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로마의 영광과 그늘 - 리어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29

로마의 영광과 그늘

 

* 랑케는 “고대의 모든 역사는 한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강들과 같이 로마의 역사 속으로 흘러들어가며, 근대의 모든 역사는 또한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나온다.”라고 말하였다. 로마는 고대문명 특히 그리스 문명을 이어받아 그 모든 성과를 종합함으로써 서양문명의 뿌리를 전달해준 매개자이다.

 

 그러나 로마 역시 독창적이고 활력 넘치는 문명과 제도 등을 많이 남겼다. 특히 법률, 토목과 건축, 군사적 능력, 그리고 기독교 등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성과를 남겼다.

 

* 로마는 제국 분할통치 정책에 따라 A. D.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어 2개의 로마가 존재했었다. 우리가 보통 로마를 지칭할 때는 서로마만을 의미한다.

 

1. 로마 공화정의 발달과 몰락

 

B. C. 753 로물루스가 티베르 강기슭에 로마 건국

 

(1) 왕정

왕(rex)은 최고행정수반으로 군대지휘권을 갖고 재판을 주재하며 종교 신관으로서의 권능을 갖지만, 원로원의 구성원에 의해 선출되었으므로 그 권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B. C. 509 귀족들이 에트루리아계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 수립

 

(전설에 의하면 타르퀴니우스왕의 참주정에 반대해서 귀족들이 반기를 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이 시기는 로마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증되는 때로 이에 불만이 가중된 귀족들이 왕의 억압적 통치에 반대한 것. 또한 귀족들은 세르비우스 왕의 군제 개혁이 평민들을 동원해 귀족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로 보았을 수도 있다.)

 

(2) 공화정과 신분투쟁

 

 

① 공화정의 구조

 

- 집정관(consul) : 행정 및 군사의 대권(imperium)을 장악하며, 원로원과 협의하고,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을 갖는다. 임기는 1년이며, 2명으로 구성되어 권력행사에 있어 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한 사람의 독재관(imperator)에게 전권이 위임되었으며, 그 기한은 6개월을 넘을 수 없었다.

 

- 원로원(senate) : 최초에는 씨족장들의 모임에서 출발(100명)한 것으로 보이며, 로마가 점점 확장되면서 그 수는 300명으로 확대되었으며 고위 정무원직을 지낸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형식적인 권한에 있어서는 집정관에게 충고할 수는 있으나 입법 활동은 금지되어있는 순수자문기관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원로원의 충고’는 집정관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국정 전반에 대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 민회 : 무장가능한 모든 성인 남자들로 구성된 민회는 최초에는 주로 혈족 귀족들만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이는 쿠리아(curia) 회로 출발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6세기 경에는 세르비우스(Servius) 왕의 군제 개혁을 계기로 군대 조직으로 구성된 켄투리아(centuria) 회로 바뀌었다. 이러한 군제 개혁은 로마군의 핵심을 경기병에서 중무장보병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민회는 귀족들과 소수의 부유한 평민들의 독단적인 지배가 가능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나중에 트리부스(tribus) 회를 만들어 평민들만이 활동하는 기구를 만들게 된다.

 

※ 귀족(patricii) : 어원은 “조상의 이름을 댈 수 있는 자”로 혈통이 중요함을 암시하며, 전통적인 대토지 농장 지주들이다.

※ 켄투리아회(병사회) : 전 시민을 193개의 백인대로 조직하고, 시민의 재산에 따라 5등급으로 구분한 군사조직을 토대로 한 일종의 시민총회. 병사회는 집정관을 포함한 고위정무관의 선출, 전쟁과 강화의 결정, 기타 입법 등 기능과 권한이 매우 컸다.

 

공화정의 권력 핵심은 귀족층으로 이들은 군대에서 기사나 중무장보병의 임무를 수행하고, 원로원의 구성원이면서 정무관직과 집정관직을 독점하였다. 한편 평민은 피지배계급으로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참정권이 없다. 다만 평민회를 통해 중대사를 비준할 뿐이나, 원로원은 이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며, 평민회의 소집도 집정관의 권한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로마는 대외적으로 팽창을 해나가야 했기에 군대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의 위치가 점차 중요성을 더해가던 때였다. 따라서 초기 공화정하에서 로마는 평민들이 점차 참정권을 요구하면서 귀족들과 기나긴 신분투쟁을 벌이게 된다.

