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Cafe/언덕에서

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6>시민은 죄인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지식창고지기 2009. 8. 3. 17:26

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6>
시민은 죄인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아이스킬로스『아가멤논』

주경철 | 중앙선데이 제48호 | 20080209 입력
일러스트=남궁유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기원전 458년)은 고대 그리스 비극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3부작인 『오레스테이아』의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트레우스 가문의 신화적 배경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아트레우스 가문의 시조는 탄탈로스다. 그는 제우스의 아들이었고 여러 신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올림포스에 있는 신들의 거처에까지 초대받았지만 내심 신들을 공경하기보다 도전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저지른 불경한 행위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과연 신들이 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능력이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자기 아들 펠롭스를 죽여 음식을 만들어 신들에게 제공한 엽기적 사건이다. 물론 대부분의 신은 음식을 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아챘지만 데메테르 여신은 딸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된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 펠롭스의 어깨 부분을 먹고 말았다. 신들은 이 고약한 인간에게 영겁의 벌을 내렸으니 이것이 유명한 탄탈로스의 가책이다.

그는 목까지 물에 잠겨 있지만 물을 마시려고 허리를 굽히면 물이 아래로 도망가고, 머리 위에 잘 익은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지만 포도를 따려고 하면 포도가 위로 도망가 버려 영원히 갈증과 기아에 시달렸다. 신들은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고 죽은 펠롭스를 도로 살려내 이 가문이 대대로 저주를 받도록 만들었다. 신화적인 설명에 따르자면 이 가문의 후손들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한 사건은 여기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탄탈로스의 자손들은 하나같이 흉악한 일들을 겪어야 했다. 우선 펠롭스는 결혼하기 위해 장인이 될 사람을 죽였다. 그는 아트레우스와 트에스테스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동생 트에스테스는 형수와 간통을 저질렀고, 이를 알게 된 아트레우스는 조카들을 죽여 요리한 다음 동생을 속여 그것을 먹도록 만들었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 동생에게 따로 남겨 놓은 손발들을 보여주며 “동생, 지금 먹고 있는 게 자네 아들들이야. 손하고 발은 예 있네” 하고 놀렸다. 이런 대접을 받고 가만있으면 아트레우스 가문 사람이 아니다. 트에스테스는 순전히 형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자기 친딸과 결혼해 아들 아이기스토스를 낳았다. 이렇게 낳은 아들이 복수해 준다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기스토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친자식처럼 키워준 아트레우스가 사실은 친부의 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주저 없이 그를 죽였다.

다음 세대인 아가멤논 대가 되면 이 인간들 간의 관계는 더욱 꼬이게 된다. 아트레우스는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두 사람은 각각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헬레네라는 두 자매와 결혼했다. 이 헬레네가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을 유발한 그리스 세계 최고의 미녀다. 소위 파리스의 심판 이야기가 그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자처하는 세 여신 사이의 3파전에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지혜를 약속한 아테나, 세계의 지배권을 약속한 헤라보다 세계 최고의 미녀를 약속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 주었다.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헬레네를 그에게 주었고, 결과적으로 트로이의 왕자가 스파르타의 왕비를 납치하게 된 이 사건은 세계대전으로 비화하였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그리스 각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원정군을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 원정군은 출발부터 큰 문제에 봉착하였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사냥에 나갔다가 그만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을 죽이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분노한 아르테미스 여신은 바람을 잠재워 원정군을 태운 범선들이 출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풀려면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양으로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불쌍한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에게 저주를 하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까지 물린 채 제단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해서 어렵사리 원정군은 트로이를 향해 떠났다.

아가멤논의 부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딸을 죽인 데 대해 분노를 참지 못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아가멤논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아이기스토스를 정부(情夫)로 삼았다. 아이기스토스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부녀간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났고, 양아버지이자 큰아버지인 아트레우스를 죽인 데다 클리타임네스트라로 보자면 자기 시아버지를 죽인 인물이다. 그런 문제 많은 사람과 딴살림을 차리고 결국 그와 합세하여 자기 남편을 죽이게 되니 이쯤 되면 ‘악녀’ 소리는 확실하게 들을 만반의 채비를 갖춘 셈이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은 이상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극은 그리스 군이 트로이를 함락하였다는 봉화 신호가 보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곧 아가멤논이 귀환하는데, 그는 일종의 전리품으로 트로이의 공주인 카산드라를 노예이자 첩으로 데리고 온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겉으로는 10년 만에 돌아오는 남편 아가멤논을 환영하는 척하면서 흉계를 꾸며 그와 카산드라를 모두 살해한다. 이 극의 스토리 자체는 사실 이것이 전부일 정도로 단순하다. 원래 그리스 비극 작품들은 오늘날의 영화처럼 새로운 스토리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저자 나름대로 극화하고 비장한 대사를 통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설득하여 붉은 카펫을 밟고 집으로 들어가도록 만든다. 이는 원래 신들만 누릴 수 있는 영예이므로 아무리 전쟁 영웅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이런 행동을 하면 오만(hubris)의 죄를 범하게 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가멤논이 왜 붉은 카펫을 밟고 들어갔는지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는 문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속여 그가 목욕탕에서 옷을 갈아입느라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이에 양날도끼(pelekus)로 세 번 내리쳐 살해한다. 왜 하필 세 번일까? 이는 신에게 동물 희생을 드리는 방식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사랑스러운 딸 이피게네이아가 피를 흘린 방식 그대로 아가멤논에게 복수한 것이다.

이 극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가족 간, 혹은 남녀 간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사랑을 배신한 여인, 헬레네는 사랑을 버리고 떠난 여인, 그리고 카산드라는 사랑을 거절한 여인이다(아폴론은 카산드라를 사랑하여 예언의 능력을 주었으나 그녀가 사랑을 거절하자 누구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도록 만들었다). 아가멤논은 가정을 파괴한 자들을 응징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친딸을 죽이고, 결국 자기 부인에게 죽임을 당한다. 사랑은 증오로 변해 있고, 사람들 간의 관계는 모두 비틀어져 있다. 집안 곳곳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피가 복수를 외치고 있다.

“집안에 흐르는 피의 비가 무섭구나.
이제 이 비는 폭포수처럼 커졌으니
또 다른 피의 운명은 다시 숫돌 위에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운명의 여신이 천천히 숫돌 위에 칼을 ‘스윽 사악’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살인의 죄를 저지른 자여, 기다려라!

이 작품은 이런 식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숙명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애증의 문제를 다루지만, 이는 동시에 국가 통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사랑의 질서가 어긋나 버린 집은 곧 통치 질서가 뒤집어진 국가의 상징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부당한 방식으로 권력을 탈취한 참주(僭主)다. 그들은 시민을 “배의 아래층에서 노를 젓는 천한 무리들” 취급을 하면서 힘으로 누르려고 한다. 그들은 사랑을 증오로 바꾸어 버린 자들인 동시에 국가의 민주 질서를 압살한 국적(國賊)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 대표들(코러스)은 칼을 빼 들고 압제자 일당과 격투 직전 상황까지 갈 정도로 당당하게 그들의 권리를 주장한다.

“아르고스의 시민은 죄인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의 내면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심원한 성찰을 담고 있는 동시에 그들이 역사적으로 발전시켜 온 정치 질서를 시민에게 교육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