역사 연구를 함. 만민공동회 관련자로 투옥됨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 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애국적 논설을 실음

1907년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 조직

1910년 중국으로 망명 [해조신문] 발간. 만주와 고구려 유적지 답사 국사 연구와 저술에 힘씀

1926년 이영휘와 무정부주의 운동에 가담. <조선혁명선언서 작성>

1929년 일본 관헌에게 체포,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1936년 옥에서 돌아가심

【저서】*<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동국거걸(東國巨傑)>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1929)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최도통전(崔都統傳)> <독사신론>

【논설】*<낭객의 신년 만필>

【소설】 <꿈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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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국사관> - ‘횡설수설’: [동아일보](1986. 2. 20)

  13세 때 칠서(七書)를 읽은 천재로서 20여 세에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강직한 논설을 실어 독립정신을 북돋우기에 전념하였다.  한일합방 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와 북경 등지로 다니며 독립운동에 관계하는 한편 국사연구와 저서에도 힘쓰다가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사건으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10년 징역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 중 8년만에 옥사하였다. 우리나라 언론계의 선구자로서 그 업적이 길이 추모되고 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을 받았다.

  그는 한말의 언론인으로서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한 많은 논설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의 원천으로 인식했던 국사에 대하여도 불후의 명저들을 남겼다.

  ‘…何如라야 是愛國者요, 其口로만 愛國愛國하면 是愛國者乎아, 其筆로만 愛國愛國하면 是愛國者乎아, 夫愛國者는 必也其骨 其血 其皮 其面 其毛 其髮이 惟是 愛國之心之組織物而已, 故로 臥時의 念도 國也며 坐時의 想도 國也며 其歌也도 國也며 其繡也도 國也며 其笑也도 國也며 其哭也도 國也라…’

  신채호가 쓴 <伊太利建國三傑傳>의 이 대목을, 어쩌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몸소 실천한 분은 바로 그 자신이 아니었던가 한다.

  선생은 ‘천재적 사학자요 또 열렬한 독립운동자이다. 그 천성 준열함과 안식의 예리함은 시속(時俗)의 배(輩) 따를 수 없던 바이었고, 사상의 고매함은 스스로 일두지(一頭地)를 벗어났다’(안재홍). 그래서 여순 감옥에서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중 순국했을 때, 미망인 박자혜(朴慈惠) 여사는 제문을 대신하여 곡한다.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신숙주의 후손으로 아호마저도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에서 따왔다. 시골 한사(寒士)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홉 살에 통감(通鑑)을 떼고 열살 때는 이미 행시(行詩)를 지었으며, 열네 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할 만큼 출중한 재질을 보였다. <是日也放聲大哭>의 필자 장지연(張志淵)의 권유로 [황성신문] 논설위원이 된 것이 26세, 다음 해에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는데, 그 후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했다가 57세로 옥사할 때까지 언관(言官), 사관(史官)으로서의 높고 해박한 춘추필법은 지금 읽어도 통쾌하기 짝이 없다.

  위당(爲堂) 정인보의 회고대로 단재는 “언제나 얼굴이 누르스름하고 기운은 초췌(憔悴)하여 늘 복부를 부둥키고 다닐 만큼 병약했으며”, 궁핍 또한 말할 수가 없었다. 감옥에서 차남 두범(斗凡)의 출생을 전해 듣고는,“정 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라”고 가족에게 비통한 편지를 띄울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역사와 독립을 논할 때는 눈은 빛나고 말은 칼날 같았다.’는 단재.(하략)


<단재(丹齋)의 오른손 - 일화> - 이규태: [조선일보](1986. 2. 22)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아침에 세수를 하고 들어오기만 하면 마치 아이들처럼 옷소매와 저고리 앞자락이 흥건히 젖어 있고 했다 한다. 망명시절인지라 옷도 단벌밖에 없어 외출하려면 아랫사람이 부엌에 들고 가서 말려야 했다. 옷 말리기에 짜증이 난 아랫사람이 어떻게 세수를 하길래 옷을 적시나 하고 문틈으로 세수하는 것을 숨어 보았던 것 같다. 머리를 뻣뻣이 세우고 오른손 한 손만으로 물을 길어 얼굴을 씻고 있으니 옷소매에 물이 흘러들고 저고리 앞자락이 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개 좀 숙이면 옷이 젖지 않을 게 아닙니까"

라고 묻자, 호통치길,

  "세수대야 같은 미물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그런 불측한....."

