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평생의 대작 [신곡]의 완성과 단테의 최후-알리기에리

지식창고지기 2010. 1. 21. 08:19

단테 알리기에리

오늘날 우리가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나라가 생겨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되고 전 국토가 통일된 직후의 일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는 없었으며, 다만 여러 도시국가와 공국 등이 저마다의 세력을 발휘하고 종종 외세의 압력에 시달리며 공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인의 민족적인 동질성에 대한 의식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며, 13~14세기에 이루어진 경제력의 향상과 르네상스의 탄생은 문화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해 활동한 인물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신곡]의 저자인 단테 알리기에리다. 


 

베아트리체와의 운명적 만남

단테 알리기에리는 1265년 3월,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두란테’(Durante)였지만, 이듬해에 유아세례를 받은 이래로 줄곧 ‘단테’(Dante)로 불리게 되었다. 알리기에리 가문은 원래 귀족에 속했지만 단테가 태어날 당시에는 사실상 몰락한 상태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임대 및 대부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1272년에는 어머니가, 1280년대에는 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장남인 단테는 10대 후반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재산이 좀 있어서 특별히 어려운 생활은 아니었다.

 

1274년 5월 1일, 아버지를 따라 유력자인 폴코 포르티나리의 집을 방문한 단테는 폴코의 딸인 베아트리체(비체)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9세, 그의 나이는 10세에 불과했지만, 이날의 경험이야말로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관습에 따라 단테는 마음에 두었던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부모님이 정한 상대와 맺어지고 말았다.  


 

겨우 13세 때인 1277년 2월 9일, 단테는 피렌체의 또 다른 유력자인 마네토 도나티의 딸인 10세의 젬마와 약혼했고, 9년 뒤인 1286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베아트리체 역시 1287년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1283년 5월 1일, 단테의 일생에서 또 한 번의 획기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처음 만난 지 정확히 9년 만인 바로 그날, 베아트리체가 길에서 단테를 보고는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단지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황홀해진 단테는 그날 밤에 꿈속에서 그녀와 함께 사랑의 신을 목격한다. 잠에서 깨어난 단테는 그때부터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인문 교육을 받은 단테는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키케로와 보에티우스와 베르길리우스를 비롯한 고전 작가들을 숙독했다. 그러나 1290년 6월, 베아트리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슬픔에 빠진 단테는 그때까지 베아트리체를 그리며 쓴 시를 엮어서 [‘단테 알리기에리의’ 새로운 인생](1295)이라는 책으로 간행한다.

 

 

 

피렌체에서의 정치 활동과 망명 생활

단테가 살았던 14세기 후반의 피렌체는 당파 싸움이 한창이었다. 당시의 정치적 배경은 이 저명한 시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당시 피렌체를 양분하는 세력이었던 교황파 겔프당과 황제(신성로마제국)파 기벨린당은 종종 음모와 무력을 동원해 가면서 권력을 뺏고 빼앗기며 각축전을 벌였다. 단테는 이 가운데서도 겔프당에 속했으며, 이 당이 또다시 상인파 비앙키(백색)당과 귀족파 네리(흑색)당으로 갈라지자 전자를 지지하고 후자와 대립했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요직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비교적 당리당략에 좌우되지 않고 공평한 처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1295년에 피렌체의 약제사 조합에 가입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한 단테는 머지않아 탁월한 지성과 언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임기 2년의 피렌체 행정부 최고위원 3인 중 1인으로 재직할 때에는 비앙키당과 네리당 간의 분규를 주도한 양측의 문제 인물들을 시외로 추방함으로써 명성과 아울러 원한도 만들게 되었다. 1301년에 프랑스의 귀족인 샤를 백작이 교황의 요청으로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로 진격하자, 단테는 교황을 설득해 전쟁을 막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로 향한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머물던 11월 1일, 샤를이 피렌체에 진입함과 동시에 그 위세를 업은 네리당의 주요 인사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1302년 1월 27일, 궐석재판에서 단테는 최고위원 재직 당시의 뇌물 수수 및 각종 비리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선고를 받는다.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오던 단테는 이 소식을 듣고 귀향을 포기했으며,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줄곧 타향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단테의 최고 걸작인 [신곡]은 그의 삶에서도 가장 어두웠던 바로 이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131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 하인리히 7세가 군대를 끌고 이탈리아로 내려오자, 단테는 그 위세를 업고 피렌체로 돌아가려는 꿈에 부푼 나머지 황제 치하의 정치에 관한 이상을 담은 [제정론]을 저술한다. 하지만 하인리히 7세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에 사망함으로써 단테의 꿈은 다시 한 번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평생의 대작 [신곡]의 완성과 단테의 최후

