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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일본 천재화가 토슈사이 샤라쿠가 김홍도와 동일인물?

지식창고지기 2009. 12. 27. 11:23

회화-일본 천재화가 토슈사이 샤라쿠가 김홍도와 동일인물?

토슈사이 샤라쿠는 일본 에도시대 극장가는 주연 배우들의 얼굴을 그린

 

일종의 브로마이드인 '야쿠샤에'가 단연 인기 품목이던 작가. 

 

그 중 1794년 5월, 에도 극장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는

 

충격적이고 개성있는 야쿠샤에를 발표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게 되었죠


 


 

아름다운 배우의 모습보다 우스꽝스럽고 엽기적인 야쿠샤에를 그렸던 샤라쿠는

 

무려 140여점이 넘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이다 10개월여 만에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려서

 

그 이후 기록을 일본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샤라쿠가 김홍도 였을 가능성은 꽤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샤라쿠의 그림에 나타난 선이 김홍도의 필선과 아주 유사하며

 

김홍도의 행적이 묘연했던 시기가 바로 샤라쿠가 일본에 등단한 1794년경이고,

 

또 샤라쿠의 그림에는 분명 일본인이 만들어낼 수 없는 화풍이 접목되는데

 

이것은 김홍도 정도의 화가만이 이룰 수 있는 독특한 세계란 것이 이유


 

이를 구체화시킨 한 학자는 1794년 김홍도가 정조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의 간첩활동과 비교되는 지도 제작이나 정탐활동을 했으며

 

그 와중에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토슈사이 샤라쿠'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우키요에를 그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염사결과 샤라쿠는 정조의 명령에 의해 일본을 정탐한 조선의 도화서 화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당시 정조는 조선을 최고의 첩보 강국으로 키워놓았는데,

그 주역은 도화서 화가들이었어요.

 

영정조 시대 도화서 화가들이 남긴 기록화는 정밀 그 자체로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여는 과정을 일일이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기록화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이 책의 감독이 바로 김홍도였죠.


아마도 샤라쿠는 김홍도의 화풍을 충실히 전수받은 도화서 출신의 조선 스파이거나

 

혹은 그에게 그림을 배우며 스파이 활동을 도운 일본인 화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여러가지 설이 많습니다.

 

샤라쿠가 김홍도라는 설도 있고,

샤라쿠가 신윤복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왜 이런 설(?)들이 많이 나왔냐면,

 

샤라쿠라는 일본의 천재화가가 1794년 5월 어느날

 

에도에 홀연히 나타나 10개월동안 140여점의 그림을 남기고

 

그냥 사라져버립니다.

 

이 미스테리한 사랴쿠의 등장을 김홍도가 조선에서 1년동안

 

자취를 감춘것과 같이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설들이 나오게 된겁니다.


 


 

샤라쿠라는 사람이 얼마나 유명하냐면

 

그당시 일본의 풍속화(유키요에)가 유럽의 회화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희한하게도 샤라쿠가 어디출신인지 누구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일본에서는 샤라쿠로 추정되는 사람만 30여명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샤라쿠가 김홍도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샤라쿠=김홍도?

 

그림속에서 샤라쿠가 김홍도와 동일인물이라는 증거(이영희씨 주장)

 

(1) 샤라쿠(寫樂)의 그림 중에는 일본어로 해석하기 어려운 한시(漢詩)가 있는데,

 

이것을 이두(吏讀) 식으로 해석해야 뜻이 통하는 경우가 있고,

 

또 글 속에 자신의 호인 '단원(檀園)'을 가르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점

 

(2) 김홍도의 그림 중에는 발가락 6개의 부처가 많은데,

 

샤라쿠(寫樂)의 부처 그림에도 발가락 6개의 부처가 있다는 점

 

 

샤라쿠는 옛날 일본에서 이상하게 인물을 그린다는 이유로 처음에 많이 핍박받았던 인물이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뮤지컬같은 공연이 인기였고, 포스터를 그리기 위해 화가들이 투입되었었다.