하고 야단을 맞고 있다.

  "그러시다면 왼손도 함께 쓰면 조금은 덜 젖을 게 아닙니까"

라고 묻자,

  "천한 그 왼손을 존귀한 얼굴에 대다니 그런 불손한....."

하며 연거푸 호통을 맞고 있다.

  옛 우리 선비들은 머리를 존중하여 천(天), 조(祖), 군(君), 사(師), 부(父) 등 존장(尊長)을 제외하고는 머리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또한 오른손을 존중하여 갓을 쓰고 수염을 쓰다듬고 밥을 먹고 하는 존귀한 두상작업(頭上作業)에만 오른손을 썼다. 반면에 왼손은 비천하게 여겨 발을 씻을 때나 오줌을 눌 때나 돈을 주고 받을 때나 쓰는 손이요, 존귀한 얼굴을 씻을 때는 천하다 하여 접근도 시키지 않았다.

  선비들의 이 같은 존두비하(尊頭卑下), 존우비좌(尊右卑左)사상은 얼핏 보기에 고답적인 것만 같다. 하지만 겉보기만 고답적일 뿐 세상 살면서 당하게 마련인 그 많은 존비(尊卑)를 분명히 하여 존을 택하고 비를 버리는 일이 체질화되고 일상화되게끔 한 선비들의 생활철학이었던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의(義)와 불의(不義), 도(道)와 부도(不道), 절(節)과 변절(變節), 지(志)와 상지(喪志), 예(禮)와 비례(非禮) 그리고 선악(善惡), 영옥(榮辱), 이해(利害), 용치(勇恥) 같은 상반된 기로에서 방황하게 마련이다. 고난(苦難)이 수반되는 의, 도, 절, 지, 예를 서슴없이 택하고 안락(安樂)이 수반되는 불의, 부도, 변절, 상지, 비례를 서슴없이 버리는 선택의 기틀을 이 존비의 신체철학(身體哲學)으로 체질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은 선비사상을 일상화하고 살았던 마지막 선비였는지도 모른다. 나라가 기울자 <시일야우방성대곡(是日也又放聲大哭)>이란 직필(直筆)이 말해주듯 언론으로 의를 지켰고, 민족이 뿌리째 먹혀들자 그 민족사의 뿌리를 지키는 데 지(志)를 세웠으며, 끝내 외지에서 옥사함으로써 절을 지켰다. 이렇게 단재가 가신 지 반백 년이 되었다. 그다지 긴 세월도 아니데 그 동안에 고난을 버리고 안락을 택하는 반(反)선비풍토가 풍미, 우리들의 목뼈가 버들가지처럼 간드랑거리고 오른손의 활근(活筋)이 건포도처럼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그래서 단재 선생이 존두(尊頭)했던 목뼈와 존우(尊右)했던 오른손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기인(奇人) 신채호> - ‘횡설수설’: [동아일보](1982. 6. 1)

  기발한 일화를 많이 남긴 사람은 흔히 기인으로 불린다. 단재 신채호도 그 중의 한 분이다. 그는 끓는 물에 팔목시계를 집어넣기가 일쑤였다. 달걀을 삶는다는 게 시계를 삶는 꼴이 된다. 수주(樹州) 변영로의 수상록을 보면, 더욱 가관이다. 단재와 함께 목욕탕에 갔던 친구들은 그의 속옷을 보고 놀랐다. 빨간 빛깔의 여자 내의를 입고 있지 않은가.