“단테 알리기에리의 생애는 마치 거칠고 요동하는 시와 같다. [천국]은 언강생심이고 [연옥]보다도 [지옥]에 더 가깝다.”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의 말이다. 1312~18년까지 베로나에서 머물렀던 단테의 말년이 딱 그러했다. 1314년에 [지옥]이 간행되어 명성은 크게 올랐지만, 망명객인 그의 내면은 한시도 평온할 날이 없었다. 내면의 고민이 외면으로도 드러났던 것일까. 조반니 보카치오의 전기에 따르면, 당시 단테를 처음 본 베로나의 어떤 여자들은 그 꾀죄죄한 행색에 놀란 나머지 “저 사람 행색을 보니 정말로 지옥에 다녀온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물론 피렌체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315년, 전쟁을 목전에 둔 피렌체의 네리당은 다급한 마음에 내부 결속을 위해 단테를 비롯한 여러 추방자들에게 사면을 제안한다. 그러나 막대한 벌금과 굴욕적인 공개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단테는 그 부당성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편지를 보내 파란을 일으킨다. 우려했던 전쟁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지만, 네리당은 대신 단테에게 칼끝을 겨눈다. 이제는 아예 사형을 선고하고 재산을 모조리 압류했으며, 피렌체에 남아 있던 그의 세 아들에게도 사형을 언도했다(다행히 그들은 무사히 도피했다.)

 

 

1318년, 단테는 베로나를 떠나 라벤나에 머물면서 [신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천국]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라벤나의 외교 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다가 병에 걸려 1321년 9월 14일에 사망한다. 56년간의 삶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19년을 망명객으로 보낸 뒤 맞이한 쓸쓸한 죽음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어서야 실책을 깨달은 피렌체는 단테의 유골을 모셔오려 했지만 라벤나는 번번이 거절했다. 1519년에 교황이 그 분쟁에서 결국 피렌체의 손을 들어주자, 라벤나는 단테의 유골을 몰래 빼돌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모처에 은닉되었던 유골이 발견되어 라벤나의 작은 교회에 안치된 것은 무려 1865년의 일이었다. 사후 500년이 되어서야 단테의 긴 유랑은 비로소 끝났던 셈이다.

 

 

중세 최고의 철학 서사시 [신곡]

단테와 베아트리체라고 하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말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두 사람은 신체적 접촉은커녕 말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사이였다. 단테는 베아트리체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연애시를 줄줄이 써냈지만, 정작 그녀를 직접 만났을 때에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전전긍긍 가슴만 앓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못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은 그저 단테의 짝사랑이었고,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사랑이었다.

 

베아트리체가 사망한 직후, 충격을 받은 단테는 마음의 위안을 찾아 광범위한 독서에 몰입한다. 이때 그는 철학자 보에티우스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을 숙독했으며, 그런 독서 체험으로부터 중세의 종교 및 사상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철학 서사시 [신곡]의 기본 구조가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단테가 이 작품의 집필에 착수한 것은 1307년으로 추정된다. 비록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보카치오는 이에 관해 매우 흥미로운 일화를 전한다. 즉 망명 당시에 단테는 [지옥]의 처음 일곱 ‘곡’을 완성한 상황이었으며, 이 원고를 압수한 정적들조차도 그 문학성에 감탄한 나머지 원고를 단테에게 돌려보내며 완성을 독려했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단테는 평소 존경했던 로마 시대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부활절 전후 일주일 동안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한다. “[신곡]은 시로 표현된 단테의 자서전”(R. W. B. 루이스)이다. 그는 두 명의 교황을 비롯한 자신의 적들을 지옥에 던지고, 자신의 친구와 존경하는 인물은 연옥(또는 림보)에 두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천국에 모셨다. 이처럼 당시의 역사와 현실이 곳곳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신곡]을 읽기 위해서는 방대한 주석과 해설을 참고해야만 한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지옥]의 경우에는 사전지식 없이 읽어도 충분히 압도적이며, 단테의 탁월한 상상력이 빚어낸 걸작이다.

