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본 제국의 미래 오스만 1세는 매우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다. 그는 족장이 되기 전 젊은 시절 이슬람교의 성자를 찾아 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그 중 그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셰익 에데바리(Sheik Edebali)라는 이슬람교의 지도자였다. 에데바리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말 하툰(Mal Hatun)이라고 하였다. 말 하툰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매우 아름답고 육감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편에서는 종교적으로 성녀와 같은 품성과 성스러운 외모를 가진 신화의 여신과도 같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떤 형의 미녀이든 미녀였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오스만은 스승의 아름다운 딸에게 한눈에 반했고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신분의 차이를 들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존경하는 스승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오스만은 상심에 빠졌다. 그 사이 말 하툰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다른 부족에게도 퍼져나가 많은 구혼자가 있었다. 오스만은 말 하툰의 구혼자들과 싸워 이겼지만 정작 스승의 결혼 승낙은 계속 받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 여 세월을 보내며 스승에 대한 존경과 말 하툰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며 상사병에 걸려 있던 오스만은 어느 날 친지의 집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그는 스승 에데바리와 함께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데바리의 가슴에서 달이 튀어 나와 오스만의 가슴으로 들어와 잠겼다(이슬람의 유명한 전승인 이 이야기에서 달의 모양은 반달이었다고도 하고 보름달이었다고도 한다). 달이 잠기고 잠시 후 오스만의 가슴에서 아름답고 커다란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무는 점점 자라나 커다란 나무 그늘이 생겼으며 그 그늘은 온 세계를 뒤덮었다. 나무 아래 세계의 산맥이 생기고 강이 흘렀으며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혜택을 얻고 즐거워했다.
오스만은 꿈 이야기를 스승 에데바리에게 했다. 에데바리는 오스만의 꿈 이야기에 나온 달이 바로 자신의 딸 말 하툰임을 깨달았다. 꿈이 오스만와 말 하툰이 결합하여 후손을 낳으면 그 후손이 세세손손 알라의 가호아래 번영하는 대제국을 경영할 것을 예언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오스만의 꿈은 그와 말 하툰의 후손들이 가질 영광과 힘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말 하툰과 결합한 오스만이 세울 나라의 미래를 알려주는 꿈이었다. 에데바리는 오스만의 꿈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던 딸 말 하툰과의 결혼을 승낙했다. 오스만은 너무나 원했던 여인과 결혼하였고 그의 꿈이 예언한 대로 향후 600년간 존속할 나라 오스만제국을 세웠다.
600년 오스만제국의 기틀 마련
왕국을 세운 오스만 1세에게는 몇 가지 선택이 있었다. 소아시아의 내륙으로 들어가 투르크족을 통합하여 영토를 확장할 것인가, 지중해 쪽으로 비잔틴의 영토를 넘볼 것인가의 귀로에서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비잔틴과의 싸움은 투르크족 통합보다 더 어려운 전쟁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스만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쟁이었다. 오스만 1세의 선택은 탁월했다. 비잔틴 공격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전략이었다. 비잔틴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강해진 오스만의 세력권 안으로 여타 투르크족은 별 어려움 없이 병합되었다. 그리고 오스만 1세가 시작한 비잔틴 공략은 훗날 그의 후손 메흐메드 2세가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이다)을 함락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는 결과를 낳았다. 바야흐로 세계 대제국의 탄생이었다.
오스만 1세는 영토 확장 문제 외에 내치에도 큰 틀을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오스만 1세는 스승 에데바리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정책방침을 아들 오르한 1세에게 남겼고 이를 세세손손 계승하게 하였다. 오스만 1세의 정책은 이후 오스만왕조의 중요한 정책방침이 되었다. 그는 후세의 술탄들에게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올바른 인재의 선택과 학자와 예술가 대우, 현자들의 가르침을 적극 수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알라신의 힘에 왕권을 의탁하고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리며 이교도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라고 주문하였다. 그의 정책 방침은 이슬람교 안에서 백성을 애민하며 정치적 공정성을 잃지 않고 문화를 부흥시키라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