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Silk Road(실크로드)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24
Silk Road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해 교통로의 총칭.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변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이것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敦煌]까지 이르는 구간으로, 역대에 장안(長安 : 지금의 시안[西安] 또는 뤄양[洛陽])을 기점으로 했고, 허시후이랑이 중요한 길목이었다.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이며,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로막혀 사막 남쪽(쿤룬 산맥[崑崙山脈] 북쪽)과 사막 북쪽(톈산 산맥[天山山脈] 남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서쪽 부분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갈래가 있어서 남로는 파미르 고원의 쿠시쿠르간에서 서쪽으로 쿠샨 왕국에 이르고,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천축(天竺 : 인도의 옛 이름)에 들어갈 수 있다.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지중해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른다. 북로는 강거(康居 : 漢魏시대 중앙 아시아의 키르기스 평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투르크계 유목민족국가)에서 서쪽으로 이란을 지나 곧장 지중해와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거의 수천 리로 이어져 지금의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여 개 국가를 거쳐간다. 이 세 부분 가운데 동쪽 부분은 역사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중앙과 서쪽 부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개통과 발전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 BC 206~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大月氏)·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2차례에 걸쳐 장건(張騫)을 중앙 아시아로 파견했다.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당시 서역(西域)이라고 칭해지던 중앙 아시아 및 서방 각지와 사절을 교환하게 되었고, 여러 문물이 왕래하게 되었다.

당시에 실크로드는 남·북 양 도로 나뉘어 있었다. 중국의 서쪽 관문이었던 위먼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는 로프노르 호 남안의 미란으로부터 쿤룬 산맥의 북쪽을 지나 야르칸드에 이른 후 파미르 고원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나가는 남로(南路)였고, 또 하나는 투루판[吐魯蕃]에서 톈산 산맥 남쪽을 지나 카슈가르에서 파미르를 넘어 페르가나로 가는 북로(北路)였다. 남로에는 다시 야르칸드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 북쪽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

전한 때에는 반초(班超)가 서역으로 출사(出使)하여 전한말 이래 중단되었던 서역과의 관계를 개선시켰고, 나아가 AD 97년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 로마)으로 파견했다. 감영은 결국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파르티아와 시리아 및 페르시아 만까지 갔다옴으로써 실크로드의 서쪽 끝을 연장시키고 중국인들의 서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당대(唐代 : 618~907)였다.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돌궐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마침 돌궐이 동·서 양국으로 분열되고 서돌궐에 내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하여 서돌궐을 제압했다. 이무렵 로프노르 호 일대의 건조화(乾燥化)가 진행되어 남도의 이용도가 낮아졌고, 북도는 둔황에서 북상하여 하미[哈密]를 경유해 투루판에서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톈산 남로)과 톈산 산맥 북쪽을 지나는 길(톈산 북로)이 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구자(龜玆 : 한대의 서역국가)와 북정(北庭 : 짐사)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설치하여 톈산 남·북로를 관장하게 했다. 이후로는 비단 무역을 비롯한 동서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소그디아나(서투르키스탄)를 본거지로 하는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했다. 9세기 무렵에는 당의 세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북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족과 서쪽에서 진출해온 이슬람 상인이 그들을 대신했다. 송대 이후로는 광저우[廣州]를 지나 스리랑카·파르티아·홍해를 지나 카이로에 도달한 후 다시 이곳을 거쳐 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했다. 이와 함께 육로는 점차 쇠퇴해갔다.

 당나라 때는 중국 전성기의 시기였다. 당나라의 서울 장안 (현재 서안)은 동서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 졌던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이었다. 중국 의 큰스님 현장이나 신라의 혜초 스님 등이 실크로드 따라 인도를 오간 것도 이 무렵이다. 혜초는 뱃길로 남양을 거쳐 인도의 성지를 순례한 후, 실크로드로 당나라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의 10년 여행기 에 비단길의 여러 가지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실크로드의 속살은 장려하다. 한나라 땅과 서역을 잇는 하서회랑, 투쟁과 대립의 상징-만리장성, 해골을 길잡이 삼아 떠났던 황량한 고비사막, 사막의 대화랑 돈황, 비극의 역사로 수놓은 고대 왕국, 수수께끼로 감싸인 이름 모를 승려들의 부도 등이 아직 남아 있어 폐허 속에서도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더듬어 볼 수 있다.

 

# 하서회랑(河西回廊)

 황하를 건너면 곧바로 사막이 시작된다.

황하의 서쪽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이 길은 황하 서쪽의 복도라는 뜻의「하서회랑」이라고 불린다. 돈황 을 목표로 하는 여행자는 이 회랑을 지나가지 않으면 서쪽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난주에서 무위, 장액,주천,가욕관,그리고 돈황으로 하서회랑은 계속된다.

열차나 자동차는 대체로 하서회랑 루트를 따라 서쪽으로 간다. 옛 사람들 은 말이나 낙타를 이용해서 이 길을 갔을 것이다. 한(漢)나라가 이 곳을 개척하기 전까지는 유목민들의 땅이었다.

중국 역사를 북방 민족과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흉노라고 불린 이 유목민은 말을 타고 황하를 건너 이곳을 쳐들어오기 일쑤였다. 진시황이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멀리 돈황 까지 이어지는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한나라 유방은 직접 흉노를 치러 이곳에 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곳이기도 하다.

 기원전 121년 한 무제 때 하서회랑은 중국에 편입되 었다. 그것은 뛰어난 지력과 계략을 갖춘 장건(張騫)이라는 장수에의해서였다 장건은 어떠한 경위를 통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漢)민족과 북방 기마민족『흉노』의 공방전에 대해 눈을 돌 리지 않으면 안된다.

한나라 왕조가 성립한 기원전 200년께, 만리장성 북쪽에서는 흉노 왕 목특선우가 북아시아 초원 일대를 평정하여 장대한 유 목 제국을 만들어 냈다. 이에 대해 한나라 제국을 구축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그 여세를 몰아 북방 흉노를 치려고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 기 마전에 뛰어난 흉노의 군대는 고조의 군대를 7일간에 걸쳐 포위, 섬멸시켰다. 한나라는 흉노에게 완패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60년 16세에 즉위 한 무제(武帝)는 고조의 굴욕을 씻고, 문자 그대로 세계유일의 왕으로서 군림할 결의를 굳혔다.한편 당시 월(月)씨의 왕이 흉노에게 평정 당해 울 분을 삼키고 있음을 안 무제는 사자를 보내 동맹을 맺어 흉노를 동서에서 협공할 생각을 했다. 윌씨에 파견할 사자를 모집했는데, 이때 사나이의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이 바로 장건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서역 출신인『감부』라는 노예를 길잡이로 세우고, 100여명의 사나운 사나 이들을 거느려 흉노의 적진 돌파를 꾀했다. 그렇지만 흉노가 무제의 사자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흉노의 땅에서 갇혀 있게 되었다.

13년이 지나서 장안에 돌아 왔을 때에는 100여명의 부하를 다 잃었고, 자기와 감부 단 둘뿐이었다.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장건은 한나라 서쪽에 있는 대원(大苑)이라는 나라에 천마(天馬), 한혈마(汗血馬)라 고 불리는 명마들이 있음을 알고 그 나라를 쳐 말을 얻어 흉노와 다시 대적하는 것이 어떠냐고 왕에게 아뢨다. 무제의 허락을 얻어 장건은 대원 을 쳐 멸망시키고 명마를 확보하였다.

장건은 지략과 기마대의 용맹성으로 드디어 흉노의 세력을 일소하였다.하서회랑에서 흉노를 일소하자 무제 는 무위·장액·주천·돈황 등의 하서 사군을 설치하여 서방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였던 것이다.사마천은 장건의 서역 개척을 착공(鑿空)이라고 표현하였다. 마치 굴에 구멍을 뚫듯이 격리되어 있는 서역에 하나의 길을 뚫었던 것이다.

 

# 고비사막

   강우량이 150 - 200㎜로 반사막이라 불린다. 고비사막은 모래, 자갈로 덮여 있고, 사막 식물만 존재한다. 섭씨 40도 이상의 열기가 가득한 대낮에 는 끝없이 맑게 개인 푸른 하늘과 황토색 들판이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연출한다. 어두워질 무렵부터 밤중까지 고비에서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황토색 대지가 하얀빛을 띠기 시작하고, 그것은 곧 푸르게 된 다. 야간 차창밖에는 아무데도 불빛을 볼 수 없다.“하늘엔 한 마리 나는 새 없고, 땅에는 한 마리 뛰는 동물 없다.” 든지“사람 뼈 동물 뼈들을 가지고 갈길의 표지로 삼을 뿐”이라고 한, 지난날 현장스님 같은 구도승이 쓴 기행류(紀行類)의 문장을 통해서 보듯이 고비사막은 황량하기 그 지없다.

그러나 이 황량함 속에도 곳곳에 사람이 사는 오아시스가 있고 길에는 가로수가 있고 사람이 살고 있다. 고비사막의 오아시스는 보통 사 막처럼 움푹 패어 생긴 것이 아니고 기련산의 만년설이 녹아서 땅 밑에 지하수가 되어 스며들었다가 아무 곳에서나 솟아오른다.

 

     Prologue, 실크로드 빛나는 사람의 길

  ◇ 실크로드 개략도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가 죽는 것은 오래 동안 길을 걷는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길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곧은길 이다가도 여러 갈래의 길을 만나 혼돈스러운 선택을 하여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잘 닦여진 길을 가다가도 때로 비포장이거나 도로가 끊기여 없는 길을 만들어 가거나 신을 벗어 들고 개울 같은 것을 건너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길을 걷는것, 다시 말해 삶이란 여정 속에는 행복하고 일이 잘 풀리는 날들, 뼈를 깎는 선택을 하였음에도 마음처럼 결과를 얻지 못하여 오랫동안 아픈 가슴을 쓸며 분루를 삼켜야 하는 날들, 평안하게 오아시스 아래서 물을 마시듯 어느날 문득 행복해져 있는 날들 등이 골고루 섞여 있다.

이렇듯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길 속에서 그래도 사람이 살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힘든 길을 가다가도 나무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물 한 모금을 마실 수 있는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며, 허기진 배를 부여안고 있다가도 간혹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며, 철천지원수이거나 아니면 도둑을 만났다가도 가족이나 친구라는 집단,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살을 부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이나 도로위에도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짧은 인생이, 삶이, 눈물과 웃음들이 우리가 모른 채 고스란히 말없는 역사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오늘도 그렇게 기록되어 갈 것이다.

강과 산, 사막과 산맥, 오아시스와 황무지로 연상되는 실크로드는 어쩌면 이런 인간의 역사, 인류의 문명과 문화, 개인의 삶이 모자이크되어 오늘에 이르는 대표적인 길일 것이며 그 역사는 최근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용트림을 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나의 경우 막연하게 실크로드를 가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는데 그런 희망을 가졌던 때들은 맘이 외롭거나 성정이 불안하였을 적이었던 것 같다. 척박한 그 땅들을 생각해보면 때로 직면하게 되는 어려운 내 현실들이 별것 아니라는 희망을 던져줄 것 같았고 뭔가 작은 위안이라도 얻을 것 같은 막연하고도 주관적인 느낌과 과대한 환상 같은 것들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의 막연하고 편한 생각들과는 달리 실크로드의 초입만 보고 온 것만으로도 결론적으로 실크로드는 그 길 위의 사람들에게는 현실이었고 더위나 밤의 추위등 자연의힘과 하루하루 싸우는 생존을 위한 길이었음을 확인하였음을 고백하고 반성한다.

  ◇ 둔황가는 길, 고비 사막의 새 아침


실크로드는 무엇을 말함인가?

실크(Silk)라는 고가의 문물로 대표되는 이 길의 이름은 실제로 사람들이 왕래한 길이었으므로 종이(Paper)로 라거나 향로(Spice)로, 전쟁(Battle)로 또는 종교(Religion)로라고 해도 별반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실크로드라는 말에서 실크는 이 길이 주는 상징적인 수사일 뿐 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를 범칭(汎稱)한다. 다시말해 실크로드란 인류가 예부터 이용해온 원거리 무역로와 문명교류의 통로에 대한 상징적인 명칭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부르는 실크로드는 주로 중앙아시아 일대에 점재한 여러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이루어진 길이다. 때문에 ´오아시스로(Oasis Road)´라고도 불린다. 오아시스로는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나 터키의 이스탄불과 로마까지 연결되며, 총 12,000km(직선거리 9,000km)에 이른다.

실크로드가 가장 번성했던 수(隋), 당(唐)시기에 이르면 신라의 문물 (서역인의 얼굴을 한 괘릉 무인상, 천마총에서 발견 되는 유리잔 등등)이 유럽과 그 맥이 닿아 있음을 확인 할 수가 있을뿐더러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됨으로서 그 연장이 서라벌과 로마를 연결하는 15,000Km에 이르게 된다는 해석도 가능할뿐더러 더러는 그렇게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크로드가 오아시스로만 지칭하지는 않는다. 실크로드라는 용어의 범위 안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로(草原路=스텝로 Steppe Road)와 지중해에서부터 홍해, 아라비아해, 인도양을 지나 중국 남해에 이르는 남해로(南海路=Southern Sea Road)까지 포함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라고 하면 동서교류의 3대 통로인 북방의 초원로와 중간의 오아시스로, 남방의 남해로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들 3대 간선의 정확한 명칭은 ´초원로´, ´오아시스로´, ´해로´라고 할 수 있다.

광의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7천년 경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생한 농경과 목축 및 토기와 방직기술 등 원시문명이 이 길을 따라 각지에 전파되는 것으로 그 시원(始原)을 잡을 수 있고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각각 기원적 6천년 경과 4천년 경에 생겨난 채도(彩陶)도 이길을 따라 동서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교류상을 실증할 만한 증거는 거의 없다.

이에 비해 협의의 실크로드 개념은 역사시대 후반기에 개통되어 18세기경까지 기능했다는 좀더 좁은 의미의 시말(始末)이다. 이에 따르면 실크로드는 시간적으로 2,500여 년간(BC 8~7세기부터 AD 18세기까지) 존재해온 문명교류의 역사적 통로로서, 오늘날 실크로드라고 하면 대개 이 협의의 실크로드를 지칭하며, 기원적 8~7세기에 스키타이(Scythai)가 초원로를 개척한 때부터 기원 전후 장건(張騫)의 서역로 개척과 로마인들의 동방초행(東方初行)을 이르는 [개척기]와, 기원후 중국 비단이 다량 서역으로 전파된 때부터 중국 당제국과 이슬람제국에 의한 활발한 동서교류와 몽골제국의 서정을 거쳐 17세기 신구 대륙간 교역이 진행되기까지의 [번영기], 그 이후의 [쇠퇴기]로 나눌 수가 있다.

내가 가게 된 실크로드는 오아시스 길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서안에서 우루무치에 이르는 길로 유라시아 대륙의 북위 40도 부근에 펼쳐진 사막대 곳곳에 오아시스가 산재해 있는데, 사막가운데 산재한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발전된 길을 의미한다. 이 길 위에서 수많은 왕조와 민족이 오아시스로 위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하였고 동서교통로에서 문자 그대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왔기 때문에 보통 오아시스로를 실크로드라고 지칭한다.

전한(前漢)시대 오아시스로는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의 두 길이 있었다. 천산산맥를 두고 그 상,하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있었고, 후한대(AD 25~220)에 와서 서역과의 관계가 확대됨에 따라 기존 오아시스로의 이용이 더욱 빈번해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선이 개척되었는데 둔황-고창을 이어 천산산맥 위를 지나는 새 길로서 나중에 이 길은 보통 천산북로라 부르게 되고 기존의 북로는 중로라고 통칭하게 된다.

  ◇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와 풍경


서안에서 우루무치는 고대 중국 내에서의 실크로드의 시발과 종점이었던 것이고 지금 나는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중국 실크로드의 고대역사에서 길의 흥망성쇄는 수없이 많은 민족들의 부침과 같이 하는데 척박한 사막 길 위에서 잊을 수 없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민족 하나를 들라면 단연 훈족, 우리가 알고 있는 흉노일 것이다.

한나라 성립이전부터 끊임없이 중국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민족이었던 흉노는 투르크계, 몽골계 그리고 북방민족들로 구성된 국가로 흉노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유목국가를 성립시켰다고 전하며, 진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한 시기에 흉노국도 기원전 209년경에 성립된다. 기원전 220년,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설한 뒤 자기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듯이 흉노도 자신들의 최고 통치자를 선우(禪于)라고 하였다. 단군의 통치권도 하늘로부터 왔다고 한것처럼 ´통치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의미를 가진 선우는 유목세계의 천명사상에 근거한 강력한 리더십을 근거로 강한 유목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제 2대 선우인 모돈(冒頓:기원전 209-174년)은 재위기간동안 몽골리아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형성하였는데 동으로 한반도의 북부, 북으로는 바이칼호,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지금의 서안)와 티베트고원까지 이르게 되며 터키의 건국역사의 모태가 되기도 하고 다시 서진(西進)을 계속한 흉노는 유럽 동쪽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란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왕권의 강화와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강인한 흉노의 세력을 의식한 진시황제가 기원 전 215년에 이르러 장군 몽염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구축하게 하였을까?

