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민주주의로 가는 길 - 페리클레스

지식창고지기 2010. 1. 21. 08:21

페리클레스

“우리의 정치체제는 이웃나라의 관행과 전혀 다릅니다. 남의 것을 본뜬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들이 우리의 체제를 본뜹니다. 몇몇 사람이 통치의 책임을 맡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으므로, 이를 데모크라티아(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개인끼리 다툼이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법으로 해결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이 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고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실로 우리는 전 헬라스(그리스)의 모범입니다.” 기원전 431년, 페리클레스는 전몰자들을 추도하는 장례식 연설에서 절정에 달해 있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찬양했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

아테네는 대략 기원전 10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인데, 해외 식민지의 건설과 무역의 발달로 거둔 성과였다. 그것은 급격한 사회 변동도 가져왔다.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때까지 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토지를 많이 가진 귀족들이 지배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상공업 발달로 막대한 부를 가진 평민이 늘면서 귀족과 평민 사이의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한편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대립도 발생했다.

 

이런 극심한 사회분열과 갈등을 틈타 ‘두 세력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사회안정을 가져오는’ 역할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가 ‘참주(티라노스)’였다. 대체로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독재로 정치를 했던 이들이지만 절망적인 사회분열보다는 공포 속의 안정이 낫다는 생각 덕분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원전 561년에(이후 한동안 실각했다가 546년에 재집권했다) 아테네의 정권을 잡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친서민 정책과 농업 진흥책, 문예 진흥책을 펴며 아테네를 강국으로 성장시켜 참주임에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로 들어서면서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참주들의 폭정에 견디지 못한 민중의 봉기가 일어나 참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중에서 가장 빠른 나라가 아테네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기원전 510년에 참주 히피아스를 몰아내고, 508년에 아테네의 전통적 부족체제를 없애 부족 단위로 뭉쳐 상호 대립하는 악습이 사라지게 했다. 또한 참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다수표를 받은 사람을 추방하는 ‘도편추방제’를 도입해 참주가 다시 나타나는 일을 막았다. 이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큰 진보였다. 그러나 아테네가 본격적인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48)이 필요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륵세스 1세의 그리스 침략은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국가들의 사상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가 되는 법.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생각했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의외로 바위가 달걀에 맞아 쪼개지자, 그리스의 위상과 세력은 단숨에 뛰어올랐다. 특히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전투가 아테네의 해군을 주축으로 한 살라미스 해전이었기에, 이 전쟁 후 아테네는 그리스에서도 첫째가는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아테네 사회 자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페르시아를 물리친 후 재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국제기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었고, 따라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델로스 동맹’이 이뤄졌다. 동맹국들은 저마다 일정한 분담금을 내도록 했는데, 그것이 사실상 아테네의 국고처럼 되고, 그리스 방어용을 표방하여 아테네 본국의 함대를 건조하고 유지하는 데 쓰이며 바야흐로 “아테네 제국”이 탄생했다. 아테네가 해상제국으로 떠오르면서 페르시아 전쟁 때에 중요해진 노잡이들의 지위는 더욱 중요해졌다. 고대에는 군사장비를 개인 부담했기 때문에, 본래는 말을 소유할 수 있는 귀족들 위주의 기병대가 주력이었고, 이후 갑옷과 방패를 마련할 수 있는 부유한 시민들이 국방의 주축이자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군함의 노잡이는 팔 힘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최하층 시민들의 담당이었는데, 이제 그 노잡이의 중요성이 극대화된 것이다. 이것은 아테네 하층민들의 정치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켰다. 페리클레스가 말한 대로 “통치권을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고(…)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다면 가난해도 상관없는” 본격적인 민주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여성과 노예는 그 ‘모두’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서양문명에 영원한 모범을 세우다


페리클레스는 이 아테네 민주주의, 아테네 제국을 전성기로 이끈 위대한 정치가였다. 귀족 출신이면서 클레이스테네스의 먼 친척이기도 했던 그는 보수파와 개혁파가 대립하는 와중에 개혁파의 선봉장이 되어 아테네의 정치개혁을 이끌었다. 또 그는 빼어난 용모에 인품도 뛰어났고, 웅변술은 당대에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학자나 예술가들과도 친했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프로타고라스, 문인 소포클레스, 조각가 페이디아스 등과는 평생 친구였다.

 

 

기원전 461년, 페리클레스는 보수파의 대표인 키몬을 도편추방에 걸어 내쫓는 데 성공한다. 이에 대항해 보수파에서 페리클레스의 동지로 개혁파를 이끄는 ‘투톱’ 중 하나였던 에피알데스를 암살해 버리자, 이후 페리클레스의 죽음까지 32년 동안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독무대가 된다. 당시는 분명히 민주제였으나 그가 마음먹으면 못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지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당시는 사실상 페리클레스가 ‘첫째가는 시민’으로 통치한 1인 독재 시대였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첫째가는 시민’을 자처하며 공화국을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것과는 달리,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있는데, 친구인 페이디아스가 공금 유용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평생의 연인이었던 아스파시아가 신성모독 혐의를 받았을 때, 그리고 말년에 전쟁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였다. 이 때마다 페리클레스는 하마터면 도편추방을 당할 위험까지 처했고, 한동안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 선배들처럼 쿠데타나 암살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오직 성난 군중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을 뿐이었다.

