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왕권 강화는 근대적 제도의 싹을 키우고 - 에드워드 1세

지식창고지기 2010. 1. 20. 15:10

에드워드 1세

“프리덤(자유)!”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멜 깁슨 분)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용감하게 싸운 끝에 잉글랜드 군에게 사로잡히고, 처형당하는 순간 이렇게 부르짖는다. 영화 속에서 월레스와 스코틀랜드인들을 괴롭히는 냉혹한 폭군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패트릭 맥구한 분)다. 영화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향된 해석을 썼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손에 넣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부 잔혹한 수법을 쓴 것, 그리고 월레스를 교수형에 처한 다음 사지를 찢어버린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수많은 독재자들과 같이, 에드워드 1세는 ‘자유’라는 외침에 이렇게 냉소했을지 모른다. “자유란 강력한 국가가 있고 나서야 보장되는 것이다!”

 

 

영국, 그 복잡한 역사

영국, 다시 말하면 브리튼 섬은 오랫동안 켈트족의 땅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55년에 카이사르가 원정을 온 이래 로마가 지속적으로 침입했고,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로마는 오늘날의 스코틀랜드에 해당하는 브리튼 북부를 제외한 지역을 통치했다. 이후 게르만 계통의 앵글로색슨족을 비롯한 침공이 거듭되고 로마는 물러났으며, 829년에 앵글로색슨의 에그버트가 잉글랜드를 평정하고 왕조를 세웠다.

 

이후 잠시 데인족이 지배했던 때를 제외하면 2백 년 이상 색슨 왕조가 이어졌으나, 1066년에 노르만족윌리엄 1세가 침입해와 색슨의 해럴드를 물리치고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노르만의 정복’). 이후 많은 색슨족은 서쪽의 웨일즈와 북쪽의 스코틀랜드로 달아나, 잉글랜드의 수복을 염원하게 된다. 노르만 왕가와 1154년에 이를 대체한 플랜태저넷 왕가는 모두 프랑스에서 건너온 프랑스 계통이었으며, 프랑스의 서부 지역에 계속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잉글랜드는 피정복민과 민족적,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세력이 다스리면서, 브리튼 섬을 유럽적 사회로 만들어간다(이후 여러 왕조가 교체되지만, 이전 왕가와 얼마간 혈맥이 닿는 가문으로 교체되는 것이라서 윌리엄 1세 이전과 같은 정복에 의한 왕조 교체와 다르다. 즉 지금의 영국 왕실도 노르만 왕가와 이어져 있다). 

 

하지만 ‘롱다리 에드워드(Edward Longshanks)’, 즉 에드워드 1세가 태어난 1239년에는 그런 상황에도 변화가 오고 있었다. 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제4대 왕인 헨리 3세의 아들이었는데, 제3대인 왕 때는 왕권과 신권의 충돌, 민족간 대립, 대륙의 왕조들과의 알력 등으로 왕권이 크게 기울고 영토 또한 많이 상실되었다. 헨리 3세는 이를 극복하려고 여러 가지로 애썼으나, 이는 오히려 역풍을 불러와 스스로의 목숨까지 위험해지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에드워드 1세는 어린 나이에도 부왕을 도와 왕권을 강화하는 싸움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6세 때 가스코뉴의 영주 자격으로 가스코뉴 귀족들의 분쟁을 해결함으로써 처음으로 통치자로서의 재능을 보였는데, 3년 뒤인 1258년에는 귀족들이 헨리 3세에게 ‘의회’를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고 대헌장(존 왕 때 수립된)을 준수하는지 감시하도록 하게 해달라는 ‘옥스퍼드 조례’를 들이민다. 헨리 3세는 일단 이를 받아들이지만, 1261년에 번복한다. 이에 분개한 귀족들이 무기를 잡음으로써, 잉글랜드는 ‘배런전쟁’이라는 내전으로 빠져든다.

 

 

 

배런전쟁에서 반란 귀족들의 지휘자는 시몽 드 몽포르였다. 그는 프랑스 출신으로 잉글랜드에 건너와 레스터 백작이 되었는데, 헨리 3세의 여동생과 결혼했음에도 처남을 줄기차게 압박했다. 마침내 그가 이끄는 반란군과 헨리 3세의 국왕군은 1264년의 루이스 전투에서 격돌했다. 국왕군의 우익을 맡고 있던 에드워드는 적군의 일각을 격파했으나, 그만 패주하는 적을 쫓느라 전선을 이탈한 사이에 부왕의 본진이 패배해 버렸다. 아버지와 아들은 나란히 포로가 되었으며, 이로써 승기를 잡은 몽포르는 헨리 3세에게 옥스퍼드 조례의 승인을 강요하고는 그에 따라 1265년에 최초의 의회를 소집한다. 그러나 그 동안에 에드워드는 억류되었던 곳에서 탈출하여 반란군과 계속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차차 승리의 여신이 그에게 호의를 보내기 시작한다. 몽포르의 병력을 다른 반군과 분리하는 데 성공한 그는 1265년 8월, 이브샴에서 다시 한 번 몽포르와 격돌한다. 이번에는 반란군의 패배였으며, 몽포르는 전사했다. 에드워드는 그의 시체를 찾아내어 갈기갈기 찢음으로써 “본보기를 보였다.”

