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소아시아의 작은 부족국가에서 일어나다 - 오스만 1세

지식창고지기 2010. 1. 20. 15:11

오스만 1세

오스만제국은 14세기부터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일어나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 북쪽의 우크라이나와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600여 년간 지배했던 다민족 제국이다. 오스만제국은 서지중해의 유럽 일부 해안을 제외한 지중해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아시아의 작은 부족국가에서 대제국으로 성장한 오스만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건국자 오스만 1세이다. 오스만제국이라는 국명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소아시아의 작은 부족국가에서 일어나다

13세기 말, 소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가지고 있던 셀주크투르크 가 서양 십자군과의 잇따른 전쟁과 결정적인 멸망원인이 된 몽골군의 서침으로 몰락하면서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들은 크고 작은 부족으로 분열됐다. 그 중 한 부족인 오구즈의 일파 카유족의 족장 에르투구룰 베이(Ertugrul Bey)는 소구트 지역을 차지하고 힘을 기르고 있었다. 오스만은 에르투구룰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1281년 24세의 나이에 부족장으로 추대됐다.

 

그의 이름 오스만은 이슬람교 남자들이 흔히 가지는 이름으로, 그 뜻은 ‘뼈를 부수는 자’라는 강한 힘을 의미하는 한편 콘도르를 뜻한다고 한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콘도르는 오스만제국의 자주권과 호전성을 뜻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오스만은 족장이 되면서 탁월한 지도력과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셀주크투르크가 멸망한 이후,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던 투르크족의 전사들은 세력을 키워가던 오스만의 명성을 듣고 그의 수하로 모여들었다.


 

그의 군대는 몽골군에 밀려 아나톨리아로 들어온 투르크족의 이슬람 전사, '가지(Ghazi)’와 인근의 여타 투르크족 중 오스만의 명성을 듣고 온 모험가들로 점점 세력이 커졌다. 아버지 에르투구룰 시절부터 400기 이상의 기병을 보유한 강력한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던 오스만의 군대는 그가 족장이 되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오스만가문과 군대의 유래와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 셀주크투르크의 일파로 1077년부터 1307년까지 아나톨리아를 다스린 이슬람 왕조 룸셀주크의 용병집단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룸셀주크가 몽골군의 침입으로 점차로 약화되자 오스만의 가문도 독립해 독자적인 부족국가를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에르투구룰과 아들 오스만을 거치면서 그 세력이 점차로 커진 오스만의 군대는 아나톨리아의 기독교 세력이나 이슬람교 세력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점차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299년경 마침내 왕국을 선언하고 오스만 1세로 등극했다. 당시 수도는 그의 고향인 소구트였다.

 


왕국을 건국한 뒤 오스만 1세는 비잔틴제국과의 경계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1326년 비잔틴 도시인 부르사(Bursa)를 공략하여 아나톨리아 전역을 통일하였다. 부르사는 그의 사후 아들 오르한 1세에 의해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 수도가 되었다. 왕국을 세운 후 오스만 1세는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행정적•정치적 면에서도 제국으로 가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밀레(Millet)로 알려진 종교적•민족적 소수집단의 자치구를 설정하여 효율적인 국정을 가능하게 했다. 오스만 1세가 만든 이 제도들은 매우 체계적이어서 이후 약 4세기 동안 큰 변화 없이 오스만제국 내에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오스만의 건국과 국가의 성장에는 몇 가지 역사적, 지리적 상황도 도움을 주었다. 몽고의 서침과 셀주크 투르크의 몰락, 구심점을 잃은 투르크족의 방황, 비잔틴 제국의 약화는 용맹스런 전사 집단이었던 오스만과 그를 따르는 이슬람 전사(가지)들에게 새로운 왕국을 열고 성장시킬 기회를 주었다. 방황하던 투르크족은 혁혁한 전과를 세우며 비잔틴과 맞서는 오스만을 구심점으로 지하드(이슬람의 성전)를 치르기 위해 속속히 집결하여 그의 힘을 강하게 만들었다. 결국 오스만 세력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점차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비잔틴은 오스만제국에게 지중해의 지배권을 내주게 되었다. 13세기에 오스만 1세에 의해 세워진 오스만제국은 20세기 초까지 600년간 존속하였다. 이러한 오스만제국의 발전과 번영은 건국자 오스만 1세가 그의 꿈속에서 이미 예언을 받은 일이었다고 한다.

 

 