 

 

② 신분투쟁의 과정

 

● B. C. 494년 성산에의 집결 → 호민관직 설치 : 호민관은 정무관들의 불법적인 행동들로부터 평민을 보호하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 트리부스 회의 설치 : 트리부스(tribus)라는 지역적 구획에 따른 평민들의 회의.

● B. C. 451년 12 표법 : 이전까지는 귀족의 자의적인 평민지배가 가능했지만 성문법의 공표로 인해 법에 의한 지배가 시작. 그러나 귀족-평민간의 통혼금지 등 여전히 신분적 차별 존재.

● B. C.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투스 법 : 집정관중의 한 명은 반드시 평민 중에서 선출. 귀족들의 토지 소유 상한선을 500유게라(약 40만평)로 제한

● B. C. 300년 정무관들의 중형 판결에 대한 모든 시민들의 상고권 인정

● B. C.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 :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의 재가없이 법적 효력을 갖는다.

 

※ 로마의 신분투쟁의 특징은 투쟁과정의 완만성과 성과의 보수성이다.

 

로마는 200년 동안의 신분투쟁을 치르면서도 내란으로 인해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되는 일은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인의 현실적인 정치 감각과 공동의 목표를 위해 포용하고 타협하는 기질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국론의 분열을 막기 위해 평민들의 요구를 순차적으로 수용한 귀족들의 태도는 noblesse oblige 그 자체였다”라면서 귀족들의 자기희생적 태도를 찬양하는 어느 역사가의 평가는 진실일까? 이미 보았듯이 신분투쟁의 실질적인 수혜자는 사실상 소수 부유한 평민이었으며, 이들은 종래의 구귀족과 융합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였다.

 

귀족 계급들은 소수의 부유한 평민들에게 권력을 분배함으로써 불만을 무마시키고,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의 공화정은 민주주의에 이르지 못하고 과두지배체제에 머무르다가 제정으로 전환하게 된다.

 

 

(3) 외적 성장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두 가지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는데, 하나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과업이고 나머지 하나는 포에니 전쟁이었다.

 

- 1차(B. C. 264-242) :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와 대결

- 2차(B. C. 218-201) : 한니발이 로마 침공 → 로마의 동맹국을 해체하는데 실패하고 결국 칸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 로마의 지배방식은 divide and rule의 원칙 아래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는 동맹시, 부분적인 자치를 인정하는 자치시, 로마시민이 이주하여 새운 식민지 등으로 구분하여 예우를 달리하는 간접통치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것의 장점은 피정복민들이 단결하는 것을 방지하며, 일종의 동족의식을 갖게 하여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다. 로마는 동맹시들이나 속주에 강압적인 지배나 착취를 하는 대신 그들의 경제권을 인정하고 또는 자치를 인정하면서 단지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했다.

- 3차(149-146) : 재기하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킴.

 

 

(4) 포에니 전쟁의 결과

이 전쟁의 결과 로마는 지중해의 지배자로 등극하고 이어서 에스파냐, 마케도니아,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아갔다. 그러나 로마의 제국화는 국가의 장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① 경제적 : 정복전쟁으로 막대한 토지를 획득하고 노예가 대량 유입되면서 대농장 경영(라티푼디움)이 실시되어 중소농민을 중심으로 하던 곡물 위주의 자급적 농업형태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② 사회적 : 속주에서 값싼 곡물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장기간의 군복무 등으로 농지가 황폐화되면서 중소 자영 농민들이 대거 몰락 → 시민병의 기반 위협.

중소 자영 농민의 몰락과는 대조적으로 속주에서의 세금 징수업, 상업, 군납업, 토목공사 등에 종사하는 부유한 평민 계층이 신흥 귀족으로 등장하였다(에퀴테스).

 

③ 정신적 : 질박한 농경적 사고가 사라지고, 헬레니즘 문화의 유입으로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 로마인들은 왜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 그토록 열중하였는가?

 

1. 로마의 지배층인 귀족집단은 계급적 이익을 위해서나 개인을 위해서 전쟁을 원할 이유가 있었다. 이제 막 사회적 성공을 위해 뛰어든 청년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 군사적 성공이 매우 절실했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군사적 명성은 쉽게 관직 획득으로 이어지곤 하였던 것이다.