 

그때 독특한 화법을 가진 한 샤라쿠라는 사람이 포스터를 처음 그리게 되었는데

사람을 과장된 표현으로 그려 비난을 샀다.

 

 

그렇게 샤라쿠의 그림은 단순히 비싼 도자기를 싸는 종이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이 해외로 수출되면서

고흐의 눈에 띄게 되었고 고흐는 샤라쿠의 그림을 자신의 그림에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샤라쿠의 그림은 고흐에게 영향을 많이 끼치게 되었고, 샤쿠라는 일본인이라고 알려져왔다.

 

그런데 이영희씨는 책에 그 샤라쿠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대표화가중 한명인 김홍도라고 주장했다.   일단, 부처의 발이 6개인 우리나라 그림과 샤쿠라가 그린 발가락 수가 같다는것, 선의 표현기법, 화법이 같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또 샤쿠라가 나타난 시기와 김홍도가 사라진 시기와 같았고,

전에도 정조가 김홍도를 스파이로 보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화가를 보내어 그림을 그려서 일본의 주요정보를 가지고 오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오주석 교수가 반박을 했다.

<연풍읍지>에서 그 당시 김홍도는 사라진것이 아니라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있었던 연풍현 현감으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토슈사이 샤라쿠가 누군지, 140점의 그림을 남기고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아직 모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와 함께 세계 3대 초상화가로 불리우는 토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

 

샤라쿠(寫樂)의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드가 등 전기인상파를 비롯해서 고흐의 후기인상파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회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화가입니다.

(일례로 고흐가 파리에서 그린 '탕귀영감의 초상화'의 배경이 우키요에로 꽉 채워져 있을정도로 일본의 우키요에는 당시 유럽 화가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샤라쿠는 1794년 에도의 극장가에 홀연히 등장, 10개월동안 무려 140여점의 작품을 제작하는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샤라쿠의 행적은 묘연합니다.

 

샤라쿠는 일본을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이지만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3) 샤라쿠(寫樂)와 김홍도의 필선(筆線)의 특징으로 붓 끝이 꺾여 올라간다는 점 등등

 

김홍도와 샤라쿠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아직까지 확인이 안된 가설일 뿐이랍니다.^^ 앞으로 더욱 뚜렷한 증거가 나타난다면 김홍도가 샤라쿠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밑에 첨부한 내용은 김홍도와 샤라쿠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이영희씨(한일비교문화연구소장)의 주장과 그에 대한 오주석씨의 반론을 담았습니다. 읽어보세요^^

 

 

 

김홍도와 일본의 천재화가 샤라쿠(東洲齊寫樂)는 동일인물?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조선의 대표적인 궁중화가로서 본관은 김해, 호는 단원(檀園)이다. 일반적으로 김홍도는 풍속화를 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모든 장르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천재 화가였다.

