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십자군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기독교 국가의 잔존 세력이 다시 한 번 결집하여 살라딘의 대군을 상대로 전투를 재개했다. 기 드 뤼지냥이 지휘하는 기독교인 군대는 무슬림이 장악한 항구 도시 아크레를 탈환하려 육지에서 포위 공격을 가했고, 그런 기독교인 군대의 배후를 살라딘의 군대가 또다시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살라딘은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적을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런 와중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함으로써 전세는 기독교인 군대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신규 병력에 리처드 1세라는 탁월한 지휘관까지 보유한 기독교인 군대 앞에서는 살라딘의 대군조차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기독교인 군대는 1191년 7월 12일에 아크레를 함락했으며, 이후 느리지만 착실한 진군 끝에 이듬해 7월에는 예루살렘의 코앞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기독교인 군대가 무력으로 성도를 탈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순간에 군대를 되돌린다. 때마침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의 부재를 틈타 그 동생(훗날의 존 왕. 폭정 끝에 귀족과 시민의 압력으로 마그나카르타를 승인하는 수모를 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이 왕위 찬탈 음모를 꾸몄고,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도 일찌감치 십자군에서 발을 빼고 고국으로 돌아가 휴전 서약을 깨트리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잠식하는 중이었다. 1192년 10월 9일, 마침내 살라딘과 평화조약을 맺은 리처드 1세가 팔레스타인을 떠나 고국으로 향함으로써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일단 막을 내린다.
전쟁 내내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피차 칼끝을 겨누는 와중에도 서로를 향해 비상한 관심과 호의를 드러냈다. 가령 술탄은 병상에 누운 잉글랜드 국왕에게 과일과 얼음을 선물했고, 전투 도중에 땅에 서서 싸우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고는 “체통에 어울리게 말에 올라 싸우시라”며 명마 두 필을 선물했다. 리처드 1세 역시 살라딘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췄으며, 심지어 (물론 어디까지나 말뿐이었지만) 자신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남동생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며 리처드 1세는 조만간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 가서 승부를 짓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에 살라딘은 만약 내가 이 땅을 결국 누군가에게 잃어야 한다면, 차라리 당신 같은 훌륭한 적에게 잃고 싶다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대결은 결코 성사되지 않았다. 리처드 1세는 귀국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붙들려 1년 넘게 억류당했으며, 살라딘은 그 와중인 1193년 3월 4일에 갑작스레 사망했기 때문이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딘의 사후에도 반세기 넘게 지속되었으며, 이후로도 지속된 제5차(1217-21), 제6차(1228-9), 제7차(1248-54) 십자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덕분에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 의해 점령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슬람 세력의 영토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구원자로 다시 부각된 살라딘
살라딘은 탁월한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로 수백 명을 처형하거나 노예로 팔아 넘기는 등, 그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시되던 전제군주 노릇까지 굳이 마다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면에서 살라딘은 상당히 관대하고 합리적인 면모를 종종 보여주었다. 전투에 임해서는 종종 단호하면서도 교활한 작전을 구사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타협과 외교라는 대안을 적극 이용하기도 했다. 평소에도 살라딘은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고, 종교적 의무를 항상 앞세웠으며, 결코 정무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사유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 장례 준비를 할 돈조차 없었다는 후일담은 그의 검소함과 청렴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언급된다.
살라딘은 사상 최초의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평가되는 아사신(암살단)과의 대결로도 유명하다. 원래 이슬람교 시아파의 신비주의 종파였던 아사신은 시리아 북부 산악 지대의 요새를 근거지로 삼고, ‘산 위의 노인’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지휘 하에 반대파 요인을 종종 암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사신 단원은 잠든 사이에 인공의 낙원으로 옮겨져 극치의 환락을 맛보고 깨어난 경험을 토대로 사후세계의 존재와 보상을 확신하고, 이후 상부의 지시라면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반드시 이행하곤 했다. 일찍이 시리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살라딘은 두 차례나 암살을 모면하고 분노한 나머지 아사신을 소탕하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기 베개에 꽂혀 있는 아사신의 단검과 경고장을 보고 소스라친 나머지, 결국 패배를 시인하고 더 이상 아사신의 뒤를 쫓지 않았다고 전한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보다 오히려 유럽에서 더욱 인기를 얻고 오래 기억되었다. 십자군을 소재로 한 여러 낭만적 문학작품에서 살라딘은 종종 리처드 1세의 숙적이면서도 존경할 만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독일의 저명한 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희곡 <현자 나탄>은 살라딘을 지혜와 관용을 겸비한 전제군주의 모범으로 여긴 서양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작품에서 살라딘은 부유한 유대인 나탄을 함정에 빠트려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기독교 가운데 어떤 것이 진정한 종교냐?” 하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나탄은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세 개의 반지”라는 유명한 비유를 들어서 세 종교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똑같다고 답변하고, 이에 감탄한 살라딘은 나탄을 신하가 아니라 친구로 삼고 영원한 우정을 맹세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살라딘을 성전(지하드)의 영웅, 즉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드높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슬람 여러 국가의 독재 정권이나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선전술이라는 비판도 일리는 있지만, 한편으로 살라딘 붐은 20세기 들어서 독립과 근대화를 이룬 다음까지도 툭하면 서양 강대국의 입김에 휘둘리는 신세인 이슬람 세계가 느끼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거부와 저항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란과 이라크 등지에서는 서양과 근동, 또는 유대-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문명 간의 충돌이 거듭되고 있으며,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와 아울러 9/11에서 정점에 달한 테러리즘의 활개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라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우상화는 사뭇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