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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 2. 고대 서양의 자연관

지식창고지기 2010. 1. 17. 19:59

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2. 고대 서양의 자연관

     

      자연이라는 말 nature의 그리스적 표현은 physis다. 이 퓌지스는 동사 physao를 명사화한 것이고, 그것은 ‘꽃피다’ ‘용솟음치다’ ‘뿜어나오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퓌지스는 꽃핌이나 용솟음, 다시 말해 일종의 발현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그 과정 자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용솟음이란 내부의 그 어떤 것이 용솟음쳐 나옴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해서 용솟음쳐 나오게 된 것이 구체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사물의 내적 본성을 가리키고, 후자는 그런 본성이 구현된 개개의 사물들 혹은 그런 사물들 전체를 가리킨다. 이처럼 퓌지스에는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이라는 의미가 이중적으로 혼재되어 있다. 즉 우리가 자연이라는 말에서 흔히 떠올리는 사물들 전체뿐만이 아니라, 그런 사물들의 내적 본성이나 원리까지도 모두 퓌지스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물의 본성으로서의 퓌지스를 물질적 질료(質料, hyle)와 비물질적 형상(形相, eidos)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탐구하였다. 탈레스(Thales)가 만물의 근원(arche·)을 물이라고 했을 때, 그 아르케는 사물의 근원이 되는 어떤 물질적 요소를 의미했다. 이렇게 퓌지스에 관한 연구가 곧 아르케의 탐구를 뜻하는 것으로 되어감에 따라, 자연의 본성에 관한 물음은 기존의 여러 기본 물질들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일례로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아르케를 공기라 했고, 엠페도클레스(Empedokles)는 그것을 흙, 물, 불, 공기의 4대 요소로 보았다. 그러나 물질적 시각에서의 자연의 본성 탐구 중 가장 세련된 형태는 데모크리토스(Demokritos)의 원자론에서 나타났다. 원자(atoma)란 문자 그대로 ‘더 이상 나누어지지(tom) 않는(a) 것’인바, 이렇게 분할 불가능한 궁극의 물질적 원자들이 크기와 모양과 위치의 차이에 따라 결합되거나 분리됨으로써 자연 사물들의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원자론(atomism)이다. 이것은 자연에는 어떠한 목적도 없고 다만 원자들의 기계적이고 필연적인 운동의 결과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기계론(mechanism)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아테네의 정치적 혼란기에 등장한 일종의 상대주의적 지식 상인들인 소피스트(Sophist)에 의해서 철학적 논의의 중심은 자연에서 인간과 사회로 바뀌었고, 퓌지스에 관한 연구는 노모스(nomos)의 탐구로 전환되었다. 노모스는 두 가지 어원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여긴다’는 뜻의 nomizesthai를 어원으로 할 경우 노모스는 ‘관습’이라는 의미이고, ‘나누어준다’는 뜻의 nemein을 어원으로 할 경우 노모스는 그런 나눔의 어떤 ‘질서’나, 그런 질서의 표현으로서 ‘법’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연 현상보다는 현실 사회에 더 관심이 많았고 당시 사회의 혼란을 상대주의적 궤변으로 대처하고자 했던 소피스트들은, 사회의 도덕이나 법(노모스)은 절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인간들 간의 합의나 그들의 ‘관습’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상대적인 규약에 불과하며, 자연(퓌지스)은 도덕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자연의 본성이란 말 그대로 자연적 본능으로서 이기적 욕망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 사이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칙의 존재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발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이익과 자기 주장만을 본성으로 지닌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될 경우,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수 밖에 없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 자신은 정치적 혼란의 희생양으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으나, 생전의 소크라테스(Sokrates)는 그런 혼란의 치유책으로서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원리가 존재함으로 확신하였다. 이러한 믿음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Platon), 또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이르기까지 부동의 신조로 전수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이란 보편적으로 사유하는 이성적 인간이며, 이런 인간이 그의 이성을 통해 파악한 질서와 원리가 바로 자연 사물의 본성이고, 자연은 그런 원리에 의해 조화롭게 ‘질서잡혀진 것(kosmos)’이었다. 이와 같은 사고 경향을 한마디로 총괄하여 표현해줄 수 있는 말이 바로 서양철학의 핵심 개념인 로고스(logos)이다.

