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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 상상의 스크린에 날개를 달다

지식창고지기 2010. 1. 12. 04:18

디지털 기술, 상상의 스크린에 날개를 달다

시티라이프 | 입력 2010.01.11 14:07

 

판타지는 영화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영화는 상상을 구현한다는 측면에서는 텍스트로 된 소설이나 만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스케일의 측면에서 TV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판타지 영화의 핵심은 바로 디지털, 즉 테크놀로지다.

↑ ‘아바타’ 제작중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

상상의 세계를 그린 판타지 무비는 언제나 대중들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영화 '아바타'는 개봉 3주만에 12억달러를 벌어들이며 역대 흥행순위 4위(4일 현재)로 뛰어올랐는데, 기존의 흥행순위 탑 5는 1위 타이타닉(1997), 2위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2003), 3위 캐리비안의 해적:망자의 함(2006) 4위 다크나이트(2008), 5위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이었다. 로맨스/드라마 장르로 구분되는 '타이타닉' 역시 누구도 보지 않은 대재난의 현장을 상상으로 재현해놓은 것이긴 하지만 이것을 뺀다고 하더라도 순수 판타지 장르와 SF영화들이 갖는 산업적 파워를 실감할 수 있다. 과거 흥행의 강자들을 돌이켜 보더라도 1970년대 '스타워즈' 시리즈나 80년대의 'ET' 등으로 , '꿈의 공장' 할리우드가 전세계를 지배하는 강력한 무기가 판타지를 근간으로 하는 상상 세계의 재현임을 알 수 있다.

판타지를 위한 매체, 영화

영화는 그 역사의 시작이 판타지의 세계를 스크린에서 펼쳐 놓는데서 시작했다는 매체적인 속성을 가진다. 하지만 SF를 바탕으로 한 블록버스터 전략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산업의 위력을 제대로 떨친 것은 80년대 이후 최근 수십년동안의 비약적인 기술 발전과 맞물리면서다.

특히 90년대와 21세기에 이뤄진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은 상상을 그리는 스크린 판타지에 날개를 달았다.

'아바타'를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건 '타이타닉'을 만들기 2년 전인 1995년이었다. 2주 만에 스크립트는 완성됐지만 '파란 피부를 가진 외계 생명체'의 사실감을 살릴 기술적인 자신이 부족해 그의 프로젝트는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터미네이터 2'에서 금속성의 디지털 배우를 탄생 시킨 첨단의 그래픽 기술을 개발한 뒤였음에도 그는 좀 더 인간처럼 살아 움직이고 느끼는 외계 생명을 구현해내고 싶은 자신의 욕심에 미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감을 얻은 것은 2003년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 등장한 '골룸'을 보고 난 뒤였다. 인간의 몸짓과 감정을 거의 비슷하게 재현해낸 골룸의 등장은 대중들을 경악시키며 디지털 배우의 한계를 성큼 확장시켰다.

그로부터 6년 뒤 등장한 '아바타'의 나비 족의 모습은 '골룸'과 비교해보면 또 얼마나 눈부시게 기술적으로 발전했는지를 실감케 한다. 어두운 밤의 계곡을 어슬렁거리며 기어다니던 골룸에 비해 나비족은 환한 형광색으로 수놓아진 낮의 세상을 시원하게 날아다닌다. 사람의 행동과 비슷해서 신기하던 골룸에 놀란 관객들은 행동 뿐 아니라 사람의 감정과 표정까지 제대로 대신하는 나비족의 실감나는 연기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6년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모션 캡쳐'의 기술이 인간의 감정과 표현까지를 재현해 내는 '이모션 캡쳐'기술로 전진한 까닭이었다.

골룸을 연기한 단신의 배우 앤디 서킨스는 전신에 타이즈 복을 입고 온몸의 관절과 근육 부위부위에 자신의 움직임을 찍어내는 카메라를 부착한 뒤 골룸을 연기했다. 이 카메라에 찍힌 내용이 그대로 컴퓨터로 옮겨져서 300개의 근육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열연한 배우 앤디서킨스의 얼굴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미리 컴퓨터로 만들어진 250개의 표정이 그의 얼굴 연기를 대신했다.

비슷한 기법으로 만들어진 같은 감독 피터 잭슨의 '킹콩'(2006)에서도 서킨스는 킹콩의 움직임을 연기했지만 스크린으로 결과물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화면에 약간의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열연은 배우가 했지만, 화면속에서 관객들의 가슴을 움직인 일품 표정연기의 공은 의 명배우는 골룸과 킹콩에 돌아갔다.

하지만 제임스 카메론의 나비족은 주연을 맡은 샘 워싱턴이나 시고니 위버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든다. 이번엔 배우의 얼굴에까지 카메라를 달아 그들의 표정을 잡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가 3미터가 넘고 새파란 몸에 꼬리까지 단, 인간과는 전혀 다른 외양을 지닌 나비족이었지만 그들의 생김새와 땀과 모공까지 재현해내는 기술 덕분에 이 디지털 배우들은 실제 배우들의 연기와 분간할 수 없는 생생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다.

