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실크로드의 역사와 민족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23
실크로드의 역사와 민족

      

     목차

 

1.실크로드란
2.실크로드의 역사
3.실크로드의 분류
4.실크로드의 문화
5.실크로드의 인물
6.실크로드이 도시들
7.실크로드상의 민족들
 
1.실크로드란

 

중국의 당대에 실크가 서역을 거쳐서 유럽의 중심이었던 로마로까지 가는 여정을 실크로드(비단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은 주로 말과 낙타를 이용해서 비단이 중국에서 로마로 가게 되고 유럽의 물건들이 중국으로 들어 오는 길인데 당시에는 주로 대상(낙타를 탄 상인-카라반)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길에 대해서 어떻게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말이다.
독일을 저명한 지리학자인 리흐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1833-1905)이 이 길을 실크로드라고 불렀다. 그는 1860-1862년에 통상조약 체결을 위하여 파견된 프러시아 대사의 수행원으로 동아시아의 자바.필리핀.일본 등 여러나라를 탐방했다. 1869-1872년 중국 전역을 답사하고 귀국한 후에는 본 대학.라히프치히대학.베를린대학에서 지리교수로 일을 하였다.
그는 중국전역을 탐사하고 1877년 중국(China)라는 책 5권을 썼는데 1권 후반부에서 동서교류사를 개관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의 시르다리야(시르강)와 아무다르야(아무강)사이의 트란스옥시아나지대를 거쳐서 서북인도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이 비단이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ssen-영어로는 실크로드)라고 말하고 있다. 후에 이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중요한 이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실크로드의 역사

 

중국의 비단이 어떻게 로마에 까지 알려졌을까?
중국과 로마까지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고비사막,타클라마칸,파미르고원,중앙아시아,이란고원,소아시아(터어키),지중해 등을 거치는 길이다..
이 실크로드를 개통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장건이라는 사람이다.

 

1)장건의 서역개척

장건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한무제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에 흥기한 흉노(Hun)는 한 대초에 이르러 동복도위(군대.행정기관)을 설치하고 대부분의 서역나라들을 그 치하에 두었다. 기원전 209년 묵특선우가 등극한 후 흉노의 국력은 급속히 강화되어 동쪽 인접국인 동호와 서쪽 인접국인 월지를 각각 격파하고 남으로는 황하연안까지 진출하여 한을 크게 위협하였다. 기원전 177-176년에 묵특선우는 우현왕을 파견해 월지의 숙적인 오손(우이순)과 제휴하여 월지를 천산이북지역으로 축출하였다. 몇 해 후(BC173-160)흉노와 오손의 연합 공격을 재차 받은 월지는 일리강의 남쪽에 있는 대완.대하일때까지 밀려가 그 곳에서 대 월지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서천하지 못하고 쿤륜산 이북에 잔류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소월지라고 불렀다. 월지의 피격 결과 오손은 월지의 고지를 점령하고 일리강유역과 이씩호일대에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이씩호 동남부에 있는 적곡성에 정도하였다. 그러나 독립국이 아니었고 흉노의 속국에 불과했다. 그 결과 기원전 176년 이후 오손 등 천산북로의 26국은 모두 흉노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서북방에서 강세 일로를 걷고 있은 흉노의 존재는 한으로서는 일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초 60년간 한은 국력 회복을 위해 흉노에 대해서 화친과 타협정책을 썼다. 매해 흉노의 선우에게 비단과 솜.쌀을 보내는가 하면 통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만의 기병을 가지고 있었던 흉노는 한의 화친정책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한의 변방을 침범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서역제국에 막대한 공물과 납세를 강요하는 등 횡포를 자행함으로써 한의 안정을 위협하고 한과 서역제국간의 내왕도 끊어 놓았다.
 
16세의 어린나이에 등극한 한무제 (유철BC140-87)은 흉노의 끊임없는 침범에 의분을 표하면서 전에 왕들이 못다한 유업을 달성코자 결의를 다지곤 하였다. 그는 등극한지 얼마지나지 않아서 흉노의 한 투항자로부터 흉노에 의해 멀리 서방으로 쫓겨간 대월지가 흉노에게 앙심을 품고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무제는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대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하여 당시의 나위에 있던 장건을 기원전138년 대월지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장건은 수행원 감부와 함께 백명을 인솔하고 장안을 떠난 농서(감숙성)에 이르렀는데 더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이미 지 지방까지 남하한 흉노군에 체포되어 흉노의 포로로 압송되었다. 장건은 흉노에서 흉노 여인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두고 10년간을 보내던 중 기회가 생겨 감부.처자와 함께 도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잊지 않았던 그는 서쪽으로 수 십일 동안 걸어 드디어 대완.강거.대월지에 이르렀다. 그가 흉노를 떠나 대완등에 이른 길은 천산북로로 짐작된다. 대완국은 지금의 페르가나지방인데 그곳에 도착하려면 파미르고원을 너머야 한다. 한서.서역전등에는 북도의 서쪽 파미르를 넘으면 대완.강거.엄채가 나온다 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건이 대완에 이른 길이 바로 천산 불고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망을 안고 찾아간 대월지의 정세에는 그간 변화가 일어났다. 신왕이 등극하여 대하를 병합하고 오손을 피하여 일리강으로부터 멀리 중앙아시아에 이동하여서 국가가 평온함을 누리고 강성해 지자 흉노를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어졌던 것이다. 실망한 장건은 대월지를 떠나 대하의 바그크에 가서 일년 동안 체류하며 관망하다가 기원전 128년 오아시스 육로 남로를 따라 강중(지금을 청해성)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에 흉노에게 재차 체포되어 1년 동안 다시 구류되었다. 그런데 그가 잡혔을 때 흉노선우의 죽음을 계기로 태자를 모살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 기회를 틈타 장건은 수행원 및 처자와 함께 다시 도주하여 기원전126년 드디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곡절 많은 장건의 서역여행은 전후 1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렸으며 그나마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그와 수행원 감부 두 사람 뿐이었다. 무제는 그의 노고와 공덕을 높이 평가하여 태중대부로 봉하고 감부에게는 봉사군이란 칭호를 주었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장건의 제1차 서역여행이다. 이 여정은 사기와 대완전.후한서,서역전등에 기술한 것이다.
장건의 1차 여행을 통해서 대월지와 대흉노의 공수동맹을 결성하지는 못했지만 이 여행을 통해서 흉노를 비롯한 서역제국에 대한 정보와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견문을 무제에게 진술하하고 대하와의 무역등도 제안을 하였다. 대하와 촉도(지금의 사천성)가 무역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무제도 이러한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기원전 125년 장건을 파견해서 이러한 길들을 개척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 것을 토착부족들을 저지로 인해서 실행이 되지 않았다. 그후 장건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서역에 대한 지리지식을 활용하여 기원전123년 대장군 위청의 흉노토벌전에서 위청을 보좌하여 공을 세웠다. 이 해 봄에 위청은 10만여 군대들 이끌고 출격하여 흉노군 1만9천명을 살상하거나 사로잡았다.
이 후 잇달아 흉노정벌로 인해 하서지역의 흉노는 큰 타격을 받고 기원전121년에 원래 흉노는 휴도와 곤야왕이 통치를 했었는데 곤야왕이 휴도왕을 살해하고 한에 투항하므로서 한은 하서에 무위와 주천.장액.돈황등에 두 군을 증설하므로서 서역의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그후 장건은 여러차례 서역의 여행을 하였으며 기원전114년 그동안의 쌓인 노고를 이기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장건이 가지고 온 군사.정치.경제.지리 등의 정보는 한의 조정에 일대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보고를 통해 무제는 여태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페르가나.사마르칸트.부하라.발흐등의 부유한 도시국가들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가나는 물론 이건이라 불리는 또 다른 먼나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은 오늘날 학자들 대부분이 로마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보다 더 직접적인 소득은 페르가나에서 기가 막힌 새로운 종류의 군마를 발견한 것인데, 장건은 그것을 천마라고 보고 했다. 빠르고 몸집이 크며 강인한 이러한 말이 당시 중국인들에겐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말이라고는 작고 느린 말(오늘날 프로제발스키 말 이라불리며 현재는 동물원에서나 가까스로 볼수가 있다.) 밖에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따. 흉노와 전쟁에서 기마전을 해야 할때 이 페르가나의 말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무제는 자신의 군대를 이들 말로 무장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 말을 구하기 위하여 페르가나로 사절단을 보냈으나 거듭 실패를 하였다. 결국 수의사까지 동반한 대규모 원정군이 파견되어 페르가나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그곳의 주민들은 말들을 모두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만약 중국군이 더 접근해 오면 말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마침내 중국군은 철수하는 대신 소량의 군마를 받기로 하고 그들의 조건부 투항을 수용해 귀환하였다. 지금은 멸종되었지만 이 천마는 한 대와 당대의 조각가.화가들의 작품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청동제 비마상이다 이것은 1969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이 서안(장안) 근처 실크로드상에서 발굴해 낸 것으로 2천년전 한 이름없는 조각가가 만들었다.(감숙성 무위에서 발굴. 이 조각의 특징은 날아가는 제비를 사뿐히 밟고 달리는 천마의 형상에 있다. 한국학자들은 신라 천마총의 천마와 양식상의 유사성을 주목하고 있다.)
한 무제는 결연한 의지로 여행의 신기원을 이루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장건의 보고에 매우 흡족해 하면서 그에게 "위대한 여행가"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무제는 제국의 영역을 서쪽으로 확장시키려 마음 먹었기 때문에 여러차례에 걸처 서역원정군을 했다. 그 일환으로 흉노의 서쪽에 살고 있던 오손(우이순)이라는 유목민과의 결맹을 추진하기 위해 장건이 기원전115년에 다시 길을 떠났으나 이번에도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우이순이 인접한 흉노의 보복이 두려웠을 뿐 아니라 그의 반해 중국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따. 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 "위대한 여행가"는 황제로부터 대단히 명예로운 벼슬을 하사받고 세상은 떠났는데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셈이었고, 이는 당시 두 강대국인 중국과 로마를 잇는 결과를 낳았다. 말하자면 그는 \'실크로드의 아버지\'라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2)로마인들이 어떻게 비단을 알게 되었을까?
로마인들은 비단이 나무에서 자란다고 굳게 믿었다. 플리니우스는 일찍이 "세레스는 솜털이 자라는 숲으로 유명하다. 그곳 사람들은 물을 이용하여 나뭇잎에서 솜털을 채취하다"라고 적었고 베르길리우스도 "중국인들이 잎에서 그 부드러운 털을 어떻게 빗질해 내는가"를 묘사하였다. 중국인 역시 이러한 허구의 신화를 구태여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을 천년 전에 제작의 비법을 발견한 비단을 가능하면 많이 팔기를 원했고 또 그것을 독점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AD6세기가 지난 뒤. 일설에 의하면 네스토리우스교단의 승려가 속이 빈 나무 지팡이 속에 누에고치를 넣어 비쟌티움으로 밀반출함으로써 이 독점 체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 혁명적인 세로운 물질을 처음으로 목격한 로마인들은 마르쿠스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휘하의 7개 군단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이 유프라데스 강을 건너 동쪽으로 파르티아인들을 추격하던 BC53년의 일이었다. 도주하던 파르티아인들이 카르하에서 갑자기 말의 진로를 바꾸면서 뒤로 몸을 돌려 화살을 비오듯 퍼부었다.(이것이 바로 원래의 파르티안 사격이다) 이때 화살은 두 사람을 관통하기도 하고 혹은 적군의 손을 뚫고 방패에 못박듯 꽂히기도 하여 로마 군대의 진영을 붕괴되고 말았다. 아마 불굴의 로마 군단은 곧이어 벌어진 다음과 같은 일이 없었다면 그래도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파르티아인들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면서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진 로마 군인들의 얼굴을 향해 비단으로 만든 거대한 깃발들을 펼쳐들고 번쩍이는 태양빛 아래서 펄럭였던 것이다. 여태까지 이러한 것을 본 적이 없었던 로마인들은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들의 뒤로는 2만명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로마사람들이 알기로는 파르티아인들은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민족으로 \'구름처럼 가볍고 얼음처럼 투명한\' 이런 놀라운 물건을 발명하거나 만들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과연 이들은 이 것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그것은 중앙아시아 저 너머에 살고 있는 신비스러운 종족인 \'비단민족\'에게서 온 것이었다. 장건의 뒤를 이어 한 무제가 보냈던 또 다른 사신이 파르티아까지 가서 그곳에서 비단을 주고 대신 타조의 알과 마술사를 데리고 왔는데 중국 연대기에 따르면 황제는 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얼만 지나지 않아서 이 놀라운 물건의 견본을 가까스로 손에 넣게 된 로마인들은 그 뛰어난 광택과 촉감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것을 좀더 많이 구할 수 없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동시에 파르티아인들에게는 이 점을 이용하면 새로운 교역의 중개인인으로서 막대한 이익을 얻을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일대 유행처럼 번졌고, 급기야 AD14년에는 그러한 풍조가 퇴폐를 조장한다고 여겨 티베리우스는 비단옷을 입는 것 자체를 금지할 정도였다. 플리니우스는 속이 다 비치는 이 세로운 의복에 대해 "여성을 나체로 만드는 것"이라고 불만을 표시하면서 비단에 대한 로마 여성들의 갈망 때문에 경제가 고갈될 지경이라고 비난했다.
공식적으로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단 무역은 더욱 번창하여 380년경 로마의 한 역사가는 비단이 "한때 귀족들에게만 국한되었지만 이제는 하층민까지 포함한 모든 계층에 널리 퍼져 있다"고 기록하였다. 비단 가격은 점점 올라가 금과 똑같은 무게로 교환할 정도가 되었다고 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어쨌든 로마인들을 금을 주고 비단을 사들였고 수요가 늘어갈수록 경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익의 상당부분은 비단을 짜는 중국의 직인들인 세레스인이 아니라 날로 번창하는 실크로드의 중개상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미 AD1세기부터 일부 발빠른 로마상인들은 탐욕스런 파르티아인을 따돌리고 세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했는데 마침내 2세기경에는 많은 양의 비단이 인도로부터 해로를 통해 로마로 들어오기 시작함으로써 괄목할 만한 경비를 절감을 이룰수 있었다. 피르티아인들은 이 중계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해로의 위험성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해외에 퍼뜨렸는데 한 중국인 사신은 로마로 가려다가 바로 이러한 이야기에 겁을 먹고 돌아간 적도 있다.
이렇게 하여서 거의 1만5천킬로미터에 달하는 로마와 중국사이의 비단길이 생기게 된 것이다...
실크로든 중국에서 비단이 주종을 이루었다.
중국으로 가는 대상(카라반)들은 금과 보석.모직물과 면직물.상아.상호.호박와 중국에서 생산이 되지 않은 유리들을 가지고 갔으며 중국에서 출발하는 대상들은 모피.도자기.철.칠.계피.대황.혁대.거울등의 청동제품을 가지고 나갔다....

 

3.실크로드의 분류

 

실크로드는 장안(오늘날의 서안)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올라가면서 좁은 복도 하서주랑을 통과하여 고비사막안에 있는 오아시스도시 돈황으로 연결된다.
돈황을 도착해서 유명한 옥문관을 도착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대상들은 타클라마칸을 우회할 때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중에 하나인 북쪽길은 사막을 지나서 3주정도 가면 하미(쿠물)에 도착하며 거기서부터 천산산맥이 기슭을 끼면서 타클라마칸의 북쪽에 점점이 박혀있는 오아시스 도시들 투르판.카라샤르.쿠차.악수.툼슉.카쉬카르 등을 통과한다.
남쪽길은 티베트의 북쪽 방벽과 사막의 가장자리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오아시스도시를 따라 미란.케리야.호탄.야르칸트.등의 도시들을 통과한다. 야르칸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카쉬카르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면 위에서 하미를 통해서 투르판 카라샤르등이 도시를 통해서 카쉬카르까지 가는 길과 만나게 된다.
카쉬카르에서부터 실크로드는 더 서쪽으로 뻗어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를 넘는 길고도 험난한 길이 시작되는데 오늘날 중국의 영토에서 옛 소련의 영토로 넘어가게 된다. 코칸트.사마르칸트.부하라.메르브에 이어 페르시아와 이라크의 영토를 지나 지중해 연안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물품들은 배에 실려 로마나 알렉산드리아로 향한다.
도 한 갈래의 길은 타클라마칸 서남부에서 카쉬카르로 올라가지 않고 곧바로 파미르를 넘어 오늘날 아프카니탄에 있는 발흐로 들어간 뒤 더 서쪽으로 메르브에서 실크로드의 다른길과 합쳐진다.
하나의 중요한 지선은 인도로 들어가는 길인데 이것 역시 타클라마칸 서남부의 야르칸트에서 곧바로 인도로 들어가는 길인데 이것 역시 험한 카라코람 고갯길을 넘어 레와 스리나가르로 이어졌고, 거기서부터 봄베이 연안의 시장들에 이를 때까지는 평탄한 길이 나타났다.
중국인들이 중도라고 부르는 길이 있는데 이것은 옥문관을 나선 뒤 방황하는 호수 롭노르의 북안을 끼고 가면서 당시 매우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였던 누란을 통과하여 앞서 말한 북쪽간선과 합류하는 것이다

다시 구분을 하자면
실크로드는 크게 초원로, 사막로(오아시스로)와 남해로로 나눌 수 있다.
초원로:화북에서 고비시막, 몽고고원을 통하여 알타이, 준가르분지를 지나 카자크구릉과 시베리아 산림지대, 러시아 남쪽 초원을 거쳐 아랄해와 카스피해의 연안에 도달한다.
사막로(오아시스로) : 호남성의 정주에서 시작하여 낙양, 서안, 감숙성의 난주,주천,돈황등을 거쳐 신장의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를 통과하여 인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및 지중해 연안에 이른다.
남해로: 화남에서 동남아, 스리랑카, 인도, 파키스탄만을 거쳐 홍해에 이른다.

신장내의 실크로드
신장지역에서는 사막로와 초원로 나눌 수 있다. 사막로는 敦煌에서 2갈래로 갈라져 신장에 진입한다. 하나는 中道로 누란에서 中道와 南道로 갈라지고 中道는 퀴체강(공작강)를 따라 코르라에 이르고 南道는 누란에서 차크륵에 이른다. 北道를 초원로라고도 부르며 安西에서 하미에 이르고 하미에서 2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짐사르에 이르고 다른 하나는 투르판에 이른다.
남로 : 돈황의 양관에서 아얼진산의 북쪽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하다가 놉로르 서쪽의 누란)을 거쳐 차크륵에 이르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과 쿤룬山 북쪽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하여 체르첸, 키리에(위티엔),호탄,야르켄트, 타쉬코르간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대월지(아무강연안)과 인도, 安息(이란)에 도달한다.
중로 : 돈황의 옥문과에서 투르판에 도달하여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인 天山의 남쪽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하여 쿠샨(쿠차), 악수, 카쉬카르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사마르칸트등 중앙아시아 지구에서 이란에 이른다.
南道와 中道는 이란의 Mashhad에서 만나 서쪽으로 진행하여 이라크, 아라비아반도, 지중해연안에 이른다.
북로 : 남북조때 천산 북쪽으로 새로운 길이 형성되었다. 중가르분지의 남쪽인 天山북쪽을 따라 짐사르, 미천, 창지, 징, 일리강를 거쳐 카작스탄에 진입하여 서쪽으로 진행하여 사마르칸트에서 中道와 만나게 된다. 또는 西行하여 카스피해를 지나 유럽평원에 도달한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실크로드는 주로 돈황을 기점으로 오아시스도시들을 통과하게 되는데 실크로드의 생명은 며칠을 넘기지 않고 당도할 수 있게끔 타클라마칸 변두리의 전략적인 지점에 적절히 위치한 오아시스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로 이 오아시스들의 생명은 거대한 사막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맥들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에 달려 있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이들 오아시스는 단지 대상들이 쉬어가는 곳이 아니라 그 자체가 중요한 교역의 거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어떤 오아시스가 규모도 커지고 번영을 누리게 되면 주변 지역을 지배하게 되고 나름대로 작지만 독립적인 소왕국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 소왕국들은 실크로드에서 생기는 이익을 한 몫 차지하려는 흉노나 다른 집단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 한편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서 상당한 재화를 얻게 된 한나라로서는 이 교역의 동맥을 위협하는 세력과 끊임없이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이 실크로드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하면 야만 부족이나 다른 독립군주들이 그것을 차지하는 서로간의 힘겨루기가 반복되었다. 새로운 지배자는 물자의 안전한 이동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간단히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중국은 얼마 후 무력이나 협정 혹은 잔인한 정복을 통해서 상황을 되돌려 놓았다. 심지어 중국이 실크로드를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을 때 조차 한적한 곳에서는 산적들이(쿤륜산맥에서 출몰하는 티베트인들)에 의한 약탈의 위험성이 항상 존재하였기 때문에 대상들이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여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여행 경기를 올려 상품의 가격을 높이는 한편, 해로의 개발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과 단절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4. 실크로드의 문화

 

1)불교
이 거대한 아시아 횡단 교통로를 통해 비단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된 또 다른 것이 옮겨졌다.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의 예술과 사상을 완전히 변화시켜 놓은 이것은 기원전 6세기 동북인도에서 탄생한 이념 즉 모든 살아있는 생물에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는 불교의 교의였다.
굽타왕조의 아쇼카왕이 BC 3세기에 개종함으로서 불교는 인도 거의 전역을 지배한 그 왕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채택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불교는 AD 1세기 한나라의 명제의 꿈을 계기로 중국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꿈에서 금인이 빛을 발하면서 자기 궁전에서 떠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그는 현자들을 불러 해몽을 요구했는데 그들을 숙의 끝에 꿈에서 본 사람이 부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당시 불교의 존재는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불교의 가르침을 알아보기 위해 즉 인도로 사신이 파견되었고 한 참 뒤에 사신이 한나라 궁정에 돌아왔는데 그는 불교의 경전과 그림들 이외에 황제에게 불교를 설명해 줄 인도의 승려들까지 데리고 왔다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이 시기 이후로는 중국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 사이를 오가는 승려와 순례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경전과 서적은 물로 새로운 종교에 사용되는 예술품들도 갖고 왔는데 이것들을 남다른 심미안이 있었던 중국인들의 눈에 전에는 보지도 못했던 놀랍고 감탄스러운 것들이었다.
불교의 중국전파는 중국인들에게 세로운 종교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레스(중국)과 인디아라는 두 단어의 합성해서 만든 \'세린디아(Serindi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전혀 새로운 형식의 미술을 인류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우리가 중요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이것이다.
논리적으로 세린디아는 인도의 불교미술과 한 대중국미술의 단순한 결합이 되었어야 했다. 중국과 인도의 모든 직접적인 접촉을 차단하고 있는 거대한 히말라야산맥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넘을 수 없는 장벽에 가로막혀 불교의 가르침과 미술은 멀리 우회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중간의 요소들이 영향을 받아들인 것이다.
불교 전파의 실질적인 진원지는 인도 본토가 아니라 현재 서북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계곡에 위치한 간다라의 불교 왕국이었다. 거기서 또 다른 미술적이 혼합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AD 1세기에 쿠샨왕조에 의해 도입된 인도의 불교 미술과 그보다 400년 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그곳에 들어오게된 그리스 미술과의 결합이었다.
이 그레코-불교식 혹은 간다라식 미술의 가장 혁명적인 점은 부처를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느 것이었는데, 이는 그 전에는 어떠한 예술 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존재하기를 그만둔 존재로서, 신학적으로 말하면 열반에 들어감으로써 윤회의 끝없는 사슬에서 벋어난 그는 이전에는 발자국.수레바퀴.나무.스투파(탑).산스크리트문자등과 같은 신비적인 상징을 통해 표현될 뿐이었다. 그러나 간다라미술에서 조각가들은 부처를 곧고 날카롭게 솟은 코와 눈썹.고전적인 입 모양과 파상형 머리카락등으로 묘사함으로써 헬레리즘적인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혁명적인 새로운 이념인 불교는, 인도에서 원래 생겨난 불교 미술이 아니라 바로 이 간다라 미술과 함께 북방루트를 통해 중국령중앙아시아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간다라 미술은 다시 세로운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승려들, 그 다 음에는 상인들과 술례자들의 발길을 따라 중국과 다른지역의 새로운 영향을 점차 흡수해 나갔다. 이 새 종교가 타클라마칸의 오아시스도시들을 따라 전파되면서 수많은 사원과 석굴과 스투파가 생겨났다.
새로운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 근원 즉 경건과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카라코람과 파미르고개들을 넘어 불교의 제2성지나 다름없어진 간다라를 방문했고 거기서 다시 인도로 들어갔다.
이들중에 일부는 당시의 번영을 누리고 있던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도시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 대부분의 길을 도보로 여행했던 법현은 아마 가장 일찍 그런 여행을 한 사람일 것이다.
법현法顯 : 399년 長安을 출발하여 난주를 거쳐 돈황에 도착하였다. 돈황에서 여행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은 후 사막을 통과하여 17일 만에 산샨(樓蘭)왕국에 도착하였다. 산샨왕국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으며 인도의 불교를 배워서 인도의 승려규율을 지키고 았었다. 그는 1개월 후에 산샨을 출발하여 高昌을 거쳐 15일 후에 엔지(焉耆)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는 4000여명의 소승불교의 승려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카라샤르焉耆에서 2개월을 머문 후 다시 투르판으로 돌아와 여행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몇사람과 함께 타클라마칸사막을 통과하여 35일 만에 호탄에 도착하였다. 그는 기술하기를 호탄은 번영된 왕국이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수천명의 승려들이 있었고 일부 승려들은 대승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문 후 카쉬카르왕국을 거처 쿤륜산맥을 넘어 인도에 도착하였다. 414년에 해로로 중국에 돌아왔다..
높은 사료가지를 지닌 법현의 여행기"불국기"는 1869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내용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 이 나라는 토지가 기름져서 사람들의 생황이 윤택하였고 무도 불법을 받들어서 불교가 생활화 되어 있었다. 승려들의 숫자는 모두 수만 명에 이른다"
법현의 다른 이야기들...(중략)
그 이후에 당대에 손오공과 여행을 한 수호지로 유명한 현장법사가 법현을 이어 인도로 건너간다.
현장顯奬(603-664) : 현장이 쓴 《大唐西域記》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큰 가치가 있으며, 16세기에 출판된 《西游記》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다. 현장은 629년 長安을 출발하여 먼저 돈황에 도착하여 혼자서 800리 이상되는 사막을 통과하여 투루판에 도착하였다. 투르판의 高昌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高昌에 남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여행할 것을 굽히지 않자 高昌왕은 그에게 동행인과 양식을 주고 서역의 왕국에 소개신을 써주었다. 그는 투르판을 떠나 焉耆카라샤르,쿠차, 바이拜城에 도달하여 북쪽으로 가서 천산을 넘어 이씩쿨호(크르그즈스탄)지역을 지나 추강를 따라 탈라스를 지나 타쉬켄트를 경유해서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였다. 다시 서행하여 카라코람사막을 통과하여 후어라사지역에서 남서쪽으로 전환하여 大夏의 도읍인 헤라트를 지나 아무다르야의 상류인 쿤두스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高昌왕의 서신을 보여주었을 때 高昌國과 친척관계인 大夏의 왕은 매우 기뻐하고 환대였다. 그는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의 북부고원을 넘어 마침내 인도에 도착하였다. 인도에서 몇년을 머물른 후 다시 육로를 통해 645년 西安으로 돌라왔다.
또한 신라인으로 실크로드를 통해서 인도를 다녀왔던 사람이 있는데 혜초이다. 그는 왕오천축국전으로 더 유명하다.
해초 慧超(700?-780?) : 혜초는 700년경 신라에서 태어나 20세가 못되어 중국의 長安으로 가서 수행하다가 이에 만족치 않고 불교의 본고장인 天竺國(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선 광주로 가서 배를 타고 말레이반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얼머동안 머물른 뒤, 인도의 서북부에서 大夏(이미 아랍인이 통치함)의 북부를 통해 타쉬코르칸을 넘어 카쉬카르를 통과하고 쿠차,엔치,高昌을 거쳐 西安으로 돌아와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는 인도의 중부에서부터옌지에 이르는 여행을 기행문으로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을 기록하였는데, 이 책은 자신이 방문한 곳의 불교상황, 국가의 통치관계,풍속습관 및 경제생활을 기록하여서 매우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우연하게도 1908년 돈황에서 프랑스의 동약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책은 돈황의 17호 굴에서 발견이 되었다.)