기원전 206년경 진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한고조(漢高祖:기원전 206-195년) 유방은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10여만의 대군을 잃고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 끝에 기원전 198년에 흉노와의 화친정책을 맺게 된다. 흉노와 맺은 약조 속에는 흉노의 선우에게 한나라의 공주를 출가시키고 일 년에 수차례씩 비단과 술과 음식을 바치며, 한과 흉노는 대등한 형제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러한 약속을 지키면 흉노는 한나라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약이었으니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적인 약조나 다름없었다.

전한(前漢) 7대 한무제(武帝) 때 까지만 하여도 당시 만리장성 밖은 수수께끼의 땅이었다.

무제는 기원전 2세기 중반에 흉노에게 쫓겨 농서[롱西:감숙성(甘肅省)]에서 서쪽 사막 밖으로 옮겨간 월지(月氏:大月氏)와 손잡고 흉노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월지에 다녀올 사신을 공모한 결과 장건(張騫:?∼B.C. 114)이란 관리가 뽑혔다.

  ◇ 서역의 시작, 타클라마칸 사막 초입에서


기원전 138년, 장건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쪽 이리(伊犁:위구르 자치구 내)란 곳에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월지를 찾아 장안[長安:서안(西安)]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농서를 벗어나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때부터 흉노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장건은 활짝 트인 성격으로 해서 흉노에게 호감을 사 장가도 들고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탈출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포로가 된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장건은 처자와 일행을 데리고 서방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우뚝 솟은 천산(天山) 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타림 분지를 횡단한 그들은 대완국(大宛國)?강거국(康居國)을 거쳐 마침내 아무 강 북쪽에 있는 월지의 궁전에 도착했다.

장건은 곧 월지의 왕을 알현하고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왕의 대답은 의외로 부정적이었다. 끝내 월지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장건은 귀국 도중에 또 흉노에게 잡혀 1년 넘게 억류되었으나 부하 한 사람과 탈출, 13년만인 기원전 126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3년 후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진 장건은 계속 서역(西域) 사업에 힘썼는데 그의 대 여행은 중국 역사에 많은 것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동서의 교통이 트이면서 서방으로부터 명마(名馬), 보석, 비파(琵琶), 수박, 석류, 포도 등이 들어오고 한나라로부터는 금과 비단 등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 때 장건이 지나가고 온 길이 초기 실크로드의 중심이 된 천산 남로와 북로의 기원이 된다. 이른바 ´실크 로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와 같이 융성하였던 흉노국은 한 무제의 끊임없는 흉노 정벌정책에 의한 원친근공(遠親近攻)의 전략과 역사에 유명한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 장군 위청, 곽거병을 앞세운 한의 침공에 의해 서서히 세력이 약해지는 것이다. 흉노를 제압한 곽거병의 고사는 오천(五川=병사들이 먹을 물이 없어 곽장군이 칼로 땅을 다섯 번 친 곳의 땅을 파자 물이 솟았다는 전설에 근거한 지명)이나 주천(酒川=곽거병에게 내린 한무제의 술 10통으로 모든 병사를 먹일 수 없고 더구나 혼자 먹을 수 없다고 금천이라는 냇물에 부으니 개울이 모두 슬로 바뀌어 모든 병사가 나누어 술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지명)같은 지명에서 알 수가 있듯이 당시의 흉노를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회적 영향을 가져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 무제의 끊임없는 흉노정벌과 실크로드 교역을 차지하기 위한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밀리게 된 흉노는 동, 서 흉노로 분리되고 결국 서역지배권을 빼앗기게 되고 마침내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만다. 이렇듯 흉노의 지배에 있던 고비사막 근처 지금의 감숙성(甘肅省)이 한나라의 영향권에 들어감으로서 나중에 이르러 수(隋), 당(唐)시기에 실크로드가 화려한 문명의 교류를 열게 되고 중국이 실질적인 실크로드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 척박한 땅에도 물은 흐르고

 

 

 

 

 

 

 

 

 

 

 

 

 

 

 

 

 

 

 

 

 

 

 

 

 

 

 

 

 

 

 

 

 

 

 

 

 

 

 

 

 

 

나아가 서기 640년 현재의 투르판 인근에 있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州)를 경영하기위해 당시 당나라가 건설하였던 6도호부중 하나로 안서도호부 건설하였다. 이 당시인 서기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고 평양의 국내성에 또한 안동도호부를 건설한다. 안동도호부의 건설은 정복지에 대한 경영뿐만 아니라 고구려 유민들의 재 건국에 대한 의지를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고구려 유민들을 지금의 티벳에 가까운 쿠차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게 되는데, 당현종 ‘개원의 치’ 말기, 이임보가 당의 재상이던 시절, 실크로드의 쿠차에 고구려 유민으로 살던 고사계에게 고선지라는 아들이 자라고 있었다.

당시 도호부 절도사는 군사력을 쥐고 있어서 재상에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 이민족을 절도사로 영입되는 것은 이임보에 의한 것으로 이는 황권에 때로 위협이 되는 절도사를 한족이 아닌 이민족을 발탁함으로서 황권을 위협받지 않게 하기 위한 계락이었다. 최치원이 한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민족인 부몽영찰이 절도사로 오면서 같은 이민족인 고선지는 총애를 받았다.

서기 740년 고선지는 텐산산맥 서쪽을 정벌하고 도호부 2인자가 된다. 747년 토번(티벳)정벌에 나선 고선지는 대승을 거두고, 현 파키스탄 지역인 소발률왕국을 정벌, 이후 72개국이 당에 항복함. 당시 장안에는 “발률을 쳐부수다”란 노래가 유행 했다고 하며 이후 고선지는 안서도호부 절도사가 되기에 이른다.

중앙아시아 타슈켄트 지방에 있던 당시의 ‘석국’이 당과 아랍에 양다리 외교정책을 펴다가 아랍으로 기울자 750년 고선지는 텐산산맥을 넘어 네 번째 서역원정에 올라 석국을 격파하였고 이후 아랍군이 고선지의 안서도호부 공격을 준비하게 되는데 타슈켄트 서북쪽 탈라스(현 카자흐스탄)에서 751년 7월 역사상 최초의 동서양대전이 벌어진다. 30만대 7만이라는 군사적 열세와 연합군으로 참여했던 투르크족의 배신으로 대패하고 이후 1천 년간 이곳의 실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이곳이 아랍권으로 편입되게 된다. 이 때 종이가 서역으로 전달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듯 실크로드는 복잡다단한 역사를 안고 오늘도 흙바람 휘날리며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고, 나는 한 사람의 여행객이 되어 장건이나, 고선지 혹은 혜초스님이 갔던 길을 따라 서안(西安)으로부터 난주(蘭州), 둔황(敦惶), 투르판을 거쳐 우루무치까지 길을 떠나는 것이다.

비록 주마관산격의 바람과 길을 만나고 본다 할지라도 어릴 때 미술책이나 사회책에서 막연하게 만났던 장안의 종소리나 양귀비, 이태백의 흔적, 고비사막과 낙타, 둔황석굴의 벽화나 채색된 부처님, 오래된 전설 같은 고성의 잔해들, 위구르나 카자흐 민족의 연원을 맛보러 가는 것이다.

 

 

실크로드의 시발점 서안(西安)

대개 다른 나라를 가게 되는 경우 비행기를 타는 시간은 밤이거나 이른 아침인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저녁 8시 40분 비행기를 타게 되는데 경주 인근에서 출발하는 나의 경우 어쩌면 실크로드의 맨 끝자락으로부터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든다. 더불어 저녁 비행기 시간과는 무관하게 이미 부산하게 움직이고 짐을 점검하는 아침부터 나의 여행은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직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한 낮, 대부분이 형제 가족인 일행들과 함께 리무진 버스로 공항까지 이동을 하고 비행기를 기다려 타고는 죽은 듯이 잠을 자다가 깜깜한 밤을 지나 11시 가까운 현지 시간에 서안 땅에 발을 내디딘다. 3년 전 동북부 연길과 백두산 그리고 북경을 갔을 때, 비행기를 탈 때 마다 연착을 밥먹듯이 하던 비행기 스케줄 변경에 대책 없이 기다리던 기억이 또렷한데 그 사이 이런 시간 감각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중국 땅에 내려서면 호흡하는 대기 중에 고유한 공기 내음이 있다. 공항청사 내에서부터 나는 약간 탁한 공기와 고유한 냄새는 다시 우리 땅을 밟을 때 까지 변함없이 나게 되는데 나만의 주관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이런 저런 생각 중에도 입국수속은 오래동안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의 호텔 까지 한 시간, 방에서 샤워를 끝내고 나서는 쉬이 잠이 들지 못하는데 결국 약간의 두통을 동반한 채 새벽잠을 깨어서는 창밖으로 보이는 13층의 소안탑(小雁塔)을 보는 것으로 바깥나들이를 서두른다.

여행은 떠나는 것인데 시간과 공간개념을 잊어버리고 떠난다는 의미는 삶이라는 길에서 가장 주된 길로 돌아오기 위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당분간 가지 않은 길을 가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호텔주위의 뒷골목에서 중국의 아침을 본다.

오래된 아파트 앞에서 아침식사거리로 비닐봉지에 빵 몇 개를 사들고 오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골목 어귀에 짐 실을 리어카를 두고 앉아 일거리를 기다리는 두 사내, 골목 돌아 꽃나무를 파는 가게들에서 문을 열어둔 채 온 가족들이 모여 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모습, 중국의 고유한 아침 풍경의 하나인 기체조를 집단으로 하는 길 하나를 건너 광장에서의 모습, 이 즈음 큰 길에는 이미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즐비하게 바쁜 일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소시민의 삶이 도시의 뒤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버스를 타고 본격적으로 여행길에 오른 차창으로 보이는 주도로가에는 서안의 개발붐에 편승한 연립주택과 아파트의 건설이 곳곳에서 한창이다. 마천루 같은 고급 아파트들은 그렇다 차더라도 새로 개발되는 연립주택들은 아직 승용차가 보편화 되지 않은 탓에 동(棟)간 간격이 아주 좁아서 마치 우리나라의 20-30여 년 전 을 보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여느 동남아의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찻길과 인도는 과장되게 넓어서 길의 폭 사이에 4줄의 가로수가 늘어설 만큼 넉넉한 폭을 가지고 있으며, 가로수 또한 20-30m를 넘을 만큼 우람하였다.

  ◇ 화청지 풍경

  ◇ 양귀비가 술잔을 든 벽화












 

 

 

 

 

 

 

 

 

 

서안은 우리에게 오히려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고도(古都)이다. 주나라 이후 10여 개의 왕조가 도읍을 정한 곳으로 현재의 모습은 명대에 새로 구축한 모습이며 오늘날 서안은 중국의 신흥 내륙 공업 지역 가운데 하나로, 20여 개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갖춘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중국의 군수 공장, 우주연구센터 등 핵심적인 산업체가 있으며 후진타오 공산정부에 의해 서북(西北)개발의 일환으로 중국돈 47억원을 투자하여 동쪽 땅의 70%를 다시 개발하고 있으며, 외국자본을 유치하여 서쪽을 경제개발구로 발전시키고 있고, 남쪽은 문화지구로 특화시키는 변화를 꾀하는 역동성을 보이고 있다.

40여분 차를 타고 찾은 첫 유적은 화청지(華淸池)로 서안에서 25㎞정도 떨어진 해발 1300여 미터의 여산(驪山)산록에 있는 온천으로 역대 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전해지는 역사에 의하면 서주(西周)시대에는 이곳에 여궁(驪宮)을 세웠으며, 진대에는 이곳에 석우(石宇)라 불렀고, 당나라 현종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혀서 이름을 "화청궁"이라 고쳤다. 또한 이곳이 온천위에 지워졌으므로 "화청지"라고도 불리었다.

756년 안록산의 난으로 화청지는 불에 타서 훼손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된 것은 청 나라말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규모의 문화재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이며, 현재도 별궁터를 하나씩 복원하는 모습을 본다.

화청지에는 43도의 물이 솟는 3개의 수원(水原)이 있으며, 다섯 개의 온천탕이 있는데 그 모양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양귀비 즉 안록산의 아내이자 당현종의 며느리였던 양옥환이 28세에 당시 61세이던 당현종의 귀비로 책봉 받고 만들어준 해당탕(海棠湯=해당화 꽃 모양의 탕) 앞에는 당현종과 앙귀비가 술과 가무를 즐기는 모습이 담벽에 새겨져 있는데, 아내를 바친 안록산이 한 때 아내였던 양귀비에게 어머니라 부르면서 춤을 추는 장면이 같이 새겨진 것이 퍽이나 이채롭다.

그 외에도 양귀비와 당현종이 같이 목욕을 했다는 연화탕(蓮華湯), 당태종 이세민의 노천 탕 이었던 성진탕(星辰湯)과, 상식탕(尙食湯), 태자탕(太子湯)이 있었고 양귀비가 몸을 말리던 앙발전도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1000년이 넘은 석류나무 두 그루와 대추나무 둥치 위에 감나무를 접 붙여 키운 ‘화청감’이란 열매가 맺는 특이한 나무들도 보였는데 이곳의 특산물이 원래 석류나무나 감이란 것을 기억한다면 대체로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 화청지내 온천 해당탕

  ◇ 서안사변의 현장 오간청 내부













 

 

 

 

 

 

 

 

 

이 온천탕들 옆으로 녹원(綠園)이라는 청나라 시대의 정원이 있다. 이곳은 중국의 근대 역사에서 공산당에 의해 선토공후항일(先討共後抗日)의 기치를 내걸었던 1936년 12월 12일, 자신의 의형제이었던 공산주의자 장학량 등에 의해 장개석의 감금이 이루어지고 공산당에 의해 국공합작이 강요되었던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곳이다.

공산주의자들의 토벌이 일본에 대한 극복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장개석이 만주를 정복한 일본에 의해 섬서성로 밀려나 원한을 품고 있던 장학량에게 다시 공산주의자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1936년 12월 7일 서안에 도착하여 화청지의 녹원에 머물고 있던 동안 오히려 장학량이 장개석을 구금하고 공산주의자와 민주주의자가 합심하여(국공합작) 일본전에 총력을 다할 것을 강요한 사건이 벌어진 곳으로 장개석을 잡기위해 쏜 총탄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지금 그 곳에는 중국 공산당의 교육중점 역사지로 지정되어 빨간 글씨의 황금빛 현판이 붙어 있었다. 역사는 이렇듯 며느리를 빼앗아 온천욕을 즐기던 곳이 때로는 피 빛 물들이는 권력싸움과 역사의 요동 속, 격랑을 만나는 곳으로도 보여 지고 있는 것이다.

북서쪽 중국에는 가장 큰 타림분지와 관중분지가 있는데 이 곳 서안은 관중분지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여름 기후는 위도에 상관없이 매우 습하고 덥다. 더구나 어느 한 곳 햇볕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아 여행 첫날부터 힘이 들었다.

1987년 유네스코에 의해〈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된 진시황릉을 찾았을 때 섭씨 35도를 훨씬 넘었을 거라는 한낮에도 그 곳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서안에서 37km 떨어진 임동현(臨潼縣)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잔시황릉은 세계적으로 개인을 위한 묘로서는 최대의 크기로 내성 둘레 4Km, 외성 둘레 6Km에 이르고, 능의 높이는 약 79m, 동서 475m, 남북 약 384m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 있으며, 능의 봉분 뒤에는 석류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다.

전한의 역사가 사마천에 의하면 진시황은 그가 황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터 이 능을 만들기 시작, 36년 동안에 완성했다고 하는데 그 때는 이미 진시황이 죽은 후였다. 무려 7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고 하는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숲과 산이 있고, 황실 보석창고 그리고 거대한 석각중국지도가 있다고 한다. 능속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서 기궁이라는 자동 발사되는 화살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연구 조사에 의하면 이곳에 전체 면적이 약 60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다고 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광활한 분지 속에서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곳에 하나의 산처럼 우뚝 솟은 이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산만큼의 흙을 어디선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인위적으로 가져와서 쌓아야 했을 것을 생각해 보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능의 꼭대기를 오르는 동안에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 산 같은 규모의 진시황릉, 온통 석류나무다.


수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하였듯,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따지고 보면 패왕(覇王)의 흔적을 보는 것인데 왕권의 확립을 위한 이러한 시도들은 어쩌면 중국 대륙을 통일한 최초의 왕으로 황제(皇帝)라 칭한 중앙집권적 고대 중국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진시황릉에서 1.5 Km의 거리에 20세기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평가되는 병마용(兵馬俑)이 있다. 1974년 3월 29일, 농부였던 양지발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굴된 병마용은 진시황이 죽은 후 대군의 일부를 순장시키는 대신에 흙을 구워 만든 인형을 묻은 것을 말하는데, 현재까지 두 3개의 갱(갱)이 발굴되었으며 그 가운데 1호 갱 에만 6,000여 병마가 실물 크기로 살아있는듯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데 이들 병사용은 하나같이 표정이 다르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병마용을 만든 시기는 진시황이 천하를 평정하고 난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인 BC 221년~ AD 211년경으로 추정되며 병마용은 진시황을 호위하던 병사들을 그대로 본 떠 만든 것으로 진나라 군대의 위용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게 아닌가하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얼마만한 규모로 조성되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이 곳 병마용은 1호갱이 약 64,000평방미터에 달하며 동서 길이 210m, 남북의 폭이 60m, 5m 깊이로 파인 직사각형 공간 안에 3열 횡대로 늘어선 6,000개의 병마용이 질서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2호 갱은 활을 든 궁병 부대, 말과 전차가 있는 전차병 부대, 보병과 기마병이 혼합된 부대, 기마병만 있는 부대 등 4개의 부대가 서로 구분 지어져 동쪽으로 바라보고 서있으며 병용 1,300개, 전차 80여대와 함께 다량의 금속병기가 출토되어 관심을 모았으나 발굴이 중단 된 상태이다.

