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해 교통로의 총칭.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변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이것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敦煌]까지 이르는 구간으로, 역대에 장안(長安 : 지금의 시안[西安] 또는 뤄양[洛陽])을 기점으로 했고, 허시후이랑이 중요한 길목이었다.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이며,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로막혀 사막 남쪽(쿤룬 산맥[崑崙山脈] 북쪽)과 사막 북쪽(톈산 산맥[天山山脈] 남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서쪽 부분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갈래가 있어서 남로는 파미르 고원의 쿠시쿠르간에서 서쪽으로 쿠샨 왕국에 이르고,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천축(天竺 : 인도의 옛 이름)에 들어갈 수 있다.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지중해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른다. 북로는 강거(康居 : 漢魏시대 중앙 아시아의 키르기스 평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투르크계 유목민족국가)에서 서쪽으로 이란을 지나 곧장 지중해와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거의 수천 리로 이어져 지금의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여 개 국가를 거쳐간다. 이 세 부분 가운데 동쪽 부분은 역사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중앙과 서쪽 부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 BC 206~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大月氏)·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2차례에 걸쳐 장건(張騫)을 중앙 아시아로 파견했다.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당시 서역(西域)이라고 칭해지던 중앙 아시아 및 서방 각지와 사절을 교환하게 되었고, 여러 문물이 왕래하게 되었다.
당시에 실크로드는 남·북 양 도로 나뉘어 있었다. 중국의 서쪽 관문이었던 위먼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는 로프노르 호 남안의 미란으로부터 쿤룬 산맥의 북쪽을 지나 야르칸드에 이른 후 파미르 고원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나가는 남로(南路)였고, 또 하나는 투루판[吐魯蕃]에서 톈산 산맥 남쪽을 지나 카슈가르에서 파미르를 넘어 페르가나로 가는 북로(北路)였다. 남로에는 다시 야르칸드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 북쪽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
전한 때에는 반초(班超)가 서역으로 출사(出使)하여 전한말 이래 중단되었던 서역과의 관계를 개선시켰고, 나아가 AD 97년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 로마)으로 파견했다. 감영은 결국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파르티아와 시리아 및 페르시아 만까지 갔다옴으로써 실크로드의 서쪽 끝을 연장시키고 중국인들의 서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당대(唐代 : 618~907)였다.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돌궐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마침 돌궐이 동·서 양국으로 분열되고 서돌궐에 내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하여 서돌궐을 제압했다. 이무렵 로프노르 호 일대의 건조화(乾燥化)가 진행되어 남도의 이용도가 낮아졌고, 북도는 둔황에서 북상하여 하미[哈密]를 경유해 투루판에서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톈산 남로)과 톈산 산맥 북쪽을 지나는 길(톈산 북로)이 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구자(龜玆 : 한대의 서역국가)와 북정(北庭 : 짐사)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설치하여 톈산 남·북로를 관장하게 했다. 이후로는 비단 무역을 비롯한 동서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소그디아나(서투르키스탄)를 본거지로 하는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했다. 9세기 무렵에는 당의 세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북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족과 서쪽에서 진출해온 이슬람 상인이 그들을 대신했다. 송대 이후로는 광저우[廣州]를 지나 스리랑카·파르티아·홍해를 지나 카이로에 도달한 후 다시 이곳을 거쳐 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했다. 이와 함께 육로는 점차 쇠퇴해갔다.
당나라 때는 중국 전성기의 시기였다. 당나라의 서울 장안 (현재 서안)은 동서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 졌던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이었다. 중국 의 큰스님 현장이나 신라의 혜초 스님 등이 실크로드 따라 인도를 오간 것도 이 무렵이다. 혜초는 뱃길로 남양을 거쳐 인도의 성지를 순례한 후, 실크로드로 당나라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의 10년 여행기 에 비단길의 여러 가지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실크로드의 속살은 장려하다. 한나라 땅과 서역을 잇는 하서회랑, 투쟁과 대립의 상징-만리장성, 해골을 길잡이 삼아 떠났던 황량한 고비사막, 사막의 대화랑 돈황, 비극의 역사로 수놓은 고대 왕국, 수수께끼로 감싸인 이름 모를 승려들의 부도 등이 아직 남아 있어 폐허 속에서도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더듬어 볼 수 있다.