분장기술과 모션캡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모션 캡쳐 기술은 동공의 크기 변화, 눈썹을 떨림까지 카메라로 잡아낸다. 환한 햇빛속에 서있는 디지털 배우들은 반투명한 피부속에 핏줄까지 살짝 내비칠 정도다.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디지털 기술

인간의 모습과 흡사한 디지털 배우를 등장시켜 상상의 외연을 확장하는 시도는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시도됐다. 아바타에 앞서 비슷한 시도를 한 대표적인 영화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폴라 익스프레스'(2006)다. 이 영화는 특급배우 톰 행크스의 표정과 연기를 그대로 본 딴 디지털 배우가 주연을 맡아 영화 전체를 이끌고 나간다. 모션 캡쳐나 컴퓨터 그래픽 특수효과가 영화의 한 장면이나 시퀀스에 등장했던 것과는 달리 영화 전편에서 진짜 배우의 느낌을 가진 디지털 배우를 구현해냄으로써 디지털 배우 영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이 영화의 제작팀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모션 캡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퍼포먼스 캡쳐'로 명명했다.

이로써 관객들은 카메라가 찍어내는 배우와 스크린에 재현되는 디지털 배우의 차이를 극소화함으로써 '리얼리티'의 의미 자체에 의문을 가져야 했다. '퍼포먼스 캡쳐'는 몸짓 뿐 아니라 감정과 표현까지 잡아내는 기술이라는 뜻에서 아바타와 같지만 아바타의 디지털 배우들은 그 사실감에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며 이를 3D화면으로 구사해 냈다는 또다른 기술의 전진의 의미를 더한다.

이처럼 점점 더 인간과 가까워지는 디지털 배우의 등장과 현실에 가까운 리얼리티의 재현은 어마어마한 자본과 기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 속에 축적된 기술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반지의 제왕'에서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한 웨타 디지털 사에서 '아바타'의 후반 작업을 위해 사용된 컴퓨터 수는 총 7500대, '아바타' 속 판도라의 자연을 구현한 CG 저장 용량을 설명하는데는 1페타바이트라는 낯선 용어를 등장시켜야 한다.

이는 '타이타닉'서 타이타닉 호의 침몰과 승객 수 천명을 창조하는데 필요했던 용량 2 테라바이트의 500배에 달하는 수치다. 배우들의 연기가 이루어진 세트 '볼륨'에 설치된 카메라의 수는 무려 250대. 배우들이 머리에 착용한 이 초소형 카메라가 그들의 표정 연기를 읽었기 때문에 250대의 카메라는 '볼륨' 곳곳에 설치되어 배우들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포착했다. 이모션 캡쳐 기술 외에도 가상 카메라라는 기술 역시 연기를 실감나게 하는데 일조했다. 가상의 카메라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갖다대면, 감독이 보는 모니터 화면에는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나비의 전사 가 판도라 속에서 등장하는 식이다.

인공지능 기술도 등장한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70만 대군의 전투신을 만들어 낸 것은 단신 배우들의 연기를 잡아낸 뒤 여기에 인공지능을 부여해 상대방이 칼을 내밀면 거기에 방어하는 연기를 자동으로 해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밖에도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주인공이 이 아찔하게 수직낙하하는 장면에 쓰인 '스파이더 캠', '매트릭스' 총격신 장면에 쓰인 '뷸렛 타임(Bullet Time)'등 나날이 등장하는 새로운 용어의 촬영과 CG기술들은 실사와 그래픽사이의 이질감과 부자연스러움을 극복시키며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사실성을 높이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빛내는 건 결국 인간의 상상력

디지털 배우의 등장과 3D화면의 완벽한 구현으로 이제 영화 속의 판타지는 그 앞을 내다보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 관객이 무엇을 한계로 생각하든 영화는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의 날개를 단 판타지 영화들이 영화 산업계의 지형도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영화계와 정보통신계가 아무리 "앞으로 3D아이맥스 영화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을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바타'의 등장으로 전 세계는 '올해가 아이맥스 영화의 원년이 될 것'이며 앞으로의 영화가 어떤 형태로든 3D 영화에 가까워지리라는 판도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에 동의하게 됐다. 디지털 배우의 등장 역시 '영화 배우'라는 개념과 역할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될 전망이다. '폴라 익스프레스'의 톰 행크스나 '아바타'의 샘 워싱턴은 분명. 그러 밖에서 열연을 펼치긴 했지만 그들이 아카데이 남우주연상을 받는다고 하면 왠지 멋쩍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앞으로 배우들의 연기 패턴과 목소리 표정 등이 입력된 컴퓨터가 실제 연기 없이도 그들의 연기를 화면에 완벽하게 펼쳐놓는 시기가 온다면 누구에게 상을 주어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영화 '시몬'에서처럼 디지털 배우가 인기를 얻고 상을 받게 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배우들 역시 화면 속에서는 자신을 닮은 디지털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일거리를 얻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의 날개를 단 판타지는 점점 무한계로 확장하고 있지만 결국 상상세계의 구현에 더욱 절실해 지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다. 이제 기술의 한계 때문에 상상의 재현이 불가능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에 모든 것만 집어넣으면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하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와 '아바타'가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고 비슷한 기획에서 제작됐지만 관객의 반응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는 바뀐 기술의 환경 바뀐 영화 패러다임 속에서 이야기의 틀과 구도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것이 영화감독의 몫이 된 것이다. 새로운 상상의 환경 속에서 누가 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는 가 하는 것이 2010년대 이후의 영화의 패권을 가져가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211호(10.01.19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