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대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1. 08:24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으로 그대가 나와 대화하고 싶다면, 수신인을 아시아의 대왕으로 할 것이며, 나와 동등한 입장으로 편지하지 마시오. 당신의 소유였던 것은 이제 모두 나의 것이니, 당신이 어떤 것을 원한다면 예의를 갖춰 내게 물으시오. 행여 그대가 나와 맞서 싸우려 한다면 나중에 도망가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당신이 어디로 피신하든 나는 당신을 찾아낸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보낸 협상 제안 편지에 대한 알렉산드로스의 답장 중에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냉철한 실리주의’와 ‘격정적 신비주의’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에는 역사와 전설이 버무려져 있다. 그에 관한 갖가지 전설들은 북쪽으로는 아이슬란드부터 동쪽으로는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유포되어 있다. 가능한 한 전설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그의 삶을 이야기하려면 아버지 필리포스 2세와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유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는 탁월한 군사지도자이자 냉철한 실리주의자였다. 이에 비해 올림피아스는 신비주의적이고 격정적인 성향의 여성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양친의 이러한 다분히 상반되는 성격을 모두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13살 때부터 약 3년 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우면서 그리스 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마케도니아는 혈통상 그리스에 속하면서도 문화나 기풍 면에서는 그리스와 차이가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을 멸시하곤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예술가, 지리학자, 측량 기사, 수로학자, 동식물학자 등을 원정길에 데리고 간 것도 스승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원정길에서 수집한 자료가 스승에게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날 무렵 그리스는 한 세기 전 페리클레스 시대의 전성기를 보내고 페르시아의 간섭, 잦은 전쟁, 선동적인 정치가들의 발호, 농업생산기반 쇠퇴,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겪으며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에게는 기회였다. 필리포스는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338년)에서 아테네와 테베를 패퇴시키고 코린토스 동맹을 이룩한 뒤 그리스 세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살해당했고, 20살 나이의 알렉산드로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북방 이민족의 침입과 서쪽의 반란을 진압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 봄 아시아 원정을 개시했다.

이집트,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계속해서 진군하다


마케도니아 군과 그리스 동맹군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보병 3만에 기병 5천 규모였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주력 기병, 창기병, 투창병, 궁수, 중무장 보병, 경보병 등 다양한 부대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운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원정대는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총독 군대와 맞서 대승을 거두고 소아시아 지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333년 11월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섬멸했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이수스 전투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후방을 위협할 수 있는 페니키아 해안의 함대 기지를 점령해 철저히 파괴해버렸고, 페르시아의 통치에 반발하던 이집트를 어렵지 않게 정복했다.

 

그는 이집트에 지중해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상업과 행정 중심지 구실을 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강물이 실어오는 침적토가 쌓이지 않는 나일 강 하구 서쪽 끝에 자리하게 된 이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다. 이집트를 떠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1년 10월 티그리스 강 동쪽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3세와 다시 결전을 벌였다. 철저하게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몇 달 뒤 파르티아 사막에서 자신의 친척인 박트리아의 왕 베소스에게 살해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최대의 적이었던 다리우스 3세를 정중하게 장사 지내주었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유력 가문 출신이자 전쟁에서 공도 세운 필로타스의 반란 음모를 해결하고, 기원전 329년 봄 박트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그리스 기병대가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큰 위기가 발행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주력군의 상당수를 아시아인으로 편성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러시아령 투르키스탄 지역)에서 보낸 2년 간 적군의 기습과 원정군 내부의 배신, 부상과 질병이 이어지며 어려움을 겪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포로로 사로잡은 박트리아 왕의 딸과 결혼하고 부하 병사들에게도 현지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는 등, 무력과 유화책을 동시에 구사하며 정복지를 넓혀갔다.

재위 13년 중 10년 간 원정하며 33세에 세상을 떠나다

알렉산드로스는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남하하여 카이버 고개를 지나 인도로 진입해 펀자브를 통과하고자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진군을 막아선 것은 펀자브 일대를 지배하는 포루스 왕이었다. 히다스페스 강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다른 전투보다 상대적으로 큰 희생을 치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 왕이 그 지역을 계속 통치하도록 했다. 히다스페스 강 전투 이후 원정군은 계속 진군했지만, 하루 60~80킬로미터를 걸으며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사이 지친 병사들은 귀국하기를 바랐다. 더구나 지금까지 마주한 적들보다 훨씬 강한 적이 있다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열병과 기후 악조건도 심했다.

 

 

 

사실상 진군을 거부하는 병사의 뜻을 접한 알렉산드로스는 사흘을 기다리며 병사들의 맘이 바뀌기를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귀환을 결정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11월 인더스 강을 따라 남하하여 이듬해 7월 인도양에 도착했다. 이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발루치스탄 사막을 거쳐 기원전 324년 초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지역에 조폐소를 만들어 페르시아 제국에서 입수한 막대한 금을 화폐로 바꾸어 제국 전역에 걸친 경제권을 형성하려 했고, 바빌론을 수도로 삼아 제국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기원전 323년 6월 13일 바빌론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 13년 중 10년을 원정으로 보내며 대제국을 건설한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바빌론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새로운 원정과 탐사 계획을 세우고,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구상을 하는데 바빴지만, 심신의 과로와 제국 운영이라는 사명의 중압감, 원정 때 입은 여러 차례의 부상(그는 후방에 남아 있지 않고 직접 전투에 가담해 용맹하게 싸웠다.) 후유증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 상태에서 걸린 열병이 과도한 음주로 악화되어 더 이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유산, ‘동서 문화의 교류와 융합’ ‘헬레니즘 세계의 형성’


그의 사후 제국은 세 나라로 갈라졌지만, 알렉산드로스 이전과 이후는 결코 더 이상 같을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박트리아 지역의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들은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캘커타 지역에 이르는 인도를 정복했고, 간다라로 불리는 카이버 고개 지역에서는 동서양이 절충된 새로운 예술양식, 간다라 미술로 불리는 양식이 탄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하고 융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면서도 각 지역의 문화와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기원전 330년경부터 이집트가 로마에 정복당하는 기원전 30년에 이르는 약 300년의 시기, 즉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드로스가 연 시대였다. 헬레니즘 시대는 로마 제국의 토양이 된 것은 물론, 이후 비잔틴 세계, 이슬람 세계, 서유럽 세계에도 공통의 유산으로 영향을 미쳤다.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2세기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세계는 단절된 사건들뿐이었지만 이제 역사는 진정으로 연결되었다.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시아의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헬레니즘 시대를 (고전 시대) 그리스 문화의 쇠퇴기로 보기도 하지만, 그리스 문화의 융합적 보편화와 확산의 시기로 평가하는 시각도 많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은 살육과 파괴로 피정복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그는 대부분의 세월을 원정으로 보내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에, 제국을 안정시키고 다스리는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여줄 기회도 사실상 없었다. 말년에는 격분과 우울을 오가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편협한 세계인식에서 벗어나 세계주의를 지향하며 지리적, 문화적, 상업적 측면에서 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확장시키고 보편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은, 그의 정복사업이 남긴 분명한 유산이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정복 전쟁으로 대제국을 이룬 군주들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북서부를 정복해 대제국을 이룩했다.
칭기즈칸 칭기즈칸
(재위 1206~1227)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몽골제국을 건설
티무르 티무르
(재위 1369∼1405) 중앙아시아, 중동, 인도를정복해 티무르제국건설
쉴레이만 1세 쉴레이만 1세
(1494~1566)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켜 전성기를 이루었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