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부정된 단성론(예수 그리스도에는 신성神性 만이 존재한다는 신학적 입장)에 대해 유스티니아누스는 관용적 입장을 취했다. 시리아와 이집트 등에서 득세하고 있던 단성론자들을 제국 교회에 통합시켜 정치적 통합을 다지려는 의도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신학과 그 지도자들을 이단으로 단죄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단성론자와 정통론자들 모두가 미워하는 신학적 입장을 단죄하여 양측의 적대감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정통론자들은 그런 조치가 칼케돈 공의회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단성론을 사실상 용인했다고 비판했고, 단성론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진정한 관용과 양보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를 열고 교황 비질리오를 억류시키기까지 했으나, 신학적 대립과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칠 줄 모르고 일했던 군주의 최후
로마 제국 전성기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공의회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교회를 통일시켰다. 소피아 대성당을 재건하는 등 많은 뛰어난 건축물들을 세웠다. 새로 집대성한 법전을 통해 제국의 질서를 확보했다. ‘아코이메토스’(잠 없는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그렇다면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시킨 위대한 군주가 아닐까? 그러나 약탈과 착취에 시달린 이탈리아 주민들은 제국의 지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넓어진 영토는 이민족의 침략에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교회 분열과 신학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대규모 토목공사로 제국의 재정은 늘 위태로웠다. 세금 부담에 시달린 백성들의 원성이 컸다. 개인적 성품 측면에서는, 자신의 명성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을 편집증에 가깝도록 의심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한 사람의 강력하고 뛰어난 황제의 통치 아래 놓인 대제국 체제를 꿈꿨지만, 그것은 이루기 무섭게 무너지기 쉬운 체제였다. 이미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 세계는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과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동질감을 상실했다. 예컨대 이탈리아는 유스티니아누스 사망 후 불과 3년 만에 비잔티움 제국에서 벗어났다.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던 군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65년 11월 14일 밤, 시종장이 홀로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에게는 제위를 이을 소생이 없었고 여동생 비길란티아의 아들 유스티누스(유스티누스 2세)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누스 2세는 이렇게 탄식해야 했다. “저 아바르족과 사나운 프랑크족, 게피다이족과 게타이족, 그 밖의 많은 민족들, 그들은 기치를 나부끼며 사방에서 우리를 공격해 온다. 이 사나운 적들을 물리치려면 어떤 힘을 찾아야 하겠는가? 오, 로마의 힘은 사라졌는가?” (코라푸스의 <유스티누스의 찬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