발굴이 중단된 이유는 원래 피부나 옷, 또는 의장이 각각 채색되어 살아있는 모습처럼 보이던 것들이 2200년 넘게 땅속에 있다. 발굴시 공기에 노출 되면서 곧 채색이 사라지는 것들이 해결되지 않아 원래의 모습을 유지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기 까지 시간이 50년이 걸리던, 100년이 걸리든지 그냥 발굴하지 않겠다는 중국정부의 정책은 정당하고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3호 갱은 3개의 갱 중 규모가 가장 작고 병마용의 수도 가장 적지만 1호와 2호의 병마용이 전투대열로 정렬해 있던 것에 비해 3호의 병마용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통로 양쪽으로 정렬해 있어 아마도 전체를 통솔하는 지휘본부로 추정한다고 한다.

  ◇ 병마용 1호갱 내부 모습

  ◇ 진시황의 전차












 

 

 

 

 

 

 

 

사진을 아무리 잘 찍어도 어둡고 멀리 있는 병마용들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실제의 대표적인 병마용 몇 개를 따로 전시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특히 진시황릉 인근에서 발견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청동전차가 그 정교함을 뽐내며 뭇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밖에서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더니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관중평원의 분지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가 뜨겁게 달구어진 황토흙을 노략질하듯 때리는 모습을 본다. 강우량이 년 600mm에도 못 미치는 마른 땅에 30여분 동안 뿌려대는 비를 이 곳 사람들은 복비(福雨)라고 부른단다.

기름에 튀겨지고, 볶이고, 구워진 점심식사를 하고 버스에 오르면서 병마용에 새겨진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2200여 년 전의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땅속에 묻혀 묵언(黙言)수행을 하던 그들이 20세기 말에 다시 햇볕을 보는 순간 너무나 오랫동안 갇혀 있던 억울함 때문에 자신의 피부색을 잃고는 우리들앞에서 테라코타로 굳어버린 것은 아닐까?

또한 그들을 만들었던 사람들, 흙을 개고 붙이던 그들은 지하궁궐의 비밀을 발설치 못하게 하기 위한 진시황의 명령으로 자신들의 영혼 하나를 하나씩을 용(俑)으로 만든 후 죽어간 것은 아닐까?

세월을 뛰어 넘는 나의 물음들에 대해 그 어떤 병마용도 답을 하지 않았고, 그냥 그대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 그들이 나는 야속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지배자의 욕심에 의해 병마용을 만든 평범한 그 시대의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영혼이 되어 억하심정을 2000년 넘게 가지고 가슴을 부비며 어두운 땅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토용(土俑)들이 한 낯 호기심으로 관광을 온 나에게 뭐라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난주(蘭州)로 가는 밤 비행기 속에서도 나는 내내 병마용들이 내지르는 고함과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전차들의 말발굽소리에 뒤척이면서 한 밤을 맞고 있었다.

 

 

난주(蘭州), 황하(黃河)의 젖줄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땅

섬서성(陝西省)의 주도인 서안을 떠나 감숙성(甘肅省)의 주도인 난주에 도착한 것은 어제밤 12시를 넘기고였다. 오늘 오후 돈황(敦惶)가는 열차를 타는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기 위해서는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일정이라 새벽 5시에 일어나야만 했다.

병령사 석굴(炳靈寺石窟)을 보기 위해서는 유가협(劉家峽)댐이 있는 황하제일협(黃河第一峽)으로 가야하기에 잠이 모자란 눈을 비비며 아이들을 재촉하였다.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도착한 후 아침 식사도 병령사로 가기 위한 유가협 댐 근처 선착장 부근에서 하게 되었다.

현지의 서빙을 하는 처녀들은 한결 같이 청바지 하나씩을 입고 폼을 낸다곤 하였는데 그릇들을 내려놓는 손톱 밑에는 때가 있을 정도로 지저분하여 다들 웃고 말았다. 모자란 잠에 더하여 입맛을 가시게 하는 그들 이었지만 그래도 생글생글 잘도 웃는 천진난만함이 느긋한 아침식사를 가능하게 하였다고나 할까?

  ◇ 병령사 가는 길, 황하제일협의 풍경

모터모트를 타고도 50여분, 뱃길로 55Km정도를 가서야 병영사석굴에 도착하였는데 이른 아침 황하를 막은 댐 부근의 경치는 마치 베트남의 하롱베이나, 계림을 닮아있었다. 이는 중국 서북지방의 특징적인 지형들로서 산들이 장년기에서 노년기로 옮아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인데 황하의 붉고 짙은 물줄기도 그 산들 사이로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달리는 보트 위에서나 병령사에 도착해서도 비교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번잡하지 않은 이른시간에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는 것과 기온이 아직 오르지 않는 아침이라 쾌적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병령(炳靈)이란 티베트어로 10만의 부처를 뜻한다. 5세기 경인 16국(十六國)시대 에 파기 시작하여 북위(北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에서 명(明)대까지 끊임없이 석굴의 조성이 이어졌다. 현존하는 크고 작은 석굴, 감(龕)은 모두 183개이며 776체의 석상, 소상(塑像)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곳은 지상 40M 이상의 높은 곳에 위치한 제169굴과 172굴이다. 초기에 만들어진 이소불립상(塑佛立像)과 보살상 등이 남아 있으며 벽화도 훌륭하다. 제171감의 석조대불(石彫大佛)은 당(唐)대의 작품으로 높이 27m인 하반신은 진흙으로 되어 있는데 사진 등으로 익히 알려진 대불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보게 되는 3곳의 석굴사원 즉, 이곳 병령사 석굴과, 돈황석굴, 트루판의 보즈크리크 천불동을 보는 과정에 특히 미륵보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미술책에 나오는 돈황 막고굴의 미륵보살상에 대한 막연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기억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국보78호와 83호로 지정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모두가 그 시대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를 끌기 때문이다.

  ◇ 병령사 석굴의 경관

예외 없이 이곳에도 많은 미륵보살들이 남아있었다. 미륵보살은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으나 석가모니보다 먼저 죽었으며, 현재는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兜率天)에 머무르면서 천상의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또한 설화에 따르면 보살은 초발심 때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자씨보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찌기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로부터 수기(受記)를 받았는데, 도솔천에서 4,000세(인간세상에서는 56억 7,000만 년)의 수명이 다한 후에 인간세상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3번에 걸친 설법으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할 것이라 했다. 이처럼 미래에 석가모니를 대신해 부처가 되어 설법한다는 의미에서 보처보살(補處菩薩)이라고도 한다.

처음 걸음을 내디뎌 온 이 병령사에서 나를 비롯하여 이곳에 머무는 우리들에게 바람 한 줄 주고 가는 하늘 속에는 내가 찾던 미륵불이 한 번 씽긋 웃어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마음 편안해지는 오전이다.

지금 이곳에는 새로운 관광지로 단장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절벽에 만들어진 굴들을 관람하기 좋도록 나무를 잇대어 절벽을 따라 관람로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니 얼마 안가서 이 곳 또한 복잡해 질 것이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가 있었다.
다시 역방향으로 보트를 타고, 버스를 타서 난주로 돌아오는데도 3시간이 걸렸다.

황하의 상류 하서회랑(河西回廊) 동쪽에 있는 난주(蘭州)는 감숙성(甘肅省)의 성도(省都)로 황하를 따라 동서로 퍼져있는  고란산(皐蘭山) 기슭의 좁고 긴 도시이다. 도시의 북측을 소용돌이 치며 황하가 흐르고 강을 따라 난신선(蘭新線)이 달린다. 五泉山(오천산) 공원이 남쪽에서, 白塔山(백탑산)공원이 북쪽에서 각각 황하를 끼고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 난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황하(黃河)

비록 햇살은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지만 서안과 달리 건조한 기후와 바람이 있어서 생각보다는 덜 더운 날씨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복잡한 큰 길에 차를 세우고는 얼른 햇살 따가워진 백탑사를 올랐다.

중국의 어느 유적지를 가보아도 우리 정서와 맞지 않는 것의 하나가 흔히 눈에 띄는 사자상들, 그리고 회백색이거나 짙은 회색의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들, 그리고 예외 없이 빨간 기둥들인데 이런 것들은 본래의 태생적 문화차이에서 비롯되는 것들일 것이다.

대리석이나 벽돌과 우리의 화강암, 대리석의 매끈함과 화강암의 약간거친 마티에르의 차이, 날카로움과 부드러움, 근엄하고 권위적인 표정과 토속적이고 해학적인 표정의 차이 등에서 완연히 우리 것과 구별이 된다. 이번에 하나 더 눈에 거슬리는 것은 야간 조명을 켜두기 위해 기둥이나 건물 지붕에 조명장치를 주렁주렁 달아놓아 낮에는 지저분해 보인다.

백탑산 공원(白塔山公園)은 산 정상에 백탑이 있다는 것으로 이름 지워진 곳인데 현재도 도교 사원이 있고 산 전체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절이 지붕을 맞대고 있다.

백탑은 원나라 초기 티베트에서 온 라마불교의 한 승려가 몽골의 칭기즈칸을 접견하기 위해 길을 가던 도중, 란주에서 병을 얻어 잠시 요양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백탑사 전시관에 보관된 ´중수백탑사기´(重修白塔寺記)에 따르면, 1450년 명나라시기에 현존하는 백탑의 형태가 중건되었고, 1715년 청나라 강희제 때 보수를 거쳐 오늘날 백탑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탑의 양식은 상부는 전통적인 중국 전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래쪽은 티벳이나 인도의 라마교의 탑을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티벳과 중국의 우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 여겨졌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蘭州(란주) 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데 250만 인구가 사는 성도이면서 중국 땅의 한 복판에 자리 잡은 도시인지라 강건너에는 화려한 마천루가 줄을 잇고 있으며 가까이로는 황하를 건너는 철교를 따라, 일요일을 맞은 시민들이 강가에 북적이고 있었다.

다시 내려와 도보로 황하제일교(黃河第一橋)라 불리는 중산교(中山橋)를 통해 황하를 건넌다. 일요일일 탓에 아마 시민들의 절반은 강가로 나들이를 나온 것처럼 붐비는데 회하나무, 버드나무, 플라타너스로 이루어진 강가의 가로수 나무 아래 그늘은 시원하였다. 가족들 혹은 연인들이 음료수를 마시며 조용하고 느긋한 시간들을 즐기는 모습이 여느 강가의 중국과 다름이 없는데 내 마음이 여유로운 탓에 이곳 황하의 난주 풍경 또한 좀 더 여유로워 보였다.

  ◇ 난주의 명물 양가죽 뗏목

다만 경제 개발의 여파로 빈부의 차이가 심해지는 중국의 특성처럼 구석구석 일감이 없는 남루한 사람들이 아무데서나 잠을 자기도 하고, 그 옆에서 공안들은 무심히 자기들끼리 소담을 나누며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강에서 보는 특징적인 탈것의 하나가 양가죽으로 만든 뗏목인데 옛날부터 짐을 부리거나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수단이었던 것인데 지금은 관광용으로 강 양쪽에서 손님들을 태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로 세로 약 2.5M의 뗏목아래에 양가죽을 통으로 기워 만든 것을 9개나 열 두 개 쯤 연결하여 상부에 나무판을 얹은 독특한 형태로 양가죽에 스며 있는 기름에 의한 부력을 이용하여 물에 뜨게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몇 번 타고 나면 젖어서 부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간간히 그늘에 뗏목을 말려서 양가죽의 부력을 회복시켜 다시 이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시간이 넉넉하면 한 번 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강가를 따라 계속 걸었다. 난주의 강가에서 유명하다는 모자상은 시간 관계로 보지를 못하고 예전 황하의 물줄기를 이용하여 돌리던 수차(水車)를 보았다. 원래 이 곳 난주에는 약 500개의 수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직경 약 15M크기의 전시용 수차가 돌아가고 있었다. 양가죽 뗏목과 더불어 이런 시설도 한 때는 이곳의 특성에 기반한 문명의 이기였음을 확인한다.

내가 자라던 지리산 밑의 강가에는 예전에 배 위에서 강 양켠에 묶은 줄을 당겨 강을 건너던 기억이 생생하며, 어릴 때, 고드름을 따서 칼싸움을 하던 그 많던 물레방아가 이곳의 수차와 대비되면서 기억에 다시 오롯해 지는데 이런 생활의 수단들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맞게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오후 3시 30분에 출발하는 돈황(敦惶)행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난주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어느 역이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난주는 중국 중심부에 자리한 도시로 교통의 요지이고 보면 다른 곳에 비해 역이 매우 혼잡하였다. 우리 일행 중에서도 결국 30-40분간 미아로 방치되다 뒤늦게 사람 찾는 소동을 벌였을 정도로 혼잡한 역사에는 한 눈에 보아도 소수민족들인 사람들이 무겁고 큰 보따리를 들고 이동을 하고 있고 기차를 기다리던 무료한 사람들은 대합실 바닥에서 카드놀이를 한다.

이전의 중국방문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이나 동남아 사람들은 카드놀이를 비롯한 내기를 참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차를 마시며 카드놀이를 하는 풍경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중국과 동남아 사람들이 내기를 좋아하는 예로서 투계(鬪鷄)나 마작 등을 꼽기도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외국의 프로축구를 비롯한 복권판매량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박지성이 속한 영국의 멘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우 구단 수익의 40%가 동남아의 중계권과 상품판매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가히 놀랄 만하다 할 것이다.

돈황까지는 밤을 새워 18-19시간을 기차로 달려야했다. 얼추 1300Km이상을 달려야 하는 것이다. 침대차를 이용하여 밤을 세워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으며 오른 18량으로 이루어진 객차는 깔끔한 이층 침대와 에어콘, 그리고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배려한 보온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짐이나 가방을 수납하기 좋도록 좁은 공간을 잘 꾸며 놓았는데 이는 대륙의 먼 길을 오고가는 열차의 역사에서 비롯된 노하우가 아닌가 싶었다.

  ◇ 돈황가는 기차에서 바라본 아침의 고비 사막

보통 30량 이상을 연결하여 달리는 중국의 일반 기차에 비해 이 기차의 길이가 18량에 그친 것은 시속 120Km를 낼 수 있는 특급열차인 이유로 매우짧다는 것과 그중에서도 우리가 탄 객차 하나만 제일 비싼 최고급 칸이란 것을 나중에 알게되었다.내가 탄 기차를 처음부터 끝까지를 돌아본 결과 허름한 3층 침대차(3층에 앉은 사람은 앉을 수도 없는 낮은 높이의 천장이 불편해 보였다)나 그냥 좌석만 있는 객차도 있었는데 입석, 좌석, 3층 침대차, 이층침대차, 특석과 일반석등에 따라 기차 삯이 각각 다르게 매겨지고 있었다.

난주에서 돈황을 거쳐 투르판과 우루무치를 지나는 이 길은 하서회랑(河西回廊)을 따라 놓여있다. 하서회랑이란 해발 4-5천 미터가 넘는 만년설로 덮인 길이 800킬로의 기련산맥(최고봉: 6203미터)과 북쪽의 합려산(合藜山)과 옹수산(龍首山)산맥 사이에 낀 길이 1000킬로미터 너비 40-100킬로미터의 긴 낭하처럼 생긴 땅으로 터널처럼 이루어진 침식분지를 일컫는다. 가장 낮은 해발을 보이는 하서회랑 주변으로 오아시스가 잘 발달되어 있고 사람들이 살며 기차길이 나있다.

따라서 하서회랑을 따라 마치 모자이크를 한 것 같은 밭의 색깔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논농사가 안 되는 특성으로 고비사막의 하서회랑을 따라 연결 된 기차 길 양쪽으로만 민가들이 있었고 그 주변에만 밭을 갈아 깨나 밀 등을 심고 거두는 이들의 생활양식이 밭의 모양과 들녘에서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 풍겨 나왔다.

다음날 오전 까지 이곳에서 식사의 두 끼를 해결해야 하며, 몇 시간의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쩌면 이번 여행 중에 이 기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 될 것 이라는데 생각이 미치고 마음이 아예 한결 수월해졌다.

시간이 자나갈수록 객차 속은 조용해지고 복도 여기저기서 두어명씩 서서 바깥풍경들을 감상하는데 늦은 오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척박하고 건조한 땅에 우리나라의 봄비처럼 추적거리며 오는 비는 여행객의 마음들을 차분하게 가라앉기도 하고 바깥의 흐릿하던 들을 깔끔하고 또렷한 색깔들로 다시 채색한 듯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것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행복하였다.

밤이 이슥해지는 시간 약간씩 흔들리는 기차 안에 몸을 누이고도 어제나 그제처럼 쉬이 잠들지를 못했다. 계속 비는 내리고 기차가 서로 교행을 할 때면 양쪽의 기차들이 기적소리를 울리고 언뜻 몸을 뒤척이는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돈황(敦惶), 불교유적의 꽃 막고굴(莫高窟)-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30분, 그치지 않는 빗소리와 교행시의 기적소리, 차량의 배차시간에 맞추어 한참씩 서고가기를 반복하는 기차의 흔들림에 때때로 눈이 뜨였다.