    로고스는 ‘모으다’는 뜻의 동사 legein에서 온 명사이다. 그런데 원시 채집 경제 하에서 들판의 과실을 모으는 것이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해상 무역을 통해 재화를 모으는 활동 등을 연상해보면 알 수 있듯이, 모은다는 것은 그저 되는 대로 뒤죽박죽으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어떤 원칙 하에서 질서있게 모으는 것이라는 점에서, ‘모으다’는 곧 ‘정돈하다’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돈하며 모으는 활동에는 갯수를 셈하여 말하고 헤아려 생각하는 활동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모으다’는 ‘계산하다’ ‘말하다’ ‘사유하다’이다. 따라서 이것을 명사화할 경우, 로고스는 원리나 법칙, 수적 비율, 언어, 사유능력으로서의 이성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로고스적 발상법이란, 수학적 비율로 된 사물의 원리나 법칙을 인간이 이성을 통해 사유하여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리키며, 이것이 서양 철학의 본류를 형성한다.

    이제 노모스는 단순히 ‘관습’이 아니라 그 본뜻인 ‘질서’를 지닌 것으로서 바로 로고스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에, 퓌지스의 연구는 로고스의 탐구로 추진된다. 또한 이 로고스는 물질적 감각이 아닌 이성적 사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퓌지스는 물질적 질료 대신 비물질적 형상의 방향에서 탐구된다.

    형상(形相)이라는 단어 eidos는 ‘보다’는 뜻의 eido를 명사화한 것으로서 문자 그대로 ‘보여진 것’, 즉 모양이나 형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모양은 단순한 겉모양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물의 외관을 그런 식으로 규정해 주는 본모양이라는 뜻에서의 형상을 말한다. 우리가 불완전하게나마 여러 가지 모양의 원을 그릴 수 있는 것은,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원 자체가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본뜨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 사물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닮고자 하는 모범적인 본(本, paradeigma)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이다.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본질인 이데아를 나누어 갖거나(metaschesis, 分有) 본받음(mime·is, 模寫)으로써 성립하는 개별자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기하학적으로 정의된 원 자체는 계속 남아 있어도 그것을 본떠 그려진 원들은 지워져 없어지듯이, 영원 불변의 참다운 실재인 이데아에 비해 감성계의 자연 사물들은 허망한 그림자의 세계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현실의 세계가 환영의 세계로 화하는 것을 그의 제자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생각한 초월적인 형상(eidos)을 사물의 속으로 끌어들여 내재화시켰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물은 그 사물을 바로 그 사물로서 구실하게 만드는 저마다의 기능(ergo·)을 자신의 본질(ousia)로서 자기 속에 지니고 있으며, 또 그것을 목적(telos)으로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 눈 앞의 이 책상은 책상의 본질적 기능(ergo·)을 실현(en)한 현실적인 것(en + ergon = energeia, 현실태)이고, 그것을 만든 자의 제작 목적(telos)을 구현(en)하여 자신 속에 소유함(echon)으로써 완성된 것(en + telos + echon = entelecheia, 완성태)이다. 이것은 모든 사물의 생성 변화하는 운동을, 기능의 실현을 통한 목적 성취의 과정으로 보는 목적론(teleology)적 사고 방식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자연은 원자들로 결합된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유지하고 완성해가는 일종의 생물체처럼 간주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그리스인들은 퓌지스의 연구를 질료적으로는 아르케에 관한 탐구로, 형상적으로는 로고스에 관한 탐구로 전개시켜 나아갔다. 그러나 사물의 본성을 물질적 질료의 방향에서 보아 원자론적 기계론으로 귀결되든, 비물질적 형상의 방향에서 보아 기능적 목적론으로 귀결되든, 자연이 자신의 본성을 지니고 스스로 움직여간다고 본 점에서는 어느 정도 자연중심적인 사고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자연의 본성이나 원리가 오직 인간의 ‘정신(nous)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것들(ta noeta)’의 영역이라는 점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비교 우위를 주장하는 인간중심주의로 이어질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