 

2)조로아스터교
실크로드는 불교만이 실크로드를 거쳐서 중국어 들어온 유일한 외래 종교는 아니었다. 또 다른 두 종교 역시 미술 문헌과 함께 타클라마칸 주변에 자리를 잡았는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마니교가 그것이다.
그리스도가 동시에 인간과 신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 네스토리우스파는 432년 에페수스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지목되자, 많은 수의 추종들이 동쪽으로 도망쳐 오늘날 이란지역에 세워졌던 사산제국의 영내로 들어갔다. 거시에서 다시 상인 겸 선교사들은 그 교리와 미술을 중국으로 전달하여 638년에 처음으로 장안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서역북도를 통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그 연도에는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의 공동체가 생겨났다. 금세기 초에 투르판과 돈황의 석굴에서 수많은 네스토리우스파 문헌들이 발굴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의 상당수가 상인이자 또 선교사였기 때문에 중국령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는 모든 대상로를 따라 이 종교가 뿌리를 내렸고, 심지어 남쪽으로 티베트까지 도달하였다. 당나라 때인 845년에 모든 외래 종교를 금지했던 조치도, 또한 11세기 무슬림들에 의한 중앙아시아이 정복도 이 종교를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베네치아 출신이 마르코폴로는 13세기 말 카쉬카르와 호탄을 지나면서 많은 수의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3)마니교
3세기 페르시아에서 태동한 마니교는 빛(영혼)과 어둠(육체)이라는 대립하는 \'두 개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마니의 제자들은 5세기 말 서구 기독교도들의 무참한 박해를 피해(주로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 박해를 받았다.) 동쪽으로 도망을 쳐 결국 중국령 중앙아시아와 중국본토에 들어와 수나라(589-618)와 당나라(618-907) 때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독일 탐험대가 투르판 지역에서 마니교 서고를 발국하기 전 까지 이 종교는 아무런 문헌을 갖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졌고 주로 이 종교에 대한 비판자들-대표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이 쓴 극도로 적대적인 글을 통해 알려졌을 뿐이었다.
위구르인들은 762년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을 약탈할 때 마니교를 접한 뒤 곧바로 개종하였다.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서로 조화되기 힘든 교리들을 차용하여 생겨난 이 기묘한 종교(불교의 교리도 차용하였다)는 10세기경에 전성기를 이룬 뒤 곧 쇠퇴하다가 마침내 중국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실크로드의 서부 오아시스 지역에서는 이슬람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가혹한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동부 지역에서는 불교로 대치되어 버렸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타클라마칸 동북지역에 있는 카라호자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르콕은 후대의 불교 별화에 의해 가려진 마니교의 아름다운 벽화들을 발견했다. 물론 네스토리우스교와 마니교의 화가나 필사가들도 훌륭한 유산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만 역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도시들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물을 남긴 것은 불교 미술인 것이다.
당나라 시대에 실크로드는가 황금기를 구가한 것을 사실이기만 왕조의 운명과 간선교역로의 운명도 하나로 묶여버리게 되었다. 왕조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실크로드상의 문화도 쇠퇴하여 마침내는 그곳에 있던 사원.승방.예술품도 종말을 고하고 만다. 한 때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흔적들은 너무더 철저하게 사라져버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될 정도였다. 이것은 복합적인 원이 있는데 하나는 오아시스도들로 흘러들어가던 만년설이 녹은 물이 만들어내 하천들이 서서히 말라버리게 된 것이고 아라비아에서 출현한 이슬람의 갑작스런 출현이었다.
그러므로 실크로드상에서 불교문명이 사라지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당제국의 쇠퇴와 몰락, 그리고 서방에서 아랍이 승리함에 따라 타클라마칸 전지역이 무슬림으로 개종한 것이다. 이 새로운 종교는 무슬림들이 금기시하는 형상예술-특히 사람의 모습을 묘사한 것- 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싫어하는 우상인 벽화난 그림들은 훼손되거나 파괴되고 사원과 스투파는 무너지고 방치된 나머지 모래 속으로 사라져갔다. 15세기가 되면 타클라마칸의 모든 지역이 무슬림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명대(1368-1644)에 가서는 실크로드가 거의 방치된 상태였으며 중국은 서방과의 접촉을 모두 끊어 버리고 자폐의 길을 택했으며, 이로 인해 타클라마칸 지역은 더욱 고립되어 쇠퇴의 길을 걸었다.

 

4)이슬람교
이슬람이 들어온 시기는(9세기말에서-960년) : 사만조
사마니드왕조라고도 부른다. 875년에 세워진 최초 폐르시아(이란)계 이슬람왕조이다. 당시 사만조는 아랍계의 압바시드 왕조에게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이 왕조의 출현으로 이란 민족의 순수한 전통이 복구되고 10세기 전 기간동안 돌궐계 부족들이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지역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았다.
875-999)의 한 왕자가 정권을 잡으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카쉬카르로 망명하였다. 이때 동커라칸조의 카칸은 왕자를 아투스 에 지방관리로 배치하였다. 여기에서 사툭·부그라칸은 그를 알게 되었고, 그의 영향과 설교에 의하여 비밀리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후, 부그라칸이 집권할 때 백성들에게 개종할 것을 호소하였고, 이와 더불어 더 빠른 전파를 위해 강제수단도 채용하였다. 또한, 이슬람교를 믿지않는 대칸(大汗)에 대해 지하드를 개시하였다. 이와동시에 선교사들을 초원의 유목민족중에 파견하여 선교를 진행시켰다. 960년에는 이슬람교가 커라칸조의 국교가 되었다. 이떠 20만의 유목민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때 이슬람교의 전파 범위는 카쉬카르지역에 국한되었다. 초기전파시기(960년-1220년) : 960년 커라칸조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한 후 불교를 신봉하는 위티엔(于田)李氏왕조에 대해 정복전쟁을 발동하고 40여년동안 전쟁을 계속하여, 1006년 마침내 정복하였다. 그러나 于田의 불교도들은 반항투쟁을 계속해 오다가 11세기 중엽에 잠식되었다. 카라칸조는 于田李氏왕조를 멸망시킨 후 이드쿠트왕조에 지하드를 발동하였다. 커라칸조의 군대는 일리를 건너 투르판(吐魯番)에 침입하였다. 이드쿠트위구르왕의 군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커라칸조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카라칸조는 또 탕쿨(西夏)에 대해서도 지하드를 개시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로부터 커라칸조는 무력을 통한 방법을 기본상 종결하였다. 西遼(크탄-크타이)의 통치시기 때는 종교에 대한 자유정책으로 각종 종교가 자유롭게 전파되었다. 이슬람교는 이 때를 이용하여 이드쿠트위구르왕조에 대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파하였다. 큰 전파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타림분지 서부와 남부에 확고한 지위를 갖는 종교가 되었다. 전지역전파시기(1220년-16세기초) : 14세기초 이슬람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天山의 남북에 넓게 전파되어 불교,경교와 병존하였다. 동차카타이칸국의 투르크·티무르칸(1347-1362)이 무슬림이 된 후, 그 후대 때 신장 각지에 이슬람교를 빨리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백성에게 강제로 개종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불교지구에는 지하드를 진행하는 등 각종 수단을 사용하였다. 16세기에는 하미(코물)지구에서 이슬람교가 우세하였다. 이 시기에 일부의 민족들은 기본적으로 전 백성이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13세기에 신장에 진입한 차카타이몽고인들은 이 시기때 전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위구르족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淸代에는 위구르족, 타직크, 회족 뿐만 아니라 카작족, 키르키즈족, 우즈벡족, 타타르족등이 이슬람교를 신봉하였다.

 

5.실크로드의 인물

 

반초
반초(약49-120년) 당대의 난제인 서역 경영에서 위훈을 떨쳤지만 역시 무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전기는 남아 있지 않고 다만 후한서 반초전에 그에 관한 기사가 몇 줄 있을 뿐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반초의 자는 중승으로 건무 8년(32) 평릉현(함양동북부)의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기 후전의 전인 반표(3-54)이고 형은 후한의 대명유가의 한서의 찬자 반고이면 여동생은 혀성의 저자 반소(49-120)이다 반초는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대범하게 효친하면서 가사에 근면할 뿐만아니라, 언변에도 능하며 많은 서적을 섭렵하였다. 그러다가 영평5년(62)에 형의 권유로 교서랑이 된후 어머니와 함께 낙양에 이사해 관부의 필경(문서 베끼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무료한 직업으로 허송세월함을 개탄하면서 서역에서 공을 세워 책봉된 부개자나 장건처럼 대장부의 지략을 펼쳐볼 일념에 불타고 있다. 40세에 서역개통과 경영의 대역정에 나섰다. 반초가 활동한 시기는 광무제와 명제의 치하에서 내정은 안정과 번영의 일로를 걷고 있었으나 대외적으로는 건국 초기에 있었던 왕망의 난으로 인해 서역 경영이 일시 파기되어 흉노의 침범에 직면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반초는 흉노 정벌에 나섰다. 그는 철학으로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범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벌의 선봉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20년간에 걸쳐 서역의 선선국, 이리, 위수, 소륵국등을 정벌하고 본격적으로 서역경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반초가 죽고나서 서역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도호임상자등은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래서 한은 서역의 도호와 둔전의 관리.병사들을 모두 소환하고 도호부를 폐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서역통로는 다시 한번 막히고 말았다. 후에 반초의 아들이 반용을 다시 서역에 투입해서 얼마간의 효과가 있었으나, 돈황 태수와의 갈등으로 투옥되었으며 서역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선지 高仙芝
당나라 때 동서 교류의 물꼬를 튼 영웅으로 불려지고 있다. 당은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해 4월 고구려유민들을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선지의 부친 고사계(高舍溪)는 타고난 무인이라 안서군의 四鎭장교로 진급되었다. 이런 무가에서 태어난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배워서 20세 정도에 부친과 동등한 계급에 올랐으며, 서기 741년 安西副都護,四鎭知兵馬使에 올랐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악수,카쉬카르,타쉬코르간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족 티벳족의 선조의 군사기지인 蓮雲堡(치트랄)를 격파하고 험준한 힌두쿠시 준령을 넘어 小勃律국 (지금의 크시미르지역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북부지역에 있던 나라)을 정벌하고 사라센제국과의 유일한 통로인 교량을 파괴하고 돌아온 후부터 이다. 이후 그는 安西四鎭節道使에 임명되었다. 그떠 고선지는 석국(石國,우즈벡의 타쉬켄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투르크족의 나라)왕이 당나라에 무례하게 굴었다 하여 원병을 주장했을 때 당의 玄宗은 이에 동의하여, 고선지는 750년 석국에 진공하여 석국을 물리치고 석국왕을 포로로 잡아 長安으로 송치하였다. 이것은 서역의 각나라에 불만을 가져오게 하고 석국의 왕자는 大食國 (아랍 이슬람 압바스 왕조 또는 사라센제국이라 부름)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751년 大食은 중국과 사이가 나쁜 토번과 연합하여 탈라스(현재 카작스탄의 江布爾) 대평원으로 쳐들어 왔다. 이 소식을 듣고 고선지는 6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탈라스에서 대치한지 5일 후에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카를룩이 배후에서 고선지의 군대를 공격하여 협공을 당한 고선지의 군대는 패배하고 만다. 고선지는 귀국한 후 좌천되나, 755년 안록산의 반란으로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회생의 기회를 맞았다. 현종은 그를 토적부원수로 임명했다. 먼저 출전하여 패전한 봉상청과 교대하면서 봉상청으로부터 적의 상황을 듣고 요새인 동관까지 작전상 후퇴한다. 이같은 수비책은 현종이 서쪽으로 피신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고선지는 후퇴하면서 錢絹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태원창을 열어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화근이 되었다. 그의 부관 이고 小勃律 원정시 監軍이었던 邊令誠은 금품을 요구하다가 거부당하자 현종에게 고선지와 봉상청이 전투를 거부하고 도망했다고 상소했다. 이글을 받아본 현종은 당사자의 변명도 듣지 않은 채 참형을 결정하였다. 탈라스 전투에 참전한 당나라 군사의 상당수가 종이 제조기술자 이어서, 아랍은 이들을 생포해가 사마르칸트에 종이 제조공장을 세웠다. 이로써 종이 제조기술이 서방에 전파되었다.

 

칭기스칸(1167-1227)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의 세운 영웅으로 서방과 중화세계에는 재앙 가운데 하나로 여겨왔다. 그것은 서방에 끼친 칭기스칸의 영향이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통해서 지배하는 방식으로 유목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 중화(중국)는 칭기스칸의 후손에 의해서 지배를 당했으며 원제국이 바로 칭기스칸의 후예들이다. 그러므로 정주민(농업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정착민들을)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관에서는 당연히 칭기스칸은 두려움을 존재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서방과 중화문명의 사관이 아닌 유목민의 사관과 중립적인 사관에서 보면 그러한 평가 외에도 또다른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은 아랍 압바스왕조를 이어서 유럽까지의 원정을 하는데 그가 서쪽으로 원정을 했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의 기틀을 잡고 호레즘과 정상적인 정치적,상업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1218년 사절단(우쿠나만 몽골인이고 나머지는 무슬림이었다.)과 대상단은 시르다리야 중류에 있는 호레즘의 국경도시 오트라르에서 카디르칸이라는 칭호로 알려지자, 이날칙에게 제지당하고 재화를 강탈당했으며 100면정도가 살해되었다. 칭기스칸이 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자 거절당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전쟁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들들을 이끌고 이드쿠트의 왕을 도움을 받아서 부하라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리고 대모스크에 들어가서 칭기스칸이 직접 연설을 하면서 "신의 채찍이다"라고 했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에 더 서쪽으로 진격을 해서 페르시아를 공격하고 압바스 칼리프조를 파괴하기 위하여 진군을 하였다.
이후에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안에서 자신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통해서 다스렸는데 이것은 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인도,페르시아,아랍,유럽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의 중요성은 당제국의 멸망과 함께 폐쇄된 실크로드가 이제 몽골제국에 의해서 다시 열리게 된 것이다..
당시에 칭기스칸은 위구르인들을 통해서 "야삭"이라는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 법률은 아주 엄격하였다. 그는 이 법률에 자신이 철저히 준수 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들과 손자들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모든 제국에 동일하게 적용을 하였다.
칭기스칸이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을 당시에 대상들은 자유롭게 무역을 진행할 수가 있었다. 제화가 지나는 길들에 상인들은 어느 민족 국가를 막론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지날 수 있었으며 현금등의 통용이 활발하였다.
몽골제국시대에는 역참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자신의 제국의 모든 소식을 그는 24시간 이내에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갗추고 있었다. 그것은 역참제도도 주요도로망을 통해서 여관을 설치하고 우편과 여관기능을 하였으면 중앙의 정책등을 알리고 제국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이기도 하였다. 이 역참에는 숙소와 음식과 말들이 준비 되어있었다. 누구든지 제국의 이름으로 그곳을 방문하면 그들을 가장 잘 달리는 말들을 제공을 받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가장 빠른 시간안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제국에 보고를 해야할 사항들을 역참과 역참들을 릴레이로 바턴을 받아서 기수와 말이 달라지면서 달려서 중앙의 칭기스칸에 전달되는 것이다.

 

6.실크로드상의 도시들

 

실크로드는 서안(장안)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바이고 한반도에서도 많은 비단이 생산이 되었던 것과 당시의 소그드상인들과 중앙아시아상인들이 오고 갔으며 신라와 고구려에도 대상(낙타을 탄 상인-카라반)들이 사용하던 낙타가 있었던 점들을 보면 한반도도 실크로드에 있어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역의 문물과 문화들을 장안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하는 중국식 사관에 젖어 있는 우리로서는 서역에 우리 선조들과 서역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직접오고 가서 문화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하도록 가리워진 역사관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서안을 실크로드의 기점으로 보면서 그 여정에서 있었던 도시들을 만나 본다.

 

1)서안

서안은 중국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섬서성의 성도이다. 섬서성은 서안.보계.동천.함양등 4개의 직할시와 6개의 지구로 되었다. 북쪽에는 황토고원 남쪽에는 진령산맥이 자리한다.
서안은 황하강중류의 한 지류인 위하가 이루는 기름진 평야의 중심에 위치에 있다. 2백만이 웃도는 인구이며 주민 대부분은 한족이며 회족과 몽고족.만주족등의 민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중국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기후는 건조한 사막성 기후에 속한다. 그러나 여름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므로 실크로드의 다른지방에 비하면 습한 편이다. 서안의 기후가 건조하기 때문에 밀등이 많이 생산되므로 음식도 밀가루로 만든것들이 많다. 각종 국수와 중국빵등이 주류를 이룬다.
서안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중국의 8대 도시에 속하며 북경.남경.낙양.개봉.항주.와 함께 중국의 6대 고도로 꼽힌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농경이 시작된 황하강유역에 자리한 까닭에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서안 동쪽 교외에서는 반파유적에서 양소문화가 대표적이다.
서안은 무려 1천1백여 년 간 13개 왕조의 수도로서 중국 역사에 자리 매김해 왔다. BC 11세기에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서안 서쪽에 있는 풍경과 호경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BC 740년유왕의 실정으로 주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진나라의 시황제가 위하 유역 함양에 수도를 정했다. 한 나라 때에는 처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 장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장안이라는 이름은 \'장은 길다\'라는 뜻이고 안이라는 이름은 \'평안하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이전부터 이곳은 흉노(훈)등의 북방과 서역의 유목민족들의 줄기찬 공격과 약탈등에 의해서 늘 안녕을 유지 할 수 없었을 뿐아니라, 장안에서만도 여러왕조와 국가가 갈리고 많은 왕들이 반란에 정권싸움에 죽어갔으므로 장안은 길게 안녕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갈망을 담은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서안은 그 후에도 삼국시대.5호16국시대등을 거처 신망.전조.전진.대하.후진.서위.북주의 수도를 지냈고, 수.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중국전국을 지배하는 황제의 도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서안은 그리이스 아테네.이집트의 카이로.이탈리아의 로마와 더불어 세계4대 수도로 손꼽히고 있다.
한 무제 때에 장건이 중앙아시아에 파견되면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서방 세계의 접촉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진귀한 물품과 문물의 교역이 이루어 졌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는 비단이 수출되고 옥이나 보석,유리제품 등이 수입되었다. 또한 포도.석류.호도.완두.참깨.오이 등의 식물류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음악과 무용.요술.곡예 같은 무형의 기술과 인도의 불교.이란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네스토리우스교파의 그리스도교인 경교.이슬람교 등의 서방 종교까지도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주철 기술과 양잠.제지접과 화법을 서방에 전했다. 이렇듯 실크로드는 동서문화의 교류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나라 때는 천산산맥 서부 북쪽에 자리잡은 서돌궐을 정복하는데 실크로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 말기 황소의 난을 비롯한 수 차례의 전란이 일어나 서안의 대부분은 폐허가 되었다.
명나라에 이를 기존의 당나라 장안성을 본따 서안부성을 만들고 도시를 재건하였는데, 현재 서안 시내 성벽 안에 남아 있는 도로들의 원형이 바로 6백년전 이 때 형성된 것이다.

종루와 고루
서안 시내 지도를 보면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도로의 원형은 6백년전 명나라 때 조성된 것인데, 성벽 안 중심을 관통하면 곧게 뻗은 네 개의 도로 교차점에는 명나라 당시 종소리로 시간을 알리는 종루가 있다. 종루가 건설된 시기는 1384년 높이 38미터, 너비35.3미터의 목조 건물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2층을 올린 것이 특징이며 이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3층처럼 보인다. 원래 이곳에 있던 종은 비림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몇 년전에 주조한 종이 전시되어 있다.
종루에서 광장쪽으로 다시 보면 또 한 대문이 있는데 대문위에 큰 북이 있다. 이것이 바로 고루이다. 고루는 1380년 명나라 대 만든 것이로 높이는 34미터,면적은 1천9백24평방미터이다. 낮에는 종을, 밤에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청진대사
고루를 벋어나면 회족거리가 나온다. 회족들은 당대에 아랍에서 대상들이 무역을 하려고 왔는데 이들의 수가 3천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당은 이들이 장안에 눌러 앉아서 살면 이들을 통해서 많은 비단을 수출할 셈으로 이들에게 성안에 살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한편 이들에게 영원히 눌러 앉도록 아내를 주어서 살도록 하였다. 이들의 마음은 항상 돌아가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당에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돌아갈 \'회\'를 써서 회족이라고 했으며 이들이 믿는 이슬람을 \'회교\'라고 불렀다.
회족음식시장을 조금 들어간 곳에 중국4대 이슬람 사원의 하나이자 서안에서는 최대의 규모을 자랑하는 청진대사가 있다. 청진대사가 창건된 시기는 현종때인 742년. 1천2백50년이라는 세월을 이기지 못한 청진대사 입구의 목패방 문은 빛이 다 바래었다.
나무들이 푸르게 우거져 있으며 봉황정을 지나 석패방을 넘어가면 바로 예배대전이 보인다. 대전은 중동식의 둥그런 돔과 미나렛이라는 첨탑 대신 푸른 기와를 얹은 중국식 절의 형태를 띠고 있다. 대전은 1천면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행사를 할 수 가 있다. 하루에 5번씩 예배가 열린다.

성벽
당나라 장안의 옛 남아 있는 고층 건물과 상점들이 즐비하 서안 시내에서 그 옛날 장안의 자취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당나라의 장안성을 본따 명나라 때 건축한 성벽이다. 처음 건축할 때는 성벽 둘레 길이가 총 13킬로미터였으나 1985년 북쪽 성벽의 일부를 터 기차역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는 11.9킬로미터만 남아있다.
성벽의 동서남북에는 각기 문이 있는데, 그 쓰임이 다 달랐다. 남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는 문이고, 북문은 서절단이 오가는 문, 동문은 각 지방에서 들어오고는 곡식, 생필품들의 공물들이 들어오는 문, 서문은 실크로드를 향해 열린 문으로 서방의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출입했다고 한다. 황제가 다니던 남문은 3중곽,서문과 북문은 2중곽, 동문은 1중곽으로 되어 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황제는 남문을 열고 친히 나가 그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실크로드의 출발점
서안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 서쪽 대경로로 가면 대상이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떠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된 거대한 하얀 석상군이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한. 당나라 때 실크로드 출발점 석상들이다. 1992년에 조각상을 세움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은 서역고 활발한 경제.문화교류를 가졌다.

팔로군 서안사무소기념관
성벽 안 서오로와 북신가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기념관은 팔로군이 국민당을 피해 혁명활동을 수행하던 근거지로 1959년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이곳에서 등소평,주덕 등이 팔로군을 지휘하면 중국 형명의 발판을 만들어 갔다.

흥경군
성벽의 남동쪽 모퉁이에는 당나라 현종이 태자시절 거처로 사용하던 흥경궁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흥경궁은 황제로 등극한 현종이 이곳에서 양귀비와 사람을 나누며 정사를 봄으로써 한때는 당나라의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했으나 안사의 난 이후 이전의 명성을 잃어버렸으며, 수 차례 걸친 전란으로 인해 결국 황폐해졌다. 흥경호는 현종이 뱃놀이 즐기던 곳으로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동문쪽에 자리잡은 침향정은 현종과 양귀비가 꽃을 보고 즐기던 정자인데 모란을 좋아하던 이백인 이곳에서 모란에 대한 즉흥시를 지었다고 한다. 침향정 앞에는 술에 취한 누워있는 주중선 이백의 조각상이 놓여있다.

대안탑
소채동로와 대안탑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에 솟은 탑을 보게 된다. 높이 64미터인 대안탑이다.
대안탑은 646년 당나라 고종이 일찍 사명한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를 기리기 위해 새운 대자은사경내에 위치한다. 고종은 절이 완성된 후 자신이 거처하는 함원전에서 매일 조석으로 두 번씩 자은사를 향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ㅅ찰 경내로 들어가보면 곧게 나 길 끝에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보인다. 대웅보전 뒤로 돌아가면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고 보관하는 장소로 상용하기 위해 쌓아 올렸다고 하는 대안탑이 그 웅대한 위용을 드러낸다. 입구 좌우에는 제술랑이 직접쓴 대당삼장성교서와 대당삼장성교서기가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대안탑은 5층으로 건축되었다. 10층으로 중건을 했는데 지금은 7층만 남아있다.
대안탑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기러기 설화가 가장 신빙성 있게 전해진다. 인도를 향해 가던 현장이 어느날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그 때 어디에선가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 길을 인도해 주었다. 부처가 기러기로 현신하여 자신을 도와 주었다고 생각한 그는 훗날 인도에서 돌아와 탑을 짓고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안탑"기러기탑"으로 이름을 하였다.

소안탑
시내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천복사공원으로 가면 707년에 중국 당나라 승려 의정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과 경전 번역본을 보관하기 위해서 세운 소안탑이 있다. 탑은 15층음 높이 45미터 였으나 지진에 의해 위쪽 두 층이 파손된 채로 당나라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안탑에는 기단석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1487년 섬서성에 진도 6급의 지진이 일어나 기단석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34년이 흐른 1521년 또 한번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다음 날 기단석을 살펴보니 갈라졌던 돌이 달라붙어 있었다. 이에 놀란 사람은 이 것은 신이 합쳐 주신 것이라 하며 \'신합\'이라 불렀다. 그러나 사실 건축물을 지을 때 기단에 반구형 돌을 쓰는 것은 고대부터 중국 장인들이 사용해 오던 방법이었다. 외부에서 반구형의 돌에 힘을 가하면 돌 안에서 내부응력이 생겨서 갈라진 돌이 서로 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것인데, 소안탑 기단석이 붙은 것도 이와 같은 과학적인 이유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거대하고 직선적인 실루엣의 대안탑은 남성적인 탑이라면 소안탑은 1천2백93년동안 비비람에 깍인 탑의 모서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어 은은한 여인의 자태를 느끼게 하는 탑이다.