어릴 때 동네를 지나가던 기차소리는 어른들에게 혹은 가족들에게 아침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아침기차 지나갔나?’ 서로 물으며 시간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었던 시절이 기억났다. 그로부터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사는 땅에서는 더 이상 그런 풍경들을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오아시스 주변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이들에게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은 지금도 하루를 살아가는 시간의 기준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순진한 생각도 해보았다.

다시 잠을 청하여 뒤척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시간은 아침 6시, 여명이 멀리서부터 찾아오기 시작하고 우리는 중국산 라면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였는데 우리의 라면맛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이 먹을만 하였다. 우아하게 난주에서 산 복숭아로 디저트를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일회용 커피로 입맛을 돋운 아침이었다.

19시간의 기차여행이 끝나고 돈황역(원래는 유원 역이었으나 3년 전부터 이름을 바꾸었다 함)에 발을 내린 것은 오전 10시 30분, 작은 시골역 처럼 보였지만 돈황을 찾는 각국의 여행객들과 중국인 여행객들이 뒤섞여 매우 혼잡한 모습이 다른 역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바깥 대기의 모습은 황토먼지가 공기 중에 녹아 있어서 하늘은 파란데 건물의 벽들이 붉은 색으로 보였다.

돈황 역에서 돈황 시내까지는 130여 Km, 버스로 약 2시간 거리인데 길닦는 공사를 하면서 중장비가 아닌 사람 손을 빌어 지반공사를 했기 때문에 노면의 요철이 심해서 버스의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공중으로 튀어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 사람들은 이 길을 고속도로라고 공공연히 부르고 있다.

하루 동안 하서회랑을 종주하며 기차에서 고비 사막을 보아온 터였지만 돈황시내로 이동하는 길도 역시 검은 흙과 자갈들로 이루어진 구릉과, 지평선이 교차하는 사막지역인데 이곳 돈황의 3대 명물에 들어간다는 가시 돋친 낙타풀과 분홍빛 꽃을 피우는 홍유(紅柳)라는 사막의 교목들이 그나마 사막 가운데서 녹색으로 남아 있어 생명이 있는 땅이라는 암시를 줄 뿐이었다.

잠깐 조는 사이 사람들의 탄성에 내다본 바깥, 사막 멀리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기루가 보였다. 지평선 가까이 먼 곳의 자갈이나 바위돌이 햇볕에 반사되어 마치 물길처럼 아스라이 보이는 풍경으로 잠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감탄을 보내기도 하였다.

  ◇ 돈황의 백양나무 가로수

 

 

 

 

 

 

 

 

 

 

 

 

 

 

 

 

 

 

 

 

 

 

 

 

 

 

 

 

 

 

 

 

 

 

 

 

 

 

 

 

 

 

 

돈황을 가면 백양나무를 보라고 했던가? 고대 중국에서 영토의 서쪽 끝이며 마지막 오아시스였던 이곳은 유난히 하얀 둥치에 잎이 반짝반짝 빛나며 나부끼는 백양나무가 많고 키 큰 미루나무도 많았다. 인구 15만, ‘타오르는 횃불‘ 이거나 ’크세 성한다‘는 뜻을 가진 돈황 시내를 들어서면서 이들 나무들이 연출하는 푸른 녹음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일정을 바꾸어 점심식사 후 곧장 불교 미술의 정화이며 동,서 미술과 문화의 교차점이 되는 막고굴(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돈황석굴)을 보게 되었다. 일정이 이렇게 변하게 되는 이유는 막고굴의 경우 관람신청을 하고나면 그곳으로부터 허락이 떨어져야 하는 이유가 하나 있고 더불어 우리에게 설명해줄 사람으로 특별히 가이드에게 부탁한 이신(李新) 선생님과의 시간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이 과정에서 우리를 인솔했던 혜초여행사의 이은주 대리가 성실한 성의를 보여주었다.

이신(李新) 선생님은 순수 한족(漢族)의 중국인으로 지금까지 돈황연구원에 27년째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계신 분으로 우리나라 관광객에게 한국말로 해설을 해주는 뛰어난 학자이시다. 이신 선생님은 막고굴에 대한 깊은 지식 없이 해설을 해서 막고굴에 대한 오해나 그릇된 정보를 주었던 조선족 가이드들을 보고 안타까움이 들어 한국말을 배우게 되셨다고 한다.

둔황의 역사는 기원전 11년에 시작된다. 한무제가 이곳의 흉노를 무찌르고 하서회랑의 하나인 둔황 군을 설치하여, 동부에서 한(漢)인을 이주시켜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삼고 나서부터이다. 그 이래 실크로드는 물자뿐 아니라 문화와 종교 등 유형무형의 많은 것을 나르게 되었다. 후한(後漢)시대에는 불교가 중국 본토에 전래돠고, 이어 4세기의 동진(東晋)시대에는 이 고장에 막고굴(莫高窟)이 개착된다. 당(唐)대의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쳐서는 왕래가 가장 성해지고 황금시대를 맞이했는데, 당이 쇠퇴하자 한때 토번(吐藩)의 지배를 받고, 곧 동쪽의 위구르에게 멸망당한다.

당나라 때의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전한시대 서기 366년부터 축조가 시작되어 14세기까지 1,0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막고굴은 둔황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으로 버스로 약 삼십분 거리에 있고, 굴 주변으로 가느다란 시냇물이 흐르며 주변은 온통 황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막고굴의 조성 시초는 서기 366년 승려 낙준(樂樽)이 명사산(鳴砂山)과 삼위산(三危山)에 이상한 빛이 있음을 알고 석벽을 파서 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남북 1,680m의 석굴군은 전부 700여개의 동굴로 되어 있으며, 그 중 채색 인물상과 벽화가 있는 것은 492개굴이고 전부 인물상 2,000여개, 벽화 45,000평방미터가 있다. 막고굴은 현존 세계 최대 규모, 최장의 역사, 내용이 풍부하고 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는 불교유적이다.

숨겨져 있던 이 불교유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서방열강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중국침탈을 시작하는 특정적인 역사적 배경 하에 이곳 돈황지역 및 서역은 서양인들에 의해 유물들이 약탈되고 있었는데 이 시기 중에 해당하는 1900년에 막고굴에는 후베이성 마청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왕원록이라는 사람이 감숙성에 와서 도교의 도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중국 불교문화의 보고인 막고굴(莫高窟)을 관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막고굴이 수난을 겪게되는 역사적 비극의 발단이 된다.

도교의 도사라고는 하지만 무식한 농부에 지나지 않았던 왕원록이 1900년 5월 26일, 16굴을 청소하던 중 동굴 벽이 갈라진 것을 보고는 얼른 그 굴속을 뒤져 보았다. 숨겨진 작은 방 17굴인 장경굴에서 50,000여점의 문서와 불경, 의학서,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 제 45굴의 미륵보살 소상

 

 

 

 

 

 

 

 

 

 

 

 

 

 

 

 

 

 

 

 

 

 

 

 

 

 

 

 

 

 

 

 

 

 

 

 

 

 

 

 

 

 

 

 

이로서 중국 및 중부 아세아의 고대역사, 지리 종교, 경제, 정치,민족, 언어 문학, 예술 ,과학 등의 연구에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제 세계적인 학문으로 자리를 잡은 ‘돈황학’이 탄생하게 된 것인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왕도사는 이것의 가치를 모르고 관리에게 선물로 증정하는 등 유출시키거나 은전 몇 푼에 팔아넘기기도 하고 출장 온 관리들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돈황에서 다량의 문서가 쏟아졌다는 말을 듣고 1907년 영국의 스타인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노련한 탐험가 스타인은 왕도사에게 약간의 금전을 주고 3차에 걸쳐 2만 여점(문서, 견화)을 가져갔고 다시 이듬해인 1908년에는 프랑스의 페리오가 역시 같은 방법으로 약 1만여 점을 가져갔다. 페리오는 스타인보다 수량은 적었지만 한문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을 가져갈 수 있었고 신라스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당시 영국 런던에 유학하고 있던 일본 정토진종서본원사(淨土眞宗西本愿寺) 22대 장로 오타니 고쯔이(大谷光瑞)는 스타인의 서역탐험의 성과를 보고 귀국하여 탐험대를 조직한 후 돈황으로 와서 왕도사가 밀실에 보관하고 있던 돈황문서 600여점을 가져갔다. 대곡 탐험대는 돈황뿐만 아니라 투루판 등 서역 다른 지방도 발굴했는데 수집한 문물 중 일부가 당시 조선총독부에 보관되었다가 해방이 되면서 한국의 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분류 되어 지금까지 한국 땅에 남아있다.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불리는 이 문물들은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서역문물전을 통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 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오타니탐험대가 다녀간 이후 1914년에는 러시아의 어든보우 탐험대가 돈황으로 와서 실측 평면도와 정면도작성 작업과 2000여장의 사진을 찍으며 벽화조각과 포화布畵, 견화絹畵, 지화紙畵, 사직품絲織品 등을 가져갔다. 1923년 하버드대학부설 푸커예술박물관의 랜드 워너가 고고조사단을 조직하여 돈황으로 왔다. 그러나 이미 장경동은 비어 있었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랜드워너는 벽화로 눈을 돌려 벽화에 화학물질을 발라 335, 321, 329, 323, 321 등의 굴에서 12폭의 벽화와 328굴에서 공양보살을 가져가고 이듬해에 다시 와서 기도했으나 현지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돈황학´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제창한 중국의 돈황학자 천인커{陳寅恪}는 이런 아픈 역사의 막고굴에 대해 “돈황은 우리나라의 상심의 역사다.”라고 말했으며 이런 저런 아픈 돈황 막고굴의 역사를 열변을 토하며 설명하던 중국인 연구원 이신(李新)선생님은 스타인, 페리오, 오타니, 워너를 일러 한마디로 ‘도둑놈’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런 역사학자들의 안타까움 뒤에는 왕원록의 무지와 상부에 유적의 발굴을 보고한 뒤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당시 중국 정부의 안일함이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중요성을 깨달은 중국정부는 1944년 ‘돈황예술연구소’를 설립하여 막고굴을 보호하기 시작 하였으며 이 조직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1984년 현재의 ‘돈황연구소’가 되었으며 1961년에 전국중요문물보호단위(=국보)로 지정 되었고 1987년에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막고굴은 그 조성시기에 따라 크게 3기로 구분이 되는데 초기(4세기-6세기중엽)는 불교가 이 지역에 유입 보급되던 시기로 이민족에 의해 조성되어 서역양식이 농후한 특징 보이며 탑묘굴, 승원굴의 양식이 주를 이룬다. 삼존불을 주로 모시고 있는 형식이며 벽화의 주제는 인도에서 전래된 중앙아시아적인 불전(佛傳)과 본생고사(本生故事=석가 탄생 이전의 불교설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중기는 수와 당(581-618, 618-907)대에 해당하는데 이시기가 막고굴의 융성기에 해당한다. 불교미술의 중국화가 진행되어 존상굴(尊像屈), 대불굴(大佛屈), 열반굴등이 당대에 조성되기 시작하고 1불 2제자 2보살 2천왕의 칠존 채소상(彩塑像)이 안치되는 것이 일반화 되었고 특히 협시보살은 당시의 대표적 미인을 모델로 조각되어 현재에도 막고굴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벽화는 불경의 내용을 화려하게 묘사하는 경변상도(經變相圖)유행, 당대에는 정토종과 결합된 정토변상도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후기는 당 이후시기로 중원풍이 전성기를 자나 쇠퇴하는데 오대에서 송에 걸쳐 돈황을 통치한 조(曹)씨 일족이나 귀족들에 의해 자신 가문의 구복을 위한 석굴을 만들거나 대형석굴 조성하였으며 원대에는 세련된 티베트밀교 계통의 벽화등장하기 시작하는 때를 말한다.

막고굴 관람을 하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보고싶다고 아무 굴이나 다 개방을 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개방되어 있는 굴도 어떤 굴은 굴 하나를 보는데도 개인당 우리 돈으로 몇 만원씩을 주어야 볼 수 있는 특별굴이 있으며, 일반굴을 보려고 하여도 떠밀리는 사람들 속에서 괜찮은 굴 하나를 보려고 기다리고 하다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관광객의입장에서 보면 8개 이상의 굴을 보게 되면 잘 보았다고 할 수 있는 형편이다.

  ◇ 제 57굴의 미륵보살 벽화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함으로서 벽화의 채색이 변하거나 사라지고 손상이 되는 지금, 아마 몇 년이 지나면 이것마저도 볼 기회가 박탈되고 모사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할지 모르는 현실이고 보면 이렇게나마 몇 개의 굴을 보는 것도 다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리들의 경청하는 태도에 신이 난 이신(李新) 선생님은 몇 개의 개방하지 않고 있거나 몇 달 후 영구 폐쇄시킬 굴 몇 개를 포함하여 14개의 굴을 소개하고 보여 주었다.

처음 본 굴은 막고굴이 세상에 이름을 알려지게 되었던 16, 17굴 즉, 50,000여 유물이 발견 된 ‘장경각’으로 당 후기에 조성된 굴이다. 17굴은 원래 862년 입적한 홍변스님의 소성을 모셨던 어영당(御影堂)이었던 곳인데 이곳에는 역시 사람들이 한참이나 붐볐다.

‘북대불‘로 알려진 96굴은 초당(初唐)기에 조성된 굴로 측천무후가 황제로 등극 후 자신의 권력에 대한 합리성을 부여하려 발원, 695년 영은선사와 음조거사가 석태니소(石胎泥塑=바위에 모양을 새긴 후, 점토로 덧 씌워 모양을 만들고 채색을 하는 수법)로 조성한 높이 34.5미터, 폭12.5미터의 돈황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막고굴의 상징이 되어있다. 불상 앞에 전실 역할을 하는 9층 누각으로 가리워져 있는데 가사대신 곤룡포를 입고 있어 측천무후를 본 따서 만들었다고들 하지만 예쁘지 않고 위압적이다.

‘북대불’은 세계 제 4위의 대불인데 중국 사천성 낙산(樂山)대불이 71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큰 대불이고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동대불이 55미터 규모로 두 번째, 바미안 서대불이 38미터로 세 번째인데 막고굴 북대불은 실내 석불로만 따지면 세계에서 제일 큰 불상이기도 하다.

연이어 130굴은 성당(盛唐)기의 양식을 완비한 [남대불]로 742-56년에 완성된 29미터의 거대한 방추형 굴속에 석태니소로 조성한 높이 26미터의 미륵대불 의자상(倚坐像)이 조성되어 있는데 만드는데 29년이 걸린 것으로 간다라 불f상의 영향을 받아 얼굴에 미소가 번지나 얼굴 쪽에 색이 바래져 있었고 남북 양 벽에 15미터 높이의 거대한 보살좌상은 막고굴에서 가장 큰 벽화이며 보살좌상 위에 높이 2미터의 비천상 또한 막고굴에서 가장 큰 비천상으로 머리를 들어 위로 한참이나 쳐다보아야 볼 수가 있었다.

  ◇ 제 259굴, 동양의 모나리자 ´선정불´

 

 

 

 

 

 

 

 

 

 

 

 

 

 

 

 

 

 

 

 

 

 

 

 

 

 

 

 

 

 

 

 

 

 

 

 

 

 

 

 

 

 

 

 

 

148굴은 성당(盛唐)기의 776년에 조성된 굴로서 서벽에 길이 16.4미터, 폭3.5미터의 석태니소의 석가 [열반상] 안치되어 보통 열반굴이라 부르며 열반경변상도 벽화가 있고 열반상 뒤에는 72구의 소상(애통해 하는 제자, 보살, 나한, 천인, 각국 왕자등)이 있는데 중당(中唐기, 막고굴 최고의 걸작 [열반상]이 있어 특별굴로 지정된 158굴과 더불어 열반굴의 대표격으로 알고 있다.

당 전성기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가 있는 172굴에서는 아름다운 비천상과 장구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등을 볼 수가 있었으며, 청록산수가 실경으로 그려진 곳으로 많은 미술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북위시대에 조성 된 259굴에는 감실내에 석가불과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 설법하는 [이불병좌 설법상]이 있는데 이는 운강석불 닮았으며 북벽 하층 우측 제3감실 내에 있는 높이 92센티의 결가부좌 선정인(禪定印)의 [선정불]은 그 미소가 아름다워 ‘동양의 모나리자’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데 아마도 인도 불교 미술의 영향을 받은 탓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이 불상 앞에서 돌아가며 표정을 음미하였으며 불빛을 비추는 역할을 맞은 아내 옆에서 나는 한참이나 이 아름다운 선정불과 눈 맞추기를 하였다.

275굴은 북량 초기의 굴로 막고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굴인데 막고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본생도인 [시비왕본생도]와 더불어 그 유명한 [교각미륵보살]이 있다. 3.34M의 X자 다리, 역삼각형 광배에 쌍사자좌와 나란히 배열되어 있으며 온 손바닥을 펴서 무릎위에 올려놓아 중생의 소원을 다 들어 주겠노라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으며 머리에 화불관(化佛冠)을 쓴 모습으로 나에게도 무슨 소원을 들어줄까? 하는 질문을 받고 있었다.