# 하서회랑(河西回廊)
황하를 건너면 곧바로 사막이 시작된다.
황하의 서쪽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이 길은 황하 서쪽의 복도라는 뜻의「하서회랑」이라고 불린다. 돈황 을 목표로 하는 여행자는 이 회랑을 지나가지 않으면 서쪽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난주에서 무위, 장액,주천,가욕관,그리고 돈황으로 하서회랑은 계속된다.
열차나 자동차는 대체로 하서회랑 루트를 따라 서쪽으로 간다. 옛 사람들 은 말이나 낙타를 이용해서 이 길을 갔을 것이다. 한(漢)나라가 이 곳을 개척하기 전까지는 유목민들의 땅이었다.
중국 역사를 북방 민족과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흉노라고 불린 이 유목민은 말을 타고 황하를 건너 이곳을 쳐들어오기 일쑤였다. 진시황이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멀리 돈황 까지 이어지는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한나라 유방은 직접 흉노를 치러 이곳에 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곳이기도 하다.
기원전 121년 한 무제 때 하서회랑은 중국에 편입되 었다. 그것은 뛰어난 지력과 계략을 갖춘 장건(張騫)이라는 장수에의해서였다 장건은 어떠한 경위를 통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漢)민족과 북방 기마민족『흉노』의 공방전에 대해 눈을 돌 리지 않으면 안된다.
한나라 왕조가 성립한 기원전 200년께, 만리장성 북쪽에서는 흉노 왕 목특선우가 북아시아 초원 일대를 평정하여 장대한 유 목 제국을 만들어 냈다. 이에 대해 한나라 제국을 구축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그 여세를 몰아 북방 흉노를 치려고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 기 마전에 뛰어난 흉노의 군대는 고조의 군대를 7일간에 걸쳐 포위, 섬멸시켰다. 한나라는 흉노에게 완패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60년 16세에 즉위 한 무제(武帝)는 고조의 굴욕을 씻고, 문자 그대로 세계유일의 왕으로서 군림할 결의를 굳혔다.한편 당시 월(月)씨의 왕이 흉노에게 평정 당해 울 분을 삼키고 있음을 안 무제는 사자를 보내 동맹을 맺어 흉노를 동서에서 협공할 생각을 했다. 윌씨에 파견할 사자를 모집했는데, 이때 사나이의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이 바로 장건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서역 출신인『감부』라는 노예를 길잡이로 세우고, 100여명의 사나운 사나 이들을 거느려 흉노의 적진 돌파를 꾀했다. 그렇지만 흉노가 무제의 사자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흉노의 땅에서 갇혀 있게 되었다.
13년이 지나서 장안에 돌아 왔을 때에는 100여명의 부하를 다 잃었고, 자기와 감부 단 둘뿐이었다.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장건은 한나라 서쪽에 있는 대원(大苑)이라는 나라에 천마(天馬), 한혈마(汗血馬)라 고 불리는 명마들이 있음을 알고 그 나라를 쳐 말을 얻어 흉노와 다시 대적하는 것이 어떠냐고 왕에게 아뢨다. 무제의 허락을 얻어 장건은 대원 을 쳐 멸망시키고 명마를 확보하였다.
장건은 지략과 기마대의 용맹성으로 드디어 흉노의 세력을 일소하였다.하서회랑에서 흉노를 일소하자 무제 는 무위·장액·주천·돈황 등의 하서 사군을 설치하여 서방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였던 것이다.사마천은 장건의 서역 개척을 착공(鑿空)이라고 표현하였다. 마치 굴에 구멍을 뚫듯이 격리되어 있는 서역에 하나의 길을 뚫었던 것이다.