병마용
진시황의 6천대군, 진시황병마용
서안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38킬로미터 정도 달려가면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이 나타난다. 진시황제능에서 1,5킬로키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에는 진시황이 죽은 후 군대의 일부를 순장시키는 대신에 흙을 구워 만든 병사들을 묻어 두었는데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 그 후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3개의 병마용갱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데, 그 모두를 합친 면적이 21평방킬로미터로 마카오의 면적보다 크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발굴된 병마용갱은 1호 갱으로 1974년에 발굴되었는데 3개의 병마용갱에서 가장 커서 규모가 14,35평방킬로미터가 되며 갱 위에는 거대한 돔이 얹혀져 있다.
용갱에 들어서면 마치 군대 서열하듯 거대한 토용군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은채 무기를 든 형상으로 서 있어 중장비를 갖춘 주력부대로 추정되는데 신기하게도 토용의 얼굴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 이는 느을 만들 때 자신의 얼굴을 본따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갱에서 시작되는 부분에는 처음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토용을 발결했다고 하는 자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놀랍게 토용 3열의 첫 줄과 1미터차이밖에 안 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우연 덕분에 용정의 시작지점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고 2천2백년 동안 잠자던 토용들을 큰 손상 없이 발굴할 수 있었다고 한다.
2호갱은 크기가 6평방킬로미터이며 1천4백 명의 토병과 말들이 있다. 보병.기병.전차등이 혼합된 지원부대로 추정되며, 현재도 복원작업이 진행중이다. 3대의 모니터에서 2호갱의 발굴작없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 3호갱은 5백20평방미터로서 단 한 대의 전차와 4마리의 말, 68개의 토용만이 발견되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형태로 토용이 배치 된 것으로 미루어 경호부대로 추측된다. 전차는 나무로 만들어 썩어 없어지고 쇠로된 부속품들 만이 남았다. 최근에는 진시황릉 서북쪽에서 4호갱이 발견되었으며 발굴중이다.
용갱의 내부에는 흙벽에 의해 길게 방이 나뉘어 있고 그 안에 토용들이 동쪽을 향재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흙벽은 3개층으로 쌓여 있어 매우 견고하다. 먼저 흙을 쌓은 후 그 위에 굵은 소나무를 깐 다음 쌀뜨물에 이긴 점토를 바르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 다시 석회를 펴 바르는 방법으로 쌓았기 때문에 2천2백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제 모습을 유지 할 수 있었다. 갱 바닥에는 벽돌이 깔려 있다.
현재 병마용에 매장 되어있는 토용의 개수는 1,2,3호 갱을 통틀어 6천여 개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토용들이 워낙 많이 파괴되어서 제 모습으로 복원된 토용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토용들이 원래 적,녹,청등의 여러 가지 색깔로 채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항우가 함양성을 함락시키면서 병마용의 토용들이 들고 있던 실제 무기를 빼앗기 위해 용갱을 파해쳤는데 그때 병마용의 일부가 파손 분실되면서 체색도 많이 흐려졌다. 다행이 3호갱은 항우의 침략을 피할수 있었던 까닭에 토용의 채색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토용들이 역할에 따라 분류해 보면 크게 보병 궁사기병.장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병이 가장 많은데 키가 170-180으로 머리를 틀어올린 모습을 하고 있고, 궁사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활을 들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용갱 전체를 합쳐서 다 나하 뿐인 장군은 196의 키에 토끼 귀 모양의 쌍엽관을 쓰고 있다. 이 처럼 토용들이 보고 신체조건이 매우 좋고, 또 모든 토용들이 갑옷을 입고 있다. 사실 전국시대 당시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여섯 나라 병사들은 신체가 약해서 철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없었다고 하니, 일제 진나라 병사들보다 크게 만들어 졌음을 감안하더라도 이 처럼 신체적인 사항이 월등이 좋았다는 사실은 진시황의 중국 통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짐작해 준다.(?)

진시황의 구리마차
1980년 2대의 구리마차가 진시황릉 서쪽으로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 되었다. 그 때 진시황은 생전에 5번 순행을 나갔는데, 그 때 탓던 마차를 2분의 1로 축소해 놓은 모형이다. 마차는 철로 주조한 후 구리 도금하여 말 및 다른 부분고 용접하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위에는 우산이 씌워져 있다.
우산은 망간 함량을 다르게 하여 중심과 변두리의 경도를 조절하였다. 구리 마차의 진품은 섬서박물관에 있으며 병마용박물과2호갱에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진시황릉
서안에서 병마용갱으로 향하는 1.5킬로쯤 못 미쳐서 석류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룬 작은 산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246-208년까지 무려 37년에 걸쳐 완공도었으며 총 7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는 진시황릉이다. 유네스코는 1987년 진시황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진시황릉은 개인의 무덤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처음 축조될 당시만 해도 봉분의 높이가 120미터에 달하고 둘레의 길이가 4킬로미터의 내성과 6킬로미터의 외성에 둘러쌓여 있었다. 현재는 높이 46미터의 진시황릉 봉분과 순장묘군이 계속 발굴이 진행 되고있는 병마용갱만이 남아있으며, 진시황제와 순장된 신하들을 모시는 사당들과 성벽은 대부분 훼손.분실되었다.
진시황릉을 오르기 전, 병마용 모형을 전시해 놓은 작은 광장 왼쪽 길을 따라 가면 처음 축조 되었을 당시의 전시황릉을 재현해 놓은 모형을 볼 수 있다. 내성 안 진시황의 사당에서는 시종들이 거주하면서 진시황제가 살아 있을 때 처럼 매일 음식을 준비하고 옷을 갈아 넣었으며 순장된 신하들을 살아 있는 사람을 모시듯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진시황은 단순히 봉분 하나만이 아니라 한 지역을 자신의 거대한 릉으로 삼았던 것이다. 진시황릉 중아으로 난 계단 석류나무 숲을 지나가면 봉분 꼭대기 전망대에 오르게 된다. 릉 아래에는 순장릉군이 뒤로는 뾰쪽하게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가 안개 속에 싸여 있는 여산이 버티고 서 있고, 앞쪽으로는 넓은 평지와 강이 한눈에 들어와 단연 명당임을 알 수 가 있다. 능은 먼저 평지에 땅을 파고 지하 궁전을 만들어 진시황제의 관과 순장품을 넣은 다음 그 위로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릉의 지하 궁전에는 구리를 녹여 바닥에 깔고 숲과 산의 모습을 꾸며 놓았으며, 수은이 흐르는 강을 만들어 그 위로 진히황의 석관이 흘러 다니게 했다고 한다. 또한 거대한 중국지도 석각과 다량의 진귀한 보물들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추측일 뿐 지하 궁전이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서 정확하게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진시황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능을 만드는 데 관여한 장인들을 모두 생매장했다.
진지황릉은 아직까지 개발 계획이 수립되어 있지 않다. 일단 주변의 수위가 높아 17킬로만 파면 물이 나올 정도이며, 능을 개발하려면 전체를 쒸울 수 있는 만한 돔 제작 기술이 있얻야 하는데, 능의 면적이 너무나 커서 현재 기술로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추측만 무성하지 정확한 내부 구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칫 훼손시킬 우려가 많다는 점도 개발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화청지
서안에서 동쪽으로 35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화청지는 산세가 뛰어나고 온천수가 풍부하여 주나라 때부터 무려 3천년 간 온천 휴양지로의 명성을 누려온 곳이다. 주의 여궁.진의 여신탕.한의 이궁.당의 온천궁.화청궁이 모두 화청지에 건설된 역대 황제들의 별궁이다.
하지만 현재 화청지는 온천지보다는 당나라의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화청지에 들어서면 연못중앙에 양귀비 조각상이 서 있다. 전라상의 모슴으로 수줍게 서 있는 양귀비의 조각상을 보면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하는 옛 말이 생각이 난다.
양귀비는 초선.왕소군.서시와 더불어 중국 고대 4대 미인으로 꼽히는데 원래는 현종의 18번째 왕조의 수왕의 비로 황궁에 들어왔다. 그러나 며느리인 양귀비에 반한 현종은 740년 양귀비를 여승으로 만들어 수왕에게서 빼냈고 4년후 다시 궁으로 들인 후 745년에 자기의 귀보로 책봉했다. 그후 양귀비의 일족은 권세의 중심에 서게 된다. 구룡지 너머로 보이는 여사산에는 주나라 마지막 왕인 유왕이 경국지색의 미인 포사를 위해 거짓 봉화를 올리던 봉화대가 있다. 좀처럼 웃지 않은 포사를 위해 어느날 유왕은 화청지 앞 여산 봉화대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를 거짓으로 올렸는데, 급하게 달려 온 제후들이 거짓 봉화임을 알고 허망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포사가 비로소 웃음을 터트렸는데, 그 뒤 유왕은 포사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자주 거짓으로 봉화를 올렸다. 후에 유왕은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삼기 위해 왕비와 태자를 폐하고, 이에 왕비의 일족인 신후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왕은 급하게 봉화를 올렸으나 이번에도 거짓 봉화라고 생각한 제후들이 구하러 오기 않아 주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구룡지를 지나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양귀비와 현종이 즐겨 목욕하던 해상탕과 연화탕이 나타난다. 해상탕은 탕의 모양이 해당화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탕 안에는 바닥을 다 덮을 정도의 대형 백옥이 놓여 있었다. 뜨거운 온천수가 차가운 옥에 닿아 서서히 식으면서 목욕하기에 알맞은 온도를 만들어 주는 역할를 했다고 한다. 연화탕에는 옛날 안록산이 온갖 동물의 모양을 조각하여 바친 기둥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현종이 목욕할 때 물에 비친 조각상의 모습이 너무 흉칙하여 시종들을 기켜 다 깎아 버리게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다.
그밖에 태종 이세민이 사용하던 성진탕.태자가 쓰던 태자탕.궁녀들이 사용하던 상식탕.사절단을 위해서 준비한 별실 등이 있다.
양귀비의 출생에 관해서는 어버지나 어머니중에 서역인으로 양귀비는 서양의 미인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장안에는 서역과의 무역이 한창 이었으며 당의 조정에도 많은 서역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당시에는 미인의 기준으로 서역의 미인을 삼았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서역을 지나면서 벽화에서 보여지는 미인들은 모두가 양귀비와 같이 글래머이다....
안록산도 서역출신이다. 아버지로부터 서역의 언어인 위구르어와 소드드어 어머니로부터 중국어등을 배웠으므로 6개국어에 능통했었다고 한다.
화청지 안쪽 끝에는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해 두었던 오간청이 자리잡고 있다. 장개석은 내적(공산당)을 먼저 몰아내고 외적(일본)을 몰아내자는 지치를 내걸고 항일투쟁을 뒤로 미룬채 반공정책을 펼쳤다. 이에 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힘을 합쳐 일본과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장학량은 1936년12월12일 사안사변을 일르켜 공산당 토벌을 지시하기 위하여 직접 서안으로 내려온 장개석을 감금하였고 결국 이 사건은 국공합작의 계기가 되었다.

양귀비 묘
무릉이 위치한 흥평현에서 12.5킬로를 더 들어가면 작은 마을 마외파가 나타난다. 이곳에 초고의 영화을 누리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친 양귀비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는데 초라한 반구형을 하고 있따. 양귀비묘가 다른 무덤들과 달리 벽돌 무덤이 된 데에는 한 아가씨의 슬플 사연이 깃들어 잇따. 마외파 근처에서 못생긴 아가씨가 살고 있었는데 외모 때문에 시집가기가 어렵자 하루는 천하의 미모를 자랑하던 양귀비의 무덤을 찾아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쓰러져 울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집에 가서 보니 못생겼던 얼굴이 예쁘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양귀비 무덤의 흙을 양귀비분이라고 하면서 너도나도 퍼가지 시작하여 결굴 무덤위에 별돌을 쌓으므로써 이를 방지하였다.
양귀비의 무덤 주위에는 많은 역대 시인들이 양귀비에게 바친 시를 조각한 비석들이 전시되어있다. 당 희종이 쓴 \'황제가 촉 가는 길\' 마외에 행차하며 청나라 임칙서가 쓴 \'양태진모에 바침,등의 시들이 그곳에 있다.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과 대립하던 안록산은 755년 11월 8천명이 넘는 기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으로 진격을하였다. 현종과 양귀비는 안록산의 난을 피해 지금의 사천 촉으로 도망갔는데 수행하던 병사들이 모반을 일으켜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이라고 위협하여다. 결국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살을 하라고 명하였고 양귀비는 길가불당에서 38세의 나이로 목을 메어 하려한 삶을 마감하였다. 757년 비밀리에 마외파에 양귀비를 묻은 현종은 그 후 죽을 때까지 양귀비를 그리워 하였다고 한다.

흥교사
당나라 때인 669년 창건된 사찰로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잘 알려지 현장의 사리탑으로 유명하다. 664년 현장이 죽은 뒤 유골은 서안 동쪽 백록원 언덕 위에 매장되었는데, 지대가 높아 황궁 내 함원전에서 그 묘가 보이는 관계로 669년 서안 동남쪽 약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소릉원으로 이장되었다. 이장과 함께 사리탑이 건축되었으며 후에 당나라 숙종이 흥교라는 2자를 하사하여 흥교사란 명칭을 갖게 되었다. 현재 흥교사의 건물들은 전날에 무너진 것을 1922년과 1939년 다시 세운 것이다.
흥교사입구에 들어가면 나무들이 우거진 정원 뒤로 3개의 탑이 보인다. 중간에 가장 큰 탑이 현장의 사리탑이고 좌우에 있는 작은 탑은 제자인 원측과 규기의 사리탑이다. 현장의 사리탑은 5층 33미터로 현장의 상이 모셔져 있으며, 탑 북쪽에는 당산장대편각법사명의 세긴 비석이 있다. 현장은 12세에 출가하였으며, 629년에는 불경 원본을 얻기 위해 인도 여행을 떠났다가 16년 만인 645년 불사리 150알. 불상8구. 경전 520질. 657부등을 가지고 당나라로 돌아왔다.
원측은 신라의 왕조로 3세에 출가하여 627년 당나라에 건너갔고 유식론의 대가가 되었다. 규기는 당나라의 귀족으로 삼차법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출가할 때 스승인 현장법사에게 음주와 여색을 허락받아 술. 여자. 경전을 실은 3대의 수레를 끌고 다녔다고 하여 이런 별명이 붙었다.

향적사
향적사는 이백. 두보와 함ㄲ 당나라 전성기의 대시인었던 왕유가 향적사를 지나면 시를 남겨 유명하다.
향적사는 706년 당나라 중종때 정토종을 크게 발전시킨 고승 선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절로 정토종 활동의 중심지였다. 정토종은 엄격한 계율에 따른 생활을 중히 여기던 기존의 불교와 달리 부처를 믿으며 아미타불을 외우기만 하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서민들이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래서 향적사 대웅보전에는 아미타불과 선도의 상이 모셔져 있다.
경내의 선도고탑은 680년 13층의 벽돌탑으로 건축되었으나 후에 2개 층이 무너져 현재는 11층이 남아 잇따. 기단 4면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답신의 4면에는 금강경이 새겨져 있다.

건릉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 건릉은 서안에서 서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허허벌판에 작은 2개의 봉우리가 호위하는 듯한 모습으로 우뚝 솟은 산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건릉이 자리하고 있는 양산이다.
측천무후는 14세 때 2대 황제인 태종의 비로 황궁에 들어왔다. 26세에 태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궁을 나와 비구니가 되었는데, 3년 후인 654년 3대 황제인 고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고종의 총애를 받고 다시 궁에 들어가게 된다. 고종의 총애를 배경으로 측천무우는 모략을 하여 황후를 쫓아내고 스스로 황후가 되었으며, 고종이 병으로 쇠약해지자 직접 정사를 관장하게 된다. 고종이 사망한 후에는 자신의 두 아들을 중종과 예종으로 올렸다가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의 이름은 주라고 고친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탄압하고 승려 회의, 그리고 장역지 형제들과 추문을 일으키고 세인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선정을 베풀어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방력을 확고히 다지는 등 6대 황제 현종이 당나라 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건릉은 당나라 능으로서는 최대규묘인데, 능이 있는 봉우리 주위에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원래2중 성곽이 둘러처져 있었다. 내성벽의 둘레는 5천9백20미터. 내성의 면적은 2백40평방미터이며, 남쪽에 주작청. 북쪽에 한무문.동쪽에 청룡문, 서쪽에 백호문이 있었다. 현재는 느으로 올라가는 사마도의 석각과 고종 측천무후의 공덕비. 61개의 석인상만이 남아있다.
산 꼭대기에 웅장하게 자리한 건릉으로 향하는 사마도 양측에는 날개 달린 말. 주작. 관을 쓰고 검을 든 장군상 등 124개의 석각이 서 있다. 배부분 석각이 삼하게 금이 가고 깨져서 남아 몸통만 남아 있다. 석각들의 행렬이 끝날 즈음에 고종의 공덕비 \'술골기비\'와 측천무흐의 공벅비 \'무자비\'가 나타난다. 측천무후의 공덕비에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사실을 두고 여려가지 설이 내려오는데, 측천무후 스스로 자신의 공덕이 너무 커서 비석에 다 적을 수 없으므로 비워두라고 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그 밖에 자신이 죽은 후 후세 사람이 알아서 쓰라고 했다는 설 측천무후에 의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중종이 자신의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그 한이 남아서 공덕비를 써주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다. 송. 금을 거쳐 구군가 비석 위에 글자를 새겨 넣어 현재는 유자비가 되었다. 특히 금나라 때인 1135년 여진문자로 적은 낭군행기는 여진문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건릉 입구 양측에는 61개의 석인상이 마치 능을 호위하듯 서 있다. 이근 고종의 장례식에 조문 온 여러 민족의 수장들과 외국사신들을 조각한 것으로 모든 석인상의 등에 국명과 관직. 성명을 적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머리도 다 잘리고 글시고 훼손되어 알아 볼 수 없다.
건릉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영태공주묘와 의덕태자묘, 그리고장회태자묘등의 배장묘가 자리잡고 있다.
의덕태자와 영태공주는 중종의 자녀로 측천무후의 노여움을 사 사사되었는데 영태공주묘는 이미 도굴당하여 약간의 당삼채와 도기들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묘 내벽에 당시 궁정의 못습을 추정할수 있는 궁녀도가 남아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장회태자는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로 역시 측천무후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묘 내벽에는 신라의 사신이 그려져 있는 영빈도가 있긴 하지만 색깔이 바래고 지워져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소능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능으로 637년에 시작하여 639년 완성되었으며 서안 서북쪽 80킬로지점에 위치한다. 당나라에서는 황릉을 건설할 때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대대로 산을 이용해 왔다. 먼저 가파른 벼랑에 나무 계단을 설치하고 올라가 벼랑 중간에 굴을 뚫은 후 황제의 관과 부장품을 넣고 쇳물을 부어 그 입고를 아예 봉해 버린다. 그런 다음 나무 계단을 불태워 없애 버리면 벼랑 위로 올라갈 수도 없을뿐더러 입구를 완전히 봉했기 때문에 고굴꾼들의 약탈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다.
현재 소릉까지 올라가는 고로를 공사하였으며 묘 내부개방이 안되고 있다.
소릉을 뒤로 하고 당나라 명자 이적의 묘가 있는데, 그 옆에 소릉에서 나온 부장품을 전시한 소릉박물관을 세워 놓았다.
출토된 물품들 중에는 당삼채기법의 삼채용이 있는데 이 채색기법은 현재에도 흉내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중에는 코가 높고 눈이 움푹 패인 서역인들의 모습을 한 도용과 낙타도 있어 당시 실크로도상의 중요한 도시로서 서역과 활발한 교류를 주고 받았던 옛 장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릉
서안에서 함양시를 지나 40킬로미터쯤 달리면 흥평현에 위치한 전한 시대의 무덤인 무릉에 도착하게 된다. 가파르게 각을 형성하며 높이 솟은 능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피라미드을 연상케 한다.
무제는 중국 대륙을 두 번째로 통일한 전한의 7번째 황제이다. 그는 자주 범람하는 황하의 치수 사업과 운하 굴착 등의 사업을 벌임으로써 민생에 힘쓰고, 모자라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최초로 소금.철.술의 전매제도를 만드는 등 세제를 보정하였다. 고관대작의 자제를 임용하던 관례를 깨고 유학을 교학으로 삼아 오경박사를 설치하고 박사관제자원중에서 관리를 발탁하여 전제적 관료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에도 힘써 동쪽으로는 고조건을 치고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을 철치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세력을 넓혔다. 오월국에 파견했던 장건에 의해 서역과의 교류에 관심을 갖게 된 무제는 북방의 흉노등을 토벌함으로써 유목 민족들에 의해 막혀 있던 동서 교통로를 열었고 서역과 공식적인 교류를 시작하였다.
무제는 민생에도 힘을 쏟았지만 자신의 능을 건설하는 데도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그는 황제로 즉위한 다음 해부터 53년에 걸쳐 자신의 무덤을 건축하였는데 매년 전국에서 걷어들이는 세금의 3분의 1을 무릉 건설에 투자하였다. 그 결과 무릉은 전한 시대 황제의 9개 능중에서 가장 커 높이는 46.5미터, 아랫부분의 길이는 동서231미터,남북으로는 234미터에 이른다. 한나라의 장안은 지금의 서안시와는 경계가 달랐다. 당시의 장안은 서안 서북쪽 장락궁과 미앙궁의 유적지 주변이었는데, 무릉이 위치한 자리는 이 한나라 장안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명당에 위치했다.
무릉에서 동으로 500미터 떨어진 곳에 곽거병묘와 무릉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곽거병은 무제 때 용맹하게 활동했던 명장이다. 무제의 황후인 위황후의 조카로 기원전 123년 18세의 나이로 시중에 올랐으며 흉노를 진압하고 곤륜산 하서 지방을 빼앗아 실크로드 개통의 주역이 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곽거병묘 봉분 앞쪽에 위치한 무릉 박물관에는 무릉과 곽거병묘에서 나온 부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묘 앞에 세워 놓았던 석각들이다. 말.소.호랑이 등 14개의짐승을 조각해 놓았는데 흉노를 밟고 있는 말은 높이는 실물과 비슷하며 흉노의 조각상도 선명하고 정교하다. 곰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의 조각도 있는데 생생한 표현력이 돋보인다.

섬서역사박물관
섬서역사박물관은 1991년6월에 개관하였다. 중국에서 2번째로 큰 박물관으로 전체규모가 5만6천평방미터에 달하여, 기존의 섬서성박물관과 함양시박물관에 있던 유물들 대부분이 이곳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중앙 홀에 당나라 고조의 릉에서 나온 돌사자상이 서 있고 섬서성의 자연 경관을 보여주는 황토고원과 황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전시실은 중국역사의 흐름을 따라 3곳을 나뉘어져 있다. 전시제1층은 선사시대와 주.진시대의 유물, 2층 한나라와 위진남북조시대, 3층 은 수. 당과 송. 원.명.청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13개 왕조가 섬서성에 수도를 정했던 만큼 전시실에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당나라 때 유물들은 다른 박물관에선 관람하기 어려운 진귀한 것들이다.
선사시대 전시실에는 1964년 남전현에서 발견된 남전원인유골의 머리부분과 기원전 7천년전부터 5천년 간 계속된 앙소문화을 대표하는 반파유적지에서 나온 그릇과 석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나라 전시실에는 갑골문자와 제사 때 사용하던 향로가 만이 남아 있어 제정일치사회였던 주나라의 사회상을 알 수 있다. 당시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면 거북의 등껍데기를 태워 그것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점을 쳐서 그 결과를 껍데기에 뒷면에 적어 놓았는데, 이 때 사용한 글자가 바로 갑골문자이다. 그 외에 보온을 위해 가운데를 비워 만든 벽돌들, 지배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그릇, 동경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주나라 유물고운데 멸종되어 지금은 볼 수 없는 조개껍질이 전시되어 있어 역사.생물학적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진나라 전시실에는 진시황 병마용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농업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은 진나라 때부터 인공하을 만들어 농업생산량 개선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나라전시실에서 주목할 말한 유물은 한 고조의 옥쇄와 함양시박물관에서 볼 수 있덩던 양가만한묘의 채색병마용이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특별하게 유명한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지배체제의 원할한 통치와 사회안정을 위해 종교를 장려하였기 때문에 불교 도교 등 종교관련유물이 많다.
당나라 시대 유물 중에서는 영태공주묘,장회태자묘,의덕태자묘 등에서 출토된 궁녀도와 영빈도, 궐루의장도등의 커다란 채색벽화, 그리고 당삼채,삼채용등이 유명하다.

비림박물관
무제는 중국 대륙을 두 번째로 통일한 전한의 7번째 황제이다. 그는 자주 범람하는 황하의 치수 사업과 운하 굴착 등의 사업을 벌임으로써 민생에 힘쓰고, 모자라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최초로 소금.철.술의 전매제도를 만드는 등 세제를 보정하였다. 고관대작의 자제를 임용하던 관례를 깨고 유학을 교학으로 삼아 오경박사를 설치하고 박사관제자원중에서 관리를 발탁하여 전제적 관료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에도 힘써 동쪽으로는 고조건을 치고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을 철치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세력을 넓혔다. 오월국에 파견했던 장건에 의해 서역과의 교류에 관심을 갖게 된 무제는 북방의 흉노등을 토벌함으로써 유목 민족들에 의해 막혀 있던 동서 교통로를 열었고 서역과 공식적인 교류를 시작하였다.
무제는 민생에도 힘을 쏟았지만 자신의 능을 건설하는 데도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그는 황제로 즉위한 다음 해부터 53년에 걸쳐 자신의 무덤을 건축하였는데 매년 전국에서 걷어들이는 세금의 3분의 1을 무릉 건설에 투자하였다. 그 결과 무릉은 전한 시대 황제의 9개 능중에서 가장 커 높이는 46.5미터, 아랫부분의 길이는 동서231미터,남북으로는 234미터에 이른다. 한나라의 장안은 지금의 서안시와는 경계가 달랐다. 당시의 장안은 서안 서북쪽 장락궁과 미앙궁의 유적지 주변이었는데, 무릉이 위치한 자리는 이 한나라 장안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명당에 위치했다.
무릉에서 동으로 500미터 떨어진 곳에 곽거병묘와 무릉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곽거병은 무제 때 용맹하게 활동했던 명장이다. 무제의 황후인 위황후의 조카로 기원전 123년 18세의 나이로 시중에 올랐으며 흉노를 진압하고 곤륜산 하서 지방을 빼앗아 실크로드 개통의 주역이 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곽거병묘 봉분 앞쪽에 위치한 무릉 박물관에는 무릉과 곽거병묘에서 나온 부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묘 앞에 세워 놓았던 석각들이다. 말.소.호랑이 등 14개의짐승을 조각해 놓았는데 흉노를 밟고 있는 말은 높이는 실물과 비슷하며 흉노의 조각상도 선명하고 정교하다. 곰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의 조각도 있는데 생생한 표현력이 돋보인다.

섬서역사박물관
섬서역사박물관은 1991년6월에 개관하였다. 중국에서 2번째로 큰 박물관으로 전체규모가 5만6천평방미터에 달하여, 기존의 섬서성박물관과 함양시박물관에 있던 유물들 대부분이 이곳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중앙 홀에 당나라 고조의 릉에서 나온 돌사자상이 서 있고 섬서성의 자연 경관을 보여주는 황토고원과 황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전시실은 중국역사의 흐름을 따라 3곳을 나뉘어져 있다. 전시제1층은 선사시대와 주.진시대의 유물, 2층 한나라와 위진남북조시대, 3층 은 수. 당과 송. 원.명.청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13개 왕조가 섬서성에 수도를 정했던 만큼 전시실에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당나라 때 유물들은 다른 박물관에선 관람하기 어려운 진귀한 것들이다.
선사시대 전시실에는 1964년 남전현에서 발견된 남전원인유골의 머리부분과 기원전 7천년전부터 5천년 간 계속된 앙소문화을 대표하는 반파유적지에서 나온 그릇과 석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나라 전시실에는 갑골문자와 제사 때 사용하던 향로가 만이 남아 있어 제정일치사회였던 주나라의 사회상을 알 수 있다. 당시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면 거북의 등껍데기를 태워 그것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점을 쳐서 그 결과를 껍데기에 뒷면에 적어 놓았는데, 이 때 사용한 글자가 바로 갑골문자이다. 그 외에 보온을 위해 가운데를 비워 만든 벽돌들, 지배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그릇, 동경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주나라 유물고운데 멸종되어 지금은 볼 수 없는 조개껍질이 전시되어 있어 역사.생물학적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진나라 전시실에는 진시황 병마용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농업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은 진나라 때부터 인공하을 만들어 농업생산량 개선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나라전시실에서 주목할 말한 유물은 한 고조의 옥쇄와 함양시박물관에서 볼 수 있덩던 양가만한묘의 채색병마용이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특별하게 유명한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지배체제의 원할한 통치와 사회안정을 위해 종교를 장려하였기 때문에 불교 도교 등 종교관련유물이 많다.
당나라 시대 유물 중에서는 영태공주묘,장회태자묘,의덕태자묘 등에서 출토된 궁녀도와 영빈도, 궐루의장도등의 커다란 채색벽화, 그리고 당삼채,삼채용등이 유명하다.

