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도굴당한 조조, 中 희대의 도굴꾼
연합뉴스 | 입력 2010.01.01 15:09 | 수정 2010.01.01 15:25 |
도굴 기구 둬 고분 파헤쳐..확보한 보물 군자금 활용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최근 중국 허난(河南)성에서 발견된 위(魏) 무왕(武王) 조조(曺操.155-220)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의 진위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이는 가운데 이 무덤이 이미 수차례 도굴됐던 것으로 드러나 중국 고고학계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이 무덤이 조조의 진짜 무덤으로 확인된다면, 72개의 가묘(假墓)를 만들라는 유언을 남겨 자신의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천하의 지략가 조조 역시 도굴꾼들의 집요함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 된다.
조조는 그러나 자신의 무덤을 파헤쳤던 도굴꾼들을 책망하거나 원망할 처지가 못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조조야말로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희대의 도굴꾼이었기 때문이다.
동진(東晋)의 역사학자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를 시작으로 후한(後漢)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명인 진림(陳琳)의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남조(南朝) 송대(宋代) 학자 배송지(裵松之)가 저술한 '삼국지' 등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조조의 도굴 전력을 상세히 기록해 후세에 전하고 있다.
특히 진림의 삼국지 위서는 조조가 도굴을 위해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모금교위(摸金校尉)'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문 도굴 기구까지 조직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중국 고대 고분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서한(西漢) 양효왕(梁孝王)의 무덤을 파헤쳐 금과 보물 수만 근을 챙긴 것도 조조였다. 조조는 양효왕의 무덤에서 확보한 보물로 휘하의 군인들을 3년간 먹여 살렸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는 현장을 직접 찾아 도굴을 지휘했고 도굴한 무덤은 잔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뜨려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조조가 군자금 확보를 위해 고분을 파헤쳤다면 춘추시대 합려(闔閭)왕을 도와 오(吳)나라를 강대국으로 키웠던 오자서(吳子胥)는 복수를 위해 파묘(破墓)한 것으로 유명하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오나라가 초(楚)나라를 함락하자, 그는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시신에 300번의 채찍질을 가하는 것으로, 아버지와 큰 형을 죽인 것을 분풀이했다. '굴묘편시(掘墓鞭屍)'라는 고사성어도 여기서 유래됐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천하를 다투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자살한 항우(項羽)는 진시황(秦始皇) 무덤을 도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유방이 진시황 무덤을 도굴한 항우의 행위를 큰 죄로 간주해 천하에 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자들은 진시황 무덤이 훼손된 흔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항우가 유방에 의해 '누명'을 썼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무덤을 파헤친 것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청(淸)의 건륭(乾隆)황제는 명(明)나라 영릉(永陵)을 새로 짓도록 해 능의 규모를 축소했을 뿐 아니라 영릉 전각의 값나가는 대들보들을 확보, 청나라 궁전 건립에 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나라 황제들이 궁전을 지으려고 명나라의 건축물을 훼손한 경우는 있었지만 명조(明朝)의 능에까지 손을 댄 것은 건륭황제가 유일하다고 대명회전(大明會典)은 적고 있다. 민간에서는 이를 두고 '건륭도목(乾隆盜木)'이라 부르고 있다.
pjk@yna.co.kr
http;//blog.yonhapnews.co.kr/haohaor/
(끝)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최근 중국 허난(河南)성에서 발견된 위(魏) 무왕(武王) 조조(曺操.155-220)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의 진위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이는 가운데 이 무덤이 이미 수차례 도굴됐던 것으로 드러나 중국 고고학계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이 무덤이 조조의 진짜 무덤으로 확인된다면, 72개의 가묘(假墓)를 만들라는 유언을 남겨 자신의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천하의 지략가 조조 역시 도굴꾼들의 집요함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 된다.
동진(東晋)의 역사학자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를 시작으로 후한(後漢)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명인 진림(陳琳)의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남조(南朝) 송대(宋代) 학자 배송지(裵松之)가 저술한 '삼국지' 등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조조의 도굴 전력을 상세히 기록해 후세에 전하고 있다.
특히 진림의 삼국지 위서는 조조가 도굴을 위해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모금교위(摸金校尉)'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문 도굴 기구까지 조직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중국 고대 고분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서한(西漢) 양효왕(梁孝王)의 무덤을 파헤쳐 금과 보물 수만 근을 챙긴 것도 조조였다. 조조는 양효왕의 무덤에서 확보한 보물로 휘하의 군인들을 3년간 먹여 살렸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는 현장을 직접 찾아 도굴을 지휘했고 도굴한 무덤은 잔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뜨려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조조가 군자금 확보를 위해 고분을 파헤쳤다면 춘추시대 합려(闔閭)왕을 도와 오(吳)나라를 강대국으로 키웠던 오자서(吳子胥)는 복수를 위해 파묘(破墓)한 것으로 유명하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오나라가 초(楚)나라를 함락하자, 그는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시신에 300번의 채찍질을 가하는 것으로, 아버지와 큰 형을 죽인 것을 분풀이했다. '굴묘편시(掘墓鞭屍)'라는 고사성어도 여기서 유래됐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천하를 다투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자살한 항우(項羽)는 진시황(秦始皇) 무덤을 도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유방이 진시황 무덤을 도굴한 항우의 행위를 큰 죄로 간주해 천하에 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자들은 진시황 무덤이 훼손된 흔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항우가 유방에 의해 '누명'을 썼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무덤을 파헤친 것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청(淸)의 건륭(乾隆)황제는 명(明)나라 영릉(永陵)을 새로 짓도록 해 능의 규모를 축소했을 뿐 아니라 영릉 전각의 값나가는 대들보들을 확보, 청나라 궁전 건립에 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나라 황제들이 궁전을 지으려고 명나라의 건축물을 훼손한 경우는 있었지만 명조(明朝)의 능에까지 손을 댄 것은 건륭황제가 유일하다고 대명회전(大明會典)은 적고 있다. 민간에서는 이를 두고 '건륭도목(乾隆盜木)'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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