# 고비사막
강우량이 150 - 200㎜로 반사막이라 불린다. 고비사막은 모래, 자갈로 덮여 있고, 사막 식물만 존재한다. 섭씨 40도 이상의 열기가 가득한 대낮에 는 끝없이 맑게 개인 푸른 하늘과 황토색 들판이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연출한다. 어두워질 무렵부터 밤중까지 고비에서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황토색 대지가 하얀빛을 띠기 시작하고, 그것은 곧 푸르게 된 다. 야간 차창밖에는 아무데도 불빛을 볼 수 없다.“하늘엔 한 마리 나는 새 없고, 땅에는 한 마리 뛰는 동물 없다.” 든지“사람 뼈 동물 뼈들을 가지고 갈길의 표지로 삼을 뿐”이라고 한, 지난날 현장스님 같은 구도승이 쓴 기행류(紀行類)의 문장을 통해서 보듯이 고비사막은 황량하기 그 지없다.
그러나 이 황량함 속에도 곳곳에 사람이 사는 오아시스가 있고 길에는 가로수가 있고 사람이 살고 있다. 고비사막의 오아시스는 보통 사 막처럼 움푹 패어 생긴 것이 아니고 기련산의 만년설이 녹아서 땅 밑에 지하수가 되어 스며들었다가 아무 곳에서나 솟아오른다.
나아가 서기 640년 현재의 투르판 인근에 있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州)를 경영하기위해 당시 당나라가 건설하였던 6도호부중 하나로 안서도호부 건설하였다. 이 당시인 서기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고 평양의 국내성에 또한 안동도호부를 건설한다. 안동도호부의 건설은 정복지에 대한 경영뿐만 아니라 고구려 유민들의 재 건국에 대한 의지를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고구려 유민들을 지금의 티벳에 가까운 쿠차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게 되는데, 당현종 ‘개원의 치’ 말기, 이임보가 당의 재상이던 시절, 실크로드의 쿠차에 고구려 유민으로 살던 고사계에게 고선지라는 아들이 자라고 있었다.
Prologue, 실크로드 빛나는 사람의 길
◇ 실크로드 개략도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가 죽는 것은 오래 동안 길을 걷는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길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곧은길 이다가도 여러 갈래의 길을 만나 혼돈스러운 선택을 하여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잘 닦여진 길을 가다가도 때로 비포장이거나 도로가 끊기여 없는 길을 만들어 가거나 신을 벗어 들고 개울 같은 것을 건너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길을 걷는것, 다시 말해 삶이란 여정 속에는 행복하고 일이 잘 풀리는 날들, 뼈를 깎는 선택을 하였음에도 마음처럼 결과를 얻지 못하여 오랫동안 아픈 가슴을 쓸며 분루를 삼켜야 하는 날들, 평안하게 오아시스 아래서 물을 마시듯 어느날 문득 행복해져 있는 날들 등이 골고루 섞여 있다.
이렇듯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길 속에서 그래도 사람이 살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힘든 길을 가다가도 나무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물 한 모금을 마실 수 있는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며, 허기진 배를 부여안고 있다가도 간혹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며, 철천지원수이거나 아니면 도둑을 만났다가도 가족이나 친구라는 집단,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살을 부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이나 도로위에도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짧은 인생이, 삶이, 눈물과 웃음들이 우리가 모른 채 고스란히 말없는 역사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오늘도 그렇게 기록되어 갈 것이다.
강과 산, 사막과 산맥, 오아시스와 황무지로 연상되는 실크로드는 어쩌면 이런 인간의 역사, 인류의 문명과 문화, 개인의 삶이 모자이크되어 오늘에 이르는 대표적인 길일 것이며 그 역사는 최근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용트림을 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나의 경우 막연하게 실크로드를 가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는데 그런 희망을 가졌던 때들은 맘이 외롭거나 성정이 불안하였을 적이었던 것 같다. 척박한 그 땅들을 생각해보면 때로 직면하게 되는 어려운 내 현실들이 별것 아니라는 희망을 던져줄 것 같았고 뭔가 작은 위안이라도 얻을 것 같은 막연하고도 주관적인 느낌과 과대한 환상 같은 것들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의 막연하고 편한 생각들과는 달리 실크로드의 초입만 보고 온 것만으로도 결론적으로 실크로드는 그 길 위의 사람들에게는 현실이었고 더위나 밤의 추위등 자연의힘과 하루하루 싸우는 생존을 위한 길이었음을 확인하였음을 고백하고 반성한다.