비림박물관
서안에는 중국의 여타 도시와 다르게 비석들만 모아 놓은 비림박물관이 있다. 원래 공자문묘였던 곳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입구에는 공자문묘 특유의 호수와 돌다리가 놓여 있다.
중국전역에 분포하고 있는 공자문묘는 지명도나 규모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가장 높은 등급의 문묘는 공자의 고향에 있는 것으로 원형의 호수가 놓여 있다. 그에 비해 이곳의 문묘는 등급이 높지 못해 반원형의 호수를 두고 있으며, 공자를 존중하기 위해 불교사찰과는 반대로 문을 동서로 만들어 놓았다.
문묘로 들어가는 길은 대부분 세 갈로 나뉘어 있는데,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길이 달랐다. 가운데의 가장 큰 길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과 직위가 높은 고관대작, 동쪽길은 향불을 가지고 가는 제관, 서쪽길은 낮은 직위의 유생들이 사용하였다.
호수 위의 돌다리를 건너 문을 들어서면 길 양쪽에 늘어선 정루와 조각상을 볼수 있다. 이 조각상들은 말과 낙타의 고삐를 묶던 말뚝으로, 실크로드의 시발점에 가까이 왔는데 아직도 고삐자국이 남아 있다.
정루 안에는 황제가 쓴 공덕비가 들어 있다. 문의 동쪽에 위치한 정자에는 서안 시내의 종루에 달려 있던 경운종을 옮겨다 놓았다. 서쪽 정자에는 석마 한필이 놓여 있는데 이는 흉노의 한 파벌인 대하족을 서안을 지배할 때 남긴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 입구의 현판을 잘 들어다 보면 \'비\'에 점하나가 없는 것이 보인다. 이 현판은 청나라 때 아편을 싣고 온 영국 선박을 불태워 아편전쟁을 부른 임측서가 전쟁이 화친으로 돌아서면서 전쟁도발자로 몰려 신장위구르지역으로 유배 갈 때 쓴 것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풀려 오는 길에 나머지 점하나를 찍겠다고 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병사하는 바람에 끝내 글자를 완성하지 못했다.
비림의 입구에는 비림에서 가장 큰 규묘라고 자랑하는 석태효경이 우뚝 서 있다. 745년 당나라 현종이 친필로 효경(공자와 그의 제자인 증자가 효대 대해 나눈 문답을 적은 경서)을 적은 것을 비석에 새긴 것이다.
제1실의 개성석경은 873년 당나라 때 114개의 석판에 65만여자를 사용하여 주역.상서.시경등의 12개 경정을 새긴 것으로 국자감태학에 있었다. 12개의 경전을 영원히 보관하려는 뜻에서 돌에다 새겼으며,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경전을 필사하여 공부하던 유생들이 이 석판을 견본 삼아 자신의 실사본이 틀린 곳이 없는지 비교하곤 했다고 한다. 제2실에는 당나라의 이름난 서예가 안진경이 쓴 안씨 가문의 족보를 비석에 새긴 안씨가묘비와왕휘지의 글씨를 볼 수 있는 대당삼장지효서비가 유명하다.
당나라 때에 만든 당대삼장지효서비는 삼장법사의불교경전을 새긴 것인데, 서진 때 문필가인 왕휘지가 글씨로 집자하기 위해 전국에 공문을 보내고 글씨 한 자를 찾는데 일천금을 내 걸었다는 믿기 어려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제 3실에는 한나부터 북송, 위진남북조 시대까지의 비석과 묘지명을 모아 놓았다. 이곳에는 또한 장욱이 초서로 쓴 \'천자문비\'가 있다. 초서는 이백과 더불어 장안의 2대괴물로 불리던 광초화초가 창안한 글씨이다. 술을 안 마시면 글씨를 못 쓰는 화초가 어느날 술에 취하자 자기 머리를 풀어서 갈겨 쓴 글씨가 초서가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제 4,5,6실에는 원,명,청대의 비석들이 있다. 6실에는 탁본실이 있다.

함양박물관
서안에서 28킬로 떨어진 함양시에 위치한 함양시박물관은 과거 명나라 때 공자문묘가 있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제일 유명한 문물은 도량형 통일의 기준이 되었던 안읍하관종과 한나라 양가만한묘에서 출토된 채색병마용이다.
진시황은 중국 국토만 통일 한 것이 아니라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 시켰는데, 제1실에 있는 안읍하관종은 전국시대 위나라 때 물건으로 후에 진시황이 곡물에 넣으면 13두가 한 말의 크기로 나온다. 제2,3실에는 진나라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진시황이 세운 함양궁의 건축재료와 배수시설도 볼 수 있는데, 3층으로 만들어진 함양궁은 항우에게 함락된후 다 파괴되어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이 많지 않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후 철제품과 병기를 다 수거하여 녹였는데, 쇳덩어리 중 형태가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유물들이 발견되어 함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3실에는 전리품과 화폐가 있다.
제5,6실에는 1965년 양가만한묘에서 출토된 채색 병마용이 있다. 이 곳에 출토된 병마용과 은 하나의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다.

반파유적박물관
반파유적지는 신석기 문화 중의 하나인 앙소문화의 유적지로 지금으로부터 7천년전에 존재 했던 모계씨족사회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21년에 발견되어 주거 유적46개,가축우리2개,성인묘174개,유아 묘인 옹관73개, 도기제작장6개,부장물품2백여점 등이 발굴 되었다. 1953년 반파유적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박물관 제1실에는 석기.어구,뼈바늘등의 주요 생산용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마제석기와 주요 생산용구의 정교한 모습,토기에 그려져 있는 예술적이고 추상적인 문양으로 미루어 볼 때 물질적.정신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3실은 반파유적지 위에 건물을 올려 신석기인들의 주거환경과 사회생활을 그대로 전시해 놓은 곳이다. 마을을 경계는 참호를 파 들짐승이나 다른 부족의 침입을 막았다. 마을 북쪽 가장자리에는 공동묘지가 있고 그 안쪽으로는 가축들을 키우던 축사가, 중앙에는 사람들이 주거지가 있다. 신석기인들의 집은 지하와 반지하,지상을 아우르며 나름의 필요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지어지고 모양 또한 다채롭다.

 

2)하서회랑(하서조랑.감숙회랑)

하서조랑이라는 말은 \'하서\'는 황하의 서쪽, \'조랑\'은 긴 복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황하의 서쪽에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말이다. 이 복도는 800킬로미터에 걸친 기련산맥과 합려산,용수산산맥 사이에 낀 세장한 고원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산 과 산 사이에 형성된 이 지대가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처럼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천산의 남북과 그 형세가 유사한 것으로는 기련산의 남북이 있다. 단지 기련산의 경우는 북측이 건조하다. 남측은 그래도 습도가 있다. 그러나 산이 물을 혜택을 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유명한 한 무제의 서역경영은 본래 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한 고조 유방 이래 사실상 속국의 입장이 되었던 흉노에 대한 반격작전의 일환이었다.
처음에는 북쪽 정면으로 출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혀 신통한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반전되어 한에 유리하게 되었던 것은 필시 기원전 124년부터 개시되었던 하서 진공작전, 즉 기련산 북측으로의 진출이었다. 특히 그 포인트가 되는 것은 지금의 감주 일대였다. 더구나 높은 곳에 이르는 경사면은 녹지로 덮여있어 북측 일대에서 가장 좋은 목초지였다. 총조시대까지 군마목장이 었었으며,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거기에 흉노 유목연합체의 우익, 즉 서방 부분을 총괄하는 우현왕이 있고, 그 아래 휴도왕이있으며, 그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감주 오아시스로부터 현 에치니강을 따라 오로지 북행하면 흉노의 군주 성우가 왕정을 두었던 몽골리아 중앙부에 이른다. 마침내 기련의 산곡으로 들어가면 남측의 현 청해지방의 목야로 통한다. 기련의 산하와 동서남북의 교통을 일거에 장악할 수 있는 고에 우현왕과 휴도왕이 있었다.
무제 정부에 있어서 만일 기련산 작전이 실패하면 북쪽에서 흉노정면에 역공을 가할수 없게 된다. 한에서 보면 다행스럽게 우현왕과 휴도왕이 서방으로 달아나게 하는데 성공을 했다. 흉노는 월지로부터 빼앗았던 기련의 산들을 상실하고 말았다. 여기서 국면은 크게 변하였다. 이 전투는 기원전 121년 곽거병의 데뷔전으로 역사상 유명하다.
휴도왕이 있었던 곳을 언지산 혹은 연지산이라한다. 연지라는 말은 안료가 되는 풀 이름이다. 후에 \'하서구사\'라는 책에 의하면 흉노는 기련과 언지의 두 산을 잃고 "내가 기련산을 잃어 육축을 번식하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언지산을 잃어 신부로 하여금 안색(어굴에 바르는 황장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라고 노래했다고 한다. 더욱이 흉노의 여성은 얼굴에 붉은색을 장식할 수 없음에 대해 수없이 탄식하였다고 당의 시인들은 무제으 태평성대를칭송하고 있다.
한은 중요한 거점을 얻었다. 흉노 우익군인 우현왕이 재차 기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련의 북록을 따라 징검다리 형태의 성벽을 만들어 거점을 만들었다. 결국 본토에서 무위.장액.주천.돈황의 4군을 차례로 설치하게 된다. 감숙성은 여기서 두 개의 감주와 숙주의 앞글자 감과 숙을 취하여 몽골시대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곳은 이처럼 점과 점의 방위선,식민지였다.
역대 중화왕조는 이들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를 유지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각종의 목민들이 생활하는 남측에는 수 양제가 토욕혼을 토벌한 경우 외에 거의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만일 기련에 솟아 있는 산들 그 북록에 오아시스가 없었다면 중국은 오랫동안 서방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을 것이다. 중국이 서방으로 신장할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 있었으며, 이것은 감숙회랑 또는 하서회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가욕관
가욕관은 하서회랑에서 가장 좁은 지대여서 관문작용을 했다.

주천
흉노를 괴멸하며 하서회랑을 확보한 한의 곽거병장군이 전승을 기념해서 무제가 내려 준 술한 병을 혼자 먹지 않고 이 샘에 풀어 모든 장졸과 함께 마셨기 때문에 이른바 술샘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따. 이 전설 말고도 이광리장군이 촌노인에게서 술 한 병을 헌상받자 서역 쟁패 과정에서 한나라 장군들이 장졸과 함게 생사고락을 같이 했기 때문에 하서조랑도 서역도 확보 할수 있다고 하여서 생긴 전설이다.

 

3)돈황

돈황이 중국의 사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111년으로 한나라 무제가 무위.장액.주천.돈황 등 하서사군을 설치하면서부터 이다. 이전에는 흉노(훈)가 살고있었다. 이 지역은 월지.강등 다양한 족속들이 뒤섞여 살았지만 흉노가 이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중국 변방지역을 끊임없이 침공하기 시작한다. 한나라는 이에 위청 곽거병, 이광리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진압하게 하고 여기에 만리장성과 진관을 설치한다. 돈황은 당시 서역도호부가 설치됐던 이 지역의 중심지로 크게 성황을 누린 오아시스도시였다. 5세기 초에 서량과 북량의 전쟁때 폐허가 되었지만 북위,서위,수,당을 거치면서 더욱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당대에는 오르콘위구르제국이 840년 분열이 되면서 5개이상으로 분열이 되는데 몽골초원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온 위구르제국은 이곳에 겐주위구르왕조을 세운다.
이후에 이들은 중국에게 점점 동화되어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막고굴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366년 낙준이라는 스님이 명사산에서 서광이 비치는 것을 보고 굴을 뚫기 시작하여 그 후 북위, 수 당을 거치면서 1천여 개의 굴이 개착돼 서역불교의 성지로 널리 알겨지게되었다.
이 석굴은 현재 막고굴이라고 부른다. 사막의 높은 곳에 있는 굴이라는 뜻이다. 명사산은 사막보다 높고, 이 높은 절벽에 굴을 뚫어 법당을 조성하고 승방을 만들어 예배와 수도를 수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명사산은 20-30킬로미터 길게 뻗어 있는 황량하고 적막한 모래 언덕이다. "ㅅ가면이 모래언덕으로, 산등이 칼날같아 올라가면 울리는 소리가 나는데 발로 밟으며 허물어지고 바람이 불면 원래 모습대로 된다."이 말은 실제로 명사산에 올라가 보면 실감할 수 있다. 명사산이라는 말 자체가 "모래가 울리는 산"인 것 처럼 모래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우레처럼 들린다고 한다.
이 명사산의 동면 절벽에 단애면에는 당초 1천여개의 굴을 뚫었지만 현재는 492개의 석굴만이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고 이가다. 그러나 한 석굴을 몇 개로 나누고 있으므로 이 숫자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들 석굴은 2개의 군으로 크게 대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복합굴인 승려굴이고, 둘째는 단독굴인 예배굴이다. 즉 승원굴은 전실,주실 등 예배굴과 측실이 좌우로 딸려 있어서 스님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한 복합굴인데 268굴이나 285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예배굴은 불보살에게 예배하는 것이 주목적인 이른바 탑주가 있는 경우와 동형 천장이 있는 경우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이 석굴들은 뚫은 사람이나 나라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어서 모름지기 세계예술의 보고로 널이 알려지고 있다.
돈황석굴은 왕모래와 진흙 등과 섞어 이루어진 역암이어서 불상을 조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은 형편이다. 그래서 벽면에 흙을 발라 별화를 그렸고, 공간에 따라 강바닥에 채취한 흙을 이겨 불상을 조성했다. 흙으로 만든 소상은 나무골재에 풀새끼를 묶고 강바닥에 침전된 고운 점토를 삼베나 모래 등과 섞어 형상을 만들고, 이를 백토로 마감한 뒤 색채나 금박을 입혀 아름다운 상으로 만든 것으로 이른바 채소(색채소묘)라 부른다. 이들 소조작품은 현재 2, 415구가 현존하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파손된 것과 도굴해 간 것 까지 합치면 가히 부지기수라 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돈황석굴을 채소(색채소묘)박물관이라고 부른다.
이보다 유명한 것은 벽화이다. 현존하는 벽화만 떼어 백을 만든다면 5미터 높이의 벽면을 25킬로미터가 전개할 수 있다. 이 어머어마한 양이 우선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 그보다 전 석굴벽면을 현란하 무비하고 호화찬란하게 장식한 존상도,불전도,본생도,변상도 그리고 각종 공양자상이나 조상연기그림 등이 유명하다.
막고굴 17번 굴에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발견한 고문에서 왕오천축국전이 발젼된다.
막고굴은 영국의 스타인과 프랑스의 펠리오,독일학자,소련학자,일본의 오타니등이 경쟁적으로 고문을 헐값에 사갔다...

옥문관
옥문관은 한4군을 설치하고 이후에 서역과 공식적인 비단의 교역이 이루어 지게 되는데, 우리가 생각할때는 장안에서 로마까지 대상단이 비단을 싣고 길고 험난한 길을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의 장안에서는 비단을 이곳 돈황에 가져오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는 끝났다. 그러면 서역의 대상단들은 현금혹은 물물 교환할 물건과 옥등을 가지고 옥문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단이 도착하면 이곳에서 비단과 옥이 거레가 이루어 지고 서로의 갈기를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측에서 보면 이곳은 옥이 들어오는 문 이라고 하여서 옥문관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교만성
교만성은 청 건륭제때 건설 되었다. 황제가 꿈 속에서 본 모양대로 건축하게 했는데 시공을 담당한 관리들이 사복을 채우고 제대로 공사를 하지를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는 일설이 있다 그러나 축성공사도중 청치사황의 변동으로 작업이 중단되었는지 건설 후 폐허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수가 없다.
백마탑
돈황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인도식의 한 탑이 있는데 이곳은 사람이나 어떤 신앙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말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이 말의 주인은 구마라십이라는 쿠챠왕국(퀴센)의 승려이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계통의 사람이고 어머니가 위구르인이라고 전한다. 고구려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해 준 전진왕 부견은 서역 정토군을 떠난 보낼 때 특별히 대장군 여광에게 쿠챠국을 복속시키면 구마라십을모시고 곧바로 장안으로 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구마라십은 쿠챠왕실 출신으로 어릴때부터 간다라에 가서 불고를 깊이 연구하고 돌아온 당대의 명승이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어학에 능통하여 역경(불경을 번역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같은 그의 재능은 중국에서 빛을 낼 수가 있었다. 구마라십은 여광과 함께 중국에 왔으나 전진이 이미 멸망해 버린 뒤었고 그래서 대장군 여광이 하서회랑에서 후랸을 세우자 잠시 여광 밑에 머물렀다가 후진왕 요흥의 초청으로 역경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고 그의 생애에 경론 70여부 300여권을 번역하여 일약 남북조 불교를 중국땅에 반석처럼 다져놓은 장본인이자 제1불교황금기를 개척한 불세출을 명승이다.
그의 원명은 카무라치와 라고 하며 그의 역경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금강경이다...
그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돈황을 거쳤으며 돈황에서 자신이 아끼는 말인 백마가 죽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기념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백마탑이다...

명사산(월아천)
명사산은 동서40킬로미터, 남북20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산인데 해발 1,650미터의 높이에 월아천 주위 50-60미터 정도이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철에는 산에서 무너져내리는 모래소리가 영락없는 천둥소리로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명사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산위에서 월아천을 내려다 보면 한눈에 들어 온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모양으로 하고 있어서 월아천이라고 이름하였다.
돈황부근 사람들에게는 단오날에 이 산에 올라 액을 막기 위하여 모래위에서 미끄럼을 타는 풍습이 유행했는데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미끄러지므로 이 때 울려퍼지는 소리가 마치 벼락치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한다.

 

4)우름치(우루무치)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도의 이름으로 이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전에 위륌치는 몽골어의 uluji(위뤼지)라고 발음이 되면 아름다운목장(초원)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고대위구르어의 oronmtai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는 견해가 있다. 돈황에서 발견된 손으로 쓰여진 책중에 삭어의 문서에서 irumcina(위림치나)라는 이름이 나온다. 925년 호텐에서 삭어의 동일한 위림치나라는 곳이 있었다. 이것은 iru과 cina 두 개가 합성이 되어서 된 이름이다. iru는 삭어에서 "가지 숲",cina는 "우거진"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그래서 위륌치라는 말은 호텐삭어에서 우거진숲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신장위구르자치구는 1955년10월1일에 정식으로 자치구로 정해졌다. 신장이라는 말은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역사에 신장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1884년11월17일이다. 이전에는 서역이라고 했는데 서역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역의 광의적 의미로는 신장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인디스탄,페르시아,유럽,중아아시아,신장,감숙,티벳 등 서안을 중심으로 서쪽의 총칭을 서역이라고 한다. 협의적인 의미로는 지금의 신장을 의미한다.
서역이라는 말은 기원전104년에 나타난다. 기원전에 보여지는 서역이라는 말은 광의적인 의미로 서쪽의 국가들이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다. 이전에 신장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는 36개국이 있었다. 이 국가들은 실크로드상에서 많은 중요한 역할 했었다. 투르판국,옌지국,퀴센국,호텐국,석국(타쉬켄트),사마르칸트 등의 도시국가들을 말한다.
  신장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1884년의 일인데 청나라 시대에 야쿱백이라는 코켄트사람이 카쉬카르에 와서 무슬림정권을 세우고 전신장을 통일한다. 이 때에 야쿱백정권은 영국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도 호락호락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청은 야쿱백과 화친을 할 것을 제의하고 쿠물(하미)에 군사를 배치하였다. 당시에 아쿱백은 청의 말을 그대로 믿고 협상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군사들에게는 발포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그 때를 기회로 무장이 해체된 야쿱백진영을 유린하여 기습공격을 가하여 삽시간에 하미,우름치,투르판,다반청등을 점령하게 된다. 당시에 야쿱백은 갑자기 사망을 하게 된다. 알려진 바로는 충격으로 노졸증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 라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밝혀진 바는 아니다.
야쿱백은 총한번도 쏘아 보지 못하고 청군이 진격을 하는 것을 돕는 처지가 되었다. 청군은 신장의 중요도시에 진격을 해서 야쿱백진영은 항복을 하게 된다.
신장이라는 말은 청나라가 서몽골왕국(갈단왕조-준가르왕조-천산북부)를 몰아내고 다시 천산남부의 카쉬카르에 진격을 하여서 호자정권과 맞붙어서 호자정권은 무참하게 패하고 만다. 호자형제는 인도로 도망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청나라는 북으로는 준가르로부터 남으로는 호자형제의 정권으로 부터 천산남북을 빼앗고 나서 이곳의 이름은 \'세로운 강역\'이라는 의미로 신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신장에서 천산의 남쪽은 회장(무슬림들의 땅),북쪽은 준장(준가르의 땅)이라고 불렀다가 후에 천산을 중심으로 남장,북장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우름치는 이드쿠트위구르(869-1270)왕조 시대에는 투르판에 속해 있었다. 이는 고창국시대를 말한다. 우름치는 이 처럼 작은 부락을 이루고 있었던 작은 목장지역에 불과 하였다.
고대의 신장의 중심은 투르판.쿠차.카쉬카르등이고 근대에 와서는 구소련과의 국경지역이었던 이리(굴자)가 중심이 되었다.
1736년 청나라 시대에는 디화라고 불렀다. 이것은 비문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름치는 고대시대로부터 우름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현지인들을 정부의 명칭과 관계없이 우름치로 부르고 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이곳에 쟁탈전을 벌이면서 이곳의 지역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1945년 우름치를 시로 승격을 시킨다.
공산당이 신중국을 세우고(1949년), 1955년10월1일 신장자치구로 명명을 하면서 우름치는 서북의 창으로 발전을 하게된다. 이곳은 모택동의 동생인 모택민이 국민당에 억류되어 사망을 당하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신장대학에서 연안로정거장 중간에 팔로군사무소가 있는데 이것은 이전에 모택민이 집무를 했던 곳이다.
현재의 우름치는 인구2백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을 하였다. 우름치는 중앙아시아를 연격하는 실크로드상의 물류거점 도시로 성장하고 있는데 소련과 중앙아시아.파키스탄등의 나라들과 터어키등지로 직접 육로를 통해서 무역이 진행되고 있다.
우름치는 공산당이 신중국을 세우고 나서 많은 중국인들이 신장건설이라는 목적으로 신장에 늘어왔으면 병단(유사시에는 군인,평상시에는 농민)들이 대규모로 들어와서 신장에서 농사가 가능한 지역에는 모두 들어가 있다. 정부의 공식인구조사에서 신장의 위구르인구는 7백만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1,300만정도가 된다고 비공식적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2천만이 넘는 인구중에서 중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40퍼센트라고 하는데 실제로 군인경찰과 상인들을 포함하면 지금은 위구르인구를 완전히 초과한다.
신장의 대부분 도시들 중심에서 가장 큰 건물과 직장은 군부대이다. 이처럼 아직도 경찰력과 군사력으로 통제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름치에서 중국인들이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위구르인들이 10퍼센트정도가 된다. 위구르인들을 남문을 중심으로 남쪽에 살고 있다. 남문중국은행 옆에 남문모스크가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남쪽에 산시항과 뒹쾨위릭(이교도-얼따오치아오)와 연안로,단결로,경마장들의 지역들에 위구르인들이 집중해서 살고 있다.
신장의 각 대학들은 우구르민족을 쿼터제로 뽑고 있다. 신장대학의 경우 50퍼세트는 위구르인으로 구성이 되어야 한다는 소수민족우대정책이 있다. 그러므로 각 대학에서는 위구르인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신장대학은 중심대학으로 위구르문학과 위구르역사연구방면에 참고서적들과 우수한 교수진들이 있다. 인문학원내에는 신장민족민속박물관이 있다.
우름치는 천산의 북록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보고타봉과 가깝고 준가르분지에 접해 있다. 그러므로 우름치의 부근에는 천연 목장들이 있다. 천산천지,남산목장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우름치시내에는 홍산(우름치가 건설되고 인공으로 나무를 심고 녹지를 조성한 공원)에서는 우름치시내를 모두다 볼수가 있으며 홍산 정상에 우름치의 발전상을 사진으로 전시 해놓은 전시관이 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은 중국에서도 독특한 전시물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미이라등이 현실감있게 관람할 수 있으며 실크로드상의 문화와 종교등을 한눈으로 볼수 있게 되어있다.

 

5)투르판

투르판의 이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각기다른 견해가 있는데 그중에 982-983년에 작가를 알수 없는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호두둘 알렘이라는 책에서 투프칸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지역을 중국어로는 탄한샨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이것은 천산(탱으르타그)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이 말이 점차 변해서 투르판이 되었다고 한다고 본는 견해가 있으면 또한 천산이라는 말의 발음이 변해서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또 다른 견해로는 텡으리라는 말과 연관이 있는 타프칸를 천산이라고 본다 그래서 타프칸-투프칸-투르판-투르판 의 변화의 과정을 저쳤으며 투르라는 말는 야쿠트어에서 텡으르(하늘,신)이라는 뜻이다. 판이ㅓ 라는 말은 페르시아,소그드과 투르크어로 위대한,넓은,성스러운등의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돌궐어대사전에서는 튑과 안의 결합으로 땅,분지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견해는 토번에서 온 것이다라는 견해이다(토번은 티벳의 옛이름이다.)
몽골어로 투르판이라는 말은 과실이 있는 땅이라는 말이다.
고대위구르말로서 테키체(벽장)이이라는 의미의 타르반 혹은 투르반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라는 견해로 고대 삭어에서 위구르어로 변화된 말이다라는 견해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투르판에 대한 말은 낮은 지역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이 지역이 역사에 알려진 것은 전한시대부터 잇다. 중국인들은 한서에 이 때를 차사전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란계로 알려져 있고 차사국의 세력은 천산 남북 멀리 우루무치부근까지 방대한 지역에 미쳤지만 실제로 많은 인구를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사전국을 후견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흉노였다. 흉노는 한 소제(BC 87-74) 때 투르판부근에 4천기의 둔전병을 주둔시키면서 차사국으로부터 조공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는 흉노와 끊임없이 대적하고 있었는데 투르판이 서역일대의 세력판도를 가늠해주는 전략적 요충지로 판단되자 기련장군정광명,도료장군범명우,한증,조국충,전순등의 다섯 장군과 20만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자 흉노는 정면대결을 파하여 재빨리 철수해 버렸고 고립무원하게 된 차사전국은 하는 수 없이 한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당시 차사전국의 수도가 바로 교하성이었고 호수는 7백,인구6,500명 병사 1,865명이었는데 고하성은 더 적을 것이다.한군이 물러가자 흉노는 다시 세력을 뻗쳐 한에 대적해 왔고 이에 따란 한은 다시 기원전68년 정길을 대장으로 한 원정군을 파견 함락시킨후 주민들이 한나라 기지가 있는 거리로 옮기고 이 지역을 흉노에게 넘기고 말았다. 흉노의 지배 때에 교성은 불투명하지만 후에 반초(32-102년)가 서역을 통치하고 있을 때 투르판의 고창성에 둔전병이 있었고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기지를 두어 간접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부터는 지방왕국이 고창군으로 삼고 태수를 파견 직접통치를 했는데 그후 후량.북량등의 세력이 연이어 부침했다. 북위 때 북량왕의 동생 등 왕족이 투르판에 망명왕국을 건설하였고(442년) 유연,고차등의 후원을 얻은 왕국이 교대로 투르판을 지배핫는데 497년경에 국씨 고창국이 세워져 140년간 번영하게된다. 국씨고창왕국의 수도는 현 고창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의 왕국이나 군의 수도는 확실하지않다. 당나라때에는 고창성 대신에 고하성에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실제로 중국이 투르판을 지배하였던 것을 아주 짧은 시기였으며 대부분 흉노(훈)과 돌궐(투르크)와 위구르민족이 투르판의 주인이었다.
 당대이전에도 위구르인들이 투르판에 살고 있었으며 이들을 고차라고 부른다. 당나라 때에는 이드쿠트(이드:주인, 쿠트:행복,하늘)위구르왕조라는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독립된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번영하였다. 이드쿠트위구르왕조시대에 (860-1270)에 실크로드상에 중요한 역할들을 했는데 그것에 중요한 것은 서역의 문화가 대부분 투르판을 통해서 동으로 전달 되었다는 사실이다. 불교와 마니고 조로아스터교등의 종교사상이 발전하고 이곳에서 한번 받아들여 진다음에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적과 사료들에서 증명을하고 있다. 중국은 이곳을 서주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서쪽의 하나의주라고 하는 명칭으로 이드쿠트왕조를 아래로 보고 부르는 사상이다. 중국의 살료들로부터 지금의 신장지역은 옛날부터 중국의 일부였다는 것을 일관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많은 역사의 진실들이 외곡되고 있는데 이 투르판은 더욱더 그러한 면이 짙다. 이드쿠트위구르왕조는 5개의 도시를 가지고 있었는데 봄.가을.겨울은 투르판을 여름에는 짐사르(카간의 도시)라고하는 도시를 궁정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위구르인중에 투르판 사람들은 우름치에 가는 것을 \'우름치에 내려간다\' 라고 하고 우름치에서 투르판에 가는 것을 \'투르판에 올라간다\'.라고 표현을 한다. 이것은 짐사르가 우름치에서 동쪽으로 천산천지가는 방향으로 조금더동쪽을 가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투르판을 이드쿠트의 오랜 수도이기 때문이다.
투르판의 역사를 살펴보면 당 이전에 중국이 직접 영향을 미친 적을 극히 적고, 중국이 직접 지배하였다 하더라도 짧은 기간 군사기지로 상용되었을 뿐이어서, 문화적인 교류는 오히려 실크로드를 따라 활발한 교역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인도 내지 이란과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불교사원이나 왕궁건축 등에 서방적인. 특히 인도적인 요소가 재배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중국적 요소가 많아지는 것은 당나라 이후로 생각된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도 인도 이란양식이지만 여기에 그려진 벽화들은 중국 궁전식이 많은데 벽화가 당통치시대때 다시 그려진 것으로 이해하면 이런 모순이 납득이 된다.