 

2. 경제적 이익 : 로마인들은 정복 전쟁을 통해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얻어내고, 속주로부터 보통 수학의 1/10에 해당하는 공납과 세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전승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은 엄청난 금액의 공공 지출을 가능하게 하여 수많은 도로와 건축물이 건설되었으며, 병사 개개인은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다.

 

 

(5)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공화정의 몰락

 

① B. C.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당선된 후 농지법의 입법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라쿠스는 로마 사회의 불균형을 바로 잡고, 중소자영농을 부활시켜 감소된 군사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유력자들이 과도하게 점유한 공유지의 부분적인 재분배가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원로원의 반발로 살해당함으로서 실패로 돌아갔다. (* 농지법 -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고 이를 초과하면 나머지는 국가가 몰수해서 무산자에게 분배하는 법률)

 

② B. C 123년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형의 뒤를 이어 더욱 광범위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농지법 부활시키고, 대규모 식민지를 건설해 토지가 없는 농민을 이주시키려 했으며, 도시 빈민들에게 저렴하고 안정된 가격에 곡물을 제공하기 위해 곡물법을 제정했다. → 반대파에 의해 살해.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조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상층 계급의 편협한 기득권 유지 욕망 때문이었다. 포에니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게 된 귀족 및 에퀴테스들은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이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개혁조치를 가로막고 보수화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6) 공화정 말기의 혼란

 

- 원로원 의원들은 개혁파를 제거함으로써 단기적으로는 승리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후 독립적인 정무관들에 의해 원로원의 지위는 더욱 약화되고 게다가 귀족들은 내부적으로 벌족파(옵티마테스)와 민중파(푸블라레스)로 양분되어 당쟁을 일삼고 있었다. 한편 동맹시들은 시민권을 요구하면서 동맹시전쟁을 일으켰다. 게다가 스파르타쿠스가 주동한 노예반란(B. C. 73)도 있었다.

이렇듯 로마 공화정 말기는 내부에서 분출되는 다양한 갈등과 권력투쟁으로 인해 매우 혼미한 상황에 빠져 들어갔다.

 

- B. C. 107년 마리우스는 평민파의 지도자로 군대 제도를 개편 → 시민의 재산 자격 철폐하고 로마 군인의 직업 군인화 : 이러한 조치는 이전 원로원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권이 개인 장군에게로 넘어가 사병화 되어버림.

 

 

 

2. 제정 로마

 

(1) 아우구스투스 : 안토니우스와의 권력다툼에서 승리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제1시민(princeps)을 자처. 그러나 외적으로는 공화제를 지향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행정, 재정, 군사 등 모든 권한을 독점하여 imperator라는 칭호를 계속 보유했고, 따라서 이때부터를 실질적인 제정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 세제 개혁 : 징세 청부 제도 폐지 → 고정된 봉급을 받는 징세관을 중앙에서 파견

 

-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중앙 집권적인 재판제도를 창설

 

- 속주를 정비하여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한편 속주 총독들에게는 직접적인 지배권을 행사

 

- 공공사업 등을 건실하게 추진하여 로마제국의 기초를 튼튼히 하여 스스로 “벽돌의 로마를 대리석의 로마”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중간에 비록 칼리굴라나 네로 등과 같은 폭군도 있었지만 곧이어 5현제가 등장함으로써 향후 200년간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계속되었다.

 

 

(2) Pax Romana

 

① 신분계층 : 원로원 - 에퀴테스

 

- 원로원 : 귀족계층으로 여전히 고위정무관직을 독점하고, 속주의 총독이나 군단의 지휘관을 담당하고, 황제 자문기관 역할을 했지만, 제정 성립과 함께 황제에 대한 종속이 강화되었다.

 

- 에퀴테스 : 제국의 제2계층으로 아우구스투스 이래 속주의 징세권은 박탈당했으나 관료제가 활성화되면서 문무의 요직에 등용되어 막강한 권한을 행사.

 

② 경제 : 막대한 전리품 획득, 속주로부터의 공납, 미개발 지역 개발 등으로 로마의 경제는 번영을 구가하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거대한 정복사업의 결과였다.