◇ 둔황가는 길, 고비 사막의 새 아침
실크로드는 무엇을 말함인가?
실크(Silk)라는 고가의 문물로 대표되는 이 길의 이름은 실제로 사람들이 왕래한 길이었으므로 종이(Paper)로 라거나 향로(Spice)로, 전쟁(Battle)로 또는 종교(Religion)로라고 해도 별반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실크로드라는 말에서 실크는 이 길이 주는 상징적인 수사일 뿐 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를 범칭(汎稱)한다. 다시말해 실크로드란 인류가 예부터 이용해온 원거리 무역로와 문명교류의 통로에 대한 상징적인 명칭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부르는 실크로드는 주로 중앙아시아 일대에 점재한 여러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이루어진 길이다. 때문에 ´오아시스로(Oasis Road)´라고도 불린다. 오아시스로는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나 터키의 이스탄불과 로마까지 연결되며, 총 12,000km(직선거리 9,000km)에 이른다.
실크로드가 가장 번성했던 수(隋), 당(唐)시기에 이르면 신라의 문물 (서역인의 얼굴을 한 괘릉 무인상, 천마총에서 발견 되는 유리잔 등등)이 유럽과 그 맥이 닿아 있음을 확인 할 수가 있을뿐더러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됨으로서 그 연장이 서라벌과 로마를 연결하는 15,000Km에 이르게 된다는 해석도 가능할뿐더러 더러는 그렇게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크로드가 오아시스로만 지칭하지는 않는다. 실크로드라는 용어의 범위 안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로(草原路=스텝로 Steppe Road)와 지중해에서부터 홍해, 아라비아해, 인도양을 지나 중국 남해에 이르는 남해로(南海路=Southern Sea Road)까지 포함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라고 하면 동서교류의 3대 통로인 북방의 초원로와 중간의 오아시스로, 남방의 남해로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들 3대 간선의 정확한 명칭은 ´초원로´, ´오아시스로´, ´해로´라고 할 수 있다.
광의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7천년 경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생한 농경과 목축 및 토기와 방직기술 등 원시문명이 이 길을 따라 각지에 전파되는 것으로 그 시원(始原)을 잡을 수 있고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각각 기원적 6천년 경과 4천년 경에 생겨난 채도(彩陶)도 이길을 따라 동서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교류상을 실증할 만한 증거는 거의 없다.
이에 비해 협의의 실크로드 개념은 역사시대 후반기에 개통되어 18세기경까지 기능했다는 좀더 좁은 의미의 시말(始末)이다. 이에 따르면 실크로드는 시간적으로 2,500여 년간(BC 8~7세기부터 AD 18세기까지) 존재해온 문명교류의 역사적 통로로서, 오늘날 실크로드라고 하면 대개 이 협의의 실크로드를 지칭하며, 기원적 8~7세기에 스키타이(Scythai)가 초원로를 개척한 때부터 기원 전후 장건(張騫)의 서역로 개척과 로마인들의 동방초행(東方初行)을 이르는 [개척기]와, 기원후 중국 비단이 다량 서역으로 전파된 때부터 중국 당제국과 이슬람제국에 의한 활발한 동서교류와 몽골제국의 서정을 거쳐 17세기 신구 대륙간 교역이 진행되기까지의 [번영기], 그 이후의 [쇠퇴기]로 나눌 수가 있다.
내가 가게 된 실크로드는 오아시스 길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서안에서 우루무치에 이르는 길로 유라시아 대륙의 북위 40도 부근에 펼쳐진 사막대 곳곳에 오아시스가 산재해 있는데, 사막가운데 산재한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발전된 길을 의미한다. 이 길 위에서 수많은 왕조와 민족이 오아시스로 위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하였고 동서교통로에서 문자 그대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왔기 때문에 보통 오아시스로를 실크로드라고 지칭한다.
전한(前漢)시대 오아시스로는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의 두 길이 있었다. 천산산맥를 두고 그 상,하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있었고, 후한대(AD 25~220)에 와서 서역과의 관계가 확대됨에 따라 기존 오아시스로의 이용이 더욱 빈번해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선이 개척되었는데 둔황-고창을 이어 천산산맥 위를 지나는 새 길로서 나중에 이 길은 보통 천산북로라 부르게 되고 기존의 북로는 중로라고 통칭하게 된다.