교하고성(야르골)
야르(만나다,교차하다), 골(파이다.우리말의 골과 같은 의미임) 그래서 물들이 교차하는 깊은 골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교하고성은 천연이 요새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냇물을 건너면 30미터나 되는 높다란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 절벽을 전체가 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북 1,600미터, 동서330미터의 대지 전체를 파고 뚫어 진흙 건축물로 구축한 것이 바로 교하고성이다. 흙들을 파내서 건축을 하였다고도 한다. 성문에 들어서면 백돌길이 남북에 걸쳐 일직선으로 뚫려 있는데 길이 끝나는 곳에 광장과 거대한 사원지가 있다. 이 사원지 주위에도 많은 사지들이 확인되어 이 구역이 원래 사원구역이었음을 확인된다. 광장북쪽에 있는 중앙사원지는 인도식 사원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80미터,동서40미터의 방형(높이 5미터)으로 들러싸인 거대한 규모인데 남쪽 입구문을 들어서면 광장이 나타나고 좌우로 승방들이 늘어서 있으며 북쪽으로는 3층기단 위에 높이 7미터의 거대한 방형탑이 구축되어 있다. 흙벽돌을 쌓아 방형탑을 세운 것으로 서쪽면에는 아직까지 감실들이 있고 이 안에는 소조불이 부조되어 있는데 파손이 심한 편이다.
담장에 면하여 3미터 사방의 방형 승방들이 줄지어 있는데 입구 문 왼쪽에 기와 무더기가 있다. 이처럼 중앙탑을 중심으로 승방들이 배치된 것은 인도식으로 평가된다.
북쪽사원지역에도 높이 10미터의 거대한 탑이 있는데 기단 네 모퉁이에 4미터 정도의 건축물이 있고 중심탑 주위에도 소탑4군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역시 사라나르불적,나란다탑군 등의 예처럼 중앙탑을 중심으로 소탑들이 배치되는 전형적인 인도식이다. 이 탑군과 나란히 남쪽으로 5미터 담장에 둘러싸인 사원이 있는데 담장을 따라 작은 승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처럼 대개의 사원형식이나 양식은 인도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점은 고창성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창고성
고창고성은 둘레가 5킬로미터 흙성벽 밑부분의 두께가 12미터 정도이며,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최고 높이가 11미터에 이르는 데 처음에는 더 높았을 것이다. 교하성이 흙자체를 조각한 조각건축인 반면 고창성은 흙벽돌을 쌓아 조성했기 때문에 파손이 보다 심해서 궁전이나 사원 같은 큰 건물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 거의 폐허화된 도시유적이다. 옛 궁성은 고창성 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궁성의 북벽이 곧 고창성과 북벽으로 되어있다. 궁성 안에 남아있는 유적으로 본래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4층인데 이것은 왕 집무소와 관련있는 궁전건물로 생각된다. 궁성 남벽은 중성의 북쪽벽과 접하고 있고 이 벽과 접하고 있는 부분에 둥근 성채가 남아있다. 서북쪽에는 높이 15미터의 건물이 있는데 카간성벽(왕의 성벽)으로 불리고 있는데 불고사원의 탑같은 기념건축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남모서리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는 석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북량 때의 절 건축을 기리는 공덕비여서 이곳이 북량 때의 사원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사찰이 445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 고창성이 구축된 것은 후한(61년)때이다. 그 이전 전한 때에는 투르판에 차사전국이라는 나라가 번창하고 있었는데 한의 위협 때문에 흉노와 동맹을 맺어 흉노군이 투르판 분지에 주둔하면서 한과 대적하도록 했다. 그래서 한은 기원전 72년인 한 선제2년에 전광명등 다섯 장군과 20만 대군을 파견하여 흉노가 퇴각한 차사전국을 일거에 함락시켰다. 당시의 수도는 교하성이었다. 당시의 고창성은 조그만 마을에 불과했지만 한이 투르판을 점령한 뒤 고창에다 작은 성채를 쌓고 술기교위로 하여금 5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게 한 이후부터는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성벽을 쌓아 주둔한 곳이라는 뜻에서 \'고창벽\'이라 했다. 후한서서역전에 전해지고 있다. 고창은 후한 반초장군이 서역을 통치하던 때에 크게 번성했고,5호16국시절에는 하서의 전량이 군을 창설하였다. 그 후 5세기(442-450)부터는 고창왕으로 부상했는데 북위 효문제 때는 중국인 국씨 왕조가 개국하게 되었다. 이른바 중국인 국씨고창국이라 하는 나라이다. 이 때가 고창국으로서는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던 시대이고 고창고성도 최절정기였다. 이 당시의 고창성이 장려하고 호화로운 성곽도시였다는 것은 삼장법사전등에 자세히 언급되고 있어서 그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현장법사가 고창성에 온 것은 630년 2월겨으로 그후 약 1개월 정도 머물렀다.
고창성은 흙벽돌로 구축한 성곽도시로서 둘레 1킬로미터의 궁전지 주위로 많은 사지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가운데 가까이에 있는 거대한 절터가 가장 유명하다. 사원의 기본구도는 인도식이고 인도식 복발탑과 거대한 방형탑, 이 주위의 승방 등 일부가 파괴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 편이다. 인도식 복발탑은 산치탑과 비슷한 모양으로 복원해 놓았고 방형탑도 일부 복원하여 원형을 다소 유지하고 있다. 방형탑에는 서면 감실 속에 여러 구의 부조상과 벽호광배일부가 남아 있어서 원래의 위용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장법사가 고창을 방문한 첫날 왕성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후 바로 여 도장에 머물렀다는 그 절이 바로 이 일이 아닐까...주로도 넓고 왕궁도 장려하며 건물지들고 거대하게 보이는 등 고창성은 현재 유지만 보아서도 당시의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모습이 보인다.
신라고증 혜초도 이곳을 지나갔었다.

아스타나고분군
아스타나고분군은 고창국시대와 당나라구족들의 공동묘지였던 곳인데 수천의 분묘들이 동서5킬로,남북2킬로의 사막에 산재하고 있다. 아스타나는 휴식과 영원한 잠이라는 뜻을 가진 위구르어로 영원히 잠든 묘지라는 뜻이다. 영원한 잠을 자고 있던 기의 수백기의 고분들은 1916년 스타인등 서구열강의 학자들이 발굴을 시도한 이래 간헐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지다. 1953년 이래 현재까지 중국정부에 의해 14회의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4백기의 고분이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사막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역사를 복원하는데 최적의 유물들이다. 이기에서 나온 문서중에슨 서진태시9년(273년)의 것이고 가장 최근의 것은 당력13년(778년)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약 5백년간에 걸쳐 조성된 역사깊은 묘군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외부에 보여주는 고분들은 땅 아래로 45도 각도로 땅을 파고 고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데 중앙에는 관이 있고 관을 중심으로 3면에는 부장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곳에서 발굴된 관용문서들 중에 여행통행증등을 불수 있다. 과거에 이러한 통행증이 없으면 여행이 허가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부역신고서, 교통사고배사청구서,계약서(소작.임대차.고용.매매.교환)등의 문서들이 있는데 교통사고배상청구서에는 어떤 사람이 우마차를 몰고가다가 사람을 치었는데 이것에 대한 배상청구서이다.
또한 변방군여에 대한 탄원서도 발견되고 있다.
1973년에 발굴에 의해서 출토된 장웅의 묘지는 국씨고창국의 멸망에 얽히 사실들을 잘 알려주고 있는데 장웅의 고모가 국왕 국문태의 모친이므로 국왕과 고종사촌간이고 그의 아내 국씨 또한 왕실의 공주로 짐작이 되는데, 묘지의 내용을 보면 장웅은 고창국의 대장군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고종사촌인 국왕 국문태의 정치적 판단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자주 간언하였지만 거절 되었고 그래서 화병이 도져 50세세인 631년에 병사하였다. 이때는 현장법사가 고창에 머물고 있었던 때인데 국왕과 의형제를 맺을 때 입회한 장태비는 장웅의 고모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 장웅의 부인은 27세였는데 그후 55년가 수절하면서 당으로부터 영안태랑군으로 책봉을 받고 귀족으로 살다가 측천무후시대인 688년에 82세의 나이도 돌아갔다고 한다. 그 직후 아들 장회석은 어머니의 시신을 아버지묘(아스타나206)에 합장(689)하였는데 이를 증명하듯이 발굴품도 고창국 말기의 유물과 당유물이 동시에 출토되고 있다.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미술품은 투르판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이들은 회화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회화로서는 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관을 덮을 때 쓰던 수십점을 복희여와도와 위기사녀도, 그리고 무악도같은 병풍화의 묘벽실에 그린 벽화들이다. 이 외에도 각종 직물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베제크릭석굴(천불동)
원래 이름은 베젝릭천불동이다. 베젝릭(아름답게 장신된)이라는 뜻이다.
57개의 석굴안에는 아름다운 소조조각과 호화로운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어서 밖의 뜨거운 열기와는 서늘한 굴에서 수도하는 안성맞춤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굴실안에는 관리가 허술하여 엉성한 생각이 든다.
4호굴(지금20호)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어떤 테마를 가지고 있다. 15개의 주제로 된 서원화로서 모두 전생의 석가부처가 과거불에거 공양을 올려 미래 성불할 것을 보장받는다는 줄거리를 다채롭게 윤색해 그린 것이다. 이 그림들은 20세기 초까지 그대로 있었으나(그냥 방치되었 거거 무슬림들이 난도질을 했다.) 독일인 그륜베델,영국의 르콕,일본의 오오타니,러시아의 올젠버그,영국의 스타인등이 차례로 드나 들면서 벽화와 소조불상들을 본국으로 가지고 가서 현재는 세계각처에 유랑하고 있다. 이곳에서 떼어온 백화단집 네 점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벽화들을 복원하는 연구가 국립박물관 안병찬교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9호굴(지금27호) 4호굴과 흡사한 구조를 하고 있다. 벽화의 대부분은 독일을 르콕에 의해서 베를린박물관에 복원지열되었으나 2차세계대전때에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이처럼 베제크릴석굴은 현재 엉망이 없지만 우리의 토함산 석굴의 연원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보여주고 있어서 각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이 석굴은 굴실을 뚫어서 만든 것도 있고 흙벽돌을 쌓아 전실과 본실을 일부 또는 전부 조성한 굴실도 상당수가 있다. 이런 것은 인도 간다라의 부트카라 제2사원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데 부트카라사원은 돌벽돌로 쌓았지만 베제크릭석굴은 흙벽돌로 바꾸었고 우리의 토함산석굴은 판석으로 축조한 것이다. 이는 축조석굴사원의 변천과 발절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로 높이 평가 된다.그러므로 토함산석굴과 잘 조화가 된다.

생각하기(1)
중국에서는 서구열강들이 많은 중국의 유물을 빼 돌렸다고 하는데 신장의 유적과 유물들은 완전히 방치된 상태였으며 유물에 대한 가치 마져도 사실 모르고 있었던 시기에 서구의 의식있는 학자들이 이 잊혀진 실크로드상의 유적들을 목숨을 걸수 찾아 나서면서 잊혀진 역사들이 하나하나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던 것이다. 많은 유물 특히 불교유물등은 무슬림들에 의해서 난도질 되었으며 근대사에서 문화혁명때에 무신론주의자들인 홍위병들이 다시 무참하게 나도질을 하므로서 얼마만한 유물들이 소실 되었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나마 서구학자들이 가지고 갔던 유물들은 학술적인 진실과 가치가 밝혀지면서 세상에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사실 외면되었으며 도굴꾼정도로 이야기가 되고 있다.
돈황에서도 많은 고문서들이 서양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에 막고굴을 관리하던 승려들의 탐욕과 무식이 이러한 것들을 서양인들을 손으로 해석하도록 했다는 사실은 자신들을 손으로 넘겨준 것에 대해서 지금은 양심적인 평가가 다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청말의 어지러운 중국의 정치상황 그리고 국공전쟁,소련과의 갈등,먹고 입는 문제로 최근까지 싸워왔던 중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었는 가는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어쩌면 서구열강들의 연구가 시작되자 중국의 학자들이 그것을 기본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소공탑
소공탑은 어민탑.보은탑이라고도 한다. 현지 위구르인들을 이곳을 투르판탑이라고 한다. 1778년에 건축하였다. 이 탑은 신장 최대의 고대탑이며 중국에서 유일한 고유의 건축품격의 고대탐이다. 아래는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원주형이며 높이는 37미터. 아래직경이 10미터이고 벽돌로 쌓아졌으며 15종의 기하도형 문양이 새겨져 있다. 탑의 중간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창문이 14개가 있다. 탑 입구에 석비가 세워져 있는에 윗면에는 한자와 위구르문자로 이 탑의 연유가 기술 되어 있다. 이 탑은 투르판군왕 술라이만이 아버지 이민의 준가르귀족반란(준가르국과의 전쟁)을 진압하는 과정중 세운 혁혁한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서 건축한 것이다. 이 탑 밑에는 투르판최대의 모스크가 있다. 탑과 모스크가 하나로 되어 았다. 모스크는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는 전당이 있고 몇천명이 예배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무슬림들은 매주와 절기마다. 이곳에서 대 집회를 연다.
이것은 신장에서 몇 안되는 이슬람건축물이다....

카르즈(카알징)
카르즈와 만리장성.경향대운하는 중국의 고대 3대공사에 속한다. 투르판의 카르즈는 수천갈래에 달하며 전체의 길이는 5천킬로미터에 이른다. 구조는 대체로 4부분으로, 수직으로 뚫어진 우물과 지하수로 지면의 수로와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작은 저수지가 있다. 투르판분지의 불쪽 보그다산과 서부의 카라우청산에서 봄과 여름에 대량의 눈이 녹아 흐러 계곡의 자갈사막으로 흐른다. 사람들은 산의 각도를 이용한 진기한 방법을 창조해내서 카르즈를 만들었으며 건조한 더운기후에 대량의 수분이 증발을 하는데 이 물을 지하로 흐르게 해서 관개농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딩호
투르판분지의 낮은 곳에 위치하며 투르판시내에서 남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동서의 길이가 40킬로이며 남북으로는 8킬로,면적은 152만평만미터이다. 가장 낮은 곳은 마이너스152.43이다(해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을 사해로 마이너스391이며 이곳은 두 번째로 낮은 곳이다. 이전에는 이 호수의 1천배가량이 되는 담수호였다고 한다. 지금의 아이딩호수는 서남부의 낮은 호수이외에 대부분이 마르고 주름잡힌 듯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 소금 결정체가 햇빛을 받으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광경을 볼 수가 있다. 현지의 위구르족에 의해서 월광호라고 이름을 지어졌다.
우름치에서 투르판으로 가는 도중에 염호가 있다. 이 염호는 중국의 14억인구가 일년동안 먹기에 충분한 소금이 있다. 이 소금은 요오드가 없어서 지금은 요오드를 첨가해서 가공하고 있다.

 

6)옌지(카라샤르)

바인골린주에 속한 옌지회족자치현이다. 이곳에 현을 세우면서 고대에 아기니왕조의 이름이었던 옌지를 현의 이름으로 체택을 했다.
카라세헤르라는 이름은 카라와 세헤르(도시)라는 말의 합성이다. 여기에서 카라는 원래 위구르어에서 검은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또한 카라는 위대한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카라세헤르는 위대한 도시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는 몽골차가타이시대에 이곳에 마가세르라는 군대가 주둔하였다. 군대가 주둔하면서 이곳의 이름을 카르세르라고 불렀으며 위구르어로 카라세헤르로 부그게 되었다는 견해가있다.

 

7)쿠챠(쿠처)

쿠차는 고대로부터 유명한 지역으로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름에 대한 많은 견해들이 있다.

1)중국어사료에스는 구스라는 말을 kjwitsi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이것이 쿠차라는 말과 비슷하다라고 하는 견해이다. 서양의 학자들고 이것을 kuci로 쿠차의 옛이름으로 본다. 이것은 토흐라부족의 이름으로 중국인들을 월씨라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로 구스라는 말은 서한시대의 것이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후에 산스크리트어의 이름으로 쿠샨이라는 이름인데 이것은 kusana이며 고대 그리이스어로는 kosana,페르시아오로는kusan으로 불렸으며 kusan은 토흐라어의 다른 방언으로 증명되고 있다. 일본의 학자중에 한사람은 kusan는 고대 쿠차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것은 퀴센-쿠차는 두 개의 말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것이 티벳어로는 guzan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퀴산(kusan-u는 위로 읽음) 서로 다른 민족들이 서로 다르게 발음을 하고 있는데 후에 kuqar에서 ri는 구대 퀴센어로 도시라는 의미로서 쿠차시가 되는 것이다.

2)쿠차라는 이름은 퀴센인들의 악(흰색)이라는 성으로 kutsi는 "흰색빛을 가진" 이라는의미이다. 이것에 대한 증거를 일본인 학자가 발견한 유물에서 puapa 혹은 buapa(u는 위로 읽음)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고대 토흐라부족의 언어로서 금꽃이라는 의 이것은 왕의 관직을 금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퀴센어에서 이것이 악(흰색)이라는 성이라는 것이 수나라역사에서 증명이 되었다.
그러나 쿠차의 이름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아직 일치되지 않은 의견이 있다.
 
쿠차의 역사는 불명확하지만 기원전 1,2세기에는 중국의 사서에 등장하고 있다. 한은 쿠차의 동쪽 50-60킬로 정도 떨어진 오루성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실크로드가 열리게되었다.
기원전65년 오손(우이순)으로 시집간 공주의 딸과 혼인한 쿠차왕 강빈은 1년동안 장안에서 체재하면서 한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한이 멸망하자 쿠차는 흉노와 제휴, 카쉬카르까지 속국으로 만들 만큼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나 후한 명제(73년)때 반초장군이 쿠차를 점령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하게된다. 그러나 반초가 죽은 지 4년만에 107년에는 서역도호부가 폐지되고 다시 독립왕국으로 성립된다. 그후 전진왕 부견이 파견한 여광장군과 쿠차왕은 일대접전을 벌였으나 7만 대 70만이라는 수적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고 만다. 여광은 낙타2만,말1만,곡예.기술사등 전리품을 가지고 하려하게 귀국을 하다가 전진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서회랑에서 후량국을 세운다. 돈황백마탑에서 말했듯이 구마라십은 중국불교계을 혁신한 인물로 중국사상사를 바뀌게 한 인물이다.
그 후 당은 다시 서역을 평정한 후 이곳 쿠차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서역 전지역을 호령하게 된다. 고구려유장 고선지장군도 이 쿠차를 중심으로 할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구려장군으로 망명한 고사계장군의 아들인데 쿠차의 안서도호부에서 장교로 복무.부도호까지 승진하고 747년 길기트원정을 떠나 이 일대를 평정한 후 안서도호로 승진하였으니, 서역일대는 물론 먼 서방제국도 그의 위명에 놀랐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민족의 후예 고선지와 혜초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다...
"왕궁의 화려함은 신의 거처와 같고 외성은 장안성과 흡사하며 방들은 장려하다"--현장법사
이날의 대도성 주위가 17,18리라고 현장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성을 8킬로미터 정도의 거대한 성곽도시였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당시 인구8만 남짓에 가람 1백여소, 승려 5천명이었다고 하니 사막도시로스는 대단한 규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는 한줌을 흙으로 변해 있다.
신라승 혜초는 인도를 다녀오면서 쿠차를 들렸다. "카쉬카르에서 한 달을 가면 쿠차(쿠샨-구스)에 도달한다. 안서대도호부로 중국군대가 대대적으로 집결된 것이다. 쿠차국에는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불교가 유행하고 있다. 고기.파.부추 등을 먹으며 중국승려들은 대승불교를 믿는다."
여기에서 보시다시피 혜초가 보았던 쿠차성은 당시만 하더라도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불교사원도 번영일로에 있었다.
현장은 또"큰성 서문 밖 길 가 좌우에 입불이 서있는데 높이가 90여척이나 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치가 어딘지 조차도 모른다. 이 입불상에서 5년마다 한 번씩 열린 일체평등의 대범회인 무차대회는 굉장히 유명하다. 위로 왕에서부터 아래로 병사,서민에 이르기까지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수십일 동안 개계를 지키고 설법을 듣고 경을 받는 일에 여념없이 지냈다고 한 사실로 보아 이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상상이된다.
후에는 9세기에 카쉬카르를 중심으로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점차 쿠차왕국도 이슬람을 받아 들이게 되면서 모든 시스템이 이슬람으로 되어버렸다.
쿠차의 가장 유명한 승려는 돈황의 백마탑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구마라쉽이라는 걸출한 인물이다.

키질석굴(크즐천불동-붉은천불동)
무자트강이 도도히 흐르고 이 북안에 깎아지른 절벽이 연이어 있는데 2킬로미터 절벽에 걸쳐 뚫려있는 수백 개의 굴들이 바로 키질석굴이다. 현재 2백36개의 굴이 확인되었지만 더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굴은 인적이 드문 벽지에 있는 탓인지 회교도들의 파괴는 그리 심하지 않다. 그러나 소련,독일,일본인들이 이곳에 벽화를 본국으로 가지고 갔다. 3세기에 만들어진 키질 최고의 17굴에서 10세기의 석굴에 이르기까지 벽화와 불교미술들로 가득찬 키질석굴은 대승소승불교의 불교미술에 인도.이란.중국적요를 조화시켜 가장 서역적으로 만든 특징있는 미술로 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오타니가 가지고 온 설굴의 벽화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8)카쉬카르

케시케르라는 이름은 고대에 빌라르사군이라고 하며 이것은 돌과 벽돌로 장식한 큰 도시라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이것은 9세기에 와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이름은 당나라시대에도 많이 알려져 있었다. 케시케르라(kashghar)는 카시(kash)와 가르(ghar)이라는 단어로 구성이 되었다. 카시라는 말은 카시티시라(옥)이라는 말과 가리(ghari) 즉 고대 상어로 지역, 국가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옥이 많이 나는 곳 이라는 의미가 된다. 중국어 표기의 (kashi 카스)라는 말은 카시커얼(중국어 표기)의 줄임말이다.

 

9)예켄

케쉬케르주의 현의 이름이며 하나의 강의 이름이다. 이 이름의 원래이름은 야르켄드로 후에 예켄으로 되었다. 이 이름을 많은 학자들이 카라한왕조때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되 견해라고 본다. 예켄의 중국어 이름의 사쳐라는 이름은 고대에 suakiwo였으며 sarki,sarko혹은 sake,saka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 것은 지금의 타시코르간주변에 sariko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다. 야르켄드이 곳은 중국어로는 루어치양으로 이곳이 루어의 고대의 발은 yer혹은 yar에 가깝고 창은 kancd에 가까운 발음이다. 이 곳은 기원전에 있던 것으로 야르륵 세헤르(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도시.혹은 친구들이 있는 도시)라는 의미가 있다.

아마니사한과 12무캄
아마니사한은 예켄왕조의 술탄 압두리시트의 왕비로 위구르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스스로 음악를 좋아 했다. 그는 그동안의 위구르인들이 부르는 대부분의 노래들을 모으기 시작하여서 이것을 근거로 위구르 클래식음악이 \'위구르 12무캄\'이라는 위구르 특유의 음악의 장르를 연다..
위구르인들은 고대로 부터 음악과 춤을 좋아 하고 즐기는 민족이다.
고대로부터 있었던 음악들을 모아서 음악체계를 형성한 것은 후대에 위구르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를 했다.위구르 음악에는 현대 오케스트라을 연상케하는 다양한 종류의 악기들이 있다. 이러한 악기들은 페르시아와 인도,그리이스,중국 등의 악기들과도 흡사한데 여기에는 많은 문화의 교류로 인해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
12무캄은 위구르 음악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갖는다.
12무캄은 12명의 노래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 위구르전체를 대표하는 12무캄이 있고 각 도시에 그 도시에 12무캄이 존재한다.
몇년 전 중앙대 음대 교수 중의 한분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열차와 버스만을 타고 터어키와 이란고원을 지나 파미르를 넘어 카쉬카르를 거쳐서 우름치에 오면서 한국의 음악의 뿌리는 찾아 보려했다. 그는 위구르음악을 들으면서 우리의 굿거리장단과 위구르음악의 기본 장단이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0)호텐

호텐의 고대의 이름은 우둔으로 이 이름은 몇천년전에 있었던 강성한 한 나라의 이름이다. 호텐과 우둔에 대한 해석에는 많은 사람들의 각기다른 견해들이 있다. 중국의 사료들에 의하면 이 이름의 가장 초기이름은 위티엔으로 이것은 카루시티어의 문서에서 khotan을 삭문자의 문서에서 불려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또한 중국어표기의 위티엔의 발음은 utian(u을 위로 읽음)으로 마하산파수트라에서 기록하고 있는 유우띠나예의 고대에 utiana(u을 위로 읽음)과 훈(흉노)들의 utiun(u을 위로 읽음)으로 불리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며 이것의 뜻은 현장이 쓴 책에서 오구즈 젖을 준 고향(나라)라는 것에 동의하며 khostan의 뜻은 땅에 젖 이라는 뜻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오구즈마칸(오구즈의 땅-오구즈는 위구르의 조상이다)이라는 것을 증거할만한 사료들이 있다.
또 다른 견해는 호텐은 고대의 요트칸고대도시의 이름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코탄,코단이라는 말로서 소를 키우는 고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또 다른 견해는 삭어의 hu-vat-ana라는 말에서 왔다라고 하며 이것은 쿠드레트릭(강한,용감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중국어사료에서 산스크리드어로 원래의 위티엔(utian)은 udyana이라는 말에서 왔으며 뒷그림자라고 한다.
필리오트라는 사람은 이 말을 과실이 있는 정원 또는 꽃동산이라고 설명한다.
러시아의 학자중에 부시르와 일본학자웅에 시라토리는 호텐이라는 말은 티벳어에서 왔다라고하며 티벳어로 gyu(yu)로서 고대 티벳어에와 현대어로는 g가 탈락되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yu는 위티엔의 위가 되므로 위의 티벳어 뜻은 카시티시(옥)이라는 뜻이다. 또한 티벳어로 도시와 마을들은 tong라고 하며 이것은 tan에 가깝다고 한다. 이것은 qustian,kustan,qustan으로서 이것의 뜻은 포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해들은 우둔이라는 말과는 관계가 없다고 본다.
메흐무트케시키리의 돌궐어대사전에서 우둔(오둔)과 호텐말이 같이 쓰여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둔이라는 말과 호텐이라는 말이 카라한왕조대에도 같이 불려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둔과 호텐의 음성학적인 변화과정을 밝히는 것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이 현상은 11세기이전에 호텐이이라는 이름이 우둔이라고 불렸던 것은 훨씬이전의 일이다
돌궐어대사전에서 udun을 투르크인들은 이것을 hudun-hutun-hotan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본다. 우둔의 뜻은 백성이다.
 
