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61년, 페리클레스는 보수파의 대표인 키몬을 도편추방에 걸어 내쫓는 데 성공한다. 이에 대항해 보수파에서 페리클레스의 동지로 개혁파를 이끄는 ‘투톱’ 중 하나였던 에피알데스를 암살해 버리자, 이후 페리클레스의 죽음까지 32년 동안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독무대가 된다. 당시는 분명히 민주제였으나 그가 마음먹으면 못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지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당시는 사실상 페리클레스가 ‘첫째가는 시민’으로 통치한 1인 독재 시대였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첫째가는 시민’을 자처하며 공화국을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것과는 달리,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있는데, 친구인 페이디아스가 공금 유용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평생의 연인이었던 아스파시아가 신성모독 혐의를 받았을 때, 그리고 말년에 전쟁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였다. 이 때마다 페리클레스는 하마터면 도편추방을 당할 위험까지 처했고, 한동안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 선배들처럼 쿠데타나 암살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오직 성난 군중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을 뿐이었다.
외교정책에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제국을 유지해야 하지만, 되도록 무력 사용은 피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의 숙적 페르시아와는 기원전 449년에, 아테네의 라이벌 스파르타와는 445년에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내치에 힘썼다. 아직 페르시아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던 아테네를 말끔히 재정비하여, 누구나 찬탄할 만한 아름다운 도시로 만드는 사업도 그 중 하나였다. 오늘날까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아크로폴리스는 그의 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에 구현된 ‘완벽한 고전미’는 건축뿐 아니라 조각, 회화, 그리고 철학과 문학에서도 찬란히 성취되었다. 아이스큐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고전 비극을 완성했고,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역사학을 창립했다. 아낙사고라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가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한편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도덕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실로 아테네는 그리스뿐 아니라 전 (서양)세계의 모범이었고, 그 모범은 수천 년 동안 서양문명의 원천을 제공했다.
완벽한 것은 없다, 또는 단명한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우리는 헬라스의 모범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 연설은 어떤 연설이었던가.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개시 후 몇 달이 지난 시점에서 전몰자들의 장례식을 치르며 행한 연설이었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얻은 그리스의 영광을 그리스인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아테네의 황금시대 또한 이로써 쇠퇴하고 마는 자멸적인 전쟁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결정적인 선택도 외면했고, 결국 자신이 완성한 ‘완벽한 체제’가 금이 가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전쟁의 원인은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분쟁이라는 비교적 사소한 것이었으나, 그리스의 양대 강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여기에 말려들고 말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제국이 못마땅했으나 특별히 손해를 보는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아테네가 스파르타까지 손에 넣으려 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아테네 역시 스파르타가 반 아테네 세력을 규합해서 제국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의심했다. 아테네 민회는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갈려 온통 시끄러웠다. 이런 가운데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를 선제공격하자는 주전파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스파르타의 체면을 살려 주는 최소한의 양보를 하자는 주화파의 주장도 거부했다. 그는 전쟁은 되도록 피해야 하지만 한다면 아테네가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 최강의 육군을 가진 스파르타와 지상에서는 대결하지 않고 성벽을 의지해 철통 같은 방어에만 힘쓴다. 그 사이에 세계 최강의 아테네 해군으로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을 봉쇄하고 공략하면 결국 적들은 두 손을 들게 되리라는 계산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