◇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와 풍경
서안에서 우루무치는 고대 중국 내에서의 실크로드의 시발과 종점이었던 것이고 지금 나는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중국 실크로드의 고대역사에서 길의 흥망성쇄는 수없이 많은 민족들의 부침과 같이 하는데 척박한 사막 길 위에서 잊을 수 없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민족 하나를 들라면 단연 훈족, 우리가 알고 있는 흉노일 것이다.
한나라 성립이전부터 끊임없이 중국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민족이었던 흉노는 투르크계, 몽골계 그리고 북방민족들로 구성된 국가로 흉노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유목국가를 성립시켰다고 전하며, 진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한 시기에 흉노국도 기원전 209년경에 성립된다. 기원전 220년,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설한 뒤 자기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듯이 흉노도 자신들의 최고 통치자를 선우(禪于)라고 하였다. 단군의 통치권도 하늘로부터 왔다고 한것처럼 ´통치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의미를 가진 선우는 유목세계의 천명사상에 근거한 강력한 리더십을 근거로 강한 유목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제 2대 선우인 모돈(冒頓:기원전 209-174년)은 재위기간동안 몽골리아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형성하였는데 동으로 한반도의 북부, 북으로는 바이칼호,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지금의 서안)와 티베트고원까지 이르게 되며 터키의 건국역사의 모태가 되기도 하고 다시 서진(西進)을 계속한 흉노는 유럽 동쪽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란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왕권의 강화와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강인한 흉노의 세력을 의식한 진시황제가 기원 전 215년에 이르러 장군 몽염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구축하게 하였을까?
기원전 206년경 진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한고조(漢高祖:기원전 206-195년) 유방은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10여만의 대군을 잃고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 끝에 기원전 198년에 흉노와의 화친정책을 맺게 된다. 흉노와 맺은 약조 속에는 흉노의 선우에게 한나라의 공주를 출가시키고 일 년에 수차례씩 비단과 술과 음식을 바치며, 한과 흉노는 대등한 형제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러한 약속을 지키면 흉노는 한나라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약이었으니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적인 약조나 다름없었다.
전한(前漢) 7대 한무제(武帝) 때 까지만 하여도 당시 만리장성 밖은 수수께끼의 땅이었다.
무제는 기원전 2세기 중반에 흉노에게 쫓겨 농서[롱西:감숙성(甘肅省)]에서 서쪽 사막 밖으로 옮겨간 월지(月氏:大月氏)와 손잡고 흉노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월지에 다녀올 사신을 공모한 결과 장건(張騫:?∼B.C. 114)이란 관리가 뽑혔다.
◇ 서역의 시작, 타클라마칸 사막 초입에서
기원전 138년, 장건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쪽 이리(伊犁:위구르 자치구 내)란 곳에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월지를 찾아 장안[長安:서안(西安)]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농서를 벗어나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때부터 흉노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장건은 활짝 트인 성격으로 해서 흉노에게 호감을 사 장가도 들고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탈출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포로가 된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장건은 처자와 일행을 데리고 서방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우뚝 솟은 천산(天山) 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타림 분지를 횡단한 그들은 대완국(大宛國)?강거국(康居國)을 거쳐 마침내 아무 강 북쪽에 있는 월지의 궁전에 도착했다.
