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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 4. 근대 서양의 자연관

지식창고지기 2010. 1. 17. 20:00

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4. 근대 서양의 자연관

     

      서양의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로만 가톨릭으로부터의 이탈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교황권에 의거한 봉건 국가로부터 군주권이나 개인적 시민권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 국가로의 이행이며,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라는 보편적 교회(ecclesia universa)의 권위로부터 개인적 신앙(fides individualis)과 성서에 호소하는 개신교로의 전환 과정이다. 그러나 그 어떤 방향으로의 선회라 하더라도 한 가지 공통되는 점은, 근대의 시작인 르네쌍스가 보편적 신성(神性, divinitas)에 대한 인성(人性, humanitas)과 개성(個性, individualitas)의 중시를 그 특징으로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바로 개인의 등장으로 귀착된다.

    그런데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이 원래 ‘나눌 수(divide) 없는(in) 것’, 그래서 ‘침해되거나 파괴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볼 때, 개인의 등장 이면에는 ‘분할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근대 과학의 기계론에서 부활된 원자(atom) 개념 역시 ‘나눌 수(tom) 없는(a)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근대 유럽인들이 얼마나 분할과 분석과 분리를 통해서 사태의 진상에 접근하고자 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분리적 사고의 발단에 데카르트(Descartes)가 있다. 사상적 혼란기에 직면하여 진리의 확고 부동한 기초를 찾고자 했던 데카르트는 일단 모든 것을 의심해 보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확고 부동하고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의심해 보아도 의심되지 않는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생각하는 동안, 그렇게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처럼 내가 있음이 확실하지만, 그것은 오직 내가 생각하는 동안만이라고 한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진리의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내가 사유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 또는 자아의 본질은 사유(cogitatio)이고, 인간은 ‘사유하는 자(res cogitans)’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물체의 본질은 연장(延長, extensio)이다. 왜냐하면 물체에서 색깔과 소리와 맛 등은 떼어낼 수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크기를 지니고 공간 속에 퍼져 있다는 연장성만큼은 떼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체는 ‘연장된 것(res extensa)’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보기에 사유와 연장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유란 하나의 통일체로서, 크기와 형태를 지니지 않아 분할 불가능한 것이지만, 연장은 장소를 차지하여 언제라도 분할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사유와 연장이 판이한 것이라면, 사유를 본질로 하는 것(자아-정신-인간)과 연장을 본질로 하는 것(세계-물질-자연)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실체, substantia)’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아와 세계,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이 실체적으로 분리된다.

    중세에는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그렇지 못한 자연에 비해 분명 우월한 존재이고 그래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분리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모두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섭리 속에서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자신의 사유를 통해 스스로 확고 부동한 토대를 마련함에 따라, 신의 그러한 연결 고리는 느슨해지고, 인간과 자연의 괴리는 메울 수 없는 간격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러한 데카르트적 분리(Cartesian division)는 동시대 내지는 그후의 철학과 과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철학에서는 인간의 주체성의 강화로, 과학에서는 자연의 객관성의 강화로 각각 나타났다.

    먼저 철학 분야에서는 데카르트의 인간-자연 관계가 칸트(Kant)의 주관-객관 관계로 전이되었다.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따른다고 하여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한 칸트는, 인간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자료에 감성과 오성의 선험적 형식들을 투입하여 구성함으로써 인식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자연이란, 인간에 의해 구성된 세계이고, 선험적 자아에 나타나는 ‘현상의 총체’이며, 주관에 의한 ‘경험의 대상 전체’이다. 이런 대상 세계로서의 자연이 철저히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수동적 ‘필연(Notwendigkeit)’의 영역인 데 반해, 선험적 자아로서의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르는 자율적인 ‘자유(Freiheit)’의 영역이다.

    그런데 칸트식의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어디까지나 ‘현상(Erscheinung)’ 세계에만 국한될 뿐 ‘사물 자체(Ding an sich)’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칸트의 선험적 의식이 헤겔의 절대적 의식으로 고양됨에 따라, 사물 자체도 ‘사유의 산물(Gedankending)’로 간주되고, 자연의 전개는 정신의 자기 형성 과정과 동일시되었다. 헤겔(Hegel)에 있어서 자연이란, 이념(Idee)이 타자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며, 신과도 같은 절대 정신(absoluter Geist)이 ‘자기를 밖으로 드러낸 것(外化, Entau βerung)’이다. 이것은 철학적 기독교의 범신론적 변주라고 할만한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마르크스(Marx)는 헤겔식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세워, 자연이란 정신이 아니라 육체적 노동이 외화(外化)된 것으로서, 인간의 사용가치의 원천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세계의 참다운 실재를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유심론자(spiritualist)가, 의식이 자연에 앞서고 자연은 의식에 의해 파악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하거나, 세계의 진정한 실재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유물론자(materialist)가, 자연이 의식에 앞서며 자연은 의식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거나 간에, 양자는 모두 자연을 인간의 의식과 대립시키고, 인간이 자연의 정신적 혹은 물질적 원리를 파악하여 자연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변화시킴으로써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시 말해 유심론자에 의해 인간이 정신적 사유의 주체로 규정되건, 유물론자에 의해 인간이 물질적 노동의 주체로 규정되건, 인간이 주체(Subjekt)가 되어 객체(Object)인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는 점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