 

외교정책에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제국을 유지해야 하지만, 되도록 무력 사용은 피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의 숙적 페르시아와는 기원전 449년에, 아테네의 라이벌 스파르타와는 445년에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내치에 힘썼다. 아직 페르시아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던 아테네를 말끔히 재정비하여, 누구나 찬탄할 만한 아름다운 도시로 만드는 사업도 그 중 하나였다. 오늘날까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아크로폴리스는 그의 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에 구현된 ‘완벽한 고전미’는 건축뿐 아니라 조각, 회화, 그리고 철학과 문학에서도 찬란히 성취되었다. 아이스큐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고전 비극을 완성했고,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역사학을 창립했다. 아낙사고라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가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한편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도덕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실로 아테네는 그리스뿐 아니라 전 (서양)세계의 모범이었고, 그 모범은 수천 년 동안 서양문명의 원천을 제공했다.

완벽한 것은 없다, 또는 단명한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우리는 헬라스의 모범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 연설은 어떤 연설이었던가.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개시 후 몇 달이 지난 시점에서 전몰자들의 장례식을 치르며 행한 연설이었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얻은 그리스의 영광을 그리스인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아테네의 황금시대 또한 이로써 쇠퇴하고 마는 자멸적인 전쟁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결정적인 선택도 외면했고, 결국 자신이 완성한 ‘완벽한 체제’가 금이 가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전쟁의 원인은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분쟁이라는 비교적 사소한 것이었으나, 그리스의 양대 강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여기에 말려들고 말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제국이 못마땅했으나 특별히 손해를 보는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아테네가 스파르타까지 손에 넣으려 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아테네 역시 스파르타가 반 아테네 세력을 규합해서 제국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의심했다. 아테네 민회는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갈려 온통 시끄러웠다. 이런 가운데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를 선제공격하자는 주전파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스파르타의 체면을 살려 주는 최소한의 양보를 하자는 주화파의 주장도 거부했다. 그는 전쟁은 되도록 피해야 하지만 한다면 아테네가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 최강의 육군을 가진 스파르타와 지상에서는 대결하지 않고 성벽을 의지해 철통 같은 방어에만 힘쓴다. 그 사이에 세계 최강의 아테네 해군으로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을 봉쇄하고 공략하면 결국 적들은 두 손을 들게 되리라는 계산이었다.

 

 

이 계산은 크게 보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두 가지 요소가 일을 그르쳤다. 하나는 지상에서는 오직 방어만 하는 전법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주전파의 비난이었다. 클레온을 비롯한 선동정치가(데마고그)들은 수십년 간 계속된 페리클레스 체제에의 염증을 교묘히 이용해, “페리클레스는 겁쟁이다” “적들이 우리 농지와 과수원을 마음껏 약탈하는 것을 우리는 손가락이나 빨며 보고 있으라고 한다”며 집요하게 성토했다. 이 때문에 페리클레스는 한동안 모든 공직에서 사퇴해야 했다. 얼마 후 아테네인들은 그를 다시 복귀시켰지만, 또 하나의 요소가 아테네와 페리클레스를 덮쳤다. 역병이었다. 페리클레스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인구가 아테네 성벽 아래 밀집해 있었기에 전염병의 피해는 엄청났다. 이는 본래 페스트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서 장티푸스로 밝혀졌는데, 결국 페리클레스 본인마저 병마에 희생되었다. 기원전 429년 9월이었다.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이 전쟁이 기껏해야 1년이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28년이나 끌었다. 결국 아테네가 기원전 405년에 스파르타에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이긴 자나 진 자나 상처밖에 남지 않은 전쟁이었다. 페리클레스가 그토록 자신했던 민주정치조차 ‘중우정치’로 전락하거나 과두정치로 바뀌었고, 도시국가 내에서도 당파가 갈려 서로 헐뜯고 학살하면서 시민의 애국심도 도덕의식도 땅에 떨어졌다. 이토록 약해진 그리스를 다시 한 번 페르시아가 침략했다면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도시국가들의 문명을 끝장내는 바람은 동쪽이 아니라 북쪽에서, 젊은 정복왕이 다스리는 마케도니아에서 불어왔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페리클레스의 동지, 적, 그리고 친구들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
아테네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가져온 대정치가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
(BC500?-BC428) 선생이자 친구. 만물의 진화를 부정했으며 모든것을 오직 이성으로만 보려는 합리주의 주장.
페이디아스 페이디아스
(BC480?~430?) 파르테논 신전을 조각한 고전 조각의 거장. 미켈란젤로, 로댕과 함께 3대 조각가로 꼽힌다.
아스파시아 아스파시아
(BC470-BC400) 연인이자 두 번째 부인. 남성을 능가하는 지성과 예술적 재능으로 유명.
클레온 클레온
(?-BC422) 아테네의 선동정치가로 페리클레스를 공격해 유명해졌다. 페리클레스 사후 10년 정도 아테네를 이끌었으나 전사했다.
투키디데스 투키디데스
(BC460?-BC400?) 패배의 책임을 지고 추방된 아테네의 장군.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써서 '역사의 아버지'로 불렸다.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