장건은 곧 월지의 왕을 알현하고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왕의 대답은 의외로 부정적이었다. 끝내 월지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장건은 귀국 도중에 또 흉노에게 잡혀 1년 넘게 억류되었으나 부하 한 사람과 탈출, 13년만인 기원전 126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3년 후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진 장건은 계속 서역(西域) 사업에 힘썼는데 그의 대 여행은 중국 역사에 많은 것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동서의 교통이 트이면서 서방으로부터 명마(名馬), 보석, 비파(琵琶), 수박, 석류, 포도 등이 들어오고 한나라로부터는 금과 비단 등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 때 장건이 지나가고 온 길이 초기 실크로드의 중심이 된 천산 남로와 북로의 기원이 된다. 이른바 ´실크 로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와 같이 융성하였던 흉노국은 한 무제의 끊임없는 흉노 정벌정책에 의한 원친근공(遠親近攻)의 전략과 역사에 유명한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 장군 위청, 곽거병을 앞세운 한의 침공에 의해 서서히 세력이 약해지는 것이다. 흉노를 제압한 곽거병의 고사는 오천(五川=병사들이 먹을 물이 없어 곽장군이 칼로 땅을 다섯 번 친 곳의 땅을 파자 물이 솟았다는 전설에 근거한 지명)이나 주천(酒川=곽거병에게 내린 한무제의 술 10통으로 모든 병사를 먹일 수 없고 더구나 혼자 먹을 수 없다고 금천이라는 냇물에 부으니 개울이 모두 슬로 바뀌어 모든 병사가 나누어 술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지명)같은 지명에서 알 수가 있듯이 당시의 흉노를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회적 영향을 가져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 무제의 끊임없는 흉노정벌과 실크로드 교역을 차지하기 위한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밀리게 된 흉노는 동, 서 흉노로 분리되고 결국 서역지배권을 빼앗기게 되고 마침내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만다. 이렇듯 흉노의 지배에 있던 고비사막 근처 지금의 감숙성(甘肅省)이 한나라의 영향권에 들어감으로서 나중에 이르러 수(隋), 당(唐)시기에 실크로드가 화려한 문명의 교류를 열게 되고 중국이 실질적인 실크로드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 척박한 땅에도 물은 흐르고
당시 도호부 절도사는 군사력을 쥐고 있어서 재상에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 이민족을 절도사로 영입되는 것은 이임보에 의한 것으로 이는 황권에 때로 위협이 되는 절도사를 한족이 아닌 이민족을 발탁함으로서 황권을 위협받지 않게 하기 위한 계락이었다. 최치원이 한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민족인 부몽영찰이 절도사로 오면서 같은 이민족인 고선지는 총애를 받았다.
서기 740년 고선지는 텐산산맥 서쪽을 정벌하고 도호부 2인자가 된다. 747년 토번(티벳)정벌에 나선 고선지는 대승을 거두고, 현 파키스탄 지역인 소발률왕국을 정벌, 이후 72개국이 당에 항복함. 당시 장안에는 “발률을 쳐부수다”란 노래가 유행 했다고 하며 이후 고선지는 안서도호부 절도사가 되기에 이른다.
중앙아시아 타슈켄트 지방에 있던 당시의 ‘석국’이 당과 아랍에 양다리 외교정책을 펴다가 아랍으로 기울자 750년 고선지는 텐산산맥을 넘어 네 번째 서역원정에 올라 석국을 격파하였고 이후 아랍군이 고선지의 안서도호부 공격을 준비하게 되는데 타슈켄트 서북쪽 탈라스(현 카자흐스탄)에서 751년 7월 역사상 최초의 동서양대전이 벌어진다. 30만대 7만이라는 군사적 열세와 연합군으로 참여했던 투르크족의 배신으로 대패하고 이후 1천 년간 이곳의 실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이곳이 아랍권으로 편입되게 된다. 이 때 종이가 서역으로 전달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듯 실크로드는 복잡다단한 역사를 안고 오늘도 흙바람 휘날리며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고, 나는 한 사람의 여행객이 되어 장건이나, 고선지 혹은 혜초스님이 갔던 길을 따라 서안(西安)으로부터 난주(蘭州), 둔황(敦惶), 투르판을 거쳐 우루무치까지 길을 떠나는 것이다.