 

이로써 배런전쟁을 끝낸 에드워드는 부왕인 헨리 3세보다 더 각광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자 1271년에 제8차 십자군에 참여해 맘루크 왕조바이바르스와 대결했으나, 동행했던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일찍 죽고,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었던 키프로스의 위그 3세는 바이바르스와의 휴전을 선언해 버린다. 에드워드는 이 휴전에 반대했지만 이슬람에서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어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포기한다. 그리고 얼마 후 부왕 헨리 3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에드워드는 귀국길에 올랐으나 그리 서두르지 않으며 이탈리아에서 부상을 충분히 치료하는 여유를 보였다. 잉글랜드에서 자신의 입지가 확고함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귀족들은 자리에 없는 그를 새 국왕으로 뽑고는, 1274년에 그가 돌아와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를 때까지 반란 따위를 일체 일으키지 않았다.

 

 

왕권 강화는 근대적 제도의 싹을 키우고


이제 왕좌에 오른 에드워드 1세는 왕권을 강화할 생각에 부심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한편으로 제도를 개혁하고 법령을 정비했으며, 한편으로 무력을 동원해 잉글랜드의 왕권이 미치는 범위를 한껏 넓히려 했다. 그는 재위 중에 ‘역대 잉글랜드 왕들이 만든 법령보다 더 많은’ 법령을 제정했다(그래서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 중에서 1279년의 사수법은 교회의 봉건적 지배권을 제한했고, 1284년의 러들랜법은 웨일즈의 효과적 통치를 위해 만든 법이었으나 징세와 사법제도에 있어 왕권을 크게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1285년의 상인법은 왕실재정 확충을 위해 양모와 와인 생산을 진흥하는 것이었다. 또 1290년의 부동산양도법은 봉건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다시 가신들에게 배분해 주는 ‘재수봉’을 제한하여 권력의 분산을 억제했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이런 법령을 추인하고 새로운 세금을 인정할 제도(대헌장에 따라 새로운 세금은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로 시몽 드 몽포르가 소집했던 의회에 주목했다. 그는 재위 중 의회를 여러 차례 열었는데, 특히 1295년에 귀족과 고위성직자, 그리고 각 지방의 대표자들을 소집해서 연 의회는 후대의 모범이 될 만했다 하여 ‘모범의회’라 불린다. 이후 의회 제도는 영국에서 중요한 전통적 제도로 자리잡았으며, 단순한 귀족 대표가 아니라 지역 대표들도 모임으로써 전국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전국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한다.’ 이것은 에드워드 1세의 또 하나의 비전이었다. 문화적으로, 그것은 자신이 쓰러트린 시몽 드 몽포르의 정책을 본받는 것이었다. 이미 의회제도를 본받아 실시한 그는 몽포르가 프랑스 출신이면서도 지배집단의 영어 사용을 의무화하며 “모두가 잉글랜드인으로 하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점을 이어받았다. 그의 선대인 존 왕과 헨리 3세 때에 프랑스의 영지를 대부분 잃으면서, 본래 대륙 쪽에 더 가까웠던 왕조는 좋든 싫든 잉글랜드에서 토착화를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같은 말을 쓰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잉글랜드 왕은 리처드 1세 때까지만 해도 영어를 한마디도 못할 정도였으나, 에드워드 1세 이후로는 일상에서도 자연스레 영어를 쓰는 ‘잉글랜드인’이 되었다.

 

 

“나를 스코틀랜드에 묻어 다오”

왕권 강화와 단일 공동체 통합의 또 다른 길은 무엇보다도 검에 의지하는 정복 사업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 왕이 명목상 웨일즈 영주들의 주군임을 강조했으나, 그위네프, 르웰린 등 토착 영주들이 이를 거부하자 1276년에 전쟁을 일으켰다. 1282년 오레윈 교 전투에서 르웰린을 무찌름으로써 전쟁은 잉글랜드의 승리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1세는 웨일즈에 12개의 새로운 성을 쌓고 6개를 재구축하고는 그곳에 잉글랜드인들을 이주시켜 웨일즈 지배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1301년에는 웨일즈의 절반을 별도의 공국으로 만들고 왕세자 에드워드(훗날의 에드워드 2세)를 그 영주로 임명했다. 영국 왕세자를 ‘웨일즈의 군주(Prince of Wales)’로 부르는 관습은 이때부터 생긴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의 야심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궁극적으로 브리튼 섬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기를 염원했고, 그러려면 로마인도 손에 넣지 못한 스코틀랜드를 반드시 차지해야 했다. 1286년에 캔모어 왕조의 알렉산더 3세가 사고로 사망하고, 외손녀인 마가렛만이 직계 왕손으로 남게 되자 그의 야심에는 불이 붙었다.