328굴은 초당(初唐)기의 굴로 채소구존상(석가모니불, 아난과 가섭존자, 좌우 협시 미륵보살,4명의공양보살) 이 있으며 그중 공양보상 한 구를 미국의 워너가 훔쳐간 것이다. 그 중 협시보살 두 점은 당대 최고의 ‘미인보살’로 인정받는 것들인데, 특별굴인 45굴에 비견된다. 볼 수는 없었지만 돈황최고의 채소 [칠존상](1불, 2제자, 관음, 대세지의 2보살, 남증장. 북다문의 2천왕)이 있는 45굴은 중국예술의 정화로 꼽힌다. 이 중 328굴의 것과 더불어 미륵보살상은 돈황에 관한 어떤 책에도 사진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우리가 본 328굴의 것이 좀 날씬한 반면 45굴의 것은 상대적으로 풍만하다.

모르긴 해도 당시 불상 중 미륵불은 시대를 대표하는 미인이나 여왕 등의 얼굴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니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우리나라 국보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도 어떤 학자들은 선덕여왕의 모습을 따온 것이라 해석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 제 428굴, 세계최고(最故)의 누드화 ´비천상´

 

 

그 외에도 관경변상도가 있는 172굴, 각국 왕자 그림과 더불어 한때 조우관을 쓴 신라왕자상이 그려져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된 237굴, 북위시대의 굴로 반가사유상과 수렵도가 있는257굴, 현란한 벽화로 가득한 428굴에서 13명의 제자가 지켜보는 돈황에서 가장 오래된 석가열반도, 6세기에 드물게 일찍 그려진 누드화인 전라의 비천상이 조정 바깥 네 모서리에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 428굴은 또한 천불 소상과 공양인상이 가장 많은 굴로 4층에 진흙으로 만든 천불이 926구, 감실테두리 안에 그린 공양인이 160여채, 네 벽 하부에 3행 배열로 그린 공양인이 1186체나 되는 큰 굴이었다.

땀을 흘리고 발품을 팔면서 3시간여를 구경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벽화의 큰 매력은 자연미‘에 있다고 한 이곳 막고굴에서 7년간 돈황벽화를 연구한 우리나라의 고고학자인 서용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서용교수에 대해 이신 선생은 외국인으로 이곳에 와서 연구한 학자 중가장 뛰어나고 대단한 학자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는데 두 분 다 세계 둔황 학회와 한국 둔황학회의 회원으로 자주 만나신다고 하였다.

´자연´이라는 단어를 완벽함이라고 정의하는 서용 교수의 말을 빌려 보자면 현재 우리 눈앞에 보여 지는 벽화는 당시의 벽화가 아니고 천 여 년 전 벽화를 그렸던 화공의 과 천 여년이라는 시간이 만나서 완벽한 자연미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으로서 옛날에 화공이 그림을 그릴 때는 인위적인 그림이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은 다시 그 그림을 자연의 의지대로 바꾸어 버려 더러는 적당히 변색되고 더러는 헤어지고 어떤 부분은 떨어지게 해서 자연의 일부분이 됨으로서 오히려 완벽해 진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왜 사람들은 하필이면 이곳 돈황에 이 많은 굴을 뚫고 불상이나 벽화를 그렸을까? 하는 의문하나를 풀게 된다. 따지고 보면 그 이유도 자연적인 것이다. 이곳을 통해 잘 모르는 미지의 대륙인 서역과 교통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땅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거나 천산산맥을 넘는 일, 수년 동안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나고 오는 것에 대한 불안 등을 부처님이라는 대상을 통해 치유 받으려 했다는 것임을...

  ◇ 이신 선생님의 사인 한 장

 

 

 

 

 

 

 

 

 

 

 

 

 

 

 

 

 

 

 

 

 

 

 

 

나오는 길, 이신(李新) 선생께서 막고굴 앞에 있는 백양나무를 가리킨다. 하얀 둥치에 자라면서 나무껍질이 터서 만들어진 흔적이 마치 사람의 눈을 닮았고 수없이 뻗은 가지가 사람의 팔을 닮아서 이 나무를 보면 천인천수 관음보살을 닮았다는 설명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과 더불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박불관에서 운영하는 서점에서 못 본 여러 굴들에 있는 벽화나 불상들의 사진이 있는 책을 한 권 사서 이신선생께 사인하나를 부탁하고 같이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막고굴 에서의 감동과 아쉬움을 묻는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막고굴을 설명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이제는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입구로 나오면서 이신 선생과 주고받은 말에 나중에까지 가슴이 아렸다.

그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순하고 학자다운 풍모를 이글을 쓰면서도 기억을 하는데 다시 한번 좋은 설명을 해 준 그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명사산(鳴沙山) 사막의 꿈과 양관(陽關) 그리고 돈황 돈황,,,-

  ◇ 명사산의 풍경


막고굴 에서의 잔잔한 감동을 뒤로한 채 이른 저녁식사를 하러갔다. 이른 저녁을 먹은 까닭은 명사산을 보기에는 더위가 가신 오후라야 제격이라는 것과 해질 무렵 명사산 고운 사막의 산정(山頂)에서 ‘사막의 기관(奇觀)‘이라 불리는 월아천(月牙川)을 보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이벤트가 되기 때문이다.

산 같은 모래 언덕 명사산은 돈황에 있는 또 하나의 명물로 돈황 남쪽 5㎞ 떨어진 곳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모래산이다. 남북 20KM, 동서가 약 40KM, 해발 1715미터, 바닥부터 봉우리까지의 표고차는 약 25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명사산은 이름 그대로 모래결이 희고 가늘며 그 정도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신사산(神沙山), 사각산(四角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명사산은 맑은 날에 이곳의 모래소리가 관현악기의 소리같이 들리거나 수만의 병마가 두들겨 치는 북과 징소리 같이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것인데 (사실은 모래가 큰 일교차에 의해 수축하고 팽창하면서 내는 소리) 한 두 사람이 모래사막을 지나고 마찰을 한다고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며 지난해 이곳에서 실험한 바에 의하면 200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같이 모래썰매 같은 것을 타고 움직일 때 소리가 났다고 한다.

명사산을 들어가는 표를 내밀고 들어선 입구에서부터 황금빛을 발하는 모래언덕에 눈이 부시고, 언덕까지 데려다 줄 낙타들이 100여 마리 땅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낙타들이 대기하는 곳에는 그 녀석들이 쏟아놓은 배설물로 땅이 질컥거리고 냄새가 진동하여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냥 우리 걸음으로 걸어서는 발이 빠지고 피곤해서 모래산 아래까지 가는데 낙타를 아니 탈 수가 없었고 약 1.5 Km를 낙타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아직은 태양이 너무 너무 뜨거웠지만 다들 모래산을 오를 호기심과 기대를 하는 눈치들이라 피곤해 보이지를 않았다.

낙타에서 내려 모래사막을 오르는 곳, 그 곁에 유명한 사막 한 가운데의 오아시스 월아천(月牙川) 작은 호수가 사찰과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월아천은 명사산 안에 있는 초생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로서 남북길이가 약 100m(제일 규모가 컸을 때 250), 폭이 25m(50) 정도다. 서쪽에서 동으로 갈수록 수심이 깊고, 제일 깊은 곳은 3.2m(제일 깊었을 때 5) 정도인 이곳의 물은 돈황 남쪽에 솟아있는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지하로 흘러 비교적 저지대인 이곳으로 모여 솟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매년 광풍이 불어도 이곳만큼은 좀처럼 모래에 덮이지 않아 기이하게 여겨졌고, 옛 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칠성초와 같은 생물이 평생 늙지 않아 ´만천(萬泉)´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해가 서서히 떨어지는 시간, 우리 일행은 나무계단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명사산을 오른다. 한걸음씩 떼는 발걸음이 무거워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꼭대기에 올라서는데 바람 한 점 없다.

반대쪽의 산등성이는 꼭 1/2로 나뉘어져 한쪽은 아직 남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데 반대쪽은 명암대비가 뚜렷하게 검은 빛으로 어둡다. 어쩌면 우리 살아가는 일도 옳고 그름, 도덕과 비도덕, 죽음과 삶, 젊음과 늙음, 어둠과 밝음으로 극단적인 양분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카메라 셔트를 누르고는 철버덕 모래밭에 앉아서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이곳 서역은 해가 늦게 진다. 시계가 아홉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고서야 세상이 빨갛게 물 들기 시작하더니, 해가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월아천 작은 호수에도 황금빛으로 변하고 하늘이 더위만큼 빨갛고 애닯게 익어가는 시간, 마음속으로 노래한가락 부른다.

  ◇ 명사산과 낙타

  ◇ 명사산 월아천




















 

 

 

 

 

 

 

 

 

 

 

 

 

<검은 산만 떠가네 / 검은 물에 떠가네 / 하늘도 바람도 한가진데/ 오는지 가는지 우리 밸세/ 이고지고 떠가네/ 메고 보듬고 떠가네/ 우리네 인생 한 밤중에/ 뱃놀이만 같으네>

천천히 양말마저 벗고 모래를 밟으며 산을 내려오다가 단체로 줄지어 모래썰매를 탄다. 급경사로 이루어진 모래산을 대나무로 만든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시간, 하늘엔 보름달에 가까운 달 하나가 우리를 보고 밝게 웃는다.

우리가 이반 여행지에서 묵게 된 호텔 중 돈황에서 묵게 된 돈황산장은 규모나 시설면에서 제일 좋았다는 말들을 하고는 했는데, 기실 제일 좋았던 이유는 호텔의 모양이 중국의 성모양을 웅장하게 보여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한쪽의 객실에서는 창밖으로 명사산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간 산책길에서 백양나무에 흔들려 시원하다 못해 약간 한기를 느낀다. 돈황의 기후는 중국 북서쪽의 대륙성 기후대에 속해 여름에는 덥지 않으나 매우 건조하며, 겨울에는 평균 영하 9~10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춥다.

건조한 여름이지만 이 도시에 들어서면 먼저 방문객을 반기는 백양나무의 푸른 잎새는 단조로운 사막의 희뿌옇거나 어두운 회갈색 혹은 흑빛에 지겨운 풍경과 더위에 지친 여행객들에게 새로움과 싱그러움을 준다. 이 나무는 원래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흔히 오아시스 도시의 주변에 많이 늘어서 있는데, 돈황의 백양나무 너머에는 옥수수밭과 보리밭, 목화밭 등이 펼쳐져 있다. 다시 한 번 나무들과 조화를 이룬 명사산을 보는 즐거움에 젖었는데 아침에 보는 명사산은 또 그대로 싱그러웠다.

양관(陽關)으로 가는 시간, 지나치는 돈황 시내는 우리나의 읍(邑) 만하다. 비천상을 동상으로 만들어 세운 네거리를 중심으로 시장주의까지 형성된 1km-2km정도의 거리만 빼면 전형적인 시골인데 어쩌면 옛날이 지금보다 더 번화하였을 것이다.

돈황의 역사는 기원전 11년에 시작된다. 한(漢)의 무제(武帝)가 이곳의 흉노를 무찌르고 하서회랑의 하나인 돈황 군을 설치하여, 동부에서 한(漢)인을 이주시켜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삼고 나서부터이다. 그 이래 실크로드는 물자뿐 아니라 문화와 종교 등 유형무형의 많은 것을 나르게 되었다.

후한(後漢)시대에는 불교가 중국 본토에 전래돠고, 이어 4세기의 동진(東晋)시대에는 이 고장에 막고굴(莫高窟)이 개착된다. 당(唐)대의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쳐서는 왕래가 가장 성해지고 황금시대를 맞이했는데, 당이 쇠퇴하자 한때 토번(吐藩)의 지배를 받고, 곧 동쪽의 위구르에게 멸망당한다. 10세기 후반, 중원에 송(宋)이 건국되고, 서방에 세력을 뻗힌 서하(西夏)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뒤 원(元)이 침입했는데, 명(明)대에는 투루판의 지배하에 놓인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역사의 변천을 겪은 둔황은 청(淸)대에 시가지가 새로 조성되었고, 현재 볼 수 있는 시가 모습은 청대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양관(陽關)이나 옥문관(玉門關)처럼 중국에서 서역으로 나아가는 국경 출입처가 번성하던 그 시절 이곳은 서역사람들과 중국인 그리고 신라나 백제에서 온 사람들이 같이 어울리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양관(陽關)은 돈황성 남서쪽 70Km지점에 있으며 통상 천산남로를 가는 통문(通門)이고 이곳에서 약 90km 북쪽에 떨어진 옥문관(玉文關)은 천산북로로 나아가는 통문(通門)인데 기원전 121년, 서한왕조가 남창의 흉노에 대항하여 서역을 다스리기 위해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의 4군을 설치하고 동시에 이 두곳의 출입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양관은 서역을 왕래하는 문호가 되어 실크로드 남쪽길의 필히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그 전략적 지위는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고승 현장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귀국한 길이 바로 실크로드 남로로 양관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 온 것이다.

돈황에서 양관(陽關)가는 길, 차 창 밖으로 끝없이 보이는 지평선과 검은 흙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 시간 여를 지난 즈음, 멀리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보이는가 싶더니 사막의 형태가 드문드문 고비(자갈과 흙 바위로 이루어진 사막형태)에서 완연히 모래로만 된 사막 형태로 바뀌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침내 타클라마칸 사막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고 이는 머잖아 양관에 도착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버스를 내리는 지점은 최근 들어 조성된 성문(城門)형태의 양관 박물관 입구였는데 당시 전쟁이 일어날 때를 대비한 전쟁도구들이 성문에 어울리게 전시되어 있었다. 성문 안 양쪽에있는 박물관은 돈황과 양관을 비롯 주위에서 발굴 된 유적들이 시대별로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었으며 특히 실크로드를 통한 여러 가지 문화의 교류부분들에 대한 지도가 나를 비롯한 관광객들에게 이해를 쉽게 해주는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 양관의 허허로운 모습

 


이곳에서도 명사산 에서와 같이 원래 양관의 성벽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데에는 탈것이 필요하였다. 다만 명사산 에서 낙타를 탔다면 이곳에서는 나귀를 탔다는 것이 틀렸을 뿐인데 이제 10살을 넘었을 것 같은 어린 아이가 어른 8명이 탄 나귀를 잘도 몰아간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양관의 원래 성벽은 허물어 졌으나 누각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 성벽이 옥문관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무너진 성벽의 흙에서 잎이 피지 않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자라고 오늘도 모래바람 속에서 이방인을 맞는 쓸쓸함과 고적함이 베인 한낮의 풍경에 내 스스로도 사막가운데 있음을 직감하면서 그냥 쓸쓸함 그대로를 마음으로 맞았다.

문을 지나면 서역으로 들어서는 것을 뜻하며 양관 북쪽 산등성이에는 비교적 보전이 잘되어 있는 한대의 봉화대가 알몸으로 뜨거운 햇볕을 통째로 맞고 있었다. 그 동쪽은 홍산구이고, 서쪽에는 남북방향의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길이 20m에 달하며 골짜기에는 푸르고 낮은 관목들이 자라면서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양관을 너머서서 보이는 사막의 끝없는 풍경을 보면서 이 사막 길 위에서 현장법사도, 혜초스님도 그리고 이름 없는 대상들도 목숨을 걸고 넘나들었을 것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처연함을 느낀다. 우리가 사는 일을 두고 봐도 언제나 오아시스에 머무를 수는 없다. 살다보면 어떤 날은 스텝기후처럼 바람 많은 초원을 걷거나 만년설이 뒤덮인 산맥을 넘듯 힘든 날들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이 사막을 건너는 일처럼 운명적으로 한계에 부딪히는 날들도 맞아가며 살게 된다.

이렇게 발품을 팔아 여행객으로 실크로드를 걷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지 평생의 나날들은 오아시스와 산, 강, 그리고 사막이 있는 실크로드를 걷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오전의 여정이 양관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부른데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중간에 ‘돈황고성‘이라 명명 된 영화세트장을 찾는다.

1987년에 돈황을 사주(沙州)라 부르던 당나라 때를 배경으로 한 일, 중 합작영화 “돈황”을 찍기 위해 일본인들이 재현한 곳으로, 나중에 중국정부에 기부한 곳으로 그 이후에도 야외 세트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른 유적지들에 비하면 역사적 의미나 별 감흥이 없지만, 이 곳을 짓기 위해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했고, 그 때문에 이곳에 가면 천 년 전 돈황의 거리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다.

또 재미있게도 지금의 사회와 다를바 없이 주관(酒館:술집), 미점(米店:쌀집), 여관, 식당, 귀의군 절도부(歸義軍 節度府:행정관청) 등이 복원되어 있고, 마약을 하는 가게나 말을 대여하는 마구간, 안경을 파는 가게 등이 있어서 당시의 사회모습을 짐작케 한다.

최근에 우리나라 TV에 방영 된 사극인 “장보고”나 “해신”의 일부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너무나 벅찬 감동을 안겨준 양관과 자연을 보고 난 뒤라 이곳에서 머무른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별로 큰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느낌 한낮이었다.

  ◇ 돈황시장 주변 거리 풍경


건조한 이곳의 기후 상, 아침의 싸늘하던 공기는 섭씨 37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로 바뀌어져 있었지만 그늘에만 서면 시원해진다. 한낮의 길가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여기저기서 리어카에 포도를 쌓아두고 손님을 무료하게 기다리던 상인들이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에게 잠시 포도를 파느라 부산한가 싶더니 이내 시간이 정지한 듯 한낮의 뜨거움에 조용히 빨려 들어간다.

점심식사 후 들린 돈황의 마지막 코스는 ‘돈황역사박물관‘, 우리를 안내하며 설명을 들려준 사람은 역시 순수한 한족으로 박물관 학예사 쯤 되는 분이었는데 일부러 우리말을 배워 열심히 설명을 해 준다.