   사연을 묻자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일전에 어떤 가게 앞을 지나다 보니 그 빛깔이 하도 고와서…”

  앞뒤의 분간도 없이 사 입었다는 실토였다. 한마디로 그의 기행은 딴 곳엔 한눈을 팔지 않는 외곬에서 태어났다. 나라의 독립과 자주 이외엔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먹고 입고 따위의 일상엔 전혀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의 기행은 오히려 돋보인다. 웃음 끝에 옷깃을 여미게도 된다.

  단재의 ‘정신없음’은 집중의 반사적 결과였다. 일부러는 아니었다. 그러나 가령 고대 로마의 장군이었던 ‘마리우스’의 ‘정신없음’은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는 로마를 위해 싸워준 ‘카메리아’ 병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로마 사람들이 그것을 법률 위반이라고 항의하자 ‘마리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쟁소리가 하도 커서 법률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법률에 정신을 쓸 겨를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대답엔 아무래도 일부러의 냄새가 풍긴다. 같은 ‘정신없음’도 그 상황과 사람에 따라 뜻이나 새김이 다른 것 같다.(하략)


<신채호의 지조> - ‘횡설수설’: [동아일보](1980. 12. 7)

  신채호 선생의 이름 위엔 갖가지 호칭이 따라 붙는다. 독립지사라고도 하고 대사학자라고도 한다. 대언론인 또는 ‘마지막 고구려인’이라는 호칭도 그 중의 하나다. 단재는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일화 한 토막을 들어보더라도 그렇다. 단재는 세수를 할 때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한 번 세수를 하고 나면 옷이 온통 흥건해지기 마련이었다. 그 까닭을 묻자 단재는 태연히 대답했다.

  “나는 평생에 머리 숙이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머리 숙일 곳이 없다는 몸가짐이었다. 어디에도 머리 숙일 수 없는 그의 사관으로 보면 <삼국사기>를 엮은 김부식의 사대사관은 ‘천추에 용서 못할 죄악’일 수밖에 없다. 고려 인종으로 하여금 제왕을 칭하게 했던 묘청의 거사야말로 통쾌한 일이었고, 따라서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정론을 펼 수 없게 되자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직을 팽개쳤던 단재의 충정을 알 만하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독립과 주권이었다. 달걀을 삶는다면서 회중시계를 삶아대고 빨간 여자 속옷을 아랑곳없이 입고 다녔던 것도 그 때문이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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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의 사상과 생애

 

【서론】

 

  일본 지도급 인사들의 망언이 우리를 다시 자극하고 있다. 그는 “한-일 합방이 무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은 있으나, 식민지로 지배하지는 않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실로 터무니없는 역사적 망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건을 바라보면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일제시대에 변절과 투항으로 얼룩진 이 땅의 지식인들의 행적을 뒤돌아볼 때 비타협적 투쟁으로 일관해온 신채호의 생애는 우리에게 민족과 독립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한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 민족주의 사학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강한 민족주의 정신으로 일제시대에 민족정신을 북돋웠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사상과 생애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본론】

 

1. 출생과 주위환경

  신채호는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고령 신씨인 신광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을에는 신숙주의 후예들 수백 호가 집단부락을 이루며 살았다. 이들은 조선조의 향반(鄕班)으로서 재산으로나 신분으로나 행세깨나 하는 명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7살에 아버지를, 15살에 친형(재호)를 잃은 신채호는 할아버지 신성우(급제해 오른 벼슬을 일찍이 버리고 고향에서 서당을 꾸렸음)에 의해서 키워졌다. 

  이때 그가 살던 마을에는 그만한 또래의 재동들이 많았다. 뒤에 독립투사로 활약한 신규식(申圭植: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대리), 신건식(申建植: 주중대사) 형제, 신석우(申錫雨: 조선일보사 사장), 신백우(申伯雨: 서로군정서 참모) 등이 각기 꿈을 안고 면학에 열중했던 것이다. 신석우는 신채호의 족조(族組), 신규식은 신채호의 족숙(族叔)뻘이 된다.