호탄 지역은 고대 피산, 위티엔, 간미, 취러, 징주에, 우루 등의 제국(諸國)지였다. 서한(西漢:유방<劉邦>이 세운 나라. B,C 206 - A.D 220. 서한이라는 명칭은 도읍인 장안<長安>이 후한의 도읍인 낙양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 때부터 시작해서 위티엔국은 정식으로 서한으로 귀속되었다. 唐(당:618 - 906년. 수(隋)의 뒤를 이어 오늘날의 서안<西安>인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여 이연<李淵>이 세운나라. 역자 주)上元 2년(675년)에는 이 곳에 피사 도독부와 십주(十州)가 설치되었다. 원나라(元:1206년 몽고족 징기스칸이 세운나라. 1279년 그의 손자 세조<世祖> 쿠빌라이 대에 이르러 남송<南宋>을 멸망시키고 국호를 元으로 개칭함. 역자 주) 몽고종(蒙古宗) 왕의 분봉지 였기도 했으며, 원나라 16년부터26년(1279 - 1289년) 까지 선위사(宣慰使) 원수부(元帥府)가 설치되기도 했다. 1759년 허티엔 대신(大臣)급 기관이 설치되기도 했다가 예얼치앙 대신 급 기관의 관리를 받기도 했다. 광서(光緖:청<淸> 덕종<德宗>의 연호 1875 - 1908년. 역자 주) 9년(1883년)에는 허티엔은 독립주로, 위티엔은 직할지로, 두개의 루어푸현으로 나누었다가 민국(民國:손문의 영도아래 신해혁명<1911.10.10일>을 계기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중화민국의 명칭. 역자 주) 2년(1913년) 독립주가 현(縣)으로 개정되기도 했다. 민국 9년(1920년) 원래 카쉬카르도(道)로 분할되어 속해 있던 예청, 피산, 허티엔, 위티엔, 모위, 루어푸 6개 현과 처러 현등의 허티엔도(道)로 성립되었다가 후에 행정구로 바뀌었고, 행정장관공서(公署)가 설치되었다. 민국31년(1942년) 예청이 사처(야르켄트莎車) 전문공서로 분할되어 나갔고, 민국32년(1943) 행정장관공서가 행정독찰(독찰:감독하며 감찰하다. 역자 주) 전원공서로 바뀌었고 행정구도 전구(專區)로 개정이 되었다. 신 중국 성림이후, 1950년 초 허티엔 전구(專區) 전원(專員)공서가 건립되었고, 1959년 허티엔(호탄和田) 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77년 허티엔지구 행정공서로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맘 자파르의 성묘
스웨덴의 탐험가 헤딘은 그가 들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옛날에 어는 곳엔가 모든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성묘가 있었고, 원근 각지에서그 곳에 참래를 마친 뒤 자신의 기원을 성취하기 위해 돈이나 옷감 혹은 가축을 가지고 와서 헌납했고, 자연 그 성묘를 관리하는 이맘은 아주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이암 밑에서 수행하는 제가 한 사람이 하루는 자기도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행운을 찾아보겠노라고 결심하고 스승으로부터 나귀 한 마리를 얻어 길을 나섰다고 한다.
그는 나귀를 끌고 이곳 저곳 헤매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 주지 않았다. 하루에 한 끼 먹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고 그를 따라다니던 나귀도 병들어 죽고 말았다. 나귀를 땅에 묻고 난 다음 나는 앞길이 막막해서 주저앉아 그 무덤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우는 연유를 묻자 그는 가장 고귀한 분이 죽었기 때문에 슬퍼서 우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무덤에 묻힌 \'고귀한 분\'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을 한 뒤 돌아갔다. 이 성묘가 신통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지면서 점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참배객들이 바치는 헌금으로 그 묘지도 그럴싸하게 꾸미고 사당도 지었다. 하루는 이 유명한 성묘에 관한 소문이 그의 옛 스승의 귀에 들어갔다. 그 역시 이 성묘를 찾아왔다. 참배를 마친 그가 헌금을 하면서 성묘의 이맘을 가만히 살펴보니 과거 자신의 제가였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놀라서 제가에게 다가가 물었다.
"도대체 이곳에 묻힌 분이 누구인가?"
그 제자는 주위를 살핀 뒤의 귀에 속삭였다.
"바로 스승님이 제게 주신 그 나귀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스승에게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스승님이 모시고 있는 성묘에는 어느 분이 묻혀 있는 겁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여기 묻혀 있는 분의 부친이라네"

 

11)타림

신장과 중국내륙에 있는 가장긴 강의 이름이다. 체르첸,롭누르,샤야르현도 이으름으로 불리는 향과 촌들이 있다. 타림강유역에 둘러싸고 있는 분지를 타림분지라고 부른다.
타림이라에는 여러 가지 설이있다.
a.산스크리트어
b.위구르로 경작이 가능한 땅
c.호수와 사막으로 둘러있는 강
d.차가타이어로 창공,하늘이라는 뜻의 타람이라는 말에서 나옴
e.고대 관직이름
f.탱으르(하늘,하나님)이라는 뜻의 테림이라는 말이 변해서 된 것이다.
타림강에서 흐르는 물을 탱으르수(하늘이 주는 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성스러운산 혹은 성스러운 물이라고 한다.

 아프라스얍의 자손들의 왕후와 왕자들에게 타림이라는 관직으로 이들의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었고 이들을 신의 위치에서 숭배를 했던 것으로 후에 왕의 아들들과 궁중의 부인들이 이 관직을 얻어서 사용하였다.
메흐무트케시키리의 돌궐어대사전에서도 위의 해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12)테클리마칸(takelamagan)

타림강을 따라서 둘러싸고 있는 남장에 자리잡고 있는 사막이다. 이 사막에 대한 몇가지 견해가 있다.
a.서역에 현장보다도 2세기먼저 왔던 파시엔은 이 사막을 모래강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자기가 이해한 것으로 다른사람들에게 묘사를 하였다.
b.대규모의 유동사막(대당서역기)
c.텍티와 마칸이라는 말의 합성어로 에슬리 마칸,예르아스티디키 괴헤르지민(땅밑의 보물같은 땅),스르륵마칸(신비로운땅),틸스마트마칸(신기한땅)등의 의미.
d.테키,테키릭(포도,포도원)이라느 의미로 포도의 고향,포도가 나는 땅).
e.테릭마칸(버려진땅).
f.키르셍 치칼마이두(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g.투르크어로 모래바다.
h호텐,키리에등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의로는 체힐마칸(힌디이란어의 크륵마칸)이라는 말로서 쿠차,코르라등지의 사람들도 이러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의 뜻은 없어진땅이라는 의미이다.
i.테케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
j.돌궐어대사전에스는 궁궁궁...거리는 소리에서 나온 테치라는 말이다라는 견해..
k.고대 토하르부족의 이름의 다른 표현으로 타크라 마칸(타클라인들의 땅)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지금도 호텐의 시골에는 토흐라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동네들이 있다. 토하르부족은 원래 돈황주변에 살고 있었다. 서한시대에 서역의 토하르부족은 전쟁으로 인해 이동을 하여서 체르첸등에 정착을 하여서 위진시대에 정권을 세웠다. 이는 토하르국으로 당현장은 기록하고 있다.

 

13)코를라

코르라라는 이름에도 많은 견해가 있다.
a.쾨륑라(쾨르-보다 동사의 이인칭복수명령형 보아라!!!)라는 말에서 나왔다.
그러나 신장의 지명중에서 특히 투르크어지명에서는 동사로 지명을 한곳이 한번도 없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약간은 납득이 가지 않은 견해라고 한다.
b.돌궐어대사전에서는 케울리-코이라 라는 말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강의 입구라른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도시는 이전에 작은 도시로서 위구르이트쿠트시대에 세워진곳이다. 중국어사료들에서는 "쿤 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마도 위구르어로는 "쾨륵뤼기"라는 것이며 이것은 코르라의 이름이 되었다 라고 한다. 이것의 의미는 아름다운풍경,아름다움곳,수려한곳등의 의미이다.
위에서 말한 강의입구라는 견해도 타당할 수 있는 것은 코를라시에는 퀴체데르야라 흐르고 있다.
c.몽골이 라마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라마승이 이곳에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다니는 빙빙돌리는 물건이 있는데 이것의 이름이 코르라고 한다. 한 승려가 퀴체강에서 돌리다가 부주의해서 강물에 빠뜨렸는데 이 승려가 "나의 코르"라는 말의 발음이 "코르라"라고 해서 이곳의 이름을 코를라라고 했다는 설이있다.

 

14)준가르분지

신장북부에 하나의 큰 분지이다.
중가르의 원래이름은 야르시 야즈이키로서 말타기경기하는 평원이라는 의미이다.
17세기 몽골의 오이라트부족의 한 부분인 중가르부족이 이 곳에서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가르 혹은 중가리에라고 부르며 이 것의 뜻은 몽골어로 왼쪽날개라는 뜻이다. 이 이름의 유래는 이 중가르부족이 오이라트의 오른편에 살고 싶은 희망을 나타내었다고 라고 하는 설화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는 이말은 고대 훈(흉노)어로서 주안가르라는 말이다. 주안가르는 군대의 왼쪽날개라는 뜻이다. 참고로 군대의 오른쪽날개는 브란가르이다. 몽골의 투구룩퇴무르한의 후대들의 한 우루시(주)의 한 부분은 이 곳을 자기들의 왕조이름으로 부르면서 중가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7.실크로드상의 민족들

 

1)흉노(훈)

흉노는 하나의 민족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연맹의 성격에 가깝다. 그래서 흉노를 하나의 민족개념으로 생각을 하면 많은 오해를 낳게 된다.
흉노는 시베리아 고아시아족과 우랄족 등 비 알타이계 부족들도 다소 있으나 대개 투르크.몽골.만주-퉁구즈.한족등 소위 알타이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연합체로 지도층은 알타이어의 하나인 투르크어의 한 방언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이미 중국에 한조가 건설되기 이전에 스텝을 석권하고 있었다.
초기에 흉노제국의 통치영역은 호르콘(오르혼)강,셀렝가강 유역과 외튀켄평원 그리고 오르도수지방이었다. 이 당시 스텝의 서쪽, 즉 아무강과 스르(시르)강 유역과 카스키 해 지역에서는 스키타이족이 활동하고 있었다. 흉노족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들로써 그들의 적국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편견이 내재되어 있다.
그들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4세기 말경으로서 중국의 전국시대와 때를 같이한다. 흉노가 중국을 크게 위협하는 고로 진나라는 기원 221년 만리장성을 구축하기에 이른렀다. 흉노는 다른 북방민족들과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며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흉노는 연.진.한이 계속되는 동안 이들 중국 왕조들에게 있어 무척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중국은 이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도 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황제가 구축한 만리장성은 감숙성의 린타오에서 요동에 이른 것으로 약5천킬로미터에 달한다.
진의 만리장성 구축과 적극적인 군사대응으로 흉노 등 북방세력이 잠시 쇠퇴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묵돌(튀멘-\'일만\'이라는 뚱)의 등장으로 흉노는 세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흉노제국의 창립자는 묵돌(튀멘)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여러 유목부족 집단들을 통합한 후에 선우(텡그르쿠트:탱그르-하늘.천자. 쿠트-하늘의 절대적인)라는 공식적인 왕명을 가짐으로서 흉노제국을 출범시켰다. 묵돌은 자신의 아버지 튀멘이 후궁 연씨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는 것에 반발하여 10만기병대를 출동시켜 구테타를 일으킴으로서 정권을 탈취하였다. 선우가 된 묵돌은 정권을 강화한 다음에 먼저 서쪽으로 천산산맥과 감숙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을 공격하여 붕괴시키고 후에 동쪽으로 만주서부지역에 위치한 동호국을 명말시키므로서 명실공히 중국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이처럼 북방을 장악한 묵돌은 중국까지 공격을 했고 기원전 201-199년 중국과 흉노 사이에 치열한 전쟁있었으나(백등산전투) 마침내 묵돌은 한 고조를 격파하고 승리하였다. 이에 한 고조는 흉노에게 매년 조공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흉노와 화친조약을 맺었다. 기원전 198년 한의 신하 유경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화친조약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흉노 선우에게 공주를 출가시킨다. 2.비단, 곡물 등 매년 조공을 바친다. 3.흉노와 한은 동등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한다. 4.만리장성을 경계로 상호 침입을 중지한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화친조약은 중국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으나 군사적인 우위에 있는 흉노에게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영역 확장을 위한 묵돌의 군사 원정은 계속되었다. 그의 정복 사업의 결과로 묵돌의 통치 시대에 제국의 경계는 동쪽으로 만주 지방, 서쪽으로 아랄 해, 북쪽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쉬강 유역, 그리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위수지방과 티벡고원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로서 약 26개의 종족과 국가를 복속하여 통치권에 두었다.
이처럼 묵돌은 중국을 위협하여 중국과 불평등 화친조약을 맺고 수 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동북아시아에서 최강의 세력으로 제국을 발전시켰다.
마침내 중국은 가능하면 이를 건드리지 않고 유화정책을 쓰면서 분열과 분리정책을 함께 써나가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이치이(오랑케로 오랑케를 무찌른다)정책은 이 후로 중국의 전통적인 북방정책의 노선이 되었다.

기원전174년 묵돌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노상선우가 등극을 하였다. 노상은 부친의 정책에 따라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복속국에 대한 통치를 강화시키고, 중국 도성 장안 근교까지 진군하는 등 중국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압력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화친조약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흉노의 침입이 잦아지자 중국 조정 내에 흉노 토벌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노상선우를 이은 군신선우 때에 흉노가 약해진 틈을 타서 중국은 흉노제국 내의 민족 분열과 흉노족 지도층 내부 분열을 조장해 흉노세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렇게 흉노제국이 약화되자 후한의 광무제는 지난 60여년간 지속된 화친조약을 파기하고 흉노정벌에 나섰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국가 경제의 주요 재원이 되는 비단의 수출 증대를 위해서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흉노 정벌이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이리하여 한무제는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를 회복할 목적으로 흉노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흉노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이 후에 제국 내 분열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흉노는 남과 북으로 분열하게 되었고, 비단길에 대한 통제력 상실과 경제가 궁핍하게 됨으로써 패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 마침내 흉노는 기원 후 155년 다른 중앙아시아의 민족이면 몽골계로 추정되는 선비족과 연합한 중국 후한에 의해 멸망하였다.
흉노제국이 멸망한 후 스텝지역에는 혼란과 정치적인 불안정이 시작되어 5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중국 역사 기록에 분열시대 2세기-6세기고 보고 있는데 이 시기에 남흉노의 후세들로 추측되는 부족들이 수 개의 왕조를 세웠으나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왕조는 거의 없었다.

한편 흉노의 쇠망으로 인해 생긴 정치적 공백은 어떠한 스텝 세력에 의해서도 메워지지 못했다. 최조의 유목제국이었던 흉노의 구체적인 실정에 대해서는 사료의 불충분으로 인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수세기 후에 등장한 투르트족(돌궐족)이 세운 돌궐제국은 흉노제국의 군사와 국가조직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이를 흉노의 전통이 후대 유목제민족제국 내에서 전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흉노의 언어는 알타이어이며 지도층이 사용한 어어는 기원 후 3세기 북위(타부가치)에서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궐어의 원시어이었으리라 추정된다.
흉노의 사회에서 혼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부족간의 문제였으며 형이나 동생이 죽었을 때 형수나 계수를 아내로 삼는 수혼제도가 존재했다.
흉노의 신앙체계에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탱그르쿠트)는 천신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중국의 황제를 천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흉노의 사상에서 전달되었다고 한다
흉노의 사회는 샤머니즘의 흔적도 많이 나타나는데 의술을 행하는 무당을 박시(Bakshi)라고 불렀다.

훈제국

흉노제국이 선비족과 중국의 연합군에 의해서 AD155년에 멸망한 후에 흉노의 지도층은 세력을 잃고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어 서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서진하여 지금의 카자크스탄과 남시베리아에 이르러 이 지역에서 우랄계 부족들을 비롯한 선주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중국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 갈고 닦은 우수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선주족들을 장앙하고 규합하여 새롭게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 후 흉노족들을 계속 서진하여 우랄 산맥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곳에서 게르만계 고투족들과 접하게 되었다. 약 2세기 동안 우랄계 부족들과 고트족등과의 접촉을 통해서 혼혈이 이루어 지면서 알타이계 흉노족들은 특히 언어적으로 우랄화가 되었다.
흉노제국이 분열이 된 후 2세기가 지나서 유럽에 돌풍을 몰고 온 훈족은 바로 이 흉노제국의 후예들로서 중국의 중앙아시아 정벌 후에 서북쪽으로 이동한 집단일 가능성이 많아. 학자들이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군사 전술, 문화의 유사성, 그리고 흉노와 훈 두 이름의 유사성 등에 기인한다. 흉노라는 이름은 우리가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원시 알타이어 \'흉hyung\'이라는 말과 \'노\'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생긴 말고 훈 또는 흉족을 경멸시 하여 부르는 것으로 중국인들에 의해 만들진 조어이다. 즉 흉노인들을 자신들이 흉 혹은 훈이라고 불렀으나 중국인들이 경멸 조로 이 말에 노예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이다. .
훈제국은 기마를 사용한 기동력과 기마전술을 가지고 동고트를 공격하고 게르만미족의 대이동이 있게 했으며 훈족에게 밀린 서고트의 로마 유입으로 395년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급격히 분열된다.
북흉노제국(AD155)을 멸망시키는데 있어 중국과 함께 일조을 담당했던 몽골계 선비족은 몽골리아 지역에서 흉노의 대체 세력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며 흉노 이후에 몽골리아는 약 2세기 반 동안의 권력 진공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기원 후 400년경에 되어서야 강력한 새로운 유목민족제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연이라고도 불리워 지는 연연이다. 그들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자료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중국 사료들에서 나타난 연연에 관련된 내용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연연은 타부가치tabach즉 북위(A3D86-543)의 창립자인 탁발규(AD386-409)의 치세 기간동안 역사 무대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다. 그 무렵 사륜이라는 지휘한이 나타나 카라샤르지방에서 소왕국을 건설하고 있던 고차(캉키-위구르민족의 조상이라고부른다.)를 명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까지 세력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중국에 이웃한 이 강력한 세로운 제국의 기원에 대한 고찰은 활발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그들에 관한 진부한 계통학은 서로 일치조차 안되어 있는 실정이다. 어떤 자료에는 흉노와 관련이 있다고 하고 어떤 자료들은 동쪽의 미개인인 동호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위왕조의 연대기에 의하면 연연은 277년에 위왕조 자신들의 조상에 의해 포로로 잡힌 노예들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정치적인 목적의 허풍과 과장이 다분이 첨가되어 있으리라 보여진다. 연연이라는 이름은 다소 경멸적인 별명인 것 같다. 연연은 \'꿈틀거리는 벌레\'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두 개가 합성된 이름이다.
북위는 429년 이후에 오손(우이순),고차(캉키-위구르의 조상) 등 소왕국들과 동맹을 관계를 맺어 연연과 싸웠다. 448년 열반과의 동맹은 연연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북위와 열반 동맹군의 공격으로 연연의 통치가가 사망하지만 연연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다.
결국 북위 왕조는 연연을 패배시키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수동적으로 연연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 성벽을 건설하는 처지가 되었다.
후에 북위는 연연보다 먼저 534년 멸망을 하게 된다.
한편 연연에 복속되어 철공업에 종사하는 돌궐족이 6세기초에 연연으로부터 독립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먼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북위의 도움을 받았으리는 추측을 하게 된다. 연연 내 돌궐족의 세력이 강해지자 돌궐의 부족장이었던 부민은 연연의 공주와 결혼할 것을 요청했는데 대장장이 출신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하자 이를 구실로 552년 북위의 계승자 서위(535-554)이 도움을 받아 연연을 공격하여 격퇴를 시킨다. 이 때 연연의 통치자는 자실을 하고 곧 이어 연연은 내부 분열로 패망하게 된다. 555년 돌궐은 연연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3천명의 연연인을 참수형에 처했다. 이로써 연연이라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역사의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탁발혹은 토파, 타브가치라고도 불리는데 2세기에서 6세기말로 이어지는 중국역사의 암흑기에 출현하여 북중국을 통치한 투르크계 국가이다. 이들은 연연과 계속적으로 대립하였는데 후에 지도층이 성씨까지 중국식으로 바꾸는 등 철처히 중국화됨으러써 중국에 동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북위의 통치자들은 국사적 귀족으로 남아있으면서 모든 행정을 중국인들에게 맡겼었다. 북위는 불교를 수용하고 국교화했으며 중국에 불교를 토착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돌궐(투르크)

돌궐은 스텝의 여러 민족들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을 문자를 남긴 민족이다. 몽골리다 북부의 오르콘(오르혼)강 유역에서 발견된 투르크어비문은 돌궐제국과 당시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비문에는 돌궐제국을 쾨트르크제국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쾨\'이라는 말은 청색을 의미한다. 이 비문을 통해서 우리는 돌궐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스텝의 유목민족으로써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비문을 통해서 당시의 중앙아시아 역사에 대한 중국의 사료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돌궐이 스텝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에 독립된 2개의 돌궐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을 해석하여 볼 때 돌궐은 하나의 제국을 이 이루어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두 형제들이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는 유목민족의 전통을 오해하여 동돌궐과 서돌궐을 다른 두 개의 나라로 오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두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었으나 이것은 통일된 한 나라였던 것이다.
돌궐 자신과 스텝의 서쪽 국가들에 의해 투르크라는 말은 6세기말 비잔틴 역사가 아가티아스의 비쟌틴문서과 아랍 시인 나비가트 알 주부야니의 아랍문서에서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문서에서는 12세기 초기에 토르크(Tork) 형태로 나타난다.
그 뜻이 1072년 중세 카라한왕조의 투르크학자 마흐무드 카쉬카리가 그의 사전에 \'강력하다\'라고 기록하면서부터이다. 이 후로 많은 역사 학자들이 마흐무드의 민간어원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세기말에 A Vambery는 이말이 ture(튀레)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지금 대부분의 학자들은 후자의 이론을 따르고 있지만 투르크인들 자신들을 전자 마흐무드가 해설한 \'강력하다\'라는 의미를 주장하고 그것이 합당하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다.
한편 돌궐이라는 말은 6세기 중국문서 주서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중국과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은 투르크족을 돌궐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중국인이 투르크인들을 소위 북방 오랑케라 하여 경멸적으로 칭하여 만들어낸 조어로서 투르크와는 별개의 말이다 돌궐의 뜻은 \'사나운 말\' 같은 큘혹은 퀼이라느 뜻이다. 즉 이말은 돌궐족 초기의 부족면이 궐 즉 큘혹은 퀼임을 암시하고 있다. 큘혹은 퀼은 궐족의 이름은 퀼테킨,퀼카간,퀼쵸르등 돌궐제국의 왕의 호칭에 많이 나타난다.
돌궐제국을 이룬 투르크족은 흉노의 하나로 보여지면,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산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족을 투르크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그들이 알타이 산록에 거주하였고, 알타이산이 투구처럼 생겨 그와 같은 이름이을 붙였다고하나 이것은 당시의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이 부족의 원래직업은 철공업이었으며 처음에는 연연에 복속국이었으나 후에는 같은 알타이계족속인 연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은 스텝민족 사상 처음으로 마을과 도시를 건설함으로서 초원지대에서 도시를 건설하였다.
 
돌궐제국의 성립 역시 스텝제국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지도력 있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돌궐제국은 부민 혹은 투멘이라고 하는 고대 투르크족 지도자에 의해 545년겨 건설되었는데 그는 552년 서위와 연합하여 연연을 멸망시키므로써 스텝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553년 부민이 사망한 후에 아들 무칸과 동생 이스테미가 동부스텝과 서부스텝을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다. 동돌궐의 지배자는 전체 돌궐제국을 대표하는데 그의 왕호는 카간이면 서돌궐은 형식상 동돌궐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서돌궐의 통치자 관직명은 제2의 통치자란 뜻으로 야부그(Yabgu)였다. 한편 돌궐은 초기에 중국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세력을 키우며 침략을 통해서 경제적인 부를 축척했다. 그러나 583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미 내부 분열로 인해 동서로 나뉘어져 있던 돌궐은 수나라에 의해 이용당하기 시작하였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서 실패하여 멸망하게 되자, 이 시기를 이용하여 돌궐이 잠시 부흥하는 듯 했으나, 곧 이어 등장한 당나라에 의해 반 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683년에 이르러 쿠툴루그 일테리쉬에 의해 돌궐제국은 당나라의 지배에서 벋어나 독립하여 제 2의 돌궐제국인 후돌궐을 세웠다. 돌궐비문에 나타난 빌게 카간, 퀼테킨 등은 바로 이 후돌궐의 집권자 들이다. 일테리쉬는 독립 후 10년만에 동부 스텝을 장악하고 제국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스텝 지역의 반복되는 역사에서 보여지듯이 돌궐의 통치영역은 않아 각종 유목민족부족들의 세력 쟁탈전의 전장을 변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742년 바스밀부족이 위구르,카르룩부족과 세력을 합하여 어린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를 제거함으로써 돌궐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 후 바스밀과 카르룩, 그리고 위구르사이의 세력다툼에서 위구르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함으로써 위구르제국이 출범하게 된다.
돌궐제국의 대외관계
돌궐의 대외관계는 과거의 스텝제국들이 그러했듯이 주로 충돌과 전쟁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쟁들은 대개 경제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비단길에 대한 지배와 관련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민족은 중국과 비잔틴제국의 교역로를 지배했었다. 비단길을 통한 동서 무역을 페르시아계 소그드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소그드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 스텝을 장악한 제국에게 이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보호를 받다 왔었다.
557년에 돌궐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렵하여 그 동안 페르시아에 위협적이었떤 아프카니스탄 지방이 에프탈리테를 붕괴시키고 제국의 영토를 동부 킨강산맥에서부터 트란속시아나 지경까지 넓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장악한 돌궐제국은 페르시아와 무역협정을 주진했으나 이에 실패자하 곧이어 567년에 소그드인 비단업자 마니아크를 단장으로 비잔틴제국에 외교사절을 보냄으로써 돌궐과 비잔틴이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오랫동안 페르시아가 이 교역을 장악해 왔었는데 돌궐제국이 등장하여 소그드상인들을 지배하게 되자 페르시아와 돌궐제국은 불편한 적대관계가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돌궐이 중국에서 산 비단을 페르시아에게 팔고 페르시아가 다시 비잔틴에게 파는 형식이 구상되었으나, 이러한 구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돌궐은 비잔틴과의 직접적인 무역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직접무역은 돌궐제국과 비잔틴제국 간의 외교관계의 증진으로 발달했는데, 돌궐과 비잔틴 간에 성립된 우호관계는 특히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잔틴에게 동서에서 페르시아를 위협한다는 의미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아바르인에 대한 기득권문제로 비잔틴과 돌궐이 한때 긴장하기도 했으나 비교적 돌궐과 비잔틴의 관계는 무난히 지속되었다. 돌궐과 비잔틴의 호의적인 관계는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잔틴제국으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돌궐과 비잔틴과의 관계는 군사적 동맹관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흑해북부와 루마니아 지방에 있던 아바르를 중간에 두고 돌궐과 비잔틴이 장기적으로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은 기독교화하기 시작한 아르바를 자신들의 복속국을로 취급하였으나, 돌궐은 전통적으로 아바르인들이 돌궐의 속임을 주장하고 나왔다. 학자들은 월지국.연연.에프탈리테.아바르가 인종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하면 이들 국가들의 구성원이 대부분 인도-유럽계통의 토하르부족이라 추정되지만 이들 국가의 지배층은 알타이계 부족일 가능성이 많다.