이 박물관은 원시시대부터 수, 당 전 까지, 수, 당기, 그리고 그 이후의 세단계로 시기를 나누어진 전시실과 보석 등을 팔거나 보석으로 꾸며진 특별전시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대개의 설명을 마친 이분이 마지막 들린 보석관에서 한 말을 빌리자면 중국정부에서 박물관 운영에 대한 자금지원을 하는데 있어 일부만 정부예산을 주고 나머지 운영자금은 자체 충당하도록 하여 이렇게 병풍이나 골동품을 팔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학예사가 유물에 관한 설명 못지않게 물건을 파는 대해서도 신경을 쓰는 것을 보면서 퍽이나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 경우 자국의 문화재를 도굴하는 도굴꾼이나 막고굴의 유물을 은전 몇 닢에 넘긴 왕원록 같은 이들보다도 골동품을 해외로 밀반출 시키는데 있어서 종범 내지 방조를 하고 있는 중국 정부가 무엇인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화적 가치에 대한 몰염치나 몰지각은 백제 무녕왕릉을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하루 만에 파헤친 우리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였고 한편으로는 막고굴에서 자신들이 운영하는 책방에서 책 한권에 싸인을 해 주던 이신(李新) 선생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였다. 연구에 몰입하고 싶어 한다던 이신선생의 얼굴 위에 물건을 사고팔 수 있으니 사고 싶은 사람이 없느냐고 멋쩍게 묻던 돈황역사박물관의 이 학예사 얼굴이 겹친다.

박물관을 본 후 한 시간 여 주어진 시간에 어제 밤에 들렀던 돈황의 ‘사주시장‘길 건너편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인구 15만의 조그만 도시인 중국 귀퉁이의 돈황에도 예외 없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조류가 밀려와 길을 지나는 젊은이들 중 상당수는 힙합패션이나 청바지를 입고 있으며 더러 웬만한 여자들의 성장은 서울 한복판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투르판으로 이동해야 하는 날, 우리는 다시 비포장과 크게 틀릴 바 없는 고속도로를 통해 2시간여 버스를 타고 돈황역으로 이동을 하였다. 저녁기차를 타기위해 몰려든 돈황역은 북새통이었다. 우루무치행 특급열차를 타고가다 중간에서 내려야 하는 우리는 비교적 수월하게 역사를 지나 기차에 오를 수가 있었다. 이미 19시간짜리 기차를 타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다들 5분 내에 짐정리를 끝내고 여유를 되찾는 모습이다.

돈황에서 하오 7시40분에 출발하는 열차는 다음날 새벽 5시를 넘어서는 동안 10시간 이상이 걸릴 터 였지만 이제 그런 정도는 별것 아니란 표정들이고, 밤 9시를 넘기면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10시를 넘어서면서 기차 밖으로 동쪽의 달과 서쪽의 별무리들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뜨겁고 낮은 땅 [투르판], 화염산과 그 주변-

기차에서 새벽을 맞는다. 잠을 깨우는 소리에 놀라 눈을 돌려 내다본 바깥 풍경은 아직 신새벽. 동쪽 하늘의 별무리와 그 곁의 반달이 서로를 마주보며 빛을 뽐내는 시간, 내가 잠들었던 동안에도 저들은 깨어서 척박한 고비 사막의 검은 땅에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 5시 40분경에 기차를 내려서 처음 본 거리 풍경은 길가에 침대를 놓고 잠을 자고 있는 위구르인 가족의 모습이었는데 지붕 위에 평상이나 침대를 놓고 자는 사람들도 꽤 눈에 띄었다. 그만큼 더운 땅이라는 이야기렸다.

이곳 투르판은 남북조(南北朝)시대부터 당(唐)대에 걸쳐서는 한(漢)인의 왕조 고창국(高昌國)과 교하군(交河郡)이 번영하였고, 10세기 이래 위구르족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투르판 이라고 개명한 것은 1912년부터이다. 투르판은 위구르어로 "낮은 땅"이라는 뜻인데 시가지는 해발 18m에서 106m이다.

투루판 분지에서 가장 낮은 곳은 해발 -154m로, 이는 중국 국내에서 가장 낮고 세계에서도 두 번째로 낮다. 이 때문에 북위42 56´에 있으면서도 7월에는 기온이 49℃,지표 온도는 82℃를 기록하고 하루의 온도차는 20℃이상, 겨울에는 -30℃까지 떨어진다는 너무나도 가혹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런 기후 사정에 비추어 본다면 투르판이 내게 보여준 첫 여름 풍경으로 사람들이 열대야를 피해 길이나 옥상에서 잠을 자는 모습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라. 언젠가 베트남의 호치민 여행에서 그 나라 사람들은 잠옷이 바깥나들이에도 입는 평상복이었다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비교적 이른 아침 식당에서 먹게된 음식들은 중국 전통의 것에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유목민족의 특성이 반영된 듯 양고기가 주류를 이루는 여러 종류의 음식과 특히 쉬시케바브를 맛 볼 수가 있었고 둥근 판 모양의 구운 빵이 곁들여졌다.

  ◇ 고창고성, 현장법사가 주석하던 법당모습


같은 유목민족인 아나톨리아의 오스만투르크가 터키를 정복하고 동, 서양에 영향력이 커지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한 케바브 종류들은 그 이전부터 실크로드상의 많은 민족들이 먹어 왔던 음식들인데 고기 덩어리를 익혀서 칼로 베어내 먹는 도네르케바브는 그렇다 치더라도 쇠꼬챙이에 고기를 끼워 구어서 먹는 쉬시케바브를 중국 사람들은 궴 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꼬치종류로 다양하게 먹고 있는 맛난 먹거리인 것이다.

투르판은 포도의 도시다. 도시의 곳곳이 가로수로 포도넝쿨을 얹어 때로 그늘진 포도터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으며 고창고성으로 가는 길, 주위의 짐들은 네모진 진흙 벽돌로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인데 집집마다 포도를 말리는 건조장이 집의 크기 만하게 지어져 있어서 건조를 위한 통풍구로 구멍이 뻥뻥 뚫린 모습이 이채로웠다.

또한 투르판시 북동 10Km의 화염산 중의 한 계곡으로 남북길이 약 7Km, 동서 너비 약 2Km의 협곡이 있는데 이 곳은 모두 포도재배지로 흔히 포도계곡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특히 씨가 없는 맑은 연두색의 넝쿨포도는 이곳부터 지중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재배되는 것으로 당도가 높고 신선한데 1kg에 우리 돈으로 300-400원 남짓하니 맘놓고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화염산맥인근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고창고성과, 아스타나 고분군, 보즈클리크 천불동, 화염산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고창고성은 옛 고창국의 유적지로 후한이 멸망한 후 번성했던 투르판의 중심지였다. 투루판시 동쪽에서 40㎞ 떨어진 화염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은 불타오르는 듯 화염산을 뒤로하고 폐허만 남아있다.

고창고성이 생기게 된 연유는 한 무제시대(BC,1C)에 서역에 천리마 또는 한혈마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이광래라는 장수를 파견하여 금은보화로 이 말을 수입하려 하였지만 서역국은 도리어 금은보화를 강탈하고 수출을 거절한다. 이에 한무제의 처남인 이원개 장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도리어 패배하게 되는데 한무제는 가욕관에 보고하러 온 이원개 장군에게 그들을 정벌할 때까지 돌아올 수 없음을 명령한다. 그래서 이원개 장군은 이곳에 고창고성을 쌓고 절치부심 하다가 결국은 승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이곳에는 인구가 35,000명까지 살았었다고 하며 13세기에 이르러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번잡한 잡상인들, 그 중에서도 어린 여자아이들의 호객행위가 만만치 않고 아침인데도 벌써 관광객들의 수가 넘쳐나는 모습이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이곳 여자아이들의 눈썹은 일자로 붙어 있거나 그려서라도 양쪽 눈썹을 일자로 연결해 놓았는데 이유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먼 곳으로 시집가지 않기 위해서한다. 아마도 역사 이래 대대로 전쟁터였던 이곳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풍습이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이런 모습의 아이들은 투르판의 다른 곳에서도 나중까지 더러 보게 되었다.

아침부터 찌는 이곳의 더위는 고성을 돌아보는데 마차를 이용하게 되어있었다. 기차를 탈 때나, 줄을 서야하는 가게 등에서도 그랬지만 아직 중국 사람들은 이런 기초질서에 익숙치 못해서인지 새치기를 하고도 뻔뻔스럽게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갈 길을 지연시킨다. 아마도 북경올림픽이 끝나는 때쯤이면 좀 많이 나아질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원래 고성은 장방형으로 주위의 길이가 5Km, 외성, 내성 및 궁성의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농경지로 잠식되어 규모가 줄어 있으며 볏짚을 섞어 만든 진흙벽돌을 부수어 퇴비로 이용한 까닭에 건물들의 파손이 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외성 남동쪽과 남서쪽 모서리에 사원의 유적지가 있으며 그 중, 현장법사가 고창국 시절 인도로 가던 중 이 곳에 주석하며 백성들에게 법문을 하던 절터와 대불이 있던 곳은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닿는 곳이다.

이렇게 볏짚에 흙을 섞어 만든 벽돌로 된 구조물은 아무리 비가 적은 지방이라 하여도 적은 빗물만으로도 쉬이 견딜 것 같지 않아 보였는데 뭉개진 건축물들은 같은 벽 하나도 반쯤은 흙더미이고 남은 반은 벽돌담으로 보이는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더러 책에서 이런 모습을 촛농이 떨어져 흘러내린 모습이라 과장되지만 그럴듯하게 표현하고 있다.

  ◇ 보즈클리크 천불동


이곳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아스타나 고분군이 있다. 아스타나는 위구르 말은 ´휴식´이라는 뜻으로 ´영원히 잠든 묘지´ 혹은 ´휴식의 잠´이라는 정도로 해석 되는데 언뜻 보기에도 단순한 공사판의 흙무더기 같은 무덤이 500여 개가 분포한 공동묘역이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미라들은 현재 우루무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당나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깊이 7M 이상을 판 다음 전실을 두고 묘를 조성한 귀족의 무덤에서는 죽어서까지 중용을 취하며 과욕을 버리려는 뜻의 벽화를 남긴 노블리스오블리제의 모습을, 대상의 무덤에는 객지에서 죽음을 맞는 상인의 운명을 말하려는 듯 죽어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을 고스란히 여러 면의 벽화에 새겨둔 모습을. 관조차 변변히 쓰지 못한 평민의 무덤과 지금까지 썩지 않고 남아 있는 미라형태의 육신을 보면서 2-3천 년 역사를 뛰어넘어 보는 나에게 이승의 신분이나 부귀영화가 결국 죽어서는 아무 차이도 아니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이었다.

다시 차를 타고 가는 곳은 그야말로 화염산의 중심부, 눈앞에 붉은 산이 장엄하게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곳, 계곡의 양편에는 붉은 화염산이 입을 크게 벌리고 우리를 맞는데 한 쪽 끝없는 낭떠러지로 흐르는 물과 그 물을 먹고사는 푸른 나무들에서 갈증을 해소한다.

낭떠러지 가까운데 차를 세우고 화염산의 웅장함을 조망하는 시간, 다들 정신없이 사진기를 눌러대는데 지난해 보았던 터키 카파도키아의 웅장했던 비둘기 계곡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자연의 힘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 화염산의 풍경


 

화염산맥은 동서 전장 98Km, 남북의 너비가 9Km, 대체적인 고도는 500m 전후이고, 최고봉은 해발 831.7m.에 이르는 바다가 융기된 지형으로 예전부터 바다생물의 화석이 즐비하게 나온다는 곳이다. 명나라 초기 그 외모 및 뜨거운 기후와 관련하여 이름을 화염산으로 칭했다고 하고 중국에서 가장 더운 지방으로, 여름 최고기온은 47.8도까지 올라가며, 지표면의 온도는 70도 이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화염산의 온도가 높은 것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분지가 태양을 향해 기울어 있기 때문이며 숲이나 식물들이 자라지 않은 땅으로 직사광선에 의한 복사열이 온도상승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 삼장법사, 철선공주, 우마왕 등의 얘기와 관련이 있는 화염산 천불동 입구에는 삼장법사와 파초선을 든 손오공과 저팔계 상이 역동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삼장법사를 모시고 우마왕이 일으킨 불길의 화염산을 넘으려던 손오공은 불을 끄기 위해서는 나찰녀의 파초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나찰녀를 찾아가서 파초선을 빌리려 하였으나 가짜를 주어서 불을 끄지 못하다가 다시 찾아간 손오공이 나찰녀를 무찌르고 파초선을 손에 넣어 그것을 부침으로서 화염산의 불을 끄게 된다. 한번을 부치니 불이 꺼지고, 두 번을 부치니 바람이 불고, 세 번을 부치니 비가 내더라는 손오공이 독백을 하던 그 날처럼 붉은 화염산은 오늘도 벌겋게 열기를 끌어올리는 듯하였다.

보즈클리크 천불동은 우리가 조망했던 화염산 기슭에 동굴로 만들어진 불교사원이다. 화염산 밑 목두계곡 절벽에 지어져 있는 천불동은 동굴이 전부 83개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57개이고 그 중 벽화가 있는 것은 40여 개, 총면적 1,200 평방미터에 이르는데 남북조시대에 시작되어 당, 오대, 송, 원대까지 7세기에 걸쳐 고창지구 최고의 불교중심으로 조성 시기는 돈황의 막고굴과 일치한다.

  ◇ 화염산 주변 풍경

  ◇ 나귀를 타고 가는 위구르 할아버지























13세기말, 고창왕실이 감숙성

 

 

영창으로 천도를 하고, 이슬람교가 투르판에 들어온 이후 불교가 쇠퇴하게 됨과 더불어 보즈크리크 동굴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당시 이곳에 터를 잡은 회족(回族)들에 의해 불상들은 소실되기도 하고 벽화들은 회칠로 덧씌워지는 수난을 받게 되며, 나중 근대에는 홍위병들에 의해 다시한번 수난을 맞게 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이곳 위구르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가 파괴했던 천불동의 불교유적들 앞에서 지금은 동굴을 보호하고 관광객들이 사진 찍는 것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규모는 막고굴에 비해 아주 작지만,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두고 햇볕을 피해 동굴을 파서 시대적인 상황과 거대한 자연의 힘을 극복해보기 위해 그들의 기원을 부처님께 빌어야만 했던 바램은 세상 어디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천불동을 나와도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은 화염산, 부지런한 사람들은 화염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평소 날 씨 같으면 더워서 산을 오를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데 마침 우리가 화염산 일원을 찾은 시간은 아직 오전이라 한낮에 비해 아직 기온이 덜 오른 것과 특이하게 이 날은 다른 날에 비해 산을 올라도 좋을 만큼 많이 시원한 편이라고 하였다.

무심하게 길가로 위구르 할아버지 한 분, 나귀를 타고 천천히 길을 따라 산길을 내려가는 시간, 하늘의 해는 서서히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뜨겁고 ´낮은 땅´, 교하고성과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들

투르판의 한낮은 고요하다. 낮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이유로 한낮 250만이 사는 시내는 이글거리는 태양만이 살아 있는 생명들이 있는 곳임을 암시할 뿐 세상은 다들 잠을 자는 듯 하다. 더위에 지친 여행객인 우리들도 오후 5시 가까이 까지 호텔 방에서 씻고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호텔 앞 포도넝쿨의 푸르름이 햇살에 녹아 들어가는 어느 낯선 장소에서 위구르인들이 켜는 현악기 소리를 듣는 꿈을 꾸다가 일어난 오후 4시경, 아직도 해는 하늘의 한가운데서 꼼짝않는데 우리는 다시 길은 나섰다.

만리장성, 대운하와 더불어 중국고대 3대 공정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카레즈(지하수로=카알징=감정=坎井)은 이곳 투르판의 가장 특색 있는 볼거리이자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자연을 극복한 문명의 현장이다. 사막의 척박한 땅에 사람이 살도록 하고 풍성한 포도농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인데 연 강우량이 20밀리도 되지 않는 투르판의 물은 이 지하수로를 통해 멀리 천산산맥의 만년설 녹은 물을 끌어다 온 것이다.

  ◇ 투르판의 관개시설 "카레즈"

 

 

 

 

 

 

 

 

 

 

 

 

 

 

 

 

 

 

 

 

 

 

 

 

 

 

 

 

 

 

 

 

 

 

 

 

 

지하로 물을 끌어오는 이유는 알다시피 사막지형과 높은 온도에 기인하여 지표로 흐르는 물은 상상이상의 증발력 때문에 도시에 오기 전에 모두 말라버리기 때문인데 지하수로를 이용하게 됨으로서 물의 증발을 막고, 오염을 방지할 수 있어서 천연 음료수나 농업용수로의 역할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투르판의 카레즈가 가장 많을 때는 1,300여 곳이 있었으나, 수위가 낮아지는 등의 이유로 1990년 현재는 700여 곳이 남아있으며, 총 유량은 2.94억톤에 이른다고 하며 투르판에는 이 같은 카레즈가 지금도 천 개가 넘고 그 길이를 합치면 5천 Km가 넘는다는 설명을 듣는다.