  할아버지의 손에 의해 신채호는 17살에 개화사상으로 들끓던 서울로 보내졌다. 봉건유학의 이론적 교두보였던 당대 최고의 대학 성균관에 들어가 백암 박은식이 주도한 일부 진보적 유학경향에 접하면서 청년 채호는 유교학문의 한계를 꺠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2. 많은 논설로써 독립투쟁 전개

  신채호는 스물에 성균관박사라는 벼슬을 얻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국립대학 교수가 된 셈이다.  그러나 그가 학생들을 가르칠 당시는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벼슬을 버리고 구국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황성신문사에 들어가 박은식, 장지연, 주시경 등과 함께 “누를 수 없는 북받치는 정열을 한 자루 붓에 맡겨 민족의 심장을 쳐 움직이는” 논객의 길을 택하게 된다. 

  당시 [황성신문]은 [독립신문]의 후신으로 장지연ㆍ박은식 등의 지사가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논설과 친일파를 매도하는 논설을 피를 토하듯 토해 내고 있었다. 곧 이어 [황성신문]이 폐간되고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는 이 두 신문에서 일반논설 외에 한국의 역사에 관한 글들도 썼다.

  그는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역사 연구를 통해 민족구국운동을 벌이려는 목표를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역사논문에서 민족의 주체를 강조하고 봉건질서의 타파를 외쳤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자주성을 찾고 주체적인 활약을 부각시키면서 사대주의와 양반의식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그의 민족사학자로서의 참모습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들에서부터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3. 망명 후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지속적 노력

  1910年,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자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독립지사들과 협력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했다. 이런 때에 상해에서 먼저 자리잡은 신규식ㆍ박은식으로부터 상해에서 활동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를 받고 상해로 거취를 옮겨 그곳에서 청년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쳐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우리나라 상고사의 연구에도 열중했다.  곧 예전의 우리의 역사가 결코 퇴영적이 아니요, 고조선․고구려 등이 강대한 중국에 맞서 영토를 확장하거나 지키며 살아온 역사적 사실을 통해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데에 온 정열을 쏟았던 것이다.

  이럴 즈음, 국내에서는 3ㆍ1 운동이 일어났고 곧 이어 망명지사들이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임시정부 수립에 앞장서 임시정부 창건위원회 중심인물로 활약했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 전원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독립투쟁의 구심체로 발족된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서로 망명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질이 벌어졌고 심지어 임시정부의 정체(政體)를 놓고 공화파와 복벽파로 나누어지기도 했다. 신채호는 감연히 이런 행동에 성토를 벌였다. 특히 독선적이요 주도권 잡기에만 열중하는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을 그는 규탄하고 나섰다. 그가 이승만을 규탄할 적에는 어찌나 격렬했던지 이승만에 반대하는 세력도 과하다고 평할 정도였다고 한다.

  임시정부가 제대로 단결되지 않자 그는 전원위원장 자리를 내던지고 언론활동을 다시 벌였다.  단재는 순한글신문인 [천고(天鼓)]를 손수 발행하기도 하고, 우리 임시정부에서 간행하는 [독립신문]과 중국의 신문인 [중화일보]에 많은 논설을 써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의 독립투쟁노선은 철저하게 폭력저항이었다. 그는 강한 일본침략과 맞서려면 파괴․암살 등의 방법을 통해 항쟁해야지, 외교 또는 문화운동이나 그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따위의 온건한 방법으로는 결코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투쟁노선 또는 독립 혁명 사상은 <조선혁명선언>에서 잘 나타난다.

 

4. 조선혁명 선언에 대한 연구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앴으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았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깡그리 빼앗아갔다. … 대다수 인민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해 소득으로 한몸과 처자의 입에 풀칠할 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바쳐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마소가 될 뿐이요, 끝내는 그 마소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들의 유입이 해마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들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가 아귀(餓鬼)부터 유귀(流鬼)가 될 뿐이며…“(현대어로 고침)

  1923年에 들어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지사들은 독립투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곧 일제의 고위 관리나 친일파들을 제거하는 폭력투쟁을 전개하여 독립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이들은 임시정부와는 별도로 의열단을 만들어 천진에 본부를 두고 중국에 널려 있는 한국인의 일본 밀정은 물론 도쿄의 침략의 원흉, 조선에 있는 총독부 관리 및 친일파에 대한 테러ㆍ암살을 행동목표로 설정하였다.