한편 돌궐제국의 중국과의 무역은 중국에게 말을 주고 비단을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러한 무역에서 중국은 그렇게 큰 이익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돌궐이 그들을 물건을 가져다가 강제로 떠맡기는 식의 억지 무역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돌궐과의 충돌을 원치 않은 중국은 대부분 긔 요구에 응했다. 또한 중국은 자신이 대국이라는 의식 속에서 돌궐이 가져온 물건을 조공으로 여겨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비단길을 장악한 돌궐과 생산국인 중국과의 이러한 불균형한 무역관계와 무역에 대한 양국의 개년차이는 결국 양국사이에 무력 충돌을 야기시켰다. 즉 물량이 많은 중국은 돌궐이 무역품으로 가져오는 하찮은 것이지만 조공으로 생각해서 답례하는 형식으로 무역을 했었는데 돌궐은 경제적 목적으로 가진 무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개념의 차이는 돌궐이 더욱 더 불균형한 무역을 강요하자 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슬람교의 침투와 탈라스국제전
돌궐제국이 건설되던 당시에는 애니미즘적인 샤머니즘이 신앙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나,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사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7세기초에는 서돌궐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기에 이르렀다. 동돌궐에서도 바로 원로였던 톤육쿡이 불교가 국민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 즉 스텝의 기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교를 반대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비교적 성행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경우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에 의해서 경교라고 불리우는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식간에 아라비아반도를 휘쓸어 버린 이슬람의 아랍인들은 7세기중엽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를 이슬람화시킨 후 중앙아시아의 서쪽 경계를 같이 하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을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8세기중엽에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아랍이슬람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어 기존세력인 돌궐,티베트,당나라등과 함께 아랍이슬람움마야드왕조도 세력 경쟁을 하게 되었다. 점점 박트리아,부하라,사마르칸트 지역을 지배하였다. 돌궐은 내부분열로 이것을 제지할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스텝의 서쪽 트란스속시아나 사람들은 이슬람영향권으로 들어갔고 이슬람화되었다.
이렇듯 아랍이슬람제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이 시도되고 있을 때 당나라는 713년 현종이 즉위하여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티베트 역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팽창주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말하자면 돌궐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서 주변의 세 제국이 팽창하려는 야욕을 품게 된 것이다. 곧 이어 734년 스텝 제국 돌궐은 붕괴되고 그 뒤를 이어 투르크계인 위구르가 스텝이 동쪽에 세력을 구축하여 위구르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747년 당나라는 고구려 출신 장군의 지휘하에 파미르고원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여기에서 티베트를 크게 물리쳤다. 750년 중국이 타쉬켄트 원정 때 자행했던 잔인한 약탈 행위는 그 지역 서부 투르크인들로 하여금 이슬람압바스왕조 칼리프엑 원정을 요청를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랍이슬람압바스군대는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는 티베트,돌궐계 카르룩과 연합하여 전쟁에 돌입했다. 751년7월 이들 동맹군과 중국-위구르연합군이 중앙아시아 타쉬켄트부근 탈라스강 유역에서 충돌하여 이른 바 탈라스국제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아랍-티베트-카르룩동맹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심장부인 투르크스탄은 1세기 동안 티베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스텝 서부 트란속시아나는 압바스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탈라스국제전은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는데 이로 인해 이때부터 트란속시아나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쇠퇴하게 된 것이다. 또 이슬람이 확장되었으며 그 이후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계속 팽창하여 오늘날 거대한 이스람세력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 후 투르크미족은 두 개 이상의 상이한 지역으로 구분되어 각각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서투르크족은 이슬람세계의 영농정착국가로 변화하였고 후에 셀쥰제국을 건설하여 중동과 페르시아의 이슬람 보호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동투르크와 중부투르크는 스텝전통을 유지하며 불교를 믿다가 후에 몽골이 등장하여 세계를 정복할 때 그 근거지가 되었다.

혜초와 고선지장군
지금까지 우리는 혜초와 고선지장군에 대해서 우리민족을 빛낸 사람으로만 인식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한번 생각해 볼 문제는 이 들이 모두 당에 배경을 두었다는 점이다. 당은 당시에 세계제국으로 실크로드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팽창일변도의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한 영향으로 신라는 당과 손을 잡고 고구려를 치고 한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한반도를 통일한 것에 대해서는 신라의 염원이었겠지만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수나라의 대군이 침략을 해 왔을 때 우리선조는 지혜로 막아내는데 성공을 했으며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의 실패로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고구려는 만주를 포함하여 발해등지 지금중국의 동북부와 몽골지역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신라는 통일을 담보로 고구려의 넓은 영토와 투르크민족과의 네트워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선조들은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을 하게 되며 정치,경제,문화,언어등의 모든 분야에 중국의 전면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고선지는 고구려유민으로 사실 고구려를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닌 것인데 우리가 그의 기계를 높이 평가할 필요는 있지만 그의 정체성에는 박수를 보내는 것은 굉장한 사대주위적인 발상이 아닐수 없다.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배웠던 것 처럼 당의 장안에는 신라방이 있었다. 신라방에는 1천명이 넘은 신라의 유학생들이 중국의 선진문명을 배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역사의 헤게모니를 누가 이끌어 가느냐에 대해서 보여준다. 당연히 무력이 강한 나라가 이끌어 가는 것이 법칙으로 되어 있다. 당은 그러한 면에서 무력과 문화를 갗춘 신라가 따라야 할 모델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당은 신라와 연합해서 고구려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젊은 남자들의 대부분을 지금의 실크로드상의 황량한 사막지역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신라의 내정간섭에 들어가는 것이 시작이 된다. 이것은 지금의 현실에서 보면 침략의 행위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신라는 그것도 고마워서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서 줄을 이어서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과 뜻이 있는 사람들은 장안에 와서 당을 배우면서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중국사관과 중국의 문화에 젖고 중국에 동화되어서 신라로 돌아갔다. 이들의 눈에는 신라(자신의 본국)의 문화와 언어와 생활은 너무나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중국의 문명과 언어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면서 으시대기에 이른다. 이들을 우리는 사대부라고 부른다. 이러한 정신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신라승려가 중국의 심장부에서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고 이것이 세인들에게 알려지고 있는데 세인들과 중국인들은 이것을 보면서 더욱 자신들의 중화의 위대함과 우등함을 자랑하는 계기를 더 신라인들이 만들어 주었던 것이 아닌가..
세종대왕은 신숙주등을 중심으로 한글을 만들었다. 신숙주는 위구르어 몽골어등에 능통한 언어학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도 역시 한자문화에서 한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몽골어(즉 고대 위구르문자)를 바탕으로 한글이 만들어 졌으며 이것은 이전에 중국이 이두문자등에 비하면 과학적이고 독창정이며 우리민족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을 태도는 어떠했는가?
이들은 "이것은 천한 사람들이나 쓰는 글이다"라고 치부했다... 이들이 바로 당시의 우리지식인들이 였으며 사대부들의 태도가 아닌가...

 

3)위구르(Uygyr)

위구르의 의미
위구르라는 이름은 8세기에 몽골리아에서 흑해까지 돌궐제국이 확장될 때 투르크계 우목민족 명으로 나타나느데 그 뜻은 \'연맹.군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은 11세기의 유명한 카라한시대의 언어.역사학자 메흐무트 카쉬카리가 쓴 \'돌궐어대사전\'에서 위구르란 이름의 의미는 \'강하다, 용맹하다,\'등의 의미라고 해설을 하고 있다.
위구르인들은 카쉬카리의 해석을 믿고 신뢰하며 그렇게 스스로 믿고 있다. 언어학을 연구하는 위구르학자들은 카쉬카리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북위시대(384-534)에는 高車(중국식 발음으로는 Gaoche 까오쳐 라고 읽는다. 이 고차라고 하는 이름은 \'높은 차를 탄 사람들\'이라는 의미로서 위구르어로는 \'캉키\'라고 한다. 중앙아시아와 유목사회에서는 가장먼저 마차를 탄 사람들이 위구르인들이라고 한다.), 수나라 때에는 외이허, 당나라 때에는 回 (후이허), 송나와 원나라시대에는 외이우얼, 지금도 외이우얼(중국인들은 이렇게 부른다.) 이것은 중국어 음역의 한계로 다른 이름들을 원음과 같게 옮기기 못한다.
위구르인들은 이리가 민족의 기원일 뿐만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대표적인 靈山 설화에도 이리는 특별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설황에서 이리는 국가에 은총과 행운을 주는 성스러운 바위가 중국으로 넘어간 이후 환란 속에서 방항하는 위구르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존재로 묘사 되고 있다.

톨라위구르
위구르인들은 흉노의 먼 후손이며 직접적인 조상은 툇뢰스부족연맹에 속해 있는 일개 부족이었다. 퇴뢰스는 중국의 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돌궐과는 계속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 외에 이 부족연맹에 대해서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퇴뢰스부족연맹이 7세기 와해됨으로서 위구르부족은 셀렝가 강 상류지역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 할 수 있었다. 위구르부족장은 에르킨이라고 불렀다. 위구르부족이 강성해진 후에는 지도자의 칭호를 일테브르라고 불렀다. 부족국가의 수도를 톨라강변 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구르는 당시 돌궐제국 내부의 분란을 조심스럽게 이용하여 641년 경에는 이미 동부 스텝지역의 상당한 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을 하였다. 일테브르토미토의 통치시대에는 타르두스지역을 통합하여 토쿠즈오구즈(9성오구즈)연맹을 주도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위구르는 656년에는 온옥(열개의 화살)을 제압하고 타쉬켄트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8세기초에 위구르와 토쿠즈오구즈는 다시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토쿠즈오구즈연맹은 독립을 상실한 후에도 소멸되거나 와해되지 않았다. 후에 동부 스텝지역에 돌자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중국과 우호관계를 가짐으로써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오르혼위구르왕조
위구르부족은 돌궐제국의 빌게카간이 사망한 후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돌궐제국을 공략하였다. 745년 바스밀과 카르룩과 연합하여 돌궐을 물리치고 지금의 몽골리아의 외트켄을 중심으로 오르혼위구르국가를 건설한다. 곧이어 위구르는 동맹부족이며 경쟁세력인 카르룩을 서부 스텝지역으로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국가는 위구르부족이 9개 부족연맹을 통합하여 건설한 것이기 때문에 온위구르(열위구르)라고 불리웠다. 흔히 오르혼제국이라고 하는 제국이 바로 이 제국이다. 이 제국은 수 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가면서 13세기까지 위구르국가로 명맥을 유지해 나가게 되었다. 골력배라 통치시대에 위구르제국은 그 세력을 크게 팽창해 나갔으며 그래서 골력배라는 쿠트룩 빌게 퀼 카간 이라는 황제의 칭호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그는 후에 카라발가순에 도읍을 정하고 동부스텝지역 통를 강화해 갔으며 745년에는 중국의 당나라로 부터 화인카간이라는 칭호을 얻게 된다.
위구르는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하였으며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고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기 까지도 한다.
쿠트룩빌게퀼카간의 아들 모옌쵸르 통치시대에는 위구르제국의 영토카 예니세이강 상류에서 추강, 탈라스 등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751년 고선지장군이 이휘하는 당나라와 아랍압바스왕조 사이에 발생한 전쟁에서 위구르는 당과 연합하였지만 실패하고 당은 파미르와 서부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상실한다. 이 전쟁을 계기로 중앙아시아는 이슬람화 되었으며 점차 투르크민족과 신장지역에 이슬람이 들어도게 되는 계기가 된다.
오르혼위구르제국은 거의 1세기 동안 동부스텝지역를 지배하였고 최전성기 때에는 알타이산맥으로부터 바이칼호에 이른다.
그러나 위구르제국은 천연재해와 크르그스,카르룩,토번등의 공격을 받고 840년에 분산이 된다.
당시 오르혼위구르제국의 왕들의 비석들이 지금 몽골리아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비석들에는 오르혼제국의 왕들 자신들이 돌궐의 후손이며 돌궐제국을 계승하고 있다고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타부카치 카간\'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데 타부가치라는 말은 흉노와 돌궐의 피을 이어가는 사람으로서 중국에 동화된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의 이세민(당태종)의 경우도 타부가치출신인 것을 우리늘 알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형제국가의 왕이라고 대우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당이 세력을 떨치기는 했지만 우목제국인 위구르제국과 돌궐제국의 관념에는 모두 형제로 대하고 있다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드쿠트위구르왕조
왕국이 분열되고 남쪽으로 내려온 위구르인들은 당나라군대에 의해서 토벌이 된다. 또한 부분은 천산산맥의 북쪽의 베시바륵(5개의 도시)의 하나인 투르판을 거점으로 위구르왕국을 건설한다. 이를 이드쿠트위구르왕조 혹은 쿠추위구르왕조등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중국의 사료에서는 서주(서쪽에 있는 하나의 주 정도로 쓰여지고 있다.)
이드쿠트위구르왕조시대에는 불교와 마니교, 경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가 성행하였으며 일부 이슬람의 영향도 나타난다. 특히 이슬람이 위구르인들을 통해서 중국에 전해졌는데 중국이름으로는 回 (후이허-회골)이라는 을 본따서 回敎 혹은 回回敎라고 불려지게 된다.
바르츈 테킨 이드쿠트의 통치시기에 거란족의 카라크타이(서요-카라크탄)에 예속되었다가 13세기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에 들어가게 된다.

카라한왕조
카라한은 552년에 세워진 쾨투르크왕조, 745년에 세워진 오르혼위구르왕조우에 투르크부족들이 서역에 세워진 영역이 방대한 문화면에서 이전의 왕조에 비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고 긴 시대를 통치한 왕조이다. 현대에 카라한왕조가 어떤 부족이 세웠는지에 대한 어떠한 것에 대해서 위구르, 카르룩, 치길, 투루크, 투르크맨, 카르룩-야그미, 카르룩야그마 토쿠즈오구즈등이 세웠다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지금 이 주장들이 첨예한 갈등으로 대두되고 있다.
중국어와 무슬림역사문헌들에 의하면 카라한왕조를 야그마부족이 세웠다라는 주장이 역사자료들에서 비교적 우세하다.
고대 중국어자료들에는 야그마부족은 오르혼위구르왕조시대에 중요한 역할를 하였다. 840년 위구르왕조가 멸망한 다음 사르친보이룩과 판테킨이 지도하는 15개부족은 알타이산맥과 예떼수 지역을 지나서 스르, 탈라스강유역을 중심으로한 카르룩지역에 이동했을 때 이 제일 처음 지역에 왔던 부족으로 알려진다. 이슬람역사에 의하면 9세기에 야그마부족은 지금의 중앙아시아의 나린강의 남부에 이동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자기들 안에서 강성함으로 카르룩왕조에 영향을 미치고 그의 많은 권한을 손에 넣었다. 이스람력 256년(870년)에 야르라부적은 크게 강성하여서 카르룩통치에 도움을 주고 서쪽의 이슬람 사마니왕조(875-999년)과 전쟁을 하고 점차 지금의 악수지역 서쪽, 카쉬카르의 남쪽, 파미르산맥의 동쪽과 서쪽지역를 차지하고 이 지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880년 야그마부족은 발라사군을 차지했다. 결과적으로 카르룩 바이구들은 완전히 야그마부족들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었다.
그러나 야그마부족은 자기영향을 더욱더 넓히기 위해서 모든 카르룩왕조의 이름으로 일을 더 크게 하였다. 그는 사마니오아조에게 대하여 많은 전쟁도 바로 이 카르룩왕조의 이름을로 하였다. 11세기에 에불폰투흐 압둘구푸르 휘세인엘엘마이가 쓴 역사 <<카시게르>>(이 책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와 14세기포에 자말카르시가 쓴 <<물히카툴 술라흐>>라는 이름의 사전과 <<역사 카시게르>>라는 책의 서문에 쓰여진 자료에 의하면 9세기말중간에 야그마부족들의 지도자인 빌게쾰카드리한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880년 발라사군의 카르룩왕조의 실체권한을 가지고 큰아들인 바르테킨게(바즈르 테킨게)는 위구르식 칭호로 "아르슬란한"이라는 이름을 주고 발라사군을 관리하는 권한을 주었고 작은 아들인 오골착 테킨은 원래 "카드르한"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야그마 종족의 칭호인 "부그라한"이라는 이름을 주고 탈라스을 관리하는 권한을 주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 초기에 오굴착 카드르한은 바지르 아르슬란한의 관리에 있었다. 893년 사마니(사만조)왕조의 왕자인 이스마일빈니 에흐매트는 큰 세력으로 탈라스에 공격을 해서 오굴착카드르한의 왕비와 1만5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오굴착카드리한은 탈라스에서 카쉬카르에 도망와서 이 곳을 중심으로 사만조에 대해서 세로운 전쟁을 준비하였다. 914년 바지르아르슬란한은 바라사군에서 죽었다. 카르룩왕조의 정권을 기회를 잡고 발라사군의 야그마정권을 학살하고 빼앗겼던 권한을 다시 빼앗았다. 발라사군과 그 주변의 야그마부족들은 무리무리를 지어서 카쉬카르주변에 이동하게 되었다. 또한 오굴착카드르한의 깃발아래에 모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바지르 아르슬란한의 큰아들(역사에는 알려지지 않았다.)은 카르룩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나서 그의 아직 어린 작은 아들인 사툭테킨(사루르테킨)은 다른 야그마정권과 함께 카쉬카르에 도망와서 삼촌인 오굴착 카드한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913년에 사만조의 궁중에서도 많은 정변이 일어났다. 사마니의 자손들인 에보 헤센나스르빈니에흐메트는 아버지인 에흐매트빈니이스마일의 사망을 기회로 왕좌를 물려받았을 때 동생인 에부나시르사만니를 다른나라로 보냈다. 궁중의 정변은 더욱더 거세지면서 이 투쟁 기간에 사마니들에게 정복당한 사마르칸트 마니교도 위구르인들은 에부사시르사마니를 지지하고 나시르빈니에흐메트에게 대항하는 하였다. 사시르빈니에흐메트는 부하라에서 큰 군대를 보내서 마니교도 위구르인들을 제어하고 500명이 넘는 마니승려들을 학살했다.

에브네스르사마니는 카쉬카르에 도망해서 오굴차카드르한의 보호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마르칸트의 이 유혈사건은 당시에 온 서역위구르인들의 주의를 끌게 하였다. 고굴착카드리한은 에부나스르사마니에게 큰 특권을 주고 그를 아투시에 배치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투르판이드쿼도 에부헤센나스르빈니에흐메트에게 편지를 서서 "우리나라의 무슬림들은 당신들의 나라의 무슬림들 보다 세배나 많아서 만약에 당신이 이 마니를 죽이면 나는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모든 무슬림를 죽이겠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우리나라의 모든 무슬림들을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리겠오"라고 했다. 그러나 에부헤센나스르빈니에흐메트 자기 정권의 위구르인들에게 대한 학살을 그치지 않았다. 더욱이 카르룩왕조의 다른 위구르부족들을 계속해서 압제하고 이들의 이 곳의 영향을 더욱더 제거하려 하였다.그러므로 이 지역의 위구르인들의 한 부분은 서북쪽으로 가서 아랄호주변의 동포들인 오구즈들 안으로 도망가서 이들과 합쳐졌고 오구즈왕조를 세우게 된다. 또 한 부분은 카쉬카르주변에 이동해서 오굴착카드리한의 보호아래 들어가게 된다. 그르므로 오굴착카드리한의 권한은 더욱 커지고 원래 야그마부족의 가장높은 칭호인 아르슬란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부그라한"이라는 이름으로 통치를 하기 시작하고 사툭테킨도 변방으로 보내고 이들의 중심권력으로부터 멀리 보내고 통치권한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려 하였다.
바로 이 상황에서 사툭테킨는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사투시에 와서 이곳의 에부니스르사마니의 설명으로 인해 이슬람교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사툭테킨은 다시 "아둘키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기 시작하였다. 사툭테킨과 삼촌인 오굴착카드르한간에 대립이 날로 거세지게 되었다. 932년 사툭테킨은 40명의 선봉대인 친구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이끌고 카쉬카르에 들어가서 공격을 시작하여서 오굴착카드르한의 모든 권속들을 학살하고 자기를 "부그라한"이라고 공포하고 야그마왕조의 보좌를 빼앗는다. 이때부터 사툭부그라한는 맹렬한 기세로 카쉬카르와 그 주변의 야그마와 이 밖에 위구르부족들을 모두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고 이들을 이슬람을 신봉하게 하고 이 종교를 국가종교라고 공포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예켄의 서북쪽과 악수강의 서쪽등지의 영토와 이 곳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모두 사툭부그라한의 수하에 들어왔다.
942년 자기와 에부네스르사마니의 아들인 에부페트타흐가 지휘를 한 군대와 투르카트다완이십과 나린강의 남부쪽을 차지했다. 후에 다시 급습을 해서 발라사군을 정복하고 카르룩왕조를 명망시킨다. 그로부터 자기를 다시 "카라한"(위대한 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다른 자료들에서는 사툭부크라한은 이 시기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가지게 된다.) 그는 그후에 "술탄 사툭부그라카라한 압룰키림"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위구르 야그마부족들이 세운 첫 번째 이슬람국고가 카라한왕조가 출현한다.
그이 초기 수도는 카쉬카르로 이 시기에 오르다켄트(궁정이 있는 도시)라고 불렀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과 국외역사자료들에서 술탄사툭부구르한이 세운 이 왕조는 여러이름으로 불려지게 된다. 예를들면 메흐뭍카쉬카리가 쓴 돌궐어대사전에서 하카니에(왕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에 보면 하카니에(왕조)라는 말은 단지 카라한왕조의 중심이었던 지역인 카쉬카르주변을 가리킨다.
카라한학자들은 "카라한" 이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강한", "용맹한", "위대한", "고상한"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의 견해는 카라한왕조의 통치는 고대투르키언어(위구르어)에서 위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로 이 말를 자기의 칭호로 사용한 것 외에도 이들은 오르혼위구르왕조시대에 명예를 얻었던 처음카간인 퀼빌게카간후에 이 왕조의 기초을 놓았으며 이 찬란한 시대를 살았던 조상인 모윤츄르카라카간(747-759)를 기념하고 자기의 새로 세운 왕조를 바로 이 오르혼위구르왕조의 계승으로 보았던 것을 의미하고 지지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술탄 사툭부그라한 조상들은 오르혼유역세서 이동해 와서 가장 초기에 정착하였다. 발라사군를 차지한 다음 자기를 "카라한"이라고 공포했다.
카라한왕조는 술탄부그라한(937-955), 무사부그라한(955-992), 하룬부그라한(992-998년)시대에 가장 융성한 발달을 했던 시대이다.
이처럼 카라한 왕조는 이슬람을 받아 들이고 이슬람의 종교이념에 의해서 국가를 운영하게 된다. 카라한왕조의 수도는 카쉬카르와 발라산군이라는 두 도시인데 카쉬카르는 당시에 수학,천문학,물리학,지리학,철학 등이 당시 그리이스와 로마의 가장 선진사상들과 동시대에 연구되어 졌으며 교류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11세기 이후에는 이슬람람 학교가 카쉬카르와 부하라에 세워진다. 그러므로 중세 카라한시대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의 양대산맥은 카쉬카르의 이드카모스크와 부하라의 모스크는 이러한 이슬람학교의 역할을 한다.
당시에 유명한 학자로 후세에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메흐무트카쉬카리와 위숲하스하집이라는 학자이다. 모두다 집권층에 배경을 두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계몽하고 왕조의 통치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잘 말해 주고 있다.

메흐뭍카쉬카리
메흐뭍빈니휘세인메흐뭍카쉬카리는 1020년에 카라한왕조의 수도인 카쉬카르의 아직(지금의 토쿠작현의 오팔)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메흐뭍카쉬카리의 생애에 대해서 많은 자료는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단지 그의 유명한 돌궐어대사전이라는 작품에 기술되어진 자료들에 근거하여 그가 카라한왕조의 왕인 술탄사툭부그라한의 두 번째 아들 술라이만투간일릭한의 자손 즉 후에 카라한왕조에서 형성된 헤센파의 대표격인 하룬부그라한에우왈의 증손자이다.
역사문헌들에 의하면 그의조상인 술라이만투간일릭한은 원래 이씩호수의 남부의 바르스한(도시)의 책임자였다. 그는 992년 그의 아들인 하룬부그라한이 왕좌에 오르고 카라한왕조의 수도인 카쉬카르에서 발라사군에 이동했으며 그의 큰아들인 위수프카디르한에게(위수프빈니엘헤센하룬카디르한)에게 탐가치부그라한 이라는 칭호를 주었으며 카쉬카르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후에 술라이만투간일릭한 가족은 가르스한에서 카쉬카르에 이동해 와서 지금의 오팔지역의 아직에 살게 되었다.
아직은 이 시기에 카라한의 궁정사람들의 기거하는 곳 중의 하나였다. 그의 할아버지와 위수프카디르한의 두 번째 아들인 무헴메트위수프는 이러므로 그의 아버지와 무헴메트빈니위수프의 크아들인 휘세인빈니무헴메트는 바로 이 아직에서 태어났다.
휘세인빈니무헴메트는 아직과 카쉬카르학교에서 학문을 배우고 연구한 학자였다. 그러므로 1024년 위수프카디르한이 카라한의 왕좌에 오르고 난 후 그는 궁정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는다. 어떤 자료들에 의하면 그는 바로 이 해를 앞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과 소학교들을 카쉬카르에서 배웠다. 1042년에 카라한의 두 개로 나뉘고 나서 동카라한왕조의 카라한인 술라이만아르슬란한(위수프카디르한의 큰아들)은 메흐뭍카쉬카리의 아버지인 휘세인빈니무헴메트를 바르스한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메흐뭍카쉬라키도 아버니와 함깨 가서 바르스한과 발라사군에서 각종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1056년 술라이만아르슬란한과 탈라스와 이스피잡지역의 책임자인 동생인 휘세인우수프간에 심한 갈등이 생겼다. 술라이만아르슬란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서 죽게 되었다. 무함메트빈니위수프는 카라한의 보좌에 오르게 되었지만 15개월 이후에 자기의 자리를 큰아들인 휘세인빈니무헴메트에게 물려주었다. 이 일은 무헴메트빈니위수프의 왕후간에 갈등을 초래했다. 그는 그의 작은 왕후는 무헴메트빈니위수프와 아들빈니무헴메트을 권속들과 함께 독약을 먹여서 죽이고 그의 아들인 이브라힘빈니무헴메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 유혈사건은 오직 휘세인빈니무헴메트의 아들 메흐뭍카쉬카리가만 도망가서 먼저는 부하라에 가서 후에 이샤푸르를 통해서 아랍압바스의 수도인 바그다드에 가서 피난을 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바르사간에 간 후에 한동안 오구즈와 투르크맨, 치길, 크르그즈등 다른 부족들이 언어와 역사, 문화, 지리, 의학등과 그밖에 상황들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바그다드에 간 후에 1072년 세계적인명작인 돌궐어대사전을 쓰기시작하고 1074년에 마쳤으며 이 시기에 아랍압바스의 헬립(왕-이슬람의 학자)인 에부하심압둘라빈니무크테드에게(1975-1094) 선물을 한다. 그의 자료에 의하면 그는 또 투르크언어의 조업법이라는 책을 썼다고 하는데 그의 이 작품은 우리의 세대에게 남겨지지가 않았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그는 1080년 사망했다고 한다.