물을 지하에서 공급하는 원천이 되는 수직 우물인 수정(水井). 20-70M 길이로 수정들을 연결하는 물의 통로인 암거(暗渠), 바깥으로 물이 노출 된 부분인 명거(明渠), 그리고 물이 저수지 형태로 모여 있는 노패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정이나 암거를 파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미약한 힘이 때로는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오늘 여행지의 기장 큰 관심사는 해지는 가운데 보게 될 교하고성(交河故城)이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동하는 도중 들르게 된 위구르인의 보통가정에서 나는 의외의 경험과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역시 포도과수원과 밭농사를 주로 하는 이 집은 단정하게 정리된 길가의 여느 집과 다름이 없었는데 대가족으로 꾸려진 이 집에는 요람에서 젖을 먹는 신생아부터 할머니까지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어머니와 딸들이 주를 이루는 모계사회의 원형(原型)이 남아 있어 딸들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집의 구조는 마주보는 두 동의 가옥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은 끝에 부엌이 있고 나머지는 차례대로 방을 넣었고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바깥에서 개별적으로 열고 들어가야 했다. 방 속에는 바닥부터 천정을 제외한 모든 벽이 붉은 계열의 카페트로 장식되어져 있었는데 원래 이들이 유목생활을 하며 살던 겔을 그대로 옮겨온 듯 했고, 내부에 별다른 가구는 없었지만 최신형 TV와 비디오재생기 그리고 오디오가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위구르 민속춤

 

 

 

 

 

 

 

 

 

 

 

 

 

 

 

 

 

 

 

 

 

 

 

 

 

 

 

 

 

 

 

 

 

 

 

 

 

이 집 뒤안의 포도밭에서 우리가 직접 딴 포도를 맛보는 시간, 이 집의 시집간 큰딸과 작은 딸이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우리를 위해 환영의 춤을 선보이는데 비록 포도를 팔고 건포도를 팔기 위한 수단이라 할 지라도 아직 때묻지 않은 그들의 넉넉한 품성과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대가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잠시 집안을 빠져나와 위구르인들이 사는 길을 걷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언제 얼굴 모르던 이들을 이날, 이 곳에서 만나리라 생각이나 했을것인가? 라는 자문(自問)을 하면서 비록 말 한마디 서로 나누지 못하더라도 이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인연이다 싶어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그들 중 만난 위구르 할머니들은 내가 가진 카메라를 보고 같이 찍어봐 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우리네 어머니나 할머니들의 모습과 별반 틀리지 않았고 조그만한 카메라 창에 찍힌 그들의 얼굴을 보고는 매우 부끄러워하시는 것이 참 정겨운 모습이었다.

  ◇ 위구르 할머니들

 

 

 

 

 

 

 

 

 

 

 

 

 

 

 

 

 

 

 

 

 

 

 

 

 

 

 

 

 

 

 

 

 

 

 

 

 

 

흙담을 따라 길게 높은 키로 정렬을 한 동네의 가로수들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즈음 그들과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맞부닥쳐 보는 일이다. 그들의 삶 속에 잠시나마 같이 동화되고 그들의 사는 방식에 젖어보면서 우리와 다른 문화나 삶의 특질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참 묘미인 것이다.

햇살의 두께가 좀 얇아졌다고는 하나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시간, 우리는 교하고성(交河故城)으로 발길을 옮겼다. 트루판시 서쪽 교외로부터 10㎞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는 이 고성의 길이는 1650m이고, 폭은 300m이며 양쪽으로 물이 흐르는 계곡 사이, 30여 미터 높이의 낭떠러지 위에 세워졌다. 아침에 본 고창고성에 비해 원형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고 아름다운 주변 경관이 찾는 이들을 오래된 역사 속으로 인도하는 곳이었다.

교하고성이 고창고성보다 원형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고창고성의 경우 진흙에 볏짚을 섞어서 만든 벽돌을 건조시켜 집을 지은 반면, 교하고성은 순수한 벽돌집이었기 때문인데 지금도 대불탑과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머물렀다는 불전, 사원, 관청, 감옥과 민가의 흔적이 남아 있고 우물을 가장한 성 바깥으로 연결된 비상통로, 그리고 많은 탑의 잔해가 남아있어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곳은 고대 서역성곽 제국 중의 하나인 교하국의 중심도시로 서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이었다. 교하국은 실크로드의 천산남로와 천산북로가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충을 차지했던 왕국이다. 또한 진한시대부터 차사전국의 수도로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인구 6500명을 가진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교통 요충지였다.

14세기 전반 원나라 때에 전쟁으로 훼손되었으나,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이 되고 있는 미개간 도시인데 최근 고고학자가 고성을 발굴하는 도중에 최초로 지하 사원과 차사국의 귀족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같은 유적이라도 분위기, 기후, 시간, 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감동이 배가되는 경우가 있는데 교하고성이나 유럽의 신전, 우리나라의 폐사지 같은 곳을 제대로 보기에는 저녁이 다가오는 해거름쯤이 제격이라고 늘 생각한다.

약간은 쓸쓸하고 고즈녁한 분위기가 이미 퇴락하고 무너져 내리는 고성이나 신전, 폐사지의 풍경과 어울릴 뿐만 아니라 이런 폐허에 가까운 곳들을 비추는 황금빛이거나 붉은 저녁노을은 이런 곳들이 영화롭던 시기를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 교하고성의 거대한 풍경


허물어진 벽 한쪽에 기대고 앉아 잠시나마 그 영화롭던 과거의 시절로 돌아가 당시의 이름 모를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상상을 하고 언젠가는 이 폐허 위에 다시 한번 영화로운 역사가 꽃피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두어 시간 교하고성을 걷고 돌아 나오는 길, 성의 입구에서 모여 앉아 잘 익은 수박을 잘라서 나누어 먹는 맛, 땀을 바가지로 흘리고 먹는 맛이 시원하고 좋은데도 좀 더 있다 땅거미지는 시간에 이 곳에 서있지 못함이 못내 아쉬운 순간들이었다.

유목민족들에게는 양(羊)이나 말, 낙타의 수가 부(富)의 축적수단이자 기준이 될 것이며, 이들을 이용한 재화의 획득으로 먹고사는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따라서 이들이 유목민족이라 하여도 생계수단인 양고기나 소고기 같은 것들을 평소에는 풍성하게 먹지 못하는데 이들 가축들을 잡고 먹는 것에도 격식을 갖춘 나름대로의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날 우리의 저녁 식사로 준비된 바비큐 파티에서 이런 단면들을 보게 되었는데 가령 양고기의 경우, 양쪽 볼 살이 가장 맛있는 부위라고 하여 처음 오른쪽 볼 살을 떼 내어 가장 연장자가 먹도록 하고, 왼 쪽 볼 살은 나이가 가장 어린 여자아이가 먹도록 하였으며 이런 연후에 가장 연장자가 양의 목부터 꼬리에 이르는 등을 따라 칼로 자르는 의식을 행한 이후에 모든 이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게 하였다.

가장 나이든 연장자에 대한 우대는 그가 가진 기술과 삶의 체험을 후대에 전해주는 스승과 어른에 대한 공경의 의미이며 나이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배려는 건강하게 자라서 훗날 부족을 이끌 강건한 사람들을 생산하고 핏줄을 이어갈 다산(多産)에 대한 바램이 숨어 있는 것이다.

  ◇ 투르판 야시장의 한 풍경

 

 

 

 

 

 

 

 

 

 

 

 

 

 

 

 

 

 

 

 

 

 

 

 

 

 

 

 

 

 

 

 

 

 

 

 

 

 

저녁식사 후, 투르판의 야시장을 산책했다. 호텔 앞에 대기 중이던 나귀마차를 타고 포도넝쿨로 만들어진 터널을 지나고, 방울소리 울리며 시내의 큰길들을 횡단하는 묘미가 색달랐다.

투르판 중심부의 야시장은 빈 공터에 서는데 요일마다 장사하는 종목을 달리하여 서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먹거리 장이 한창으로 더위를 피해 밤을 즐기는 투르판 사람들로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양고기를 이용한 케바브와 우리의 소고기국밥 비슷한 음식들 그리고 낭 이라는 둥근 빵과 양유, 더운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표정은 순박하고 정겨워 보였다.

옛 것들과 풍습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면서도 문명의 물결이 팽창하는 중국에서 변방인 이곳도 예외가 아니어서 야시장 바로 곁에는 호화로운 대형 상가가 밤을 밝히고 있었다. 1층에는 가전제품들이 주로 진열되어 있었고 지하는 우리나라처럼 할인마트 형태의 식품점들로 차 있었는데 농산품들은 품질도 괜찮아 보이고 가격도 많이 저렴하였다. 비교적 고급차(茶)라 일컬어지는 벽라춘을 한 봉지에 우리 돈으로 250원 가량에 산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는데 나중에 서안에서 포장만 좋게 한 동일한 것이 우리 돈으로 25,000원을 호가하는 것을 보고 원산지의 농민들은 중국도 예외 없이 힘들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낯선 소수민족들의 ´아름다운목장´ 우루무치

이번 여행에서 가장 먼 곳, 종착역이 될 우루무치로 가는 길은 버스를 타고 서북개발을 위해 서역으로 연결 된 고속도로를 지나가게 되었다. 옛날 대상들이 걷거나 낙타 혹은 말을 타고 지나던 굽이굽이의 길이 잘 닦여진 고속도로로 변하였다고 해도 지금의 이 길 역시 변함없는 실크로드라는 생각을 하였다.

신강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는 중국의 각 성이나 자치구 중에서 그 면적이 가장 넓어서 중국 전체 국토의 1/6에 해당하는 넓은 땅이다. 우루무치로 가는 길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땅을 본다. 평평하고 끝없는 초원지대에서 방목을 하는 양떼를 보면서 중국이 세계 최대의 양 사육 수를 자랑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루무치 가는 중간쯤에서 만나는 소금호수의 규모가 차로 이십 여분 달릴 때까지 시야에 남아 있다는 것으로 광대한 땅과 지하자원을 가진 중국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소금호수에서 채취한 소금을 가공하고 상품화하는 회사가 우리나라 유수의 기업이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는데 자원이 없어도 이 오지에까지 와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노력을 하는 모습이 뿌듯했다.

  ◇ 우루무치 가는 고속도로 옆의 풍력발전소


 

우루무치에 다다를 즈음 아시아에서 규모가 제일로 크다는 풍력발전소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면서 다가섰다. 개당 300Kw를 생산하는 풍차가 300여 개로 고속도로 양편에 건설되어 있는데 이 평원은 사시사철 풍량과 풍향이 일정하여 전기를 생산하는데 적격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제주도에 소규모의 풍력발전소가 있고 영덕에도 건설중이라는데 이곳에 비하면 미미한 규모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슬픈 뒷이야기 하나가 발전소를 건설할 당시 중국에 기술을 이전하기 위해 이곳에 온 덴마크 기술자 13명이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모두 사망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발전소 끝머리에 검은색의 풍차 13개가 세워져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우루무치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차들로 복잡했다. 우루무치는 중국 국내의 자치구 중 최대의 면적과 인구를 보유한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구도인데 천산산맥(天山山脈)의 북쪽 기슭, 표고 924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서쪽 카자흐스탄과 국경 도시 이닝을 거쳐 옛 소련으로 가는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카슈가르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가는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버스 루트가 마련되어 있는데 우루무치가 이 두 길의 분기점인 것이다. 더하여 1992년에 실크로드 철도가 개통이 되어 국제열차가 알마아타·타슈켄트까지 이어져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우루무치는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목장´을 뜻한다. 위구르족이 가장 많지만 카자흐ㆍ키르기스ㆍ오로스 족 등 13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만큼 문화의 다양성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도착하여 먹은 점심식사의 내용 또한 낭과 양유를 곁들인 양고기종류들 등 좀 더 유목민족들의 것들로 바뀌어져 있었다.

어느 순간 또 비가 오고 있었다. 해가 나는 날이면 한낮이 더워야할 이곳도 비가 오고 흐리면 한낮에도 서늘해져서 긴 옷을 입고서야 안도감을 느끼는 을씨년스런 날씨로 인하여 도시전체가 어둡게 보였다.

  ◇ 우루무치 구시가지의 한 모습


비를 맞으며 나선 길에서 처음 둘러본 곳이 신강위구르자치구박물관, 신관공사가 한창이었지만 현재의 박물관은 마치 오래된 창고를 보는 듯 낙후한 모습이었고 역시나 다른 박물관처럼 입구는 토산품을 파는 가게를 통과하도록 되어있었다.

이 박물관은 약 30,000점의 유물들이 보관된 곳으로 특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누란(樓蘭)미라를 비롯한 3,000-4,000여 년 전의 미라들과, 전설 속의 나라인 니야(Niya)문명의 출토물들, 화염산에서 발견된 바다화석들, 투루판 지역에서 발견된 진묘수등 무덤유적들을 소장하고 있다. 비록 변방에 떨어져 있는 초라한 모습의 박물관이지만 가치로 따지면 가히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이 박물관에서 본 것 중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은 니야(Niya)문명 유물들과 미라였다.

돈황의 장경각을 털어 갔던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Stein)이 전설 속의 땅 니야(Niya)를 찾아서 타클라마칸 사막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중 숨겨진 땅 민팽(Minfeng)에서 북으로 약 100Km 지점에서 니야(Niya)의 동전을 발견함으로서 문명의 실체와 단서를 찾게 되고 발견된 것들로서 아직 그들의 역사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고 한다.

그보다 더 유명하고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미라들인데 4,000년 전의 누란(樓蘭)미라를 비롯 여전사의 미라, 소녀아이의 미라 등 10여 구의 미라들이 이 박물관의 핵심 소장품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누란(樓蘭)미라는 45세 전후의 나이를 가진 여성으로서 혈액형이 O형이라는 것과 몸속에서 4,000년이 지난 즈음에도 기생충이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못지않게  한 올 한 올의 머리카락, 그대로 선이 살아있는 손금과 주름들이 너무 생생하여 살아있는 듯한 표정의 미라는 우리를 전율케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큰 아쉬움 하나를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우루무치에 와서 꼭 보아야 할 것의 하나가 천산산맥(天山山脈)의 박격달봉(博格達峰, 5445m) 중턱 해발 2,000m에 있는 호수인 천산천지(天山天池)인데 3일 전에 내린 큰비로 다리가 떠내려가서 당분간 가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면적 3㎢에 이르는 천지는 열사(熱砂)의 사막 속에 있는 오아시스로 천경(天鏡)이라든가 신지(神池)라는 뜻을 내포한 피서지로 유명하고 여름철에는 ´파오´라고 불리는 그들의 이동식 집에서 민박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천산산맥의 초입에 있는 카자흐 족의 목장중 하나인 남산목장(南山牧場)을 방문하여 그들과 잠시 어울려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어야했다.

신강위구르에서 카자흐 족은 아직 회교도의 이념과 생활양식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민족으로서 한족을 제외한 소수민족 중 위구르족을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카자흐´라는 말은 인접한 내몽고 사람들로부터는 ´도망자´로 아프간 민족들로부터는 ´백조´라는 의미로 폄하되고 있지만 스스로는 ´초원의 영웅´으로 해석하는 자존심이 강한 민족으로 아직도 문명을 거부한 채 유목민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 카자흐 사람들이 사는 남산목장 풍경


우루무치에서 남쪽 교외로 약 75km, 차로 두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천산산맥 북쪽 자락에 펼쳐진 남산목장을 가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비가 와서 산과 초목의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산등성이에는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수십 마리의 말들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산 밑으로 지어진 여러 동(棟)의 ´파오´가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안 그래도 궂은 날씨에 더위가 가셔 긴 옷을 입었는데도 천산산맥의 여름산록은 으스스할 정도로 한기를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코끝에 찬 기운을 느끼면서도 말을 타고 목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맑은 공기는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말을 탈 때, 고삐를 쥐고 안내하는 소년과 아무 말 없이 다니는 것이 서먹하여 영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약간 한다고 하여 이름을 물으니 대답을 하고 가족들의 구성이 어떻다 하는 등의 대답은 하면서도 나이를 묻는 것에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아이로 보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사춘기의 소년은 자기를 벌써 어른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는데 묻는 나를 머쓱하게 만드는 당돌한 녀석이었지만 나중에 수고했다고, 네가 최고라고 말을 하면서 지폐 한 장을 집어주자 그제야 내 카메라를 빼앗아 말을 탄 내 모습을 찍어주겠노라고 맘을 풀어놓았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카자흐족을 만나면서 개인이 가진 양(洋)의 수를 세는 것은 그의 재산을 세는 것이므로 하지 말 것이라든가 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지칭하는 사람에게 모욕이 되므로 손을 펴서 가리킬 것 같은 소소한 주의해야할 사항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말에서 내린 후에는 전통복장을 한 카자흐 아가씨의 안내를 받아 그들이 생활하는 ´파오´의 내부를 구경하였는데 ´마네차´라는 말 젖을 발효시킨 우유 빛의 차와 밀가루로 빚어 만든 과자를 권했다. 마네차는 유목민족들이 사막을 건너면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먹었던 음료로 생각건대 오래 발효시키면 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약간 비릿하지만 그런대로 마실 만 하였다. 이런 류의 음료는 다른 유목민족들도 이름만 다를 뿐 중요한 양식이자 물을 대신하는 중요한 먹거리로 터키의 여름음료인 양젖을 이용해 만든 ´아이란´과 닮았다.