 김홍도가 활동하던 시기, 일본에서는 토슈사이 샤라쿠(東洲齊寫樂), 키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麻呂, 1753?-1805),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 1760-1849) 등 풍속화(우키요에=浮世繪)를 그리는 화가들이 이름을 날렸다. 그 중에서도 샤라쿠(寫樂)는 1794년 5월 어느 날 에도(江戶, 지금의 東京)에 홀연히 나타나 10개월간 140여점의 그림만 남기고 사라졌다. 샤라쿠(寫樂)의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드가 등 전기인상파를 비롯해서 고흐의 후기인상파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회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화가다. (일례로 고흐가 파리에서 그린 '탕귀영감의 초상화'의 배경이 우키요에로 꽉 채워져 있다. 그 정도로 일본의 우키요에는 당시 유럽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샤라쿠(寫樂)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01년 독일의 유리우스 쿠루트가 쓴 『Sharaku』」에 의해서이다. 유리우스 쿠루트는 이 책에서 "샤라쿠(寫樂)는 렘블란트, 베라스케스와 함께 세계 3대 초상화가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샤라쿠(寫樂)가 어디에서 출생하여 누구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샤라쿠(寫樂)에 대한 연구서가 100여권이나 나와 있고, 샤라쿠(寫樂)로 추정되는 사람이 30여명이나 된다. 그 중에서 요슈(万葉集)의 재해석으로 잘 알려진 이영희씨(한일비교문화연구소장)는 샤라쿠(寫樂)와 김홍도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영희씨는 샤라쿠(寫樂)와 김홍도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5년간 연구하여, 그 성과물로  『또 한 사람의 샤라쿠=もうひとりの写楽(河出書房新) 라는 책을 내놓고 있다. 이 책에서 이영희씨는 샤라쿠(寫樂)의 정교하고 해학적인 화풍, 붓의 터치, 그림 속 글의 내용 등*1)에서 김홍도가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홍도가 연풍현감으로 지내던 무렵(1792-1795), 임금(정조)의 밀명(密命)을 받아 일본의 군사정보 등을 수집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1764년 이후 30년간 통신사의 왕래가 없었 임진정유 왜란을 겪은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거기에서 활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풍속화(浮世繪)를 그려 팔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김홍도는 1789년(44세)에 정조의 명에 따라 츠시마(對馬島) 지도를 그려오기도 했던 적도 있다.

  전에 샤라쿠와 김홍도의 동일인물 여부에 대해서 KBS TV, 일본의 아사히 TV(1996. 9. 16)에서 다룬 적도 있지만, 아직까지 사실로 확인된 바는 없고, 이영희씨의 추리소설 같은 추측*2)과 가설만 있을 뿐이다.

*1) 그림 속에서 샤라쿠(寫樂)와 김홍도가 동일 인물로 추측하는 가지 특징

(1) 샤라쿠(寫樂)의 그림 중에는 일본어로 해석하기 한시(漢詩)가 있는데, 이것을 이두(吏讀) 식으로 해석해야 뜻이 통하는 경우가 있고, 또 글 속에 자신의 호인 '단원(檀園)'을 가르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점

(2) 김홍도의 그림 중에는 발가락 6개의 부처가 많은데, 샤라쿠(寫樂)의 부처 그림에도 발가락 6개의 부처가 있다는 점

(3) 샤라쿠(寫樂)와 김홍도의 필선(筆線)의 특징으로 붓 끝이 꺾여 올라간다는 점 등등

*2) 필자는 이영희씨의 추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평소 한일고대사에 대한 이영희씨의 해석에는 지나칠 정도로 민족우월적 사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93∼94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노래하는 역사>와 2000년 <속 노래하는 역사>에서 한 고대어 분석을 통해 『만요슈(萬葉集)』는 왜로 건너간 가야계백제계고구려계 한민족이 왜에서 벌인 패권다툼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영희씨는 <노래하는 역사>에서 일본의 39대 천황 천지(天智)는 백제 무왕(武王)의 아들이고, 40대 천황 천무(天武)는 고구려의 제상이자 장군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고, 41대 천황 지통(持統)은 천무 천황의 비(妃)이고, 42대 천황 문무(文武)는 신라의 문무왕 ... 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이영희씨의 해석은 추리소설의 소재로서 재미있을 지 몰라도 사실적(史實的) 고증은 부족하다.

■ 위의 그림: 왼쪽부터 이영희『또 한 사람의 샤라쿠=もうひとりの写楽』河出書房新), 김홍도 자화상, 샤라쿠의 대표적 우키요에 스모선수

 

----------------------------------------------------------------------반론

 

   샤라쿠 활동기간에 김홍도, 조선에 있었다.