꿈에서 본 제국의 미래


오스만 1세는 매우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다. 그는 족장이 되기 전 젊은 시절 이슬람교의 성자를 찾아 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그 중 그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셰익 에데바리(Sheik Edebali)라는 이슬람교의 지도자였다. 에데바리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말 하툰(Mal Hatun)이라고 하였다. 말 하툰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매우 아름답고 육감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편에서는 종교적으로 성녀와 같은 품성과 성스러운 외모를 가진 신화의 여신과도 같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떤 형의 미녀이든 미녀였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오스만은 스승의 아름다운 딸에게 한눈에 반했고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신분의 차이를 들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존경하는 스승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오스만은 상심에 빠졌다. 그 사이 말 하툰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다른 부족에게도 퍼져나가 많은 구혼자가 있었다. 오스만은 말 하툰의 구혼자들과 싸워 이겼지만 정작 스승의 결혼 승낙은 계속 받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 여 세월을 보내며 스승에 대한 존경과 말 하툰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며 상사병에 걸려 있던 오스만은 어느 날 친지의 집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그는 스승 에데바리와 함께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데바리의 가슴에서 달이 튀어 나와 오스만의 가슴으로 들어와 잠겼다(이슬람의 유명한 전승인 이 이야기에서 달의 모양은 반달이었다고도 하고 보름달이었다고도 한다). 달이 잠기고 잠시 후 오스만의 가슴에서 아름답고 커다란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무는 점점 자라나 커다란 나무 그늘이 생겼으며 그 그늘은 온 세계를 뒤덮었다. 나무 아래 세계의 산맥이 생기고 강이 흘렀으며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혜택을 얻고 즐거워했다.

 

오스만은 꿈 이야기를 스승 에데바리에게 했다. 에데바리는 오스만의 꿈 이야기에 나온 달이 바로 자신의 딸 말 하툰임을 깨달았다. 꿈이 오스만와 말 하툰이 결합하여 후손을 낳으면 그 후손이 세세손손 알라의 가호아래 번영하는 대제국을 경영할 것을 예언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오스만의 꿈은 그와 말 하툰의 후손들이 가질 영광과 힘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말 하툰과 결합한 오스만이 세울 나라의 미래를 알려주는 꿈이었다. 에데바리는 오스만의 꿈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던 딸 말 하툰과의 결혼을 승낙했다. 오스만은 너무나 원했던 여인과 결혼하였고 그의 꿈이 예언한 대로 향후 600년간 존속할 나라 오스만제국을 세웠다.

 

 

600년 오스만제국의 기틀 마련


왕국을 세운 오스만 1세에게는 몇 가지 선택이 있었다. 소아시아의 내륙으로 들어가 투르크족을 통합하여 영토를 확장할 것인가, 지중해 쪽으로 비잔틴의 영토를 넘볼 것인가의 귀로에서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비잔틴과의 싸움은 투르크족 통합보다 더 어려운 전쟁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스만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쟁이었다. 오스만 1세의 선택은 탁월했다. 비잔틴 공격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전략이었다. 비잔틴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강해진 오스만의 세력권 안으로 여타 투르크족은 별 어려움 없이 병합되었다. 그리고 오스만 1세가 시작한 비잔틴 공략은 훗날 그의 후손 메흐메드 2세가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이다)을 함락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는 결과를 낳았다. 바야흐로 세계 대제국의 탄생이었다.

 

오스만 1세는 영토 확장 문제 외에 내치에도 큰 틀을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오스만 1세는 스승 에데바리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정책방침을 아들 오르한 1세에게 남겼고 이를 세세손손 계승하게 하였다. 오스만 1세의 정책은 이후 오스만왕조의 중요한 정책방침이 되었다. 그는 후세의 술탄들에게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올바른 인재의 선택과 학자와 예술가 대우, 현자들의 가르침을 적극 수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알라신의 힘에 왕권을 의탁하고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리며 이교도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라고 주문하였다. 그의 정책 방침은 이슬람교 안에서 백성을 애민하며 정치적 공정성을 잃지 않고 문화를 부흥시키라는 것이었다.

 

 

 

오스만 1세는 지하드의 기치 아래 26년간 계속 비잔틴제국을 공략하였고 죽음마저도 비잔틴의 소아시아 내 도시였던 부르사를 공격하다가 갑자기 맞았다. 부르사는 그의 유지를 받든 아들 오르한 1세에 의해 정복되었고 오르한 1세는 아버지 오스만 1세의 무덤을 이곳에 만들었다. 오스만 1세는 사후 오스만제국에서 하나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가지(Ghazi) 전통의 상징으로서 종교와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 받았다. 그러기에 오스만 1세의 칼은 대대손손 그를 잇는 오스만 왕조의 술탄 대관식에서 사용되었으며 제국의 국호는 그의 이름 오스만을 따 600년간 존속된 것이다.

 

오스만 1세가 세운 오스만제국은 동양과 서양의 사이에 위치하는 지리적 성격상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오스만제국의 지중해 지배로 동방으로 가는 육로 길이 막히자 바다 길을 찾아보기 위해 도래한 것이었으며, 대항해시대의 여파로 신대륙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한편, 오스만제국은 동서양을 잇는 지역적 위치를 이용하여 상업으로 큰 부를 누렸으며 이슬람교 안에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습합하여 오스만제국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키며 번영하였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작은 부족에서 시작하여 대제국을 이룬 왕들

오스만 1세 오스만 1세
오스만제국의 초대 술탄
클로비스 1세 클로비스 1세
(465~511) 프랑크족의 살리족의 수장에서 중세 유럽을 여는 프랑크왕국을 건국하였다.
칭기스칸 칭기스칸
(1155~1227) 몽골의 작은 부족에서 시작해 중국과 서역을 아우르며 유럽사에도 영향을 미친 대제국 건설.
누르하치 누르하치
(1559~1626) 여진의 한 부족인 건주 여진의 수장에서 중국을 다스리는 청나라를 세웠다.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