 

단테의 서사시는 [지옥], [연옥], [천국]이 각각 33개의 ‘곡’(曲, canto)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 서곡을 합쳐 모두 100곡이다. 하나의 ‘곡’은 150행 내외로서 전체 1만 4233행에 달한다. 오늘날은 [신곡]이란 제목으로 유명하지만, 원래 이 세 편을 가리키는 제목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comedia, 희극)]였다. “절망으로 시작되어 희망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단테는 설명했다. 그러다가 단테의 열렬한 예찬자인 보카치오가 이 작품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디비나’(divina, 신적인)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졸지에 ‘라 디비나 코메디아(la divina comedia),’ 즉 ‘신적인 희극’이 되었던 것이다.

 

“신곡(神曲)”은 일본의 작가 모리 오가이(森鷗外)가 처음 사용한 일본어 표기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최근에 나온 어떤 번역본에서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라는 원제를 병기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신곡’이란 번역 제목이 더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훗날 발자크는 단테의 ‘신적인 희극’이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묘사한 것처럼, 자신은 인간사의 갖가지 단면들을 묘사한 작품을 쓰겠다는 야심에서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을 발표했다. 이는 한 편의 작품이 아니라 발자크가 1830년부터 사망 때까지 발표, 집필, 또는 구상한 140여 편의 작품군을 가리킨다.

 

 

단테의 업적과 [신곡]이 후대에 끼친 영향


단테의 가장 큰 업적은 오늘날의 이탈리아어를 확립한 것이라 하겠다. 단테의 생애 동안에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는 저마다의 방언을 사용했다. 그러나 [신곡] 이후로 거기 사용된 피렌체의 말, 즉 토스카나 방언이 공용어나 다름없이 되었다. [속어론](1304)에서 단테는 지식인의 공용어인 라틴어보다 각 지역의 일상어인 속어로 시를 쓰자는 주장을 펼친 바 있었다(물론 [속어론] 자체는 라틴어로 쓴 것이었지만). 단테가 [신곡]을 라틴어가 아니라 일상어로 쓴 까닭은, 그래야만 지식인 말고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한 보다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문체를 구사하기 위해서였다.

 

문학사적인 영향력 면에서 단테는 가장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문학적 성취나 영향력에서는 호메로스베르길리우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괴테와 발자크 같은 저명한 작가들과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해럴드 블룸은 [세계문학의 천재들]에서 “세계 역사에서 단테를 주목하지 않고는 천재를 논할 수 없다. 그는 (…)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풍부한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라고 전제한 다음, “[신곡]과 필적하거나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가 남긴 39편의 희곡 중 가장 뛰어난 20여 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고 극찬했다.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헨리 롱펠로, 윌리엄 블레이크, 철학자 랠프 월도 에머슨 등도 단테를 숙독하고 예찬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현대의 시인 중에서는 에즈라 파운드와 T. S. 엘리엇이 특히 단테를 좋아했고, 종종 작품 중간에 인용하거나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문학자 C. S. 루이스 역시 [신곡]을 애독했고, 아내 조이와의 짧고 슬픈 결혼생활을 회고한 저서 [헤아려 본 슬픔]을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묘사한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역시 “나의 나쁜 버릇은 [신곡]과 [돈 키호테]를 끊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특유의 입담으로 단테를 향한 애정을 과시한 바 있다.

 

단테의 영향력은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지옥]의 한 장면을 묘사한 [단테의 조각배](1822)로 처음 명성을 얻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1880~1917)도 [지옥]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며,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도 그 조각의 일부다.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는 아리아로 유명한 푸치니의 오페라 [자니 스키키](1918)는 [지옥]의 한 대목에서 영감을 얻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신곡]을 소재로 [단테 교향곡](1856)을 쓰다가 “어느 누구도 천국의 기쁨을 음악으로 묘사할 수는 없다”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만류로 ‘지옥’과 ‘연옥’까지만 쓰고 ‘천국’을 단념했다. 어쩌면 바그너의 주장이야말로 이미 그곳을 시로 노래한 단테에 관한 역설적인 찬사는 아니었을까.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