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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 3. 중세 서양의 자연관

지식창고지기 2010. 1. 17. 19:59

3.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3. 중세 서양의 자연관

     

      로만 가톨릭의 시대인 중세에 그리스의 퓌지스(physis)는 라틴 어 나투라(natura)로 번역되었다. natura는 ‘태어나다’는 뜻의 nascor에서 온 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본성’을 뜻하고, 그런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사물들 혹은 사물 전체를 뜻한다. 따라서 퓌지스와 마찬가지로, 나투라의 의미에도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이 동시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꽃핌’으로서의 퓌지스와 ‘태어남’으로서의 나투라는 전혀 다른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꽃이 핀다는 것은 꽃이 적절한 때(kairos)를 만나 제 스스로 피어난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퓌지스로서의 자연이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이 스스로 발현된 자립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부모를 그 존재 원인으로 하여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나투라로서의 자연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기 안에 갖고 있지 않아 스스로에 의해 존립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퓌지스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적 자연을 의미한다면, 나투라는 신에 의해 조종되는 피동적 자연을 의미한다. 이것은 퓌지스가 ‘제작(poie·is)’의 산물인데 반해서, 나투라는 ‘창조(creatio)’의 산물임을 시사하고 있다.

     

    전혀 없는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겨날 수 없다(ex nihilo nihil fit)’고 본 그리스인들은, 우주 만물은 그들의 신 데미우르고스(De·iourgos)가 이미 있어온 기본적인 질료와 형상을 결합시켜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루어 나가도록 해준 것이라고 보았다. 데미우르고스라는 말의 원뜻이 장인(匠人)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작자(poie·e·)로서의 그는 장인처럼 이미 주어진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제작물(to poioumenon)을 형성해낸다.

     

    이처럼 제작이 ‘있던 것에서 있는 것으로 됨’을 뜻하는데 반해서, 창조는 ‘없던 것에서 있는 것으로 됨’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이 볼 때 만물의 근원은 만물의 최초 원인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것을 낳은 최고의 원인이 되면서도 그 자신은 자기를 낳는 어떠한 원인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신에 앞선 것을 전혀 갖지 않은 제일의 원인으로서의 신은 기존의 ‘어떤 것으로부터(ex aliquo)’가 아니라, 완벽한 ‘무로부터(ex nihilo)’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이미 나타나 있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히브리서, 11장 3절) 이제 신과 자연의 관계는 제작자와 제작물의 관계가 아니라, 창조주(creator)와 피조물(ens creatum)의 관계로 된다. “은총은 자연을 밑에 둔다(gratia supponit naturam).”는 원리에서 보이듯이, 신의 은총과 말씀과 섭리에 의해 자연이 창조된다.

     

    모든 것을 산출하는 신이 능산적 자연(能産的 自然, natura naturans)이라면, 그에 의해 산출되는 자연은 소산적 자연(所産的 自然, natura naturata)이다. 한갓된 피조물을 초월한 절대 타자라는 점에서, 창조주인 신과 피조물로서의 자연이나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이게 되고, 이런 점에서 신은 피조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숨겨진 신(deus absconditus)’이 된다.

    하지만 신은 세상을 창조함에 있어,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만은 ‘신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하였다.(창세기, 1장 27절)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은 자유의지와 인격성을 가질 수 있고, 신앙을 통해 신과 가까워질 수도 있다. 아울러 신의 형상이 부여됨으로 해서, 인간은 신의 영광을 반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며, 다른 피조물인 자연과는 질적으로 다른 우월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사, 땅을 지배하라,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 28절)는 말씀에 따라, 이제 인간에게는 땅의 지배권(dominum terrae)이 부여되는 것이다. 결국 신-인간-자연으로 이루어진 중세적 위계 구조는, 인간은 신을 섬기고 자연을 지배한다는 말로 압축된다. 이것은 신중심주의(theocentrism)에 기대어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가 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중세는 신 중심인 반면 근대는 인간 중심이라거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근대만의 특징이라거나 하는 식의 일반인의 통념은 매우 얕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의 생성에 창조론이 도입됨에 따라, 많은 그리스적 사유 유산들이 기독교적으로 변형되었다. 개별적 사물에 대한 보편적 형상의 초월성(플라톤)은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초월성으로 바뀌고, 개별적 사물 속에 내재하는 자체 본질로서의 기능과 목적(아리스토텔레스)은 창조의 역사 속에 내재하는 신의 의지로서의 섭리와 목적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역사적 목적론을 통해서 비물질적인 형상적 방향만이 강조됨에 따라, 물질적이고 질료적인 방향에서의 원자론은 그후 근대 과학이 성립될 때까지 천년 동안의 고독을 맛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