 

 

그는 먼저 당시 세 살에 불과했던 마가렛(노르웨이 왕실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이후 ‘노르웨이의 소녀’라고 불렸다)과 왕세자 에드워드를 결혼시켜 자연스럽게 스코틀랜드를 차지하려고 했다. 이는 성사될 뻔 했으나, 마가렛이 1290년에 사망함으로써 차질이 생겼다. 그러자 에드워드 1세는 과거 스코틀랜드인이 일시적으로 잉글랜드의 종주권을 승인했던 사실을 들춰내어 스스로를 스코틀랜드의 합법적인 군주라고 주장한다. 마가렛의 죽음 후 차기 왕위를 놓고 다투던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분쟁을 중재해 주겠다며 노햄 회의에 출석한 잉글랜드 왕이 그런 주장을 하니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결국 “나를 명목상 주군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스코틀랜드의 실질적 군주로 인정하겠다”는 에드워드의 회유에 넘어가고, 갤러웨이의 영주였던 존 베일리얼이 1292년에 에드워드에게 충성 서약을 한 다음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의 3개 요새를 직접 지배하겠다고 나서고, 베일리얼의 국왕법정보다 자신의 법정을 상위 법정으로 제도화하려 하는 등 ‘명목상’ 지배자에 그치지 않을 뜻을 드러내자 베일리얼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에드워드와 결전을 벌인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군대는 강했으며,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까지 일부 회유하여 힘을 보탰다.

 

1296년의 던버 전투에서 베일리얼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으며, 에드워드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러나 차기 왕위를 노리고 에드워드에게 협력했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에드워드는 비웃음만 날렸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상징하던 ‘스콘의 돌’을 런던으로 옮겨 자신이 명실공히 스코틀랜드의 통치자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웨일즈의 경우처럼 각지에 성곽을 쌓고 잉글랜드인을 이주시켜 지배를 굳건히 하려 했다.

 

하지만 오랜 독립을 지켜온 스코틀랜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윌리엄 월레스를 비롯한 반란자들이 꼬리를 물고 등장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잔혹한 방법을 꺼리지 않았다. 저항하는 도시를 점령하고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지도자들은 도시 한가운데에 묶어 놓고 산 채로 불태우는 식의 진압이 거듭되었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조치는 주민들의 증오와 원한을 부추겨, 스코틀랜드는 좀처럼 평정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에드워드는 유럽 대륙에서도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며, 그 때문에 프랑스와도 계속적인 전쟁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계속해서 새로운 세금을 매겨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 했고, 이는 당연히 잉글랜드 귀족들과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어떻게든 경비를 조달하려던 에드워드는 1290년에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추방하는 조치까지 취한다. 그러나 이는 ‘황금알을 낳는 닭의 배를 가르는 격’이었으며, 장기적으로 영국의 경제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모순된 왕국’의 비전을 유산으로 남기다

1307년,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을 진압하려고 여섯 번째로 스코틀랜드로 향하다 병사한다. 전설에 따르면 “나를 스코틀랜드에 묻어라. 완전히 정복된 스코틀랜드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윌리엄 월레스를 처형한 지 2년 만이었다. 왕위를 계승한 에드워드 2세는 부왕에 비하면 무능한 인물이었으며, 1314년에 스코틀랜드 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독립을 인정해준다. 그리고 정략 결혼했던 프랑스의 이사벨 왕비가 그의 왕권에 반기를 들더니, 프랑스 군을 이끌고 와서 그를 폐위시키고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왕위에 앉힌다(1325년).

 

에드워드 1세의 야심은 많은 무리수를 포함했고, 따라서 당대에나 후대에나 그를 잔혹한 폭군으로 단정하는 시각을 양산했다. 하지만 브리튼 섬이 민족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싸움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부 아래 통합된 단일 왕국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비전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왕권 강화를 위해 그가 수립한 여러 제도들, 의회 제도나 재산권 관련 법령 등은 근대 영국의 밑거름이 되었다. 강력한 왕권, 잘 정비된 의회, 하나로 합쳐진 브리튼, 이 세 가지는 공교롭게도 17세기에 와서 스코틀랜드계인 스튜어트 왕조에 이르러 함께 실현된다. 그러나 그 세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왕과 신하들 사이에 또 다른 내전을 불러오고, 왕의 처형과 왕정의 복고를 거쳐 오늘날 ‘가벼운 모순’을 가진 영국, 군주국이면서 민주국가, 단일 국민국가이면서 스코틀랜드-웨일스-잉글랜드의 지방색이 완연한 영국이 만들어져 간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통일’을 위해 악평도 꺼리지 않았던 지도자들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1세
‘브리튼 통일왕국’ 건설을 위해 힘쓴 잉글랜드의 왕
조조 조조
(155~220) ‘난세의 간웅’이라는 평가 속에서 후한 말기의 혼란을 대부분 평정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유스티니아누스
(482~565) 지중해 통일을 위해 배신과 학살, 가혹한 세금 등을 거듭해 악평이 자자했다.
체사레 보르자 체사레 보르자
(1475~1507) 이탈리아 통일을 목표로 정략결혼이나 암살 등을 거듭하여 당대의 공포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
(1534~1582) 승려들을 집단 학살하는 등 잔혹한 방법도 쓰면서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했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