위숲하스하집
역사문헌에 의하면 그는 1015-1016년 카라한왕조의 수도인 라발사군에 한 부자집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는 발라사군에서 지냈다. 1042년 카라한왕조가 두 개로 분열되고 나서 서카라한(일릭한)과 동카라한의 중간에서 심한 갈등이 일어났다. 한동안 발라사군의 정치국면은 아주 급박하게 되었다. 특히 동카라한의 통치권력타툼으로 심한유혈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일은 발라사군에 집중 되어 있었던 학자들과 이슬람학자들의 평화를 깨고 그들을 카쉬카르에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카쉬카르에서 상주하는 탐가치부그라하룬엘헤센빈니술라이만의 많은 학자들을 자기에게 흡수하고 이들의 창조활동을 위해서 좋은 조건들을 준비해 주었다.
위숲하스하집은 바로 이 시기에 발라사군에서 카쉬카르로 왔다고 본다. 그가 카쉬카르에 와서 그의 저명한 작품이 쿠타그구빌릭(행복을 가져다주는 지식)을 쓰기 시작한다. (1069-1070년) 18개월에 걸쳐서 마무리를 했다고 전한다.
자기의 작품에서 자기 자신이 50이 넘어서 이 글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엘헤센빈니술라이만카라한(1074-1130)에게 선물을 했다. 이 작품은 카라한왕조시대와 카라한왕조만의 독특한 문학임과 동시에 카라한왕조시대의 사화와 이데올로기, 사상, 철학, 정치와 사회도덕등의 문제들을 기술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작품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정직의 상징에 속한 퀸투그디(해가 뜨다)와 행복의 상징인 달이 차다, 지혜의 상징, 만족의 상징등의 4개의 인물형상으로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작품은 1439년 카라사일이라는 책의 고대위구르문자(토쿠즈오구즈문자) 으로 옮겨 쓴 위나본(혹은 에라트본)과 아랍문자로 옮겨 적은 카히르본과 엔멘간본등의 세 가지 본이 있다.
이작품은 카라한왕조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에서도 기여한 공로가 클 뿐 아니라 19-20세기의 세계의 학자들의 주목들 받고 있다. 프랑스학자인 자우프라트암비드는 1823년 이 작품에 대해서 처음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어와 독일어, 터키어, 우즈벡어와 현대위구르어들으로 번역이 되었다.
카라한왕조 13세기 이후에 몽골제국에 편입되면서 몽골제국의 차카타이왕조가 서게 되는데 차카타이왕조는 카라한이 지배한 대부분의 영토와 이드쿠트위구르왕조의 모든 부분을 어우르게 된다.

차가타이왕조
카가타이우루스는 1224년 칭기스한이 자기에게 속한 모든 영토들을 자기 아들들에게 분할준 다음에 형성이 되었다. 차가타이우루시에 속한 영토들은 일리강의 상류, 발카시호수의 남부의 예떼수자역,제이훈(아무)강까지에 이르는 마와라운네히르지역과 위구르이드쿠트왕조에게 속한 퀴센(쿠차)지역까지였다. 차가타이우루시의 정치중심은 지금의 서부타림분지와 그의 주변의 지역인 코르가스현에 속한 알마륵이였다. 차가타이왕조는 어떤 때에는 또 카야시에 있기도 하였다. 이 알마륵과 카야시의 주변에 나무로 담을 만들어서 이 곳에 각종 야생동물들을 몰아서 사냥을 하였다.
사료들에 보면 차가타이한은 법집행에 있어서 엄격하였으며 국가의 정치와 행정,군사제도들에도 스스로 엄하게 지켰으며 자기아래 관리들에게도 엄격한 요구를 하였던 하나의 정권이었다. 그러므로 칭기스한이 살아있었던 때에 국가법집행을 그의 관할에서 관리하였다.
차가타이한은 자기에게 분할된 우루스을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서 다스렸다. 중앙아시아의 투그크스탄과 아와라운네히르지역을 외르겐사람(어떤 자료에는 하레즘사람)인 상인 메흐무트 얄라와치을 통해서 다스렸다. 지금의 타림분지의 서부를 중심으로 한 망라이쉬예르지역을 몽골 도그라트부족을 통해서 다스렸다. 이드쿠트지역은 이드쿠트정권을 통해서 다스렸다.
메흐무트얄라와치는 일찍부터 칭기스한에게 복속되었다. 1219년-1222년에 칭기스한는 서역에 공격을 하고 부하라,하레즘지역을 복속하고 메흐무트야라와치를 마와라운네히르지역의 아루타치에 임명하고 이 지역의 행정과 경제등을 맡아 하게 하였다.
1224년 차가타이우루시가 형성되고 나서 메흐무트 야라와치는 차가타이한의 중신의 자리에 있었으며 마와라운네히르지역 특히 하레즘과 부라하의 최고통치기구의 대표로 있었다. 그는 항상 호젠트(지금의 타직크스탄에 속한지역)에서 살았으며 정해진 시간이나 어떤 일들이 발생을 하면 알마륵혹은 카야스에 가서 차가타이한과 대사를 이야기 하였다. 1221년 차가타이한의 동생인 왹타이한이 몽골제국의 카간의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 그의 자리를 다시금 견고히 하였다.
그러나 1238년 부하라에서 3일길쯤 되는 타랍마을에서 무함메트타라비가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메흐무트야라와치의 무거운 통치로 인해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차가타이한은 그의 자리에서 해직을 하고 그의 아들 아스우트아랴와치를 다루가치로 임명을 했다. 매흐무트야라와치는 왹타이한의 명에 의해서 한바륵(지금의 북경)에 세금을 보내는 일을 하였으며 1254년 이 곳에서 죽었다. 의 아들 메스우트야라와치는 마우라운네히르지역의 다루가치의 임무을 하기 위해서 카라구차(위구르 이드쿠트왕조),비시바륵,호텐,케시케르,알마륵,헤이얄(지금의 바이카시호수의 남부),세메르칸트,,부하라와 제이훈(아무)강유역등지의 무슬림들을 다스리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임무를 1289년 자기가 죽기까지 계속했었다.
 
차가타이우루시에 속한 망라이쉬에르지역은 동쪽에 타르-뷔귀르(지금의 뷔귀르),퀴센(쿠차),서쪽으로는 페르가네분지와 베데흐샨 북쪽으로는 이식쾰(이식호수) 남으로는 체르첸등지가 속해 있었다. 망라이쉬에르라는 말은 압탑로이(태양이 떠오르는 방향,동쪽)이라는 의미로 이 지역은 차가타이우루시의 동쪽부분이다. 이 지역의 주민은 주로 위구르와 다른 투르크부족들이었다. 쿠차지역에서 카물(지금의 쿠물)와 지금의 감숙성의 가욕관성까지에 이르는 곳은 위구르이드쿠트왕조에 속해 있었으며 차가타이우루시에 속한 망라이쉬에르지역의 영역에 속하지 않았다.
망라이에르지역의 첫 번째 통치는 몽골도그라트부족의 족장이 오르툽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항상 악수(지금의 악수 퀸세헤르현)에 거주하였다. 사료들에 보면 도그라트부족은 원래 지금의 오눈강의 남부에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칭기스한의 4대손으로 할아버지 돔나이한의 8대부단자르의 손이다.
도그라트부족은 원래 몽골테이투트(테이트)부족과 같은 혈통이라고 한다. 그러나 1201년 칭기스한은 테이투트부족에게 공격을 할 때에 고구라트부족이 자원해서 칭기스한에게 복속되었으며 칭기스한이 서역에 팽창전쟁을 할 때에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카라차르누얀이 이끄는 많은 두그라트종족들은 차가타이한군대와 수누타이군대에게 속해서 전쟁을 했으며 망라이에르지역을 차지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후에 두그라트부족은 바이다간과 그의 아들 오르툽의 지휘아래 망라이에르지역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차가타이한은 도그라트부족에 대한 신임이 컷다. 도그라투부족도 몽골제국과 차가타이우루시의 권위에 대해서 아주 복종적으로 따랐다.
1238년 부라하의 메흐무트타라비가 봉기를 일으키고나서 차가타이한은 도그라트부족의 자리를 더욱더 의미를 부여했으며 이 부족장인 오르탑의 관직을 높여서 자에게 자기의 가장 높은 관리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도그라트부족도 차가타이우루시에 특별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는 지금의 악수퀸세헤르,마랄비시,케시케르,예켄,메키트,호텐등지에 많은 헤니예(국가와 관리들이 차지하는 영토)와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와 우루시의 모든 세금과 법에도 많은 혜택을 누렸다.
차가타이한은 자기 통치시대에 망라이쉬에르지역이 아주 평온하게 지내었기 때문에 도그라트들에게 간섭을 하지 않았다.
몽골이 서역지역을 통치하던 시기에 위구르이트쿠트왕조를 포함해서 모두가 이슬람의 신봉하였다. 그러므로 이지역은 위구르,카르룩,야그마,캉리,투르크멘,크르그스,등 대부분투르크부족들과 타직부족의 땅이었다. 몽골이 서역지역에 왔을 때 이 곳에 부족들사회는 각기다른발전단계에 있었다. 타림유역,아무강,시르강지역의 또 다른 부족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봉건들과 관계를 가지고 발전을 하였다. 예테수지역,텡으트타그와 파미르산맥주변의 부족들은 유목생활을 하였지만 이 부족들에는 파트르아르한봉건들과 관계를 가지고 발전을 하였다. 그러므로 몽골귀족들이 서역에 왔을 때 아주 복잡한 사회관계를 보게 되었다. 특히 차가타이우루시의 상황는 아주 복잡하였다.
차가타이한과 그의 대표격인 메흐무트야라와치,메시우트야라와치그리고 오르탑도그라트등은 몽골군대들로 들로 인해서 황폐한 이곳을 빠르게 회복을 시켰다. 그러므로 몽골귀족들은의 현실적,정치적필요를 잘 채워주었다. 즉 이들은 먼저는 현지의 발전된 부족과 민족들의 전통통치제도을 실행하고 현지관리들을 신힘하고 이들을 자기의 통지의 협력자라고 하였다. 특히 현지 무슬림들는 종교신앙과 투르크이슬람문화의 복원 시키고 더욱더 발전시키는 것을 실행하였다. 특히 자기들도 이 정책을 강화하고 선전을 하였다. 예를 들면 메스우트야라와치가 다르구치를 맡고 있을 때 차가타이한의 허락을 얻어서 부하라,세메르켄트,타시켄트,외르겐치,호젠트등지에 많은 새로운 도시들과 성들을 건설하였다. 성벽들 주변에는 물고랑들을 만들과 새로운 경작지와 정원과 과실들을 심었다. 아무강과 시르강에 많은 물 고정을 건설하고 농업생산을 발전시켰다. 결과적으로 마우라운네히르지역의 파괴된 경제를 아주 빨리 발전시키고 차가타이우루시뿐만 아니라 모든 몽골제국에서 빠르게 발전하는 지역의 하나로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이 곳에 이주해온 몽골부족들도 점점 자기의 이전의 유목습관을 버리고 농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상황은 이들이 투르크와 되는 과정을 빠르게 했다.
특히 몽골인들의 이전의 바르라스,도그라트부족들은 빠르게 먼저 투르크민족들에게 동화되었다.

메스우트아라와치는자기의 60년 통치 과정에서 마우라운네히르와 망라이쉬에르지역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는 1238년 다루가치가 되고 나서 차가타이한의 비준에 의해서 부하라와 카쉬카르에 메드리스에시우디에라는 이름의 두 개의 큰 학교을 세웠다. 부하라의 메드리스메스우디에는 1274년 에젬(이란)지역에서 온 몽골인들로부터 파괴가 되었지만 그는 다시 빠르게 회복을 시켰다. 1289년 메스우트야라와치가 죽었을 때 그의 묘는 바로 이 곳 부하라의 메드리스메스우디에에 놓여지게 되었다. 케시케르의 메스우디에메드리스는 하루하루 발전을 거듭하여서 마와라운네히르,망라이쉬에르 특히 이란에젬지역까지도 아주 유명한 고등교육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동쪽에 유명한 이 메드리세는 1388년 악삭테무르가 케시케르에 공격을 하던 때에 완전히 파괴가되었다.
차가타이우르시가 형성이 되고 나서 이 자역에 상업과 금융과 그 밖에 영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마와라운네히르와 망라이쉬에르지역들의 대외무역은 급속하게 발전을 하였다. 이전에 실크로드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몽골제국의 수도인 한바륵(북경)에서 카라쿠룸까지와 카라쿠롬에서 알타이산맥,이밀,알마륵을 통해서 사라이(지금의 카스피해의 북부아스트라한시의 주변)과 이 지역에서 유럽까지 통하는 북부실크로드와 고대실크로를 따라서 연결되는 남부실크로드가 다시 한번 흥황의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특히 메스우트야라와치는 부하라에 금융감독기관을 설치하고 금과 은과 동전을 관리하였다. 다른 사료들에 보면 이 돈들에는 아랍어와 중국어 문자가 쓰여졌다고 한다.
1224년 형성된 차가타이우루시는 짧은 시간에 마와라운네히르와 망라이쉬에르지역의 사회를 빠르게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발전을에 촉진시켰다. 그러므로 차가타이한은 효과적인 책략으로 이 지역에 한동한 평화로운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이 처럼 차가타이은 중앙아시아와 신장지역등 광범위한 통치를 하였으며 자신이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었으며 다른사람들을 신뢰하고 일을 맡겼던 통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차가타이와 그의 자손들이 직접 통치시기(1224-1309), 완전히 투르화된 사람들의 통치(1309-1348)과 무굴스탄(1348-1524)이 통치를 하게 되면 이들의 마지막 왕조는 예켄왕조(1514-1682)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차가타이는 자신이 무슬림을 받아 들임과 동시에 자기의 왕조의 모든 사람을 이슬람의 교훈에 의해서 국가를 통치하였다. 차가타이 이후에 그의 아들들은 여러 국가들을 세운는데 그중에 우즈벡왕조를 세우기도 한다. 우즈벡왕조는 카라한때에는 카라한에 속하였으며 차가타이왕조때에는 차가타이에 속하면서 강하게 투르크성향을 간직하고 역사을 이어간다.

예켄왕조와 근대위구르
예켄왕조는 중국의 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예켄왕조가 무너지면서 신장은 청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이 후에 청조는 철저하게 무슬림과 한족을 차별하여서 다스리게 된다. 이 때에 1862년 섬서와 감숙에서 이슬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서투르크스탄의 코칸트에서 야쿱백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서 신장에 진격을 하였다. 신장에 진출을 노리고 있던 영국이 일을 지원하며 천산북로의 일리지방에 들어오려 하자, 러시아는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1871년 일리에 군대를 파견하여 굴자를 점령한다. 당시에 야쿱백은 영국이 공급한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재래식 무기를 무장한 청나라와 대항을 할 경우 청나라 군대가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고 하는데 청군이 코물까지 진격을 하면서 야쿱백과 협상을 하기로 하고 야쿱백진영을 안정시킨 다음 급습을 해서 야쿱백진영은 총 한발 못 쏘아 보고 무너지게 되어서 우름치.투르판.다반청.코르라등이 무너지게 되었다. 당시에 야쿱백은 코르라에서 갑작스런 변동으로 인해서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사인은 아직도 잘 알려지고 있지 않다.
이후에 카쉬카르를 중심으로 호자들이 위구르인들을 통치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이 때에 갈단(서몽골왕조)가 아팍호자와 손잡고 이곳을 70년정도 통치를 한다. 그러나 서몽골이 청으로부터 무너지고 난 다음 청은 청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아팍호자들과 대결을 하여서 결국 아팍호자들을 물리치고 천산남북이 모두 청의 완전하 지배하게 들어가게 된다.
이 후로 이곳을 '새로운 강역'이라는 이름으로 신장이라고 부르게 된다.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산당과 국민당이 신장에서 다시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위구르인들도 공산당과 국민당편으로 나뉘어 지는 국면을 맞이한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에흐메트잔 카스미라는 사람이 신장의 북쪽 일리를 중심으로 위구르인들의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위구르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공산당측에 완전하 자치를 요구하려고 모스크바회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북경의 정부쪽으로 부터 초처을 받고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가 폭파해서 그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찬란한 역사를 가졌던 위구르인들은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팍호자의 성묘
카쉬카르시의 외각에 모스크와 돔 형식으로 된 무덤이 있는데 이것을 아팍호자의 성묘라고 하는데 이곳을 중국인들을 향비묘라고 하며 향비묘로 더 유명하다.
향비는 '이파르한' 이라는 여인을 의미하며 이파르한의 뜻은 '향기가 나다'라는 뜻이다.
돔 형의 건축 안에는 북경에서 향비를 싣고 온 운구용 가마가 있는데 나무로 만들어 졌다.
향비에 대해서는 이러한 전설이 있다.
지금부터 200년전 청나라 군대가 이곳을 정복했을 때 그에 저항한 한 수령의 딸이 있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몸에서 향기가 났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건륭제는 그를 북경으로 불러서 자신의 비로 삼았다. 황제는 고향을 그리는 그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서역풍의 목욕탕도 지어주었다. 그러한 황제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항상 소매에 단도를 숨기고 끝까지 잠자리를 거절 하면서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황태후는 황제에게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그가 귀를 귀울이지 않자 황제가 궁전을 비운 사이에 그녀를 불러 목 매어 죽도록 했다. 후일 황제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생전의 희망에 따라 시신을 나무로 만든 가마에 실어 고향인 카쉬카르로 보냈고 이런 연유로 그녀의 시신이 안치된 아팍하자의 묘지는 향비묘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나 향비는 역사에서 용비라는 여자로 청군이 카쉬카르을 정복하고 북경에 복귀 할때 청군에 향비 노릇을 했던 그녀의 숙부와 종형제등은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하사 받게 된다. 그때 건륭은 50세였다. 용비믄 1760년에 비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녀는 황제가 지방을 순회할때에 여러 차례 동행을 할 정도로 총해를 받다가 1788년 죽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황후에 의해서 죽었다는 기록은 찾아 볼수 없다. 황후는 그녀가 죽기 몇년전에 죽었다.
그러므로 위구르인들이 이야기하는 이파르한의 설화는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자신들의 처지를 역설적으로 가공하여서 이러한 것으로 스스로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많다.

호자
20세기 초까지 위구르인들 사이에는 \'호자\'라는 존칭으로 불리던 특수한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특수한 능력을 가졌으며 갖가지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슬람을 신봉하는 위구르인들에게는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현제 이 호자들에 관한 전기가 여러 종 전해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들이 행한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원래 한 가문에 속한 이들은 신비주의 교단을 형성하고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세속적이면서 권력도 강화하였다. 17세기 호자집안에 주도권 다툼이 시작되면서 악타그륵(백산당),카라타그륵(흑산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은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하여 세속 군자와 귀족등고 같은 권력층과 손을 잡았고, 이로 인해서 이 지역의 정치는 극도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향비묘의 실질적인 주인 아팍호자는 바로 이 백산당의 거두였다. 그는 적대세력에게 미려 도저히 그 곳에 머룰 수 없게 되자 국외로 망명을 떠나서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는 편지를 써서 갈단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 하도록하였다. 갈단은 칭기시칸에 버금가는 대제국을 세우겠다는 야망에 불타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팍호자의 요청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1680년 아팍호자를 앞세우고 군대를 파견하여 남장지역을 점령하고 70년간 몽골인들이 위구르인들을 지배한다.
아팍호자 역시 몽골인들의 대리인으로 위구르인들 위에 군림하였다. 종교인이 세속권력까지 장악을 하여서 신성국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 아팍호자는 외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위구르인들은 독립을 잃고 몽골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하는 장본인이 되었다. 그의 전기에 의하면 이 일에 대해서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백산당과 흑산당의 관계는 더 깊은 골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위구르인들은(남장의 위구르인들) 몽골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북쪽 초원지대에서 농사를 하도록 강요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일리지역과 북장의 여러곳에 사는 위구르인들은 아팍호자의 통치 때에 옮겨가서 정착한 사람들이다....
오늘난 천산 북쪽에 많은 도시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위구르인들의 농경을 하면서 정착과 도시를 이루는 전통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1750년 들어와 서몽골(갈단왕조)를 물리친 청나라는 그 여세를 몰아 위구르인들이 사는 천산남쪽도 지배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호자들은 몽골이 무너진 것을 계기로 독립국가을 세우려고 했다. 결국 청나라와의 충돌이 불가피 했다. 이 때 청나라 장수를 살해하고 반청투쟁을 했던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호자형제\'라고 부른다. 이들은 아팍호자의 증손들이다.
당시 흑산당과 기득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많은 관리들이 청군과 손을 잡았고 아팍호자자손들 집안에도 분열이 일어나 청군에 길을 열어 주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용비는 청조를 도와 북경에서 고관이 된 일족은 바로 아팍의 동생 집안이었다.
호자형제가 이끄는 위구르군대는 야르칸트와 카쉬카를 최후의 보루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759년 인도로 도주 하려고 파미르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따르는 무리는 4000년명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바닥샨 지방을 다스리던 군주는 호자형제를 공격하여 포로로 잡았다. 얼마 후 그 군주는 이 형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청군이 호자형제의 주검를 양도 할 것을 요구하자 바닥샨은 자신이 무슬림으로서 호자형제를 죽인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청군은 시체 양도의 허락을 얻어 냈지만 시체는 이미 무슬림들이 빼돌린 후였다.
결과적으로 청은 위구르인들이 사는 모든 곳을 정복하고 새로운 강역이라는 뜻의 신장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국제두되집단 위구르
몽골의 확대와 지배에 빠져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위구르이다. 그들은 몽골 출현 당시, 천산위구르왕국(이드쿠트위구르왕조)라고 불리는 목농 복합형의 통상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르혼위구르왕조의 후예들인 것이다. 투르판을 중심으로 한 5개도시를 가진 국가로 유명하다. 왕족,귀족층은 유목국가의 전통을 가지면서도 민중은 이전 국씨고창국이 오아시스 통상 문화국가의 꽃을 피웠던 토양 위에 세워진 것이다.
지배층은 투르크인(위구르인들)이였으나 영내에는 먼저 거주하고 있던 인도,아리안계와 한족계,소그드계,티베트계도 있었다. 언어는 위구르어와 소그드어,페르시아어,티베트어,아랍어 그리고 산스크리트어 등을 사용하였다.
언어.인종.문화 모든 면에서 혼성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각각의 요소가 병존하면서 한 사람이 다언어.다문화에 통하고 다인종의 피가 체내에 흐르는 것도 상당히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생업도 유목,목축,농경,상공업,국제통상 등 다양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중앙아시아의 제요소가 이 국가에 응집하며 존재했다. 당연히 주변과 멀리있는 국가들과도 왕래가 있었으며 여러나라의 정보도 집중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보입국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몽골시대 유라시아 동서에서 활약하는 위구르인들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눈에 띈다. 페르시아어로 당시 '위구리스탄-위구르인들의 땅'은 인재 공급의 보고였다.
이미 1209년 위구르왕 이드쿠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왕호이다. '이드-주인, 쿠트-행복'이라는 이름이다. 크탄이 지배를 하고 있었던 때에 위구르왕은 크탄의 지배를 거절하고 몽골에 의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직몽골이 큰 힘를 발휘하지 않고 있었던 때이기 때문이다. 몽골이 세계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이드쿠트위구르왕조는 칭기스칸의 조력자로 세계지배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몽골공주와 결혼하여 부마로서 준몽골왕가의 지위를 차기하기도 한다. 이들은 칭기스칸의 사부에서 참모,행정관,재무관,군인,기업가등까지 다양한 방면에 활동을 하게 된다. 크탄(서요)는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위구르는 두뇌가 뛰어났다. 그러므로 크탄은 몸으로 승부했다고 하면 위구르는 머리로 승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칭기스칸은 이들(타타통아)로부터 법률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이 법을 엄격히 준수 했으며 모든 이들이 준수하도록 명하였다. 아들들 중에서는 차가카이가 가장 잘 준수했다고 한다.
법률과 행정을 정비하려면 일단 문자가 있어야 하는데 칭기스칸은 위구르인들로부터 문자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에 가르쳐서 지금의 몽골문자에 까지 이른다.
원제국을 전설한 쿠빌라이등은 위구르인을 참모로 전중국을 차지 했을 뿐만 아니라 늘 통치의 스승으로서 위구르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국제경찰 오르혼위구르제국
당왕조 중국에 티베트고원의 토번이 진공을 하면 위구르기마군단이 출동했다. 또 당왕조 국내에 있어서도 번진의 발호가 있을지라도 약화되었던 당왕조가 나름대로 평형과 안녕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불가사의한 배경에는 번진 위에 북으로 덮쳐 누르는 위구르의 건대가 그림자를 간과할 수가 없다. 역시 정국은 공간의 테두리를 넘어 연동하고 있었다. 위구르는 아시아 동방에 있어서 국제경찰의 역할를 하고 있었다.
위구르의 주도는 정치.군사에 머무르지 않았다. 돌궐 이래 투르크국가와 인연이 깊은 소그드 상업세력과 결합하여 위구르는 소그드대상들을 이용하여 비호국으로 삼았던 당왕조의 중국에 말을 운송하고 비단을 가져오는 무역을 전개하였다. 장안에는 항상 천명이 넘는 소그드상인단들이 주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로 국제상품 비단은 소그드 상인망을 타고 중앙아시아와 그보다 서쪽으로 판매되었다.
이리하여 위구르왕조는 당왕조 중국으로부터 경제 제공과 소그드상인과의 일체화된 국제무역에 의해 이전에 없었던 군사력과 자금력을 겸비한 유목제국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4)소그드

당의 수도인 1백만 도시 장안은 실크로드와 직결되는 국제도시이기도 하였다.
실크로드는 서쪽으로 열린 중앙아시아의 대교역로였고, 그 중심지가 파미르고원에서 흘러나오는 제렙샨(황금을 뿌린다는 의미)강 유역의 옥토를 중심으로 하는 소그드지방이다. 이 지역에 사는이란계 소그드인은 대부분 조로아스터교도들로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식민,상업활동을 펼쳤다. 그들을 열심히 케러반(대상)을 조직해 장안까지 들어왔으며 대부분이 서시주변에 정착하여 보석.융단.향료의 판매.금륭 등에 종사하였다.
그들을 장사수완에는 중국 상인들조차도 당해내지 못했던 듯하다. 구당서에서 "소그드인은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아기의 입안에 설탕을 머금게 하고 손에는 아교의 재료가 되는 풀을 쥐어준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했을 때 설탕처럼 좋은 말만하고 아교가 손에 달라붙듯이 한 번 쥔 돈은 절대 놓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신도를 단속하는 관청의 장관을 살보라고 하는데 그것은 소그드어로 '대상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사르토파우'의 음역이었다. 그 지위는 대부분 소그드인들이 차지하였다.
소그드인의 출신지는 그 사람의 성을 보면 알 수가 있었다. 사마르칸트 출신자는 '강' 부하라 출신자는 '안' 키슈 출신자는 '사'라는 성을 썼다. 안사의 난의 지도자 안록산사사면도 소그드인의 피를 이어받았다. 당대에 호인이라고 부를 경우에는 소그드인을 가르키기도 하고 북방의 흉노와 돌궐등의 가르키기도 한다.
소그드인들은 페르시아 이란계사람들로 예전부터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실크로드상에서 대상으로서 중간상으로서 많은 이익를 챙기고 있었으며 당대에 외튀켄산맥을 중심으로 제국을 건설한 오르콘위구르제국의 수도에도 많은 사람들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국의 수도의 한 골목은 소그드인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문자를 위구르제국에 전달해 주었다. 이 문자는 이슬람이 위구르인들에게 들어오기 전까지 위구르인들은 이 소그드문자를 쓰고 있었다. 이 문자는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을 건설하면서 몽골인들에게 전달 되었다. 몽골제국의 통치스승은 유목민이면서도 정착민인 그러므로 법률과 행정등이 고도로 발달한 위구르인들을 참모로 초빙을 하였다. 그러므로 초기 칭기스칸의 참모로는 타타통아라는 인물이 늘 따라다녔고 쿠빌라이에게는 또다른 에흐메트라는 위구르인이 참모의 역할을 했다.


이 언어는 다시 만주인들이 개량을 하여서 만주문자로 탄생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북경의 청나라 유적들에는 이 글자가 아직도 건제하게 볼 수 있다.
지금도 만주족,시보족(만주족의 한 갈래)는 이 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의 몽골인(내몽골자치구에는 이 문자가 사용되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