  이 의열단은 그들의 강령과 행동목표의 취지 및 단원의 정신무장을 위해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기로 하고 그 선언서를 신채호에게 부탁했다. 신채호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혁명 사상을 발표할 계기로 여겨 위와 같은 대일 선언서를 작성했다.

  또한 이 글에서 그는 일본의 침략수법과 압제의 실상을 낱낱이 지적하고 또 동양평화의 허구성을 파헤쳤다. 또 일본 식민통치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일련의 미온적 방법에 대해 비판을 했다.

  첫째는 국제연맹의 도움 따위에 기대는 외교론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방법의 한계를 말하고, 둘째는 민족자본의 육성,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 신문 등을 통한 문화수준의 향상 따위의 방법으로 민족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준비론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그는 신문 한두 개, 학교 몇 개, 군대 얼마로 대일항쟁을 벌이겠다는 것은 막연하고도 기다릴 수 없는 세월이 될지 모르는 계획이라고 일갈했다. 그리하여 혁명의 수단을 통해서만 소기의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이렇게 강조했다.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몰아낼지며, 강도 일본을 몰아내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몰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라.....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계획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분될 뿐이요, 정신상에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제일은 이족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라.....”(현대어로 고침)

   이 행동 목표에는 일본 천황의 암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글을 읽는 일본 침략자들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격렬하고 조리정연한 문장으로 일본에 대한 혁명이론을 전개했다. 이 글은 의열단 단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따라서 1920연대 의열단의 무력항쟁이 눈부시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5. 조선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

   그러나 이것이 끝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그의 이름도 일본 수사기관에 포착되어 만주 여행길에서 일경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이에 그의 독립투쟁 경력이 모두 드러났고, 특히 <조선혁명선언>의 작성자임도 밝혀졌다. 그는 10년형을 선고받아 여순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1936年 2月 21日, 북풍이 몰아치는 여순 감옥에서 단재(丹齋) 신채호는 고난에 찬 독립투쟁의 일생을 마쳤다. 당시 그의 나이 쉰일곱 살로 일제에 대한 폭력혁명투쟁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10년 실형을 선고받고 8년째 복역하다 옥중에서 순국한 것이다. 조국광복의 꿈을 안고 중국에 망명한 지 26년, 상해와 북경․만주 등지를 오가며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흔적을 더듬고 민족혼을 깨우치던 사학자요, 언론인이며 혁명가인 신채호는 결국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으나 후손들을 생각하여 국내에 묘소를 쓰기로 하고 여순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봉안해왔다. 그러나 정작 그는 민적(民籍)이 없어서 매장허가를 얻지 못해 암장할 수밖에 없는 기막힌 처지였다. 그는 살아서 “곡하고 노래하기 그마저도 어려워라”고 한탄했지만 죽어서도 정작 묻힐 곳이 없는 형편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한 한 많은 생애였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민족사학의 태두, 근대사학의 기수로 일컫는다. 적어도 실학자들의 역사의식을 계승하고 근대사학을 접목시켜 철저한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주체의 역사를 서술하기에 불 같은 정열을 기울였던 것이다. 망명지의 차가운 여관방에서도 그는 역사책을 놓지 않았으며 감옥에서도 그의 연구열은 멈출 줄 몰랐다. 그의 역사서술은 기백이 넘쳤고, 압제를 일삼는 세력에 대해서는 칼보다 예리한 필치로 매도하였다.