비록 주마관산격의 바람과 길을 만나고 본다 할지라도 어릴 때 미술책이나 사회책에서 막연하게 만났던 장안의 종소리나 양귀비, 이태백의 흔적, 고비사막과 낙타, 둔황석굴의 벽화나 채색된 부처님, 오래된 전설 같은 고성의 잔해들, 위구르나 카자흐 민족의 연원을 맛보러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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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다른 나라를 가게 되는 경우 비행기를 타는 시간은 밤이거나 이른 아침인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저녁 8시 40분 비행기를 타게 되는데 경주 인근에서 출발하는 나의 경우 어쩌면 실크로드의 맨 끝자락으로부터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든다. 더불어 저녁 비행기 시간과는 무관하게 이미 부산하게 움직이고 짐을 점검하는 아침부터 나의 여행은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서안은 우리에게 오히려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고도(古都)이다. 주나라 이후 10여 개의 왕조가 도읍을 정한 곳으로 현재의 모습은 명대에 새로 구축한 모습이며 오늘날 서안은 중국의 신흥 내륙 공업 지역 가운데 하나로, 20여 개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갖춘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이 온천탕들 옆으로 녹원(綠園)이라는 청나라 시대의 정원이 있다. 이곳은 중국의 근대 역사에서 공산당에 의해 선토공후항일(先討共後抗日)의 기치를 내걸었던 1936년 12월 12일, 자신의 의형제이었던 공산주의자 장학량 등에 의해 장개석의 감금이 이루어지고 공산당에 의해 국공합작이 강요되었던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곳이다.
사진을 아무리 잘 찍어도 어둡고 멀리 있는 병마용들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실제의 대표적인 병마용 몇 개를 따로 전시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특히 진시황릉 인근에서 발견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청동전차가 그 정교함을 뽐내며 뭇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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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산만 떠가네 / 검은 물에 떠가네 / 하늘도 바람도 한가진데/ 오는지 가는지 우리 밸세/ 이고지고 떠가네/ 메고 보듬고 떠가네/ 우리네 인생 한 밤중에/ 뱃놀이만 같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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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새벽을 맞는다. 잠을 깨우는 소리에 놀라 눈을 돌려 내다본 바깥 풍경은 아직 신새벽. 동쪽 하늘의 별무리와 그 곁의 반달이 서로를 마주보며 빛을 뽐내는 시간, 내가 잠들었던 동안에도 저들은 깨어서 척박한 고비 사막의 검은 땅에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화염산맥은 동서 전장 98Km, 남북의 너비가 9Km, 대체적인 고도는 500m 전후이고, 최고봉은 해발 831.7m.에 이르는 바다가 융기된 지형으로 예전부터 바다생물의 화석이 즐비하게 나온다는 곳이다. 명나라 초기 그 외모 및 뜨거운 기후와 관련하여 이름을 화염산으로 칭했다고 하고 중국에서 가장 더운 지방으로, 여름 최고기온은 47.8도까지 올라가며, 지표면의 온도는 70도 이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화염산의 온도가 높은 것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분지가 태양을 향해 기울어 있기 때문이며 숲이나 식물들이 자라지 않은 땅으로 직사광선에 의한 복사열이 온도상승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창으로 천도를 하고, 이슬람교가 투르판에 들어온 이후 불교가 쇠퇴하게 됨과 더불어 보즈크리크 동굴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당시 이곳에 터를 잡은 회족(回族)들에 의해 불상들은 소실되기도 하고 벽화들은 회칠로 덧씌워지는 수난을 받게 되며, 나중 근대에는 홍위병들에 의해 다시한번 수난을 맞게 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이곳 위구르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가 파괴했던 천불동의 불교유적들 앞에서 지금은 동굴을 보호하고 관광객들이 사진 찍는 것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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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판의 한낮은 고요하다. 낮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이유로 한낮 250만이 사는 시내는 이글거리는 태양만이 살아 있는 생명들이 있는 곳임을 암시할 뿐 세상은 다들 잠을 자는 듯 하다. 더위에 지친 여행객인 우리들도 오후 5시 가까이 까지 호텔 방에서 씻고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지하로 물을 끌어오는 이유는 알다시피 사막지형과 높은 온도에 기인하여 지표로 흐르는 물은 상상이상의 증발력 때문에 도시에 오기 전에 모두 말라버리기 때문인데 지하수로를 이용하게 됨으로서 물의 증발을 막고, 오염을 방지할 수 있어서 천연 음료수나 농업용수로의 역할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 집 뒤안의 포도밭에서 우리가 직접 딴 포도를 맛보는 시간, 이 집의 시집간 큰딸과 작은 딸이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우리를 위해 환영의 춤을 선보이는데 비록 포도를 팔고 건포도를 팔기 위한 수단이라 할 지라도 아직 때묻지 않은 그들의 넉넉한 품성과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대가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흙담을 따라 길게 높은 키로 정렬을 한 동네의 가로수들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즈음 그들과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맞부닥쳐 보는 일이다. 그들의 삶 속에 잠시나마 같이 동화되고 그들의 사는 방식에 젖어보면서 우리와 다른 문화나 삶의 특질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참 묘미인 것이다.
