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로마법대전 또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편찬 유스타니아누스 1세

지식창고지기 2010. 1. 21. 11:38

유스티니아누스 1세

동(東)로마 제국으로도 불리는 비잔티움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최대의 판도를 이룩했다. 그는 분열된 동서 교회를 통합시키고, 이탈리아 본토 회복과 지중해 세계의 통일로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다.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대제국의 꿈을 이루려 한 그는 대제(大帝)의 칭호를 받았다.

 

 

로마법대전 또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편찬

비잔티움 제국 황제 유스티누스 1세는 518년 제위에 오른 뒤,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를 내무대신으로 임명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삼촌이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삼촌의 수족(手足)이자 머리 구실을 했다. 유스티누스는 일반 병사에서 황궁 경비대 사령관에까지 오른 인물로서 자신감과 포부가 컸지만, 학식을 갖추지 못했고 나라를 다스릴 능력도 없었다. 결국 조카 유스티니아누스가 국정을 좌우했고, 527년 4월 유스티니아누스는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유스티누스가 세상을 떠나고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삼촌과 달리 학식이 깊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오래 전부터 로마법을 집대성하려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438년에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시도했지만 황제의 칙령을 모으는 데 그쳤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트리보니아누스를 책임자로 삼아 법전 편찬에 착수했다. 시작 14개월만인 529년 4월 칙령을 새로 정리한 <칙법휘찬>(勅法彙纂)을 완성하여 제국의 모든 법정에서 시행했다.


 

530년에는 법률 저작들을 집대성하고 기존 학설들을 체계적인 틀로 종합한 <학설휘찬>을 편찬했다. 그리고 533년에는 법학 교재 <법학제요>를 편찬했다. 제국 안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최고 권위의 법률, 법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 그리고 법학 교육 교재를 확립시킨 것이다. 훗날 로마법대전(Corpus Juris Civilis)으로 불리게 된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편찬된 법전은, 기존 칙령과 법 학설들 사이의 모순과 중복을 없애고 보다 명료하게 만들어 체계를 갖추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자신의 법도 포함시켰다.

 

 

옛 로마 제국의 전성기 판도를 회복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33년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보내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공격하여 534년 항복을 받아냈다. 535년에는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동고트 왕국의 내분을 틈타 역시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해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점령했고 540년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고트의 새로운 왕 토틸라가 반격하자 544년 다시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여 대적케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의심하고 시기하여 549년 그를 소환하고 나르세스 장군으로 교체했으며, 이후 552년 나르세스가 라벤나를 다시 점령하기까지 격전이 이어졌다.

 

“폐하, 저 벨리사리우스를 이탈리아로 보내는 것에만 만족하신다면 전쟁 준비는 이대로도 완벽합니다. 그러나 적을 이기려면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장수는 부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선 제 경호병들을 기병과 보병 모두 보내주십시오. 훈족을 비롯한 야만족 부대를 많이 보내주십시오. 병사들에게 지급할 돈을 보내 주십시오.” 벨리사리우스가 545년 5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유스티니아누스가 그에 대해 취한 다분히 이중적인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벨리사리우스는 541~543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도 크게 활약했지만 그 전쟁에서도 소환당한 적이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강화 협정을 통해 일종의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비잔티움 제국이 서방에 주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552년에는 서고트족이 지배하던 에스파냐 지역의 남부를 공격하여 몇몇 도시들을 점령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본토, 여기에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 지중해의 주요 섬들까지 영향권 안에 둠으로써, 유스티니아누스는 옛 로마 제국 전성기의 판도를 거의 회복했다.

 

 

교회 재통일 노력, “신이 하나이듯, 교회도 제국도 하나여야 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하기 전부터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을 극복하려 했다. 그는 신이 하나이듯 제국도 하나, 교회도 하나여야 한다고 확신했다. 제국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자면 교회의 재통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셈이다. 삼촌 유스티누스 황제가 교황 호르미스다스에게 보낸 서한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작성한 것이었다. 이 서한을 계기로 몇 차례 서신을 교환한 끝에, 519년 교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는 서방 교회가 이단으로 지목한 비잔티움 제국의 주교들을 파문하는 데 동의했고, 이것은 동방 교회가 교회의 재통일을 위해 서방 교회에 양보하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기독교 교리, 교회 규정, 신학 논쟁에 깊이 개입했다. 당시로서는 교리 및 교회 문제가 사실상 정치 문제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부정된 단성론(예수 그리스도에는 신성神性 만이 존재한다는 신학적 입장)에 대해 유스티니아누스는 관용적 입장을 취했다. 시리아와 이집트 등에서 득세하고 있던 단성론자들을 제국 교회에 통합시켜 정치적 통합을 다지려는 의도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신학과 그 지도자들을 이단으로 단죄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단성론자와 정통론자들 모두가 미워하는 신학적 입장을 단죄하여 양측의 적대감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정통론자들은 그런 조치가 칼케돈 공의회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단성론을 사실상 용인했다고 비판했고, 단성론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진정한 관용과 양보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를 열고 교황 비질리오를 억류시키기까지 했으나, 신학적 대립과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칠 줄 모르고 일했던 군주의 최후


로마 제국 전성기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공의회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교회를 통일시켰다. 소피아 대성당을 재건하는 등 많은 뛰어난 건축물들을 세웠다. 새로 집대성한 법전을 통해 제국의 질서를 확보했다. ‘아코이메토스’(잠 없는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그렇다면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시킨 위대한 군주가 아닐까? 그러나 약탈과 착취에 시달린 이탈리아 주민들은 제국의 지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넓어진 영토는 이민족의 침략에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교회 분열과 신학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대규모 토목공사로 제국의 재정은 늘 위태로웠다. 세금 부담에 시달린 백성들의 원성이 컸다. 개인적 성품 측면에서는, 자신의 명성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을 편집증에 가깝도록 의심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한 사람의 강력하고 뛰어난 황제의 통치 아래 놓인 대제국 체제를 꿈꿨지만, 그것은 이루기 무섭게 무너지기 쉬운 체제였다. 이미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 세계는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과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동질감을 상실했다. 예컨대 이탈리아는 유스티니아누스 사망 후 불과 3년 만에 비잔티움 제국에서 벗어났다.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던 군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65년 11월 14일 밤, 시종장이 홀로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에게는 제위를 이을 소생이 없었고 여동생 비길란티아의 아들 유스티누스(유스티누스 2세)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누스 2세는 이렇게 탄식해야 했다. “저 아바르족과 사나운 프랑크족, 게피다이족과 게타이족, 그 밖의 많은 민족들, 그들은 기치를 나부끼며 사방에서 우리를 공격해 온다. 이 사나운 적들을 물리치려면 어떤 힘을 찾아야 하겠는가? 오, 로마의 힘은 사라졌는가?” (코라푸스의 <유스티누스의 찬가> 중에서)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법 제정, 법전 편찬을 이끈 군주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함무라비 함무라비
(BC 1810~1750) 가장 오래된 성문법 중 하나인 함무라비 법을 제정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1769~1821) 나폴레옹법전으로도 불리는 프랑스 민법전을 제정, 공포
주원장 (명 태조) 주원장 (명 태조)
(재위 1368∼1398) 조선에도 영향을 미친 <대명률>을 제정하여 공포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