   오늘날 그가 뛰놀던 고향 땅은 비록 대청댐으로 일부 물에 잠겨 있지만, 그이 민족정신과 역사정신은 우리의 혼 속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또 후학들은 그의 역사정신을 본받아 민족사관의 정립에 열중하기도 한다. 민족의 역사는 바로 나라를 유지․발전시키는 데에 정신적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6. 조선상고사를 통한 단재 신채호의 사상

(1) 역사학의 객관성 중시

  단재는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확립자로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은 단재사학이 근대적인 역사이론을 전개하고 역사연구에 있어서 실증적 방법을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단재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선상고사>에 잘 나타나 있는데, 총론부분에서 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鬪爭)” 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상극 관계에서 파악하려 하였으며, 이러한 투쟁관계가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만 역사발전에 작용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인간의 행위라 할지라도 이 두 성격(상속성과 보편성)을 갖지 못할 때에는 역사로서 채취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그의 역사 이해는 우리 민족을 아(我)의 위치에 두고 非我인 다른 민족과의 투쟁을 서술하는 소위 투쟁사적인 성격이 강하였던 것이다. 이 점은 그가 한국사 연구를 독립투쟁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였던 것과 상통한다. 외민족(外民族)과의 투쟁 즉 대외 항쟁사야말로 애국심을 일으키는데 가장 효과적이며, 이런 점에서 그가 초기에 이순신, 을지문덕, 최영 등을 부각시키려 했던 것도 이러한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민족사 체계화의 의지

  단재가 바라보는 역사학이란 모순관계의 상극투쟁을 통하여 사회가 진보되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었다. 역사는 역사 기술자의 뜻에 따라 변개되거나 사실이 첨삭될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하여는 사료의 수집선택과 거기에 대한 비판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이것은 역사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실증주의 방법의 제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사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고대사의 영역을 협소한 한반도에서 광활한 만주대륙으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이다. 우선 한국 고대사의 인식체계면에서 보면 <조선상고사>는 과거의 신라 중심의 역사에서 부여, 고구려 중심의 역사로 전환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3) 종래의 인식체계 부인

  또한 단재의 한국 고대사 인식은 종래의 단군, 기자(箕子), 위만조선으로 연결되는 인식체계나 단군, 기자, 마한, 신라로 연결되는 인식체계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단군,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한국 고대사의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 점 천재적인 역사가로 불리는 단재의 <조선상고사>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지명고증에 있어서는 민족의 이동에 따라 지명, 강명(江名) 등도 이동되었다는 지명이동설을 도입하여 “삼한사군 통설”을 반박하였으며, 한국 고대사의 산적한 난제를 해결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일본이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고대의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결론】

 

  단재 신채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그는 평생동안 고개를 쳐들고 얼굴을 씻었다고 한다.  세숫물이 가슴을 적셔도 아랑곳없이 평생 이를 어긴 일이 없다고 한다. “남자가 어찌 땅을 보고 세면을 하느냐”고 말했다 하는데 이런 기백이 바로 독립투쟁에서나 역사서술에도 그대로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신민회 평북책 이승훈이 건립한 정주의 오산학교에 들른 단재의 모습을 당시 교사를 하고 있던 춘원 이광수는 36年 4 [조광]에 이렇게 적고 있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나 되는 단재는 풍채가 초라한 샌님이나 이상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지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 누가 핀잔을 주려 하면 ‘그러면 어때요’라며 여전했다.  남 말을 듣고 소신을 고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얘기할 땐 다정스러웠다.”

  또 [조광]에 실린 이윤재의 ‘북경시대의 단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영어 원전을 읽기 위해 미국 유학을 다녀온 우사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우면서도 발음을 쓸데 없다며 배우지 않았다. 예컨대 neighbour의 발음을 ‘네이그후바우어’라고 읽었다. 네이버는 영국인의 발음법이니 꼭 따를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매우 느리게 한문 읽듯이 구절마람’이란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소리내 읽었다. 그래도 원전을 해독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일화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단재 신채호는 꿋꿋한 성품으로서 일생을 통해 민족정신의 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물론 민족주의의 지나친 치우침으로 인해서 역사에의 투영이 역사서술과 그 가치평가의 공정성을 잃게 한 점도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재 신채호의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꿋꿋한 성품을 소유하신 단재 신채호의 생애와 그의 역사학적 주장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번 비판해 볼 필요가 있으며, 어떠한 사상이나 문화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진정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모습이 단재 신채호가 후손에게 바라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