 

③ 정복활동 : 트라야누스 때 제국의 경계가 최대한 확대되고, 하드리아누스 때는 주로 방어에 주력.

 

※ 팍스 로마나는 진실로 평화로운 시기였는가?

이 시기 평화의 본질은 무엇보다 로마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에 기초한 것이다. 로마의 강력한 군대가 주변의 경쟁 세력들을 굴복시킴으로써 창출된 이 질서는 불만의 표출을 억제할 수 있을 때는 유지되지만 로마의 힘이 미약해졌을 때는 심각한 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편, 제국 내적으로도 이 평화로운 시기는 평민들 특히 속주의 소토지 보유농들에게는 가장 혹독한 시기였다. 지주층의 강도 높은 착취구조와 황실 재정의 조세요구로 인해 생산량의 상당수를 빼앗겨야 했던 것이다.

 

 

(3) 제정말기의 상황

 

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양자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아들 코모두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면서 제위 계승권에 문제가 생기고 군인들이 황제의 제위계승 문제에 개입.

(약 50년 동안 26명의 황제, 그 중에서 25명이 살해 또는 전사)

 

② 외부로부터의 위협 : 사산조 페르시아가 동방의 국경 위협, 북부의 변경지대에서는 게르만족이 침입

→ 군제개편 : 정규군단에도 속주민이 대거 유입, 변경지대에는 현지인으로 하여금 주둔하도록 하고 지위를 세습.

 

③ 행정관리의 수 증가 : 속주를 세분화 ⇒ 이러한 문제를 세금의 증대로 해결하려함

 

 

(4) 제국의 재편

 

① 디오클레티아누스

- 황제권의 절대화 - 동방의 전제군주제를 도입

- 제국의 분할 통치 :정제 2명과 부제 2명

 

② 콘스탄티누스

- 313년 크리스트교 공인 : 제국의 내적 통일을 목표.

-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김 → 콘스탄티노플 : 테오도시우스가 두 아들에게 제국을 둘로 나누어주면서 완전히 제국 분할

※ 결국 476년 게르만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됨으로서 서로마 제국은 몰락.

 

 

 

3. 로마제국의 멸망 요인

 

“로마 제국은 영원하다”는 생각 때문에 제국의 몰락은 당대인들에게 하나의 정신적 충격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씌어진 것이다. 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조직과 제도를 재건하고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되풀이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칭호는 샤를마뉴 대제와 오토 대제 그리고 신성로마 황제들에 의해 계속 사용되었다.

 

(1) 정치적 요인

① 황제권 계승의 문란 - 황제 세습의 원칙이 없었으며, 황제들이 군을 통제하지 못함.

②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어려울 정도의 넓은 영토.

③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으며, 과다한 행정 관료는 국가 재정을 고갈시킨 원인이다.

 

 

(2) 경제적 요인

① 로마의 경제적 번영은 정복에 의한 영토 확장과 이에 수반된 공납의 산물이지 기술의 개발이나 생산력의 발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복이 중단되면 경제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② 정복 전쟁의 종식으로 노예의 공급이 중단되자 대농장(라티푼디움)은 소작제로 변화

③ 상업도 거듭되는 내란과 속주의 자급자족 및 무역불균형의 심화 등에 따라 쇠퇴

→ 도시의 쇠퇴로 이어지고 이는 발달된 도시 문명이 농촌 문명으로의 퇴화를 의미

 

(3) 사회적 요인

① 상층계급과 하층계급간의 장기화된 충돌로 국가 위기시 대중의 지지 얻지 못하는 등 계급간의 위화감이 심화되었다.

② 공화정 말기 이래로 로마의 근간을 이루던 중산 농민층이 무기력해짐으로써 사회의 근간이 부실..

(4) 정신적 요인

① 사회 불안의 가중으로 사람들은 현세에 대한 희망을 낙관하지 못하고 내세를 바라보게 됨 → 크리스트교, 동방의 신비종교

② 사치 풍조가 만연해서 건실한 기풍을 상실.

 

※ 기타 요인

(1) 기번의 설 : 기독교의 내세지향적인 성향이 로마인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2) 기후의 변화와 지력의 고갈

(3) 인종의 타락 : 타 민족과의 혼혈로 저질민족으로 전락.

(4) 납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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