카자흐 족의 음식 문화에 대해 하나 더 부연하자면 카자흐족은 음식을 ´홍석´, ´백석´, ´황석´으로 나누어 이 세 가지를 골고루 먹는다는데 홍석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음식은 고기류이며, 백석에는 마네차를 비롯한 우유류, 황석에는 구운 떡인 ´낭´이나 면 종류가 포함된다고 한다.

  ◇ 카자흐 인들의 집 "파오" 내부


 

 

산록에서 바라보는 비 그친 우루무치의 평원은 아름다웠다.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계속 바깥을 조망하다 플라타너스나 백양나무로 이루어진 가로수들을 보고는 잠시 어린 날의 고향 신작로를 기억하였고 찬바람과 비에 몸이 많이 지쳐있음을 느끼면서 졸다가 노인 하나가 길가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양을 잡는 모습에 퍼뜩 눈을 떠서 바라보기도 하였다.

늦은 오후로 가는 시간, 시내로 다시 들어온 우리는 시장구경을 갔다. 지금까지 도착하는 곳마다 거의 시장구경을 하였지만 ´신강위구르제1국제사장´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곳이 규모나 상품의 다양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컸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같은 동화에 나오는 삽화처럼 전통적인 회교 바자르답게 회교식의 첨탑인 ´미나렛´이 높이 솟아 랜드마크(Landmark)의 역할을 하고 문이 달린 시장의 입구를 통과하면 수백 개의 상점이 즐비한데 아마도 밤이 되어 철시를 하면 시장 안으로 통하는 외문들은 꽁꽁 닫힐 것이었다. 

중국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것은 현대식의 고급명품관을 제외하면 호텔이고 시장이고 길거리고 간에 터무니없는 가격에서 시작을 하게 된다. 이는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 이긴 하지만 중국의 물건 가격에 대한 버블은 마치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과장되고 황당한 묘사보다 덜하지가 않다.

더구나 호텔 같은 곳에서는 같은 물건인데도 이런 시장보다도 훨씬 비싼 가격을 매기고 있어서 얄미운데 파는 사람이 부르는 가격의 1/10만 부르고 지나가도 따라와서 흔쾌히 물건을 전해주는 그들의 얼굴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고, 때로는 물건을 사고남은 잔돈을 주지 않고 다른 물건을 더하여 파는 고집스런 모습이 아연하기도 하다.

  ◇ 우루무치 시장 풍경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여 기념품을 고르고 하다보면 또 친근해지는 그들이고 보면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어디이든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웃고 헤어질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을 하였다.

집 떠난 후 처음으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집 ´일선정´에서 거나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서안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시간, 서쪽으로 올수록 사람들은 더 순박하고 정이 깊은데 우루무치에서 하루 밤도 자지를 않고 천지 구경도 못한 것이 아쉬웠다.

언제 또 한 번 이곳을 찾을 수나 있을 것인가? 확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능성이 훨씬 적음을 인식하면서 못내 ´아쉽다´, ´아쉽다´를 되뇌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 서안, 장안(長安)의 성벽을 돌아 현장법사와 해후하다-

새벽에 서안에 도착한 우리는 여행 첫 날 묵었던 서안호텔에 다시 묵게 되었다. 현장법사가 17년 간 서역을 돌고 돌아와 서안에 귀소(歸巢)를 하였듯 내 여행의 마지막 기착점도 마지막날, 서안을 둘러봄으로서 그 끝을 맺게 될 터, 여전히 호텔 창 밖으로는 우뚝 솟은 소안탑(小雁塔)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소안탑도 서안의 랜드마크(Landmark)의 하나이지만 역시 서안의 상징적인 랜드마크(Landmark)는 대안탑(大雁塔)과 장안성의 종루(鐘樓)일 것이다.

가장 가까이 위치한 소안탑(小雁塔)을 찾은 이른 아침, 외국인들에게만 입장료를 받는 이곳은 공원화 되어 있어 아직 아침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즐비하고 나무들이 곳곳에 울창하여 시원하였다. 원래 이곳은 당현종이 세운 천복사(나중에 측천무후에 의해 전복사로 이름이 바뀜)라는 절터로 15층, 45미터의 규모의 전탑인 소안탑이 현장법사를 기리기 위해 서기 648년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지진으로 일부의 탑이 허물어져 13층, 42미터의 규모로 남아있는데 복구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있어서 당나라 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다녀온 당나라 승려 의정이 귀국 시 운반해온 4백부 의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세운 소안탑과 현장법사를 기리거나 가지고 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대안탑 모두 기러기 안(雁)자를 쓰는데 이는 현장법사의 서역 여행 시 일어났던 일과 관계가 있다. 사막 가운데서 길을 잃은 현장법사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기러기 한 마리가 나타나서 물이 있는 곳으로 현장법사를 인도하여 살아날 수 있게 하였는데 그 때 나타난 기러기가 바로 부처님이었다고 생각하고 두 탑의 이름에 기러기를 상징적으로 넣었다고 한다.

전복사 터인 이곳은 지금 더 이상 절이 아닌 공원이지만 당나라 때는 대안탑이 있는 자은사(慈恩寺)와 더불어 왕립사찰 이었는데 그런 흔적의 하나로 당시의 철종(鐵鐘)이 아직 남아 있다. 친인(親人)들에 대한 좋은 기억이나 앞으로의 희망을 노란 종이에 적어 종에 붙여두고 치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는 중국인들의 풍습이 있다고는 하나 지금도 관람객들로부터 돈을 받고 문화재인 철종을 치게 모습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안탑은 서안시 남쪽에 있는 당대(唐代), 당 고종이 어머니를 위해 지은 황궁사찰 이었고 지금도 300여분의 스님들이 계시는 자은사(慈恩寺) 경내에 있는 서안시의 상징적인 탑이다.
처음에는 5층탑이었으나 뒤에 10층으로 증축되었고 전쟁중의 화재로 일부 허물어졌다가 명나라 시절인 서기 907년에 복구되어 높이 64m, 둘레 25m의 7층탑으로 남아있는데 기단부만 한 면이 약 50m쯤 되는 거대한 크기이다. 대안탑 역시 벽돌로 만든 전탑인데 양식은 아직 목탑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분황사지 모전석탑(돌을 깎아 만든 벽돌로 쌓은 탑)과 비교할 수 있으며 이 탑을 통해 황룡사지 9층 목탑을 상상하여 그려볼 수 있었다.

대안탑은 따로 20위안의 돈을 주면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 수 있게 하여서 내부구조를 보고 맨 위층에서 바깥을 조망할 욕심으로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국보급 문화재를 하루에 수 만 명이 오르내리도록 혀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같으면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일일뿐더러 향후 문화재관리에 큰 문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대안탑

 

 

 

 

 

 

 

 

 

 

 

 

 

 

 

 

 

 

 

 

 

 

 

 

 

 

 

 

 

 

 

 

 

 

 

 

 

 

대안탑 꼭대기에서 보면 사방으로 대로가 뚫려 있는 모습이 시원했고, 자은사 북쪽 광장은 최근에 개장한 아시아 최대의 분수공원이 단장되어 있으며 남쪽 현장법사의 사리탑이 있는 흥교사(興敎寺) 쪽으로는 많은 할머니들이 절을 하고 치성을 드리는 모습이 우리나라 여느 절과 다름이 없었다.

대안탑이 있는 자은사(慈恩寺)는 원래 황실사찰 이었지만 나중에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돌아와 1000여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하면서 12년 간 주석 했던 곳이기에 곳곳에 현재는 현장법사와 관련된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고 특히 현장법사의 일대기를 벽화로 만들어 놓은 것이나 당시 번역된 불경들을 전시해 놓은 것은 의미가 있어 보였다.

시내 남대문 성벽 가까이에 있는 비림(碑林) 박물관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데 1087년 북송 철종 2년에 개성석경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비림의 자리는 당대에 조성된 공자사당이다. 그러나 당나라가 패망 후 도읍이 아니었던 서안은 송나라 이후 역할이 군사중점방위처의 역할을 하는 변방 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던 터에, 송나라 철종이 유적의 가치가 있는 비석들을 이 곳에 임의적으로 모아두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사당이 박물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지금도 비림의 매표구를 지나 들어서면, 여느 공자사당처럼 붓을 씻고 마음을 씻는다는 반지(半池)라는 반달모양의 연못이 있고 삼문(三門)이 있어서 사당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지나쳐 갈 수 있는 입구 옆에는 경운종이라는 동종(銅鍾)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 장안성의 종루에 걸려 있던 것으로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 종각의 종과 같은 것으로 현재 비림의 한 구석에서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쳐다보고 있다.

비림에서 제일 대표적인 비석은 개성 석경으로 114개의 석판에 유교경전 13경(655,025자)을 조각한 것으로, 여기에 당대 명필 구양순과 안진경, 이양수 등의 친필 석각과 조철, 소식, 조맹부 등 명사들의 진적비 등이 집중되어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 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1000개가 넘는 비석을 모아놓은 세계적 역사적 유적지이다.

한 때, 구체(구양순체)니 안체(안진경체)같은 설익은 붓글씨를 배우면서 익히 보았던 비석 글들이나 공자상이 새겨진 비석, 당현종이 효경을 새겨놓은 석대효경(石臺孝經), 관우가 유비에게 마음을 전달하는 편지글로서 16자의 글을 이용하여 두 그루의 대나무 그림으로 만든 관제시죽(關帝詩竹), 혜도 초서 천자문이나 단 천자문 등은 비림의 역사와 가치를 보여주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 비림, 공자상

 

 

 

 

 

 

 

 

 

 

 

 

 

 

 

 

 

 

 

 

 

 

 

 

 

 

 

 

 

 

 

 

 

 

 

 

 

 

그러나 이 곳 역시 여느 박물관에서 고 미술품을 파는 일이나, 소안탑에서 돈을 받고 종을 칠 수 있게 했던 것, 대안탑 내부를 사람들이 마음대로 들러갈 수 있었던 것처럼 비석을 탁본하여 파는 일들로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서안의 유적지들을 둘러보다 보면 어느 곳에서건 머리부분에 원숭이나 다른 동물들을 조각한 2-3미터 정도의 돌기둥들 모아놓은 것을 자주 목격한다. 하나 하나가 재미있는 표정들로 의인화되어 있는 이 화강암 기둥들은 조각의 수법도 유치하지 않을뿐더러 문화재급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알고 보니 말을 묶어두기 위해 만들었던 구조물들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소안탑, 대안탑, 이곳 비림에서도 수 십 개씩 모아두어 그 자체로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유적지를 살피면서 차를 타고 움직이다보면 서안 어느 곳에서나 성벽이나 성벽에 만들어진 누각을 자주 볼 수밖에 없다. 당대(唐代)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인구가 100만 명에 달했던 장안성의 규모는 1368년에 원(元)을 무찌른 명(明)의 주원장에 의해 장안성(長安城) 의 기초 위에 새로이 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의 성벽들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데는 내벽을 토성형태로 쌓으면서 흙을 개는데 황토에 더해 키위즙을 넣어 견고함을 더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는다.

1421년 베이징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50년 동안 이곳이 중국의 중심이었으며 1/3정도 규모가 확장하여 12m 높이를 가진 성벽의 길이는 동쪽 2590m, 서쪽 2631m, 북쪽 3244m, 남쪽 3441m에 이른다. 성의 주위에는 방어를 위한 해자(垓子)가 폭 20m, 깊이 7m로 파여 있었고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들을 감시하고 공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적대(성벽을 튀어나오게 축조한 공격과 관측을 위한 곳)를 120m마다 하나씩 조성하였는데 이 간격은 당시 활의 유효 사거리가 60여m 정도였던 것을 감안한 것이라 한다.

  ◇ 서안성벽 모습


남대문을 통해 올라가서 본 성벽의 회랑 넓이는 12m에 이르러 4차선 도로를 내고 남을 만큼 넉넉해 보였다. 현재는 성벽을 담으로 하여 지은 불법 주거지들이 모두 철거되고 길로 편입되었거나 묻혀 있었던 해자(垓子) 부분들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렇게 고대 성곽이 온전하게 남은 세계최대의 성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바쁘게 발품을 팔고 나니 이미 늦은 점심이다. 여행 중 음식에 대해 잘 견디다가도 집에 갈 날이 가까워지면 우리 음식이 더욱 그립다.

점심을 한국음식점에서 먹게 되어 기대를 잔뜩 하였는데 이건 마치 중국음식과 한국음식이 적당히 퓨전(Fusion)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실망감이 컸다. 이 실망감은 저녁에 찾은 섬서성 서안의 명물인 만두집까지도 이어졌는데 이십여 가지가 나오는 만두요리집은 빛 좋은 개살구로 어느 하나 입맛에 맞는 것이 없었다. 입이 까탈스런 내가 아닌데도 지나치게 두꺼운 만두피와 기름기가 흐르는 만두 속은 비위에 거슬렸다.

오후에는 섬서성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규모 면에서는 병마용 다음으로 컸고 내용 면에서는 가장 다채롭고 수많은 유적들을 감상할 수가 있었다. 기원전 115만년부터 1800년대 청나라에 이르는 문물들이 가득 찬 이 곳의 입구에는 10톤이 넘는 돌사자 수호석이 떡 하니 버티고 섰다.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고 난 후, 그녀의 어머니 무덤을 순릉이라 이름짓고 만든 수호석인데 이 박물관의 얼굴역할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크기에 놀랄 만 하였으나 나중에 본 석관이나 다른 수호석들의 규모도 상상 이상의 것들이 즐비하였다.

115만 년 전의 역사 이전의 유적부터 전시되는 이유는 이곳 위수 서쪽의 서안에서 당시의 인류였던 남전인(藍田人=Homo electicus)의 유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삼족(三足)토기의 문화 즉, 용산문화(龍山文化= B.C 4900-B.C 4100)의 문물들 또한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 남전인(Homo Electicus)의 두개골


우리가 흔히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중국의 문화나 문물에 대한 것들을 그냥 달달 외던 기억에서 실제로 그것들을 한눈에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일 수 있는데 이 곳 섬서성 역사박물관은 상당부분 그런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주는 곳이었다.

가령 서주 시기에 금.은으로 조개 모양으로 만든 화폐나 여러 개의 다리가 붙어 있는 제사때 쓰이는 찰기(札器)도 있었는데 다섯 개의 다리가 있는 것을 오정찰기(五鼎札器)라 이름
붙이고 황제와 관련된 것에는 9개의 다리가 붙어 있는 구정찰기를 사용한다는 것과 , 철기시대로 이행하는 진나라 사대의 북같이 생긴 석구를 볼 수가 있었다.

또한 우리가 아는 엽전 모양의 화폐가 처음 등장하는 한나라 때의 채색토기가 당나라에 와서는 홍, 청, 녹 삼색의 당삼채(唐三彩)로 발전하는 모습, 그러다 백자 도기가 나타나고 명, 청기에 들어 은입사(銀入絲) 상감이나 청화백자로의 이행을 한 눈에 볼 수가 있었다.

저녁 무렵 서안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곳 실크로드의 부분을 보는 여드레 동안 4번의 비를 맞게 되었는데 도착한 다음 날과 여행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비를 보고 시작한 여행이 비를 보고 끝나가고 있었다.

비 속, 저녁을 먹고 잠시 내린 자리에서는 종루가 화려한 불빛에 둘러 쌓여 도시의 한 가운데 임을 알려주고 있었고 주위의 현대식 초고층 빌딩과 거대한 백화점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 서안, 종루(鐘樓)의 야경


종루는 외관 3층, 내부 2층의 누각으로,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는데 158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외기둥 양식으로 지은 진기한 건물이다. 종루 위로 올라가(유료) 시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으며 사진을 찍는데 안성맞춤일 것인데 이 곳 역시 오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을수 밖에..

서안을 둘러보면서 보지 못한 장면 하나가 가슴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서안성 북문에서 이슬람거리의 집과 지붕들을 바라다보는 것, 어느 책에 인쇄된 그 사진 한 장의 느낌을 이 곳에 왔음에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북문이 이곳에서 멀지 않음을 상기하고는 그 곳을 찾아보기로 하고 몇 몇 일행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골목을 헤적이며 부산하게 발을 옮겼다.

비가 명대의 성곽아래 돌길에 흩어지고 골목골목 재래시장의 지붕에 비 닿는 소리를 들음으로서 여행객의 늦은 허기짐과 쓸쓸함이 회족(回族)들의 고함소리에 묻히고 어느덧 절 형식의 회교사원인 청진사(淸眞寺) 앞에 이르게 되었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적막한 골목 어귀, 굳게 닫힌 사원의 문, 그리고 멀리 육중하게 보이는 성곽의 그림자, 여전히 끊이지 않는 빗소리, 성곽에 올라 멀리서 보아야 할 장소의 중심에 우리는 갇힌 듯 서 있었다.

새벽으로 가는 시간 1시 30분,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하여 고단한 하루를 풀기 위해 잠을 자는 도시를 빠져나온 우리는 자는 사람 이마를 만지듯 서안과 실크로드에 작별인사를 고한다.

불가에서 자기 자신의 실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 깨닿고 본심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십우도(十牛圖) 혹은 심우도(尋牛圖) 라는 것이 있다. 여행이라는 것이 떠날 수 없는 환경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이탈하는 것이라면 여행의 본질 또한 자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 때문에 십우도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한 낱 범부, 나 자신의 실체를 찾을 능력은 고사하고 하루 앞가름 하기도 벅차다는 것을 안다. 다만 훌훌 떠날 수 있을 때마다 나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이런 정신적 사치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