   이영희씨의 '일본화가 샤라쿠=김홍도' 주장에 대한 반론...시사저널/ 1998. 8

 

       오주석(서울대강사. 한국회화사)

 

 

일본 에도 시대의 수수께끼 판화가 샤라쿠가 바로 조선 정조 시대 최고화가인 김홍도였다는 이영희씨의 주장은 대단히 충격적이고, 일면 신선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논리의 모순과 끝간데 없는 상상, 그리고 언어에 대한 편집증적인 해석과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로 짜여진 신기루일 뿐이다. 이씨의 주장에는 갖가지 문제가 있지만 지면 관계상 가장 기본적인 오류 하나만 검토한다.(더 자세한 내용은 <단원 김홍도-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영희씨에 의하면 샤라쿠는 1794년 5월 일본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1795년 1월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기까지 단기간 활약하면서 판화 1백 40점을 남겼다. 그런데 묘하게도 같은 기간에 김홍도가 활동한 흔적이나 남긴 작품이 국내에는 일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풍읍지>를 보면 김홍도는 1791년 12월 22일부터 1795년 1월 7일까지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있었던 연풍현 현감으로 재직하였다. 이것은 현지에서 기록된 지방문서로, 이른 바 1차 사료이다. 경상도 문경에서 조령을 넘으면 바로 연풍인데, 조령산의 상암사라는 절을 중수할 때 새긴 비문에는 1792년 가뭄이 크게 들어 원님 김홍도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내요이 보인다.

 

가문은 1793년에도 거푸 들어서 삼남 지방에 굶는 백성이 속출하였다. 1793년 5월 24일자 <일성록>을 보면 충청도 감사가 '연풍현감 김홍도는...나라 곡식에 의지하지 않고 나름대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곡식을 나누어 죽을 끓여 먹였는데, 정해진 규정대로 시행하여 굶주린 백성이 살아나게 되었다'고 보고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연풍현 백성이 5천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3천이 굶주렸다고 하니 기근이 얼마나 심햇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영희씨는 이해 가을에 김홍도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이런 와중에 목민관인 수령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다.

가뭄은 1794년에도 계속되어 정조는 홍대협이라는 사람을 호서 지방에 내려 보내어 수령들이 백성을 잘 보살피는지 감사하도록 하였다. 1795년 1월 7일 <일성록>에 기록된 홍대협의 보고에는 '신이 지난해 11월 4일에 명을 받들어 호서위유사로 가서 정황을 살펴본 결과...연풍 현감 김홍도는 다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하나도 잘한 행적이 없으며...백성에게 악형을 베풀어...경내 전체가 소란하고 원망하는 비방이 자자하다고 합니다...이같이 백성에게 포학한 무리는 중히 다스려 벌주어야 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또 같은날 기록의 앞쪽에는 "과인(정조를 가리킴)이 묻기를...'연풍 원(김홍도)은 과연 어떠하던가?'하니, 홍대협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몸소 살펴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듣건대 그 정령이 극히 해괴하다고 하옵니다'하였다...과인은 '연풍과 신창 두 고을의 수령은 우선적으로 갈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일은 파직으로만 마무리되지 않았다.

1월 8일자 <일성록>에 나타난 비변사에서 올린 의견에는 "저 자가 미천한 몸으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도 보답할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악을 저지른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미 직책에서 갈렸다고 해서 놓아둘 수 없습니다. 해당 관청에 영을 내려 잡아다 문초하고 엄치 죄를 밝혀야 합니다'하니 주상께서 윤허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한편 같은책 1월 18일자에는 '의금부에서 미처 잡아 오지 못한 죄인을 사면하는 단자교로 인하여...김홍도를 놓아주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필자는 한.일간을 여행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예 빼고서 샤라쿠가 활약하기 직전과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있었던 김홍도 행적의 일부만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반론은 충분할 것이다. 한편 인용문에는 김홍도가 백성을 못살 게 군 탐관오리였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필자는 그것이 중인 출신 수령에 대한 모함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