저녁식사 후, 투르판의 야시장을 산책했다. 호텔 앞에 대기 중이던 나귀마차를 타고 포도넝쿨로 만들어진 터널을 지나고, 방울소리 울리며 시내의 큰길들을 횡단하는 묘미가 색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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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서 가장 먼 곳, 종착역이 될 우루무치로 가는 길은 버스를 타고 서북개발을 위해 서역으로 연결 된 고속도로를 지나가게 되었다. 옛날 대상들이 걷거나 낙타 혹은 말을 타고 지나던 굽이굽이의 길이 잘 닦여진 고속도로로 변하였다고 해도 지금의 이 길 역시 변함없는 실크로드라는 생각을 하였다.
우루무치에 다다를 즈음 아시아에서 규모가 제일로 크다는 풍력발전소가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면서 다가섰다. 개당 300Kw를 생산하는 풍차가 300여 개로 고속도로 양편에 건설되어 있는데 이 평원은 사시사철 풍량과 풍향이 일정하여 전기를 생산하는데 적격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제주도에 소규모의 풍력발전소가 있고 영덕에도 건설중이라는데 이곳에 비하면 미미한 규모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산록에서 바라보는 비 그친 우루무치의 평원은 아름다웠다.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계속 바깥을 조망하다 플라타너스나 백양나무로 이루어진 가로수들을 보고는 잠시 어린 날의 고향 신작로를 기억하였고 찬바람과 비에 몸이 많이 지쳐있음을 느끼면서 졸다가 노인 하나가 길가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양을 잡는 모습에 퍼뜩 눈을 떠서 바라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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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서안에 도착한 우리는 여행 첫 날 묵었던 서안호텔에 다시 묵게 되었다. 현장법사가 17년 간 서역을 돌고 돌아와 서안에 귀소(歸巢)를 하였듯 내 여행의 마지막 기착점도 마지막날, 서안을 둘러봄으로서 그 끝을 맺게 될 터, 여전히 호텔 창 밖으로는 우뚝 솟은 소안탑(小雁塔)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소안탑도 서안의 랜드마크(Landmark)의 하나이지만 역시 서안의 상징적인 랜드마크(Landmark)는 대안탑(大雁塔)과 장안성의 종루(鐘樓)일 것이다.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다녀온 당나라 승려 의정이 귀국 시 운반해온 4백부 의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세운 소안탑과 현장법사를 기리거나 가지고 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대안탑 모두 기러기 안(雁)자를 쓰는데 이는 현장법사의 서역 여행 시 일어났던 일과 관계가 있다. 사막 가운데서 길을 잃은 현장법사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기러기 한 마리가 나타나서 물이 있는 곳으로 현장법사를 인도하여 살아날 수 있게 하였는데 그 때 나타난 기러기가 바로 부처님이었다고 생각하고 두 탑의 이름에 기러기를 상징적으로 넣었다고 한다.
대안탑 꼭대기에서 보면 사방으로 대로가 뚫려 있는 모습이 시원했고, 자은사 북쪽 광장은 최근에 개장한 아시아 최대의 분수공원이 단장되어 있으며 남쪽 현장법사의 사리탑이 있는 흥교사(興敎寺) 쪽으로는 많은 할머니들이 절을 하고 치성을 드리는 모습이 우리나라 여느 절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 곳 역시 여느 박물관에서 고 미술품을 파는 일이나, 소안탑에서 돈을 받고 종을 칠 수 있게 했던 것, 대안탑 내부를 사람들이 마음대로 들러갈 수 있었던 것처럼 비석을